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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정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내부링크]

꼭 같이 사는 것처럼 저자 임현정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9.12.11. 나의 글러브에게 ...... 너의 뜨거웠던 포옹도 나를 더 멀리 날려보내기 위한 성급한 배웅이었을까 인부들이 담배 피우러 나간 사이 이삿짐을 실은 트럭을 통째로 훔쳐갔다는 건데 숲 속 공터에 책이 꽂힌 책상이며 손때 묻은 소파까지 여자가 살던 집처럼 해놓고 남자는 너럭바위에 앉아 생무를 베어 먹은 것처럼 달지도 쓰지도 않게 웃었다고 합니다 꼭 같이 사는 것처럼 물방울무늬 원피스가 침대 위에 가지런히 누워 있었다는데 경비 아저씨의 푸른 모자가 아파트 화단에 떨어져 있는 날이었습니다 사금파리 반짝 빛나던 길 전문 폼페이 유적에는 빈 구덩이로 남은 사람들이 있다지 살과 뼈가 삭아내린 그 구덩이에 석고를 부어 웅크리고 죽은 여자를 떠냈다지 얼굴을 어깨에 묻은 채 울고 있는 배가 부푼 구덩이도 있었대 푸른 신호등이 깜빡거리는 사거리 내게로 달려드는 차가 급정거하는 순간 펑 하고 플래시가 터져버린 환한 대낮 나는 왜 그

박태일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 [내부링크]

달래는 몽골 말로 바다 저자 박태일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3.12.27. 아침 저녁 오갈 때마다 혹 당신일까 길 건너로 지나치다 울란바타르에 머문 셋째 주인 오늘 울란바타르호텔 앞에 선 당신을 처음 만난다 옆구리에 무거운 외투를 낀 채 익은 듯했던 모습은 동상 앞쪽에 새긴 레닌 레닌 막 배우기 시작한 몽골어로 확인하며 나는 눈인사를 보낸다 레닌 당신보다 먼저 알았던 동지 카우츠키 1970년대 초반 어린 대학생 시절 나에게 그의 책 계급투쟁 복사본을 건네주었던 친구는 서독으로 흘러가 동독 문학을 배우고 독일인 아내와 돌아왔지만 그가 처음 말아주었던 대마초 매운 연기처럼 울란바타르 겨울 공기는 낮고 어둡다 그 카우츠키가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잊었고 또 당신이 어떻게 그를 다루었는지 희미하지만 징키스한과 자무하가 뿌린 넓은 땅 울란바타르 붉은 영웅의 도시에 영웅으로 와서 오래 즐거웠을 당신 잿빛 걸음을 공중에 묶어둔 채 아직도 몽골 정부청사 건너 쪽 그보다 더 큰 대사관으로 남은 조국

조영석 [토이 크레인] [내부링크]

토이 크레인 저자 조영석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3.09.27. 그 겨울 우리는 얇은 벽에 붙어살았다 얇은 벽 너머로 서로의 안부를 주고 받았다 알람 소리가 무한 반복되는 새벽 얇은 벽 너머 아이가 침대에서 떨어지고 나어린 엄마가 악다구니를 썼고 우리는 조용히 아침밥을 씹어먹으며 어린 엄마의 이력을 청취했다 사연을 보낼 순 없었지만 서로의 이름 정도와 빚의 규모는 알 수 있었다 아기의 이름은 가영이었고, 알람에도 지치지 않는 남녀의 신음 소리를 배우며 아기는 긴긴 겨울밤을 지새우며 울었다 집을 나서는 소리 설거지 소리 변기물 내리는 소리 하소연하는 소리 호통치는 소리 넘나드는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대가족이었으나 복도에서 만나면 서로의 방을 들키지 않기 위해 등 돌리고 문을 닫는 이복형제들이었다 그 겨울 우리는 얇은 벽에 붙어 겨울을 났다 나란히 누워 때로는 얼굴을 마주보고 누워 서로의 구겨진 사연을 주고받았고 세상에서 가장 먼 가족이 되었다 얇은 벽 전문 어느 쪽도 칠십은

여성민 [에로틱한 찰리] [내부링크]

에로틱한 찰리 저자 여성민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5.03.16. 간절해서 간지럽습니다 이리 와요 침대에 누워요 당신은 아직 뱀이 아닙니다 양말입니까 식칼입니까 핀셋으로 누군가의 눈알을 집어본 적이 있습니다 타일 하나가 떨어지며 깨지면 나비가 됩니다 그런 이치로 사마귀처럼 핀셋이 뜁니다 핀셋처럼 계단이 쩍 벌어집니다 이런 이런 곤충채집입니까 핀셋이 놓친 붕대입니다 흠뻑 피를 먹고 기어갑니다 신물이 날 때까지 통통해지며 통통해지며 뱀처럼 이리 와요 내려와서 침대에 누워요 당신은 아직 뱀입니다 하지만 누울 수가 없습니다 간지럽습니다 이 토사물을 좀 봐요 허물처럼 끝없이 밀려나오는 한 번 끓어오른 적이 있는 세계니까요 결국 세계입니까 고작 죽었습니다 간절해서 포기하는 세계입니다 뱀과 핀셋 전문 충분히 증오하기를 해바라기 양말을 신기고 해바라기를 들어올리며 너의 몸으로 들어간다 벨기에 벨기에 너는 모르는 말을 중얼거린다 요 귀여운 것아 나는 외국에 가본 적이 없단다 해바라기 밭에서 나가본

주민현 [킬트, 그리고 퀼트] [내부링크]

킬트, 그리고 퀼트 저자 주민현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0.03.10. 갈등이라는 게 뭐지, 소설을 쓰는 네가. 그러자 갈등이 생기는 기분. 맞은편 건물이 몇 층까지 올라가는지 못 보고 회사가 망할 때 그것이 갈등인가 임종을 못 보고 깔깔대며 육개장을 먹을 때 그것은 갈등이 아닌가. 소설을 쓰는 네가 소설을 못 쓴다고 울고 나는 남 일인 것처럼 차를 마신다. 그러다 눈이 내렸고 눈이다, 그 소리에 강아지가 벌떡 일어났고 내리는 눈을 보고서 너는 임종이 우리의 가까이에 있다 소설에 그렇게 썼다 아무도 죽지 않았는데 네 소설 속에서 흰 천이 흔들리고 임종이 생기고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주인공은 새로 지어지는 맞은편 건물을 덮은 파란 천을 바라보며 흰 천이 흔들리고 임종을 바라보았던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갈등이란 아름답구나, 갈등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되고 창밖에 눈이 그친다 흰 천이 바람에 흔들린다 이렇게 내내 서 있어도 될까 이렇게 오래 사람인 척해도 될

김경인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내부링크]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저자 김경인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0.06.24. 성실하고 유능한 구인 공고가 났습니다 나는 성실한 수강생입니다 밤에는 잠꼬대로 진실을 흘려보내고 어제에서 갓 딴 악몽 한 컵으로 아침을 시작합니다 낙관, 희망, 혁신, 미래.... 눈앞에 펄럭이는 단어들은 얼마나 위생적인가요 내년에는 더 유능해질 겁니다. 정사각 통에 차곡차곡 담긴 티슈처럼 내면을 숨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흰 테이블보에 스민 얼룩을 감쪽같이 지우듯 슬픔의 귀퉁이를 솜씨 좋게 잘라내는 건 서툴지만요 나는 실용을 좋아합니다. 새나 구름을 키우지 않고 불규칙동사를 외우듯 인생을 이해하지요 퀴즈는 다 풀지 못했어요. 꿈이 나를 놓아주지 않아서 그만 오늘에 늦게 도착하고 말았거든요 반복과 위생을 좋아합니다. 이불을 탈탈 털어 지난 내가 떨어뜨린 부스러기 절망을 깨끗이 정리하고 아침에 도착한 퀴즈의 답을 달달 외우면서 무럭무럭 새로운 세포로 분열합니다 네모난 종이처럼 반듯하며 나무 연필처럼 구르다 잠시

문보영 [책기둥] [내부링크]

책기둥 저자 문보영 출판 민음사 발매 2017.12.22. 신은 부하들을 시켜, 세계에 입장하는 이들에게 수고비 대신 코스트코 빵을 나눠 주었다 사람들이 태어났다 빵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우리는 모여 골똘히 생각했다 왜 우리들은 빵을 받지 못한 걸까? 1) 옷이 한 벌밖에 없었다 목둘레가 해진 런닝구만 걸치고 아랫도리 없이 입장하려 들었다 2) 영국식 파이프 담배 모양의 영혼을 소망하는 것으로 신성모독을 했다 3) 성당 의자에 너무 오래 앉아 있는 여자를 보며 그 모습이 상처 난 부위에 딱지 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4) 매일매일 신나는 꿈을 꾸었고 그래서 꿈과 현실을 바꿔치기하고 싶었다 5) 신을 보며 저 사람은 소화기관에 작은 문제가 있는게 아닐까, 의심했다 6) 제대로 된 사람, 이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7) 그래서 학교를 잘 나가지 않았다 8) 세상의 모든 도서관이 불에 탔을 때 구하고 싶은 책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9) 책을 너무 많이 읽었다

손택수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내부링크]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저자 손택수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2.10.25. 고백하자면, 나도 유치장 신세를 진 적이 있다 얼결에 떠맡은 회사의 주주들에게 고발당해서 마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밤마다 뱀이 목을 졸라대는 악몽의 시간들 그때 기꺼이 대부가 되어준 스테파노를 만났다 영세식 날 받은 초 한 자루가 다할 때 나의 삶도 끝나는 거라고, 사물 하나에도 그리 생명을 불어넣으며 기도를 해보라고 스테파노는 엄지와 검지에 침을 묻혔다 입으로 불어 끄지 않고 굳이 심지에 체액을 묻혔다 영세를 받고 냉담자로 지낸 몇 해 기도도 미사도 습관이고 중독만 같아서, 차라리 죄를 짓고 괴로워하는 일이 더 나다운 것만 같아서 처음 길이로부터 큰 차이 없이 장수를 하고 있는 초 한 뼘가웃 한 그 길이대로라면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는데 어쩌다 용기를 낸 날이면 식은땀을 흘리며 겁먹은 내 낯짝이 보인다 기껏 한 자루 초에 지나지 않는 것이, 겨우 제 품이나 밝히는 가난한 빛의 평수가 심지에

김박은경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내부링크]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저자 김박은경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0.10.15. 그랬구나, 그랬겠지 다정한 후렴구를 따라 양손의 노을과 양어깨의 샛별을 따라 오른팔과 왼팔이 만들어내는 따스한 동그라미를 따라 겨울 강은 얼었던 만큼 녹으며 잊은 것들을 불러오고 노래가 마르기도 전에 다른 사랑에 빠지던 네가 궁금하지만 지금은 아닐 것 같지만 오늘일 수도 있으니까 영원히 알 수 없는 일도 있어야 하니까 꽃마다열매는 아니고 바람마다 내일은 아니니까 계절도 없이 되풀이되는 이 사랑이 불운이라 해도 좋겠어, 너를 알고 앓고 잃고 앓다니 안 되겠다 고단해 슬프지도 않은 밤이 길거나 짧거나 그냥 안고 있자 그러니까 이상해 나쁘고 좋지 최선을 다하지는 말아야지 제발, 숨이 뛰고 돈다 소란스러워 꿈이 다 깨겠어 소란 전문 오월이 왔지, 포로 로마노에 한 손으로는 젤라또를 먹으며 다른 손으로는 너의 심장을 끌어안으며 사라지는 것들 앞에 살아 있는 일은 좋았지 아름다웠지 폐허 위로 쌍무지개 찬란히 둥

박은정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내부링크]

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저자 박은정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5.03.30. 월식이 얼마나 길어질까요 가난한 애정 앞의 원숭이들처럼 사랑은 무기력하고 기교는 칼날처럼 빛나던 시간들 오늘의 잠은 더없이 단조로울 거예요 절반만 완성된 불행에 광을 내는 이들의 이름을 연인이라 부르자 꽃잎을 수의처럼 입고 뛰어가는 아이들 모든 것들이 몸을 감춘다 누군가는 사랑의 주기를 꽃으로 피우고 누군가는 이별의 주기를 꽃말로 지우기에 우리는 하나의 부레만으로도 너무 많이 울었다 바람도 없이 날아오르는 봄밤의 음성들 어디서 흘러들어 이렇게 뜨거운 귀가 되었나 꽃이 어둠을 통과하고 어둠이 꽃이 될 때 비로소 드러나는 창백한 얼굴들 온몸에 꽃을 그려넣던 혼백들이 늦은 사랑을 나눈다 봄밤의 연인들 전문 난청을 가진 아이는 어른이 되자 울 때마다 녹물을 흘리는 여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녹이 슬어 혈관을 타고 흐르는 동안 나는 불협의 감정을 사랑하고 나는 병력의 감정을 사랑합니다 정성을 들여 돌아갈 곳

이사라 [훗날 훗사람] [내부링크]

훗날 훗사람 저자 이사라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3.04.17.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보낸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내 벽에는 오래된 당신의 벽화가 빛나겠지 천년을 휘돈 나비가 찾아들고 다시 한바탕 시간들 위로 꽃잎 날리고 비 내리고 사랑하고 울고 이끼 끼고 나의 얼룩도 당신처럼 시간을 지나가겠지 얼룩 전문 사랑 따라서 당신을 향해 힘껏 달려왔습니다 당신은 천천히 그림자 속에 잠기고 갑자기 텅 빈 느낌이 들어 휘젓는 사방이 고요해지고 멈춘 시간 끝에 뭉클한 포말 하나가 생겼습니다 말도 못하고 곧 터질 것 같습니다 포말 전문 햇살 그리운

정한용 [거짓말의 탄생] [내부링크]

거짓말의 탄생 저자 정한용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5.12.10. ‘아저씨도’ 가 ‘아씨좆도’ 로 읽힌다. ‘아홉시반’ 이 ‘아씨발년’ 으로, ‘제대로’ 가 ‘지랄도’ 로. ‘겐세이 놓는다’ 가 ‘개새끼 낳는다’ 로 읽힌다, 세월이 좆같고 씹 같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가 일어나고, 가자지구에선 이스라엘 새끼들이 웃고, ‘점령하라’ 에 나갔던 젊은이들은 모조리 감옥으로 가고, 홍콩 민주화를 외치던 깃발에 불이 붙는다. 바다로 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고, 광화문에서 청계천까지 노란 리본이 휘날리고, 남에서 북으로 삐라를 날리고, 북에서 남으로 총알을 보내고, 낙동강에선 괴물 쥐가 어슬렁대고. 제3한강교 밑에선 큰빗이끼벌레가 녹차를 마신다. 에볼라가 붉은색 장미처럼 웃는다. 바야흐로, 아름다운 시절이다. 아동 교육비 최고, 저출산율 최고, 노인 빈곤율 최고, 자살율 최고, 빈부 격차 최고, 얼씨구, 기록 풍년이다, 단식 농성 최고, 공권력 남용 최고, 간첩 조작 최고, 법인세 감면 최

이재훈 [생물학적인 눈물] [내부링크]

생물학적인 눈물 저자 이재훈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1.11.05. 단도를 꺼내 당신의 귀를 자르고 싶었어요. 늘 문밖에 서서 나의 독백을 엿들었잖아요. 가까이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제가 잘못이죠. 묻고 싶어요. 멀찍이 당신을 따라다녀도 되느냐고. 애초에 모든 것을 부수는 마음이었어요. 경우의 수는 없었죠. 칼에 진리가 없고 달콤한 사과에 진리가 없어요. 자다 깨니 비가 내려요. 베란다에 본드처럼 빗줄기가 흘러요. 슬픔은 멀찍이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되었어요. 만지지 못하고, 쓰다듬지 못하고, 홀로 방탕했어요. 당신은 나를 부인하지 않았어요. 당신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어요. 나를 감독하고 해설하는 사람들이 넘쳐나요. 기대하지 마세요. 강도를 만나면 투쟁하면 돼요. 밤참 같은 미련들을 버릴 겁니다. 영혼의 책이 있다면 마지막 페이지는 어떻게 쓸까요. 표적도 없고, 분홍빛 과거도 없으며 초록빛 미래도 없는데요. 뭐라고 울까요. 저는 그저 그리워하는 직업을 가졌

이현승 [친애하는 사물들] [내부링크]

친애하는 사물들 저자 이현승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2.07.30. 왼손등에 난 상처가 오른손의 존재를 일깨운다 한 손으로 다른 손목을 쥐고 병원으로 실려오는 자살기도자처럼 우리는 두 개의 손을 가지고 있지 주인공을 곤경에 빠뜨려놓고 아직 끝이 아니라고 위로하는 소설가처럼 삶은 늘 위로인지 경고인지 모를 손을 내민다 시작해보나마나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두 살의 주인공에게도 울분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왼손에게 오른손이 필요한 것처럼 오른손에게 왼손이 필요한 것처럼 다정도 병인 양 전문 오아시스 콤플렉스 때문인지도 몰라 우리는 모든 것이 우연이었다고 생각한다 갈증은 사막의 신기루 속에 야자수 그늘을 만들고 어떤 필연도 없다면 우리는 결정적으로 비껴난 사람들이다 당신이 나의 두려움의 근원을 추측하고 있을 때 나는 당신의 시선에서 당신의 바깥

박서영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내부링크]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저자 박서영 출판 걷는사람 발매 2019.02.03. 이제 기억나지 않는 그 당시의 슬픔에 관하여 밥 먹다가 문득 생각났다 우리는 왜 그곳에 갔던 것일까 안개 속에서 당신의 표정을 수집하는 건 쉽지 않았고 당신의 표정에 손가락을 대면 울음의 소용돌이에 손을 집어넣고 헤집는 것 같아 아렸던 기억, 좋아해 그러나 이건 고백이 아니야 그게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니까요 시간은 자꾸 화를 냈고 기억을 왜곡했다 손가락 끝마다 감각은 되살아났고 숟가락엔 밤 대신 붉은 고깃살 같은 기억들이 한 점씩 올라와 있었다 어떤 날엔 승냥이의 뱃속을 찢고 내가 화를 낼 순서가 맞았지만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승냥이가 슬피 우는 날도 있었다 다 지난 일이다 하루는 사랑한다며 웃는 승냥이의 입술을 하루는 헤어지자며 우는 승냥이의 눈동자를 그래, 승냥이가 죽고 저 구름이 남았다 저 나무가 남았다, 꽃이 남았다 내 곁에 다 남아 있다 그때 초원을 지나갔습니다 소나무를 만졌습니

박서영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내부링크]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저자 박서영 출판 걷는사람 발매 2019.02.03. 내 상처로 누군가 감상적이 되거나 내 뿔에 치여 누군가 우는 것도 싫다 가끔 혼자 거울 앞에서 쓰다듬는다 죽순처럼 자라는 부드러운 뿔, 아름답게 치솟는 나의 고집을 뿔 위의 모자 부분 아아, 험담은 돌고 돌아서 다시 내게 날카로운 상처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몸속에서 사랑보다 미움이 더 빨리 걸어나가니 사랑해 볼 막간이 없으니 내 귀와 입술이 그만 부음에 든다면 ! 중이염 부분 사라진 것들은 그냥 돌아오는 법이 없네 이 무더운 여름날 헉헉거리며 숨을 다 세상에 쏟아내며 내가 기어코 찾아가야 하네 불러내야 하네 전화를 하고 그의 집 앞까지 찾아가서 쾅쾅 문을 두드려야 하네 개똥을 밟고 소똥을 밟고 질척질척한 세월을 건너가야 하네 사라진 것들의 너무 빠른 보행을 따라잡을 수 없네 내가 버스 정류소에 내리면 그는 벌써 집까지 다 갔다 하고 내가 그의 집 앞에 당도하면 그는 벌써 하늘에 닿았다 하네 내가 하늘에 당

윤은성 [주소를 쥐고] [내부링크]

주소를 쥐고 저자 윤은성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21.09.01. 내가 본 것은 계속해서 뒤로 사라지는 언덕들이었다 사람이 사는지 알 수 없는 오래된 마을과 성곽이 차창에 나타났고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무기력을 사람처럼 내가 데리고 다녔구나 깨닫고 있었지만 예상 외로 빠르게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며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동안 창밖의 그는 나보다 먼저 고개를 돌리고 플랫폼을 달려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내가 두고 온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생각하기를 영원히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그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미끄럼틀, 고양이, 모래밭, 오래 타오르다 방금 전 사그라진 여름 저녁의 태양, 아직 덜 말해진 적막과 끝까지 말해지지 않을 적막 어렷품한 먼 곳과 그런 순간들로 이루어진 저녁의 서울 시장 골목에 들어선다 몇 블록 뒤 1년 이후를 알 수 없는 상호명들의 틈으로 내가 돌아오는 동안 그대는 기다리고, 고양이는 배를 드러내며 자고, 모래 밭은 어느

고진하 [명랑의 둘레] [내부링크]

명랑의 둘레 저자 고진하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5.11.10. 때로 내 마음은 근심의 직물을 짜는 공장이기도 하지만 그 공장 옆으로 바람이 불고 심호흡하는 꽃들을 보며 하늘하늘 너풀너풀 내 근심은 간데없이 날아가기도 하지 꽃의 문을 열기도 하고 닫기도 하는 봄, 저 나른한 봄의 학교에서 개화도 낙화도 생을 단련하는 수업이지만 나비나 벌들이 잠깐 향기 은은한 꽃술에 앉아 평정을 누리는 향기 수업의 자리를 곁눈질하다 봄날이 다 갔네 행인 같은 봄이 끌고 사라진 꽃수레의 체온이 마른 잎맥처럼 가슴 언저리께 남아 잔물결을 일으키지만 숱한 이별과 친해져야 할 누덕누덕한 날들 위로 성큼 다가올 여름이 심호흡하는 소리를 듣고 있네 향기 수업 전문 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의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그대의 존재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 때, 불면으로 잠 못 이루는 그대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쓰디

낮부터 취해있고 싶어라 [내부링크]

해 . . 버렸습니다. 종 . . 강 . . 101번째 게시물은 종강,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들. Previous image Next image 암튼 기말곡은 유령씨가 노래를 해주셨는데, 발표 안 해도 된다고 해서 대충 해버렸다. 복사 붙여넣기 최고. Previous image Next image 제목은 'Dream Video'. 주제로 선정되었던 [데미안]을 읽고 작곡하기였는데, 주제 선정에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 주었으면 좋겠다 싶다. 아무튼, 그 외 기말고사 및 공모전을 마무리하고 폴더는 닫아두었다. 안녕 안녕. 기다려 나의 5학년 1학기 . . . 하 - 그리고 월요일엔 류정이의 이사를 도와주고. (왜 사진이 없을까 . . .) 화요일엔 종형이와 쇼핑 후, 만화카페에서 만화를 봤다. 체인소맨 누가 보고 있어서 아쉬운 대로 주술회전 . . . 그나저나 시간 왜 이렇게 빨리 가. 청춘을 지하철에서 탕진할 것만 같아 나 그리고 예쁜 니트를 구입했는데 봐줄 사람 ? 그리고 저녁엔

망가진 자들을 위한 그리움의 마차 [내부링크]

크리스마스 타일 저자 김금희 출판 창비 발매 2022.11.25. 단편 소설집이에요. 전작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에 수록된 단편 [크리스마스에는]이 수록되어 있고, 그와 같은 시간대를 살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첫 번째 단편 [은하의 밤]에서 주인공 '은하'는 암 선고를 받아요. 그리고 어딘가 이상한 오태만 대리와 함께 하나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돼요. [마차는 언제 망가진 자들을 수거하러 오나], 일명 '마망자'라는. 왜 마차여야 하는지,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오태만 대리는 쿠바에서의 기억을 얘기해요. 자전거를 빌려 타고 카리브해의 눈부신 백사장을 보기 위해 떠났는데, 아무리 밟아도 백사장은 나오지 않고 물 한 병 없이 황무지에 고립되어 '이제 죽는구나' 싶을 때 멀리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이내 "도와줄까?" 하고 누군가 건넸다고. 그날 일어난 그 작은 기적은 태만을 완전한 개심으로 몰아넣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고양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깨달

허연 [불온한 검은 피] [내부링크]

불온한 검은 피 저자 허연 출판 민음사 발매 2014.04.28. 얼음장 밑을 흘러왔다고 했다. 힘들었던 건 내가 아니라 겨울이었다고 했다. 우리가 '첫사랑은……' 어쩌구 하는70년대식 방화(邦畵) 속에서 눈덩이를 던지며 사랑을 좇던 늦은 오후에 어느새 너는 서걱이는 마른 대숲을 지나 내 곁에 왔다고 했다. 어머니는 아직도 무릎이 아프다고. 이젠 정말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녹슨 편지함 속에서 울었다. 그런 밤마다 나는 어머니가 아닌 너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지난해 따뜻했던 몇 가지 기억들을. 다시 돌아온 너에게, 말 없는 눈발로 내 옆에 서 있었던 쓸쓸함을 묻지 않으리라. 어느 날 막막한 강변로에서 다시 너를 잃어버리고 창문 틈에 너를 기다린다는 연서를 꽂아놓을 때까지, 네가 옆에 없음을 알고 전율할 때까지. 낡은 자명종의 태엽을 감으며,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너는 사라질 때까지만 내 옆에 있어 준다고 했다 전문 그대가 젖어 있는 것 같은데 비를

채길우 [매듭법] [내부링크]

매듭법 저자 채길우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0.06.10. 네가, 를 니가, 로 부르지 않고 내가, 로 말해주는 사람을 좋아해 나와 구별되지 않으려는 너에게 춤을 청하기 위해 다가갑니다 손을 맞잡는다면 수줍겠지요 마주보고 선 발을 밟을까 두렵겠지만 우리를 발음으로 판명하지 않아도 각자를 모양으로 규정하지 않아도 서로를 문맥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며 한 발 한 발 신중히 걸음을 뭉쳐요 심장은 박자를 타고 땀방울이 미끄러지기 시작하겠죠 그러다 몸이 마음에 섞여 방금 나라고 하지 않았어? 너라고 하지 않았어? 궁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거울 앞의 연습생처럼 두려움 없이 내가 행간을 크게 내디뎌 뛰어오르려 할 때 너를 주어로 부르는 일은 사투리 같은 이유와 몸짓이지만 긍정에 대한 서투름을 서두르지 않도록 내가 사랑해도 좋겠습니까? 물으면 한참을 머물다 얼굴을 들며 네, 라고 문장을 고쳐주는 사람이 좋겠습니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세요 침묵이라도 괜찮은가요 우리는 조금

허은실 [나는 잠깐 설웁다] [내부링크]

나는 잠깐 설웁다 저자 허은실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7.01.31. 꽃은 시들고 불로 구운 그릇은 깨진다 타인을 견디는 것과 외로움을 견디는 일 어떤 것이 더 난해한가 다 자라지도 않았는데 늙어가고 있다 그러나 감상은 단지 기후 같은 것 완전히 절망하지도 온전히 희망하지도 미안하지만 나의 모자여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허상 녹슬어 부서지는 동상보다는 방구석 먼지와 머리카락의 연대를 믿겠다 어금니 뒤쪽을 착색하는 니코틴과 죽은 뒤에도 자라는 손톱의 습관을 희망하겠다 약속의 말보다는 복숭아의 욕창을 애무보다는 허벅지를 무는 벼룩을 상서로운 빛보다는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희미한 어둠을 캄캄한 길에선 먼빛을 디뎌야 하므로 날 수 없어 춤을 추는 나날 흔들리고 찌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별자리를 그린다 목 없는 나날 전문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

곽은영 [관목들] [내부링크]

관목들 저자 곽은영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0.07.15. 연통 속 그을음 멀수록 엉긴 마음 긴 겨울 전문 어느덧 풍경의 닳은 모서리가 보이기 시작할 때 풀벌레 소리가 잔잔할 때 전화를 하려다 풀벌레 소리를 더 듣고 싶어질 때 가을 전문 모양이 달라졌다면 달처럼 말이에요 있는 걸까요 있었던 걸까요 짧은 봄 전문 오늘밤 안개, 벗이여 취생몽사 몽생취사라는 말을 이제 알았는데 그대는 먼저 떠났는가 강의 흐름이 보이지 않는 밤이다 빈털터리 눈빛, 새의 원망, 떨어진 설익은 열매, 숨은 향기, 뒤죽박죽의 말,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한 번이라도 나 는 그대의 것이었는가 그대는 한 번이라도 내 것이었는가 그런 것들의 구분도 의미가 없어졌다 그물에 걸린 달, 서 성이는 한기, 쏘삭거리며 그대가 남긴 몇 줄의 글 그런 것들을 생각한다 그대가 거기 있어 오늘밤 안개, 추도 전문 감정이 형체를 얻는 순간은 하나의 사건

장수양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내부링크]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저자 장수양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1.03.10. 손을 잡으면 눈이 녹아. 극장에서는 그래. 스크린 향이 있다는 걸 아니. 기묘한 냄새야. 우린 쿠션 달린 의자가 아니라 계단에 꿇어앉아 있는 것 같아. 한 칸씩 낮아지거나 높아지면서. 누군가는 나의 정수리를 내려다보고 아래 있는 머리들은 볼링공처럼 보이네. 밀어내면 멀리 굴러가버리는 것들. 엔딩크레디트가 끝없이 올라가는 티셔츠를 입고 싶어. 영사기의 불빛을 내 목젖과 눈꺼풀 위까지 쐬어도 좋다. 이상하지. 불 꺼진 자리에서 너의 이름을 읽는 일은 왜 언제나 어려울까. 너는 어두울수록 맑아지는 게 있다고 했지만 나는 컴컴한 공간에서 매번 어리숙했다. 숨쉬는 걸 잊어버려서, 나중에는 귓가에 다른 사람의 숨소리가 닿는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나는 어둠 속에 하얗게 떠오른 너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이런 걸 사람들은 시네마라고 부르는 걸까. 다리와 팔이, 뜨거워서 만질 수 없는 가슴이 얼굴이 녹아버리고 그렇게 공

김경후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내부링크]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저자 김경후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21.07.05. 새해 첫날마다 지난해 토정비결이 맞았는지 맞춰본다 예언은 지연된다 잘못된 건 없어 시간은 멈추고 세월은 흐른다 일어나마자마 운 게 아니에요 울려고 일어난 겁니다 사랑보다 빨리 쉬는 건 사람 그러나 난 쉬고 싶은 사람 울려면 일어나야 합니다 잘못된 건 없어 저만치 여기 있네 부분 한번은 은백양 숲을 까맣게 태웠지 눈송이들 불꽃 속으로 따스하게 녹아 흘렀지 사라진 일들이 단 하나의 희망이 될 때 다신 켜지지 않는다 네가 오지 않아 밤은 오지 않아도 된다 라이터 소년 전문 통닭 파는 트럭이 노랗게 웅크리고 있다 밤은 길고 봄은 짧지 자줏빛 꽃 이름을 찾아보기 전에 봄이 사라졌다 꼭 찾아야 할 것들은 남지 않았지 그게 너였을까 퇴근할 곳 없이, 퇴근 시간마다 죽어가는 하루들 내가 죽인 밤들 아무것도 한 적 없는데 더는 할 게 아무것도 없다 멈칫멈칫 제자리 돌고 있는 전기 구이 통닭 달이 있을 텐데 달빛 없는 달밤

이희중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내부링크]

나는 나를 간질일 수 없다 저자 이희중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7.09.15. 우리는 자주 다 알지 못한 채 마음을 내어준다. 다 알고서도 사랑할 수 있을까.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다. 노래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이를테면 버스 안에서 한두 소절을 처음 듣고 어떤 노래를 기억하게 되었을 때, 악기의 배합이나 리듬이나 곡조만 아니라 노랫말 때문에 더 좋아하게 되었을 때, 그 노래의 가장 강렬한 대목을 듣고 홀딱 빠졌을 때, 우리는 그 노래의 남은 전부를 마음대로 상상하고 마음대로 좋아한다. 자신이 좋아하도록 손수 만들고 상상하고 좋아한다. 잠깐 듣고 만 노래의 제목과 가수를 수소문하여 마침내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나오기를 기다려 녹음하거나, 음반 이나 음원을 구해 거듭 들으며, 가사를 받아 적은 후 따라 부르며 노래를 다 알고 나면 이미 그 노래는 그전과 같지 않다. 우리는 자주, 다 알고는 멀리한다. 다 알고서도 싫증내지 않을 수 있을까. 노래는 우리가 다 부를 수

김 륭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내부링크]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저자 김륭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2.06.25. 햇빛에 허를 찔려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거려줄지도 몰라 눈사람을 만드는 건 불법이야, 햇빛은 언제나 어둡고 가난한 세상을 부정하고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나를 팔다리가 잘린 채 암매장된 시체처럼 발굴하지만 괜찮아, 나는 태어날 때부터 두 손을 가슴에 푹, 찔러 넣고 다니는 습관이 생겼거든 글쎄, 어디쯤에서 펑펑 울었는지 누군가 질겅질겅 씹다버린 껌을 밟았는지 그건 꽃밭에 발자국을 숨겨놓고 사는 눈사람의 사생활 오늘도 햇빛은 얼굴이 지워진 내 사랑을 고물자전거 펑크 난 바퀴처럼 굴리고 가지만, 괜찮아 사과를 쪼개듯 햇빛이 세상을 반으로 나누지는 못할 테고, 나는 눈사람보다 더 따뜻하게 죽을 자신이 있거든 이건 절대 불법이 아니거든 눈사람을 만드는 건 불법이야 전문 맥주 대신 콜라를 마시면서 속이 시꺼매 다행, 이라고 중얼거린 말이 그녀 짧은 스커트 밑을 구르며 오소소 태어나는 순간 싹둑, 잘린 것은 탯줄이

이 향 [희다] [내부링크]

희다 저자 이향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3.11.08. 몸이 아프면 슬쩍 달라붙어 당신 손을 잡고 그 어깨에 기대 밥 한술 받아먹고 싶다 사랑한다고 사랑받고 싶다고 말을 못해 무슨 병에라도 옮아서는 곧 떨어져버릴 듯이 매달려 있고 싶다 사과 전문 언젠가 당신이 잠든 내 손을 슬며시 내려두고 방문을 빠져나갔을 때, 그때 알았더라면 보내지 말았어야 할 것들이 많다 당신이 빠져나간 손으로 끈적함이 파고든다 술렁이는 혓바닥과 입술, 나른한 사지. 다시 당신을 안아본다 그 사이로 못 보낼 것도 없다 싶은데 자다가 일어나 물 한잔 마시면 손잡이에 머물러 있는 당신, 아직 돌려주지 못한새끼손가락이 살짝 굽어 있다 새끼손가락 전문 잠시 눈감았다 뜨면 사라지는 순간이 있다 어제저녁 붉게 노을 졌던 태양의 한때처럼 오늘아침 초록으로 흔들리는 잎의 한때처럼 한순간이란 붙잡아두고 싶은 것이어서 새벽마다 물방울이 맺히는 것일까 물방울 같은 한순간 그 물방울만한 힘이 나뭇가지를 휘게 하는지 그때 붙잡고 싶

고영민 [구구] [내부링크]

구구 저자 고영민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5.10.28. 배롱나무의 꽃이 지고 있다 배롱나무의 꽃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저녁마다 숱한 꽃다발을 내게 바쳤으나 나는 그걸 다 받아주지 못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꽃다발을 바치는 것 저녁 늦게까지 온몸이 꽃다발이 되어 들고 서 있는 것 그럴 때 배롱나무는 얼마나 많은 감정을 갖고 있었을까 꽃들은 지나온 시간의 모든 것을 품은 채 떨어져 있다 밑동을 만지면 먼 가지의 꽃이 흔들리던 나무 바닥의 꽃들은 아직 붉고 바람의 그늘 속에 엎드려 미루어놓은 말들로 중얼거리고 지난 것은 다 진 것일까 나도 한때 누군가를 위해 꽃 한 다발을 들고 오래오래 문밖에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빈손의, 어둠에 몰두해 있는 배롱나무에게 꽃다발 전문 바람이 몹시 불던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그녀의 집 대문 앞에 빈 스티로폼 박스가 바람에 이리저리 뒹굴고 있었다 밤새 그리 뒹굴 것 같아 커다란 돌멩이 하나 주워와 그 안에 넣어주었다 첫사랑 전문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해 돌아

그럴 분이 아니에요 [내부링크]

선의 법칙 저자 편혜영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5.06.15. 장편소설이에요. 가족의 죽음을 추적하는 인물들이, 어떤 행보를 보이고 그 끝에 도달하는 곳이 어디인지. 각자가 밟은 자리를 선으로 이으면, 어떤 지도가 나오는지에 관한.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소설은 번갈아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윤세오'라는 인물이 아버지 '윤수창'의 죽음을 추적하며 만나는 것들에 대해 얘기해 볼까 해요. “제1, 제2, 제3 금융권. 종합세트네요. 원래 그래요. 1에서 못 갚으면 2로 가고, 또 못 갚으니 3으로 가죠. 3이 뭔 줄은 알죠? 사채예요. 그다음에 4가 있으면 그리로 가겠지만 불행히 그런 건 없어요. 3 다음에 갈 수 있는 곳은 저기뿐이죠.” 김명국이 오른손 검지를 들어 위쪽을 가리켰다. “빚도 못 갚고 계속 거짓말하고 책임도 못 지니, 화도 나고 싸움도 하고 그랬을 테죠. 그러면 당연히 죄도 짓고요. 윤수창씨가 평소 이런 말씀을 자주 했답니다. 예전

폭력의 사각지대를 찾아 [내부링크]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저자 천희란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2.03.24. 단편 소설집이에요. 9편의 단편들로 이루어져 있는. 문제의식을 제기하는 단편인 [기울어진 마음]과, [숨].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 찬 이에게 어떻게 다시 사랑이 찾아오는지에 관한 이야기인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먼저, [기울어진 마음]을. 이야기는 주인공 '승은'이 조카 '기호' 커플의 혼전 임신 소식을 들으며 시작해요. 승은은 이 문제의 결정권이 당사자들에게 있다는 것을 거듭 환기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도움이 되고자 애쓰지만, 기호의 여자친구 '혜원'과 단둘이 이야기를 나눌 때 자신의 임신 중단 경험을 떠올리며 자신과 같은 선택을 하길 바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게 돼요. 결국 혜원은 '승은'과 같은 선택을 결심하고, 기호는 술에 잔뜩 취한 채로 승은에게 가서 따져요. 도대체 혜원이에게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너 정말 다 책임질 수 있어? 혜원이랑 애랑 먹여 살릴

밤새도록 신열에 시달리는 중 [내부링크]

희랍어 시간 저자 한강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1.11.10. "열이 있어?" 물으며, 손을 뻗어 다정하게 이마를 짚어주는 시절이 있었더라면. 거대한 오류 같은 올해, 가장 아름다운 서사. 심장에 장전된 차디찬 폭약을 향해 타들어가던 불꽃은 없다.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는 혈관의 내부처럼, 작동을 멈 춘 승강기의 통로처럼 그녀의 입술 안쪽은 텅 비어 있다. 여전히 말라 있는 뺨을 그녀는 손등으로 닦아낸다. 눈물이 흘렀던 길에 지도를 그려뒀더라면. 말이 흘러나왔던 길에 바늘 자국을, 핏자국이라도 새겨뒀더라면. 하지만 너무 끔찍한 길이었어. 혀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그녀는 중얼거린다. 당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희랍식 논증의 방식으로 이따금 나는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무엇인가를 잃으면 다른 무엇인가를 얻게 된다는 명제가 참이라고 가정할 때, 당신을 잃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 보이는 세계를 이제 잃음으로써 무엇을 얻게 될 것인지. 인간의 모든 고통과 후회. 집착과 슬픔과 나약함

영, 원, 희, [내부링크]

토우의 집 저자 권여선 출판 자음과모음 발매 2020.11.30. 장편소설이에요. 삼벌레고개 라는 지명을 가진 곳의 작은 마을에, 모든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사고 있는 일명 '빨갱이 집안'이 존재하고, 추방되길 바라는, 죽어버리길 바라는. 토우가 갖는 주술적인 의미에 부합하는 등장인물들의 저주하는 마음이 종내에 어떤 것들을 몰고 오는지에 관한. 소설은 마을에 대한 묘사로 시작해, 차츰 우물 댁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고까운 감정을 그려내요. 점점 신경질적이 되어가는 우물 댁의 아버지는 폭력의 인과를 무시한 채 엉뚱한 곳으로 발화하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해졌다. 원은 온몸으로 느꼈다. 어머니는 나오시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오시지 않는다…… 니 에미 애비가 너를 안 원했던 모양이구나…… 너를 안 원했어…… 어머니는 나오시지 않는다…… 첨에 딸을 낳고 또 딸을 낳았으니 안 그렇겠어……. 원은 이를 딱딱 부딪쳤다. 아버지가 어머니

고양이의 부드러운 침입 [내부링크]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 저자 손보미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8.08.24. 단편 소설집이에요. 함축적인 것들이 많아 다소 난해하게 읽힐지도 모르는 이야기들이 가득한. 소설은 아주 짧은 단편인 표제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로 시작해요. 부드럽게 당신의 방에, 밤에 침입하는 도둑고양이들의 이야기들로. 나는 가끔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에 대해 생각한다. 내 생각에 그건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종류의 침입이다. 아주 폭신폭신하고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천천히 파고들어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부지불식간에 나 자신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때때로 무단 침입한 고양이는 정반대의 작용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분명하게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냉정한 방식으로. 어쩌면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이라는 표현은 틀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모든 고양이는 언제나 무단 침입하는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바이올린 아웃소싱 [내부링크]

이제야 언니에게 저자 최진영 출판 창비 발매 2019.09.20. 장편소설이에요. '이제야' 언니가 겪은 비극과, '이제야' 언니의 비극 이후 독백들로 이어지는. 사건의 시작은 '승호'라는 동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어느 날, 버려진 컨테이너를 아지트 삼아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여, '제야'가 그곳에 감으로써 시작돼요. 멀리서 제야를 보고 따라온 당숙이, 컨테이너 안에서 제야를 강간해요. 학생, 생각해 봐. 위험한 순간이 닥치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저항이란 걸 해. 그러면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어. 근데 학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 할 수 있는데도 하지 않았잖아. 남자를 때리거나 할퀴기는 했나? 그럼 그 남자 몸에 뭐라도 남았을 건데. 제야는 죽을 것만 같았다고 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고, 마비된 것 같았다고,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그러니까 말이 안 맞잖아. 술에 취해서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니고, 약물을 쓴 것도 아니고, 사지를 묶인 것도

박지혜 [햇빛] [내부링크]

햇빛 저자 박지혜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4.11.03. 기억나지 않는다 얼어가는 사람을 끌어안는다 기억나지 않는다 너무나 아름다운 얼어가는 사람들은 아름다움만 보여주었다 예감에 휩싸였던 시간 정말 신비였을까 검은 길을 걷는다 그와 함께 걷는다 단단하고 축축한 밤공기 텅 빈 그림자새 기억나지 않는다 멀리 있는 것들이 되살아난다 무슨 계절을 좋아하는지 물었다 여름 죽음처럼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너와 나의 아름다움이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해도 아름다운 것이 있었다 여름 전문 어떤 순간이 정지할 때도 있어. 영원의 정지. 그게 뭔지 잘 몰라도 그런 게 있어. 연인의 잠. 그게 뭔지 잘 몰라도 연인의 잠을 자고 싶어. 죽음으로만 완성되는 사랑이야. 그런 건 없어. 그래도. 모든 그래도가 문제여서 그래도의 여운을 따라가는 어리석은 시인이 되었나. 매일매일 지는 해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슬픔으로 들어갔다. 사라지는 순간들을 붙들고 울고 싶어. 모두 잊어야 한다고 했다. 일

정한아 [울프 노트] [내부링크]

울프 노트 저자 정한아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8.04.23. 나를 믿지 마, 벗들, 나의 변심은 대체로 요일 메뉴처럼 한정되어 있고 주말 결혼식 뷔페처럼 목구멍을 넘기기 힘들지만, 나는 동네 사람들 말을 믿고 동네 사람들은 동네 사람들 말을 믿고 동네 사람들은 프랜차이즈를 선호하지 대량 소독된 냅킨처럼 잘 개어진 3%의 불신은 우리가 감당할 몫 친구, 그걸 적립해도 여기선 사용할 수 없어 지배인은 가장 비싼 요리를 추천하고 있군, 그렇다면 아주 조금 할인해주실 오늘의 요리는 무엇입니까? 아니, 아니야, 나처럼 나를 불신하는 벗들, 지나치게 번쩍이는 합리적인 가격의 식기와 샹들리에와 따그락거리는 사기 소리가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아, 허나 동네 사람들 아니면 누굴 믿는단 말인가 어딜 가도 맛이 한결같아 수상하지만 대량 재배된 슈퍼옥수수와 대량 도축된 돼지고기에 공정 무역 커피로 입가심을 하고 나면 우리는 조금 괜찮은 대량 슈퍼사람 같지 않나 기부라도 한 것 같지 않나 내가 진짜

허은실 [회복기] [내부링크]

회복기 저자 허은실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2.10.28. “축구 잘하던 아이가 공습으로… 친구 무덤 찾은 팔레스타인 소년들” (서울신문 2021. 05. 20. 13:15/ 사진: 동생 모하마드(10, 가운데)는 “시위 당일 형이 먹을 것을 주고 갔다. 형이 내게 남긴 마지막 말은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아버지 어머니가 혼자 울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슬퍼했다.) “‘이스라엘에 8천억 무기 판매’ 바이든 승인에 미 의회 제동 시도” (연합뉴스 2021. 05. 21. 01:30/ 사진: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곡사포 발사하는 이스라엘군) behave님 외 21명이 내 트윗을 마음에 들어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 (2021. 05. 21. 10:58/ 사진: 흰 작약꽃 송이들) ㄴLeeLea@lea1376 혹시…… 작약인가요? ㄴ@crazy_huh 네 제가 환호작약하는 작약이랍니다 곡사포 연기구름이 피어오른다. 스크롤 다운. 작약이 우아하게 폭발하고 있다. 연기와

서영처 [말뚝에 묶인 피아노] [내부링크]

말뚝에 묶인 피아노 저자 서영처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5.03.02. 그리워라, 당신 흔적을 따라 앨라배마 루이지애나를 거쳐 증기선을 타고 헤맨지 수년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는 당신 몸속 시퍼런 물길을 지도에 표시해봅니다 흥얼거리는 한 자락 노래 같은 길 당신은 한 번도 길을 잃지 않았더군요 어떤 이는 공원의 벤치에서 마른 빵을 씹는 당신을 보았다 하고 어떤 이는 벤조를 울리며 걸어가는 당신을 보았다 하고 외로움에 먹혀 험상궂은 짐승이 되어 금광으로 흘러갔다 하고 나는 당신이 지나간 길에서 태양과 먹구름, 천둥 냄새를 맡아요 세월이 갈수록 당신 희미해져 눈을 감아야 엽맥 같은 모습이 보이네요 켄터키 옛집엔 여름을 못 견뎌 칸나가 피고 있어요 뭉게구름 사이로 그래요, 저렇게 키 큰 칸나는 처음이에요 저 붉고 깊은 음원을 단숨에 들이킨 당신, 피 속에 태양이 흐르고 머리 위론 폭포 같은 햇살 쏟아져 내리고 태양이 최후의 악보라고 당신, 또 내 귓전에 중얼거리고 그리워라 스와니, 나

너의 체온만으로 불이 붙는 심지 [내부링크]

재 저자 신용목 출판 난다 발매 2021.11.20. 장편소설이에요. 허수경 작가의 유고 시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과, 천희란 작가의 [자동 피아노],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과 비슷한. 거대한 서사라기 보다, 사랑을 주제로 옴니버스 형태를 띠고 있는 책이라 한 장씩 찢어 읽기 좋은. 요즘은 말을 자꾸 더듬어서요. 좋았던 부분들만을 조금 옮겨보아요. 지구상 어딘가 인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면, 사랑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 세상에 열어놓은 입술이 인간이라고 여기겠지. 그들에게 인생은 사랑이라는 두 글자를 완성하는 일일 것이다. 오래된 아파트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밤이면 하나씩 불을 밝혔다가 다시 꺼지는 창문들을 보며, 인간의 하루하루가 한 인간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그러나 우리를 인간이게 하는 무언가를 말하기 위한 모스부호일지도 모른다고. 그 속에서 영위되는 인간의 삶은 사랑을 인간 저편까지 옮겨놓기 위해 쓰여지는 몸의 문장일지도 모

이병률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내부링크]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 저자 이병률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0.09.01. 칠 일만 사랑하겠다 육 일이 되는 날 사랑을 끝내고 뒷일도 균열도 없이 까무룩 잊고만 싶다 완전히 산산이 사랑하겠다 문드러져 뼈마디만 남기고 소멸하겠다 칠 일이 되는 날 꽃나무 가지 하나 꺾어 두 눈을 찌르고 눈이 멀겠다 까맣게 먹먹하겠다 헤아릴 무엇도 남기지 않도록 지문을 없애겠다 눈이 맵도록 이불까지 유리잔까지 불사를 것이며 칠 일 동안의 정확한 감정은 절벽에 안겨 떨어지리라 칠 일이 지난 새벽부터 폭우 내리고 그 홍수 닿는 곳에서 숲이 시작된다 그리고 어떤 자격으로 첫번째 해가 뜬다 사라질 것들을 다시 시작을 한다고 해서 다시 그 사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칠 일 전문 난로 하나 보내준다던 사람 한 번도 본 적은 없는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는다는 사람이라 했는데 추위는 점점 닥쳐오는데 어떤 날은 추자도에 있다 하고 어떤 날은 아주 먼 바다에 있다 하고 어떤 날은 깜빡 잊고 내가 지내는 항구

송재학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내부링크]

아침이 부탁했다, 결혼식을 저자 송재학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2.05.03. 잠들지 못하는 밤의 손발로 나무를 깎아 사람을 만들었더니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 아가미를 남긴 채 속을 헐어내자 뉘엿뉘엿 편서풍에 헹군 악기만 남았다 그림자와 그림자가 섞이고 마주치는 현의 인기척이 더디면서 생의 잎새는 한 뼘 더 길어진다 그때 콘트라베이스의 떨림은 온몸을 몇 차례 돌아다닌 핏물과 다름없다 그게 급기야 슬프디슬픈 시선이 되었다 사람은 저녁을 되풀이하는가 보다 꽃을 보아도 후회가 맨 앞, 약음기로 불어온 숨에 몸이 부풀면서 울림판을 채우는 억양들 입이 부르튼 통점 그리고 멀리 떠나는 사람이기에 지판에 손자국은 남는다 속삭임은 기어이 나뭇잎의 입말을 되새긴다 무언가 삼켜야 어딘가 시큰거려야 토해낼 수 있는 소리가 있다면 적층 대신 깎아서 이루어진 소리 또한 쇠첩에 그려져 있다 죽음처럼 불가피해야만, 평생의 저음이 고이지 않을까 신체와 콘트라베이스 전문 해변에서 두 사람은 실루엣으로 만났다 이별

박서영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내부링크]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저자 박서영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9.02.03. 버스 정류소에 앉아 목련꽃 떨어지는 거 본다 정확한 노선을 따라가는 세월 보려고 정류소를 향해 가는 당신의 뒤를 미행한 적 있다 당신은 다리 위에 멈춰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검은 입안을 보여 주었다 무슨 말이든 해 보라고 가던 걸음 딱 멈추고 뜨거운 입천장을 보여 주는 슬픔 어쩌다 목련꽃 피는 밤에 우린 마주쳤을까 피려고 여기까지 온 목련은 지고 버스는 덜렁덜렁 떨어진 목련 꽃송이 태우고 간다 나는 하나 둘 셋 세월을 세다가 그만둔다 넷 다섯 여섯 방향을 세다가 그만둔다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색된 목련 꽃송이들이 툴툴거리며 버스를 타고 어딘가 가고 있다 일곱 여덟 나는 떠나는 이들의 뒤통수를 세다가 그만둔다 자꾸 흔들리고 자꾸 일렁거리는 것들은 자신들이 지독히 슬픈 세계라는 걸 알고 있을까 내 손을 뿌리치며 가는 당신을 따라간 적 있다 당신은 도망가다가 갑자기 길 위의 늙은 구두 수선공 앞에

황혜경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내부링크]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 저자 황혜경 출판 문학과지성사 발매 2018.02.09. 간절한 기도의 진심과 방해하는 기도의 개입이 대립하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하루하루가 이럴 수 있지 확연히 다르게 하루 다음에 하루는 이렇게 어느 쪽으로든 이토록 채근할 수가 있지 아무리 뿌리가 부실해서 캐낼 뿌리가 없다고 해도 그렇지 하루는 괜찮고 하루는 안 괜찮고 살아질 것 같고 살아지지 않고 팽팽하다 양쪽이 곤란하다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지 않는 길고 질긴 것 끊어지지도 않으니 붕 떠야만 봐줄 수 있는 덜 불편한 장면이 있고 더 들어줄 수 있는 목소리가 있으니 정상이 불가능해진다 북돋는 기도와 방해하는 사람 어떤 것이 어떤 것에 관여했는지 점점 알 수가 없고 그동안 무엇을 빌어왔는지 기도의 근원이 어려워지고 밑도 끝도 없고 그리고 끝도 없이 끝도 없이 월이 가면 월이 오고 연이 가면 연이 오고 팽팽한 공포 전문 가죽을 지키기 위해서는 햇빛과 습기를 조심해야지 겨울의 비누

권민경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내부링크]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 저자 권민경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18.12.17. 오래 맘이 아파 병이었으나 몸의 병도 얻었다 스무 살 내일 수술한다는 동생의 카톡 내 몸의 수술 자국을 세본다 내게도 이런 날이 어쩜 건강하게도 살았구나 멍청하게 과거를 잘 잊는 동물로 변태하면서 초년운과 말년운 중 어느쪽을 고를래? 말년이 좋다는데 주저 없다 초년은 버리라고 있는거다 어째서 둘 다 좋을 순 없는 걸까 뒤늦게 처량해봤자 조울증 카페에 가입했다 코리안매니아 이상한 이름이라 자꾸 파고든다 한국인이 조울 덕후란 뜻일까 표출도 병이래 말할 수밖에 없는것도 병이고 주접과 주책도 어린 시절 일산엔 선산 묘지가 많았고 나는 뒷산에 자주 올랐는데 거기서 마주쳤던 엄지손가락 내게서 떨어져나갈 장기무덤 초년은 버리라니까 어제에 대한 회한 아 그래서 맴찢 이란 말이 좋구나 수술을 앞둔 동생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도 한 적 없는 말 그러면서 잘도 혼인했고 건방지게 동병상련 이라

권민경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 [내부링크]

꿈을 꾸지 않기로 했고 그렇게 되었다 저자 권민경 출판 민음사 발매 2022.03.25. 어떤 사람의 해가 뜨는 동안 어떤 사람의 해는 진다 믿기지 않아 태어난 지 너무 오래되었고 죽을 나를 나는 모르고 시작과 끝은 외부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데 자전 공전 심술 난 이공계생 인생의 목표가 겨우 교수라니 넘 시시하지 않니? 깔깔 웃고 흩어진다 심술 난 수료자들 동짓날 가장 사랑하는 교수님께 편지를 쓴다 선생님 선생님 때문에 시인이 되었습니다 시인 되었?습니다 겨울의 달처럼 떠 있는데 언제 지는 건지 다시 떠야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도 모를 것이다 아는 척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뭘 믿어야 하지? 다 믿기질 않는데 해가 뜨고 진다는 것도 아기가 죽고 신이 있다는 것도 엄마아빠의 자식이며 나 자신의 몸을 움직이는 게 내 영혼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는 날이 흘렀다 결국 그렇게 되었다 새해 전문 엄마 괜찮아졌다고 생각하지 마 히키코모리 생활을 끝냈다고 내가 다 나은 건 아냐 오늘

김복희 [희망은 사랑을 한다] [내부링크]

희망은 사랑을 한다 저자 김복희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0.07.20. 내가 사랑하는 만큼 저녁이 찾아온다면 매일 환하겠지 매일 불타는 흰 밤이겠지 그러나 다락방에도 없고 계단 밑에도 없네 다락방이 없네 신발장 위 냉장고 위에도 없네 귀퉁이가 해진 담요 아래 의자 밑에도 책상 위에도 내가 사랑을 배우려고 한다면 네가 있다는 것을 배우느라 사랑이 무엇인지 알 틈도 없겠지 불 꺼진 방에 하루 이상이 잠들어 있다고 이불을 걷어보네 구름이 갈기갈기 찢겨져 있네 비가 들이치겠지 머리 위 어깨 위 무릎 위에도 창문을 열어두었네 너를 알게 된다면 대낮이 끝나지 않는 시간이라면 문을 열어두겠네 다녀올게 다녀와 내가 좋아하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지나가는 말이 냄새가 나기 시작했네 갈 곳이 없어서 자꾸 지나가는 것처럼 그렇게 당신은 사랑을 하는군요 전문 천 원을 가졌다 천 원이 필요했기에 천 원을 가졌다 천 원으로 배를 채울 것도 영혼을 고양시킬 것도 아니다 지성을 갈고닦을 생각도 없다 다만 지금

이규리 [당신은 첫눈입니까] [내부링크]

당신은 첫눈입니까 저자 이규리 저 출판 미등록 발매 2020.12.10. 뭔가 하면 할수록 비천해갔다 밤의 이야기들은 어디에서 역류하였을까 누추한 일은 사라지지 않고 남으려는 몸 물이 물 아닌 시름 내 슬픔의 경로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인데 살아 자주 역류했다 당신이 관념이 아름다움이 세상모르고 거기 있을 때 서러운 풍경은 모이거나 흩어졌고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문과 문 사이에서 앞날을 흔들어 보기도 했으나 거꾸로 서서 내일을 본 적 있니 웃어본 적 있니 물구나무서서 보는 일은 좀 괜찮았는데 무언가 잘 안 되어 생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면 모쪼록 이것도 역설의 방식이라 하면 안 될까 나도 내가 아닌 곳으로 흐른 때가 많았으니 너무 오래되었다면 그리 두어라 긴 밤이여 솟구쳐 흘러라 역류성 식도염 전문 빗길에 착 달라붙은 나뭇잎들 보면 만나지 말아야 할 사람을 맞닥뜨린 느낌이 든다 꺼낼 수 없었던 어려운 말 그렇게라도 한번 짚고 넘어가길 바란 것일 텐데 허드슨강을 툭툭 끊으며 가

나희덕 [가능주의자] [내부링크]

가능주의자 저자 나희덕 출판 문학동네 발매 2021.12.06.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박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平으로 가는 生의 마라톤 [내부링크]

레몬 저자 권여선 출판 창비 발매 2019.04.30. 레몬은 한 여자아이의 미스터리한 죽음을 시작으로 남아있는 가족의 슬픔이 어떤 형태로 발화되는지, 그리고 그 '알 수 없음'을 쫓아가며 어떤 것들에 도착하는지를 그려낸 소설이에요. 작중 다언의 발화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슬픔을 이겨내지 못한 어머니가 이미 떠나가 버린 언니의 모습을 다언에게서 보고 싶어 해 거듭 성형을 시키고, 자신의 삶을 잃어가는 줄도 모른 채 어딘가 비틀린 애도를 과하게 수행하는 주체. 언니가 죽은 후 우리는 경기도 신도시로 이사했고 나도 그곳 고등학교로 전학을 했다. 이전 학교와 달리 남녀 공학이 아닌 여고였다. 처음엔 나도 엄마도 매우 느린 속도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떨어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엄마는 꼬박꼬박 숍에 일을 하러 나갔고 나도 꼬박꼬박 학교에 나갔다. 엄마는 어땠는지 모르겠다. 나는 점점 어리둥절해졌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내가 언니를 별로 사랑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의혹에 빠졌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