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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사] 1-6. 19세기 영러 각축-동방문제의 재 조짐, 헝가리 위기 [내부링크]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 삽화 19세기 중반, 오스만제국은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용어는 오스만제국이 한때 강력한 세력이었음에도, 크리미아 전쟁 당시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1세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제국의 쇠퇴와 약화를 조롱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 오스만제국은 여러 내부적 문제와 외부의 압력에 직면해 있었으며, 이는 유럽의 정치적 균형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요소였습니다. 1848년, 유럽은 혁명의 물결로 요동쳤습니다. 이즈음, 잠깐 조성된 위기를 수면 아래로 끌어내린 듯한 해협 조약 체결 이후에 다시 유럽 제국들과 영국이 오스만제국과 얽히면서 새로운 동방 위기가 생성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헝가리인들은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며 봉기했고, 유럽 전역의 정치적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모 하

[하노버 왕실 스토리] 조지 3세가 중혼자(重婚者, bigamist)란 풍문의 진실 [내부링크]

조지 왕자, 후에 조지 3세 조지 왕자, 후에 조지 3세로 알려진 인물은, 프레드릭 왕세자의 아들이자 조지 2세의 손자로서, 1738년 5월 24일에 런던의 노퍽 하우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보수적이고 교육을 잘 받았으나, 자신의 혼인과 관련하여 여러 에피소드를 만들었던 인물입니다. 한나 라이트 풋(Hannah Lightfoot) 조지 3세와 한나 라이트 풋 (Hannah Lightfoot)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해 왔습니다. 한나 라이트풋은 웨스트민스터 퀘이커교의 신도인 그녀의 부모 밑에서 1730년에 태어난 기록이 있습니다. 한나는 1753년 식료품 상인인 아이작 액스퍼드(Isaac Axford)와 잠시 결혼했었다는 흔적도 있습니다. 가십에 따르면, 15살의 조지 왕자가 세인트 제임스 마켓(현재 워털루 플레이스와 리젠트 스트리트) 옆, 리넨 포목상 가게 창가에 앉아 있는 한나(조지보다 8살 위)를 처음 보았다고 합니다. 이 가게

[기독교적 관점] 역사학은 불안정한 학문이다? [내부링크]

인류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고고학과 인류학의 중심 주제 중 하나입니다. 과학적 연구를 통해, 인류의 조상이 처음 나타난 것은 기원전(B.C) 300만 년에서 200만 년 사이로 추정되며, 이 시기의 인류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다양한 화석을 통해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발견은 인간 진화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반면,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인간의 창조와 초기 행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는 종교적 문헌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창세기의 기록이 종교적 맥락에서 중요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일반 역사 기록으로서는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도, 창세기의 서술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깊은 관심과 욕구를 반영하며, 문화와 신앙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처럼 과학과 종교는 각각의 방식으로 인류의 기원을 탐구하며, 서로 다른 관점에서 인간의 뿌리와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는 데 기여하고 있습니다. 로제타 스톤 성경의 역사적 기록과

[역사 일반] 역사와 문화를 함께 묶어서 표현하는 이유? 그리고 사상의 의미는? [내부링크]

역사와 문화의 상호작용은 인류의 발전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들은 문화적 가치관, 예술, 언어, 그리고 전통 등을 형성하는 데 기여합니다. 예를 들어, 철학 예술 등을 품은 고대 그리스 역사는 서양 문화와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연구되고 참조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문화적 요소들은 다시 역사의 흐름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화적 변화는 역사적 사건의 해석에 영향을 주기도 하며, 역사를 더욱더 다층적이고 복잡한 학문으로 만듭니다. 따라서, 역사와 문화는 서로를 통해 끊임없이 재창조되며, 이 과정에서 인간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역사는 인간의 행동, 사고(思考)의 결정, 기술 등에 대한 기록이기에 인간의 행동뿐 아니라 사고를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란 틀 속에 문화가 만들어지기까지를 인간과 결부하여 단계별로 나눠보면, 사고(思考) 정립(문명)의 단계,

[역사 일반] 역사학은 불안정한 학문이다? [내부링크]

선사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문자의 발명 이전을 말하며, 이 시기에 대한 지식은 주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추론됩니다.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생활, 문화, 사회 구조에 대한 이해는 유물, 유적, 화석 등 물리적 증거에 의존합니다. 예를 들어, 도구 사용, 예술 작품, 무덤 등은 인간의 본성과 초기 공동체 생활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 연구자들은 인간의 기원과 초기 사회의 발전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사시대 연구는 인간의 본능적인 독립성과 공동체 의식의 근원을 탐구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며,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많은 사회적, 문화적 문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특히 고고학적 발견은 과학적 분석을 통해서 논리적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인간의 기원에 대한 탐구는 인간의 첫 조상이 기원전 200~300만 년 전에 존재했다고 추정되며, 이는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 피테쿠스와 같은 화석을 통해 뒷받침됩니다

[동영상 1] 로버트 월폴 총리 [내부링크]

https://youtu.be/-305MnpY3eI 영상을 볼때 자막을 열고 보세요.

[영국 총리의 삶] 5-2. ‘베이비 정치가’라 불린 총리, 데번셔 공작 - 총리로서의 삶과 그 이후 [내부링크]

미노르카 해전 장면 기대와 달리 총리에 오른 데번셔의 위치는 그리 확고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1756년 5월 20일, 미노르카 해전(Battle of Menorca)은 7년 전쟁 초기의 중요한 해전으로, 프랑스와 영국 함대 간에 발생했다. 이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에 따라 영국은 미노르카 섬을 잃게 되었다. 존 빙 제독 이 사건의 결과로, 영국 함대의 사령관이었던 빙 제독(Admiral John Byng)은 '의무 소홀'로 기소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당시 영국 내 여론에 큰 충격을 주었고, 데번셔 정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실 막강한 해군력을 갖춘 영국 함대가 프랑스의 공격에 무참히 패한 것은 당연히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해군 부가 해군 준장 출신인 앤슨 경의 노력으로 개혁을 이미 단행하였었고 조선소도 재조직하여 100여 척의 선박을 보유해서 이 정도라면 객관적으로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연합군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영국 총리의 삶] 5-1. ‘베이비 정치가’라 불린 총리, 데번셔 공작-간단 소개와 초기 정치 [내부링크]

윌리엄 캐번디시, 데번셔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 데번셔 공작 (William Cavendish, 4th Duke of Devonshire)은 1756년부터 1757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영국의 총리를 역임했으며, 이 때문에 '베이비 정치가'라고 불렸다. 비록 그의 재임 기간은 짧았지만, 영국 정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휘그당의 지지를 받으며, 특히 대(大) 피트가 전쟁을 관리하는 (남) 국무장관으로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다. 데번셔 공작의 중용적인 지도력은 당시 분열되기 쉬웠던 휘그당을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이는 18세기 중반 영국 정치에서 휘그당의 지속적인 강세를 가능하게 했다. 샬럿 캐번디시 1741년에 데번셔는 정계에 입문하여 펠럼 정부의 주요 선거구인 데번셔 지역의 의원으로 활동하며 '하팅턴 경'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1748년에 가문에서 정한 정략결혼 대신 사랑을 선택하여 아일랜드의 부호인 벌링턴 백작의 상속녀 샬럿과 결혼했으며, 이 결혼을

[하노버 왕실 스토리] -삼대에 걸쳐 부자간의 불화가 있었던 왕들은 누구? [내부링크]

조지 1세 하노버의 선제후 가문은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가문은 1635년에 설립되어 1901년까지 존재했으며, 하노버 선 제후국, 하노버 왕국, 브라운슈바이크 공국을 포함한 여러 영토를 지배했습니다. 하노버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배출한 벨프 가문의 후손으로, 중세 독일의 명문가였습니다. 조지 1세가 1714년에 영국 왕위에 오르면서 하노버와 영국은 동군연합(同君聯合, Personal union: 서로 독립된 2개 이상의 국가가 같은 군주를 모시는 정치 형태)을 이루었습니다. 조지 2세 영국 하노버 왕조의 초대 왕인 조지 1세와 왕세자이자 다음 왕인 조지 2세 사이의 불화는 영국과 하노버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조지 1세는 절대주의적 통치를 선호하며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으나, 조지 2세는 입헌군주제와 의회의 권한 강화를 지지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견해 차이는 부자간의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외교 정책에서도 차이가 보였습니다. 조지

[외교사] 1-5. 19세기 영러 각축-(2차) 동방 위기와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Russophobia)’ [내부링크]

(1차) 동방 위기 이후, 영 정부의 인식 속에는 ‘동방 위기’의 재현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내재해 있었는데 그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 이집트-오스만 전쟁(the second Egyptian – Ottoman War, 1839–1841)이었습니다. 이번 전쟁은 오스만제국의 술탄이 지난번 이집트와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이집트 관할이 되어있는 시리아 지방(레반트의 일부)을 공격하므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전쟁의 시작은 오스만 술탄이 했는데 진행 과정을 보면 이집트 파샤의 승리가 점쳐졌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이 전쟁 역시 영국에는 ‘(2차) 동방 위기’로 느껴지게 되었는데, 그 위기를 조성한 현실적 주역은 러시아가 아니라 프랑스였습니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 이집트의 승리가 점쳐지는 마당에 이미 점령하여 관리하는 시리아지역을 국제적으로 이집트 직할지로 확고하게 인정해 주고, 심지어 파샤가 이번 전쟁 중 점령한 오스만제국 내 모든 지역을 그에게 다 넘겨

[외교사] 1-4. 19세기 영러 각축- (1차) 동방 위기와 영국의 ‘러시아에 대한 반감(Russophobia)’ [내부링크]

1830년 런던 의정서는 그리스의 독립을 국제법적으로 인정하는 중요한 문서였으며, 동방문제에 대한 열강의 관심을 새롭게 집중시켰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이집트와 오스만제국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과정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려 했습니다. 특히, 제1차 동방 위기(1832-1833)와 제2차 동방 위기(1839-1840) 동안 영국은 러시아의 발칸반도와 중동 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장을 막기 위해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이 기간에 영국과 러시아 사이의 긴장은 유럽 전체의 균형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으며, 결국 크리미아(크림) 전쟁으로 이어지는 긴장의 고조를 가져왔습니다. 동방 위기, 그 시작은 이집트 태수와 오스만제국 사이의 전쟁(Egyptian – Ottoman War, 1831-1833)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파샤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자립을 시도하던 중에 발생했습니다. 그리스 독립 전쟁 때, 무함

[영국 총리의 삶] 4-3. 휘그당 신·구세력의 전환기를 담당한 총리, 뉴캐슬 공작 - 총리 2기의 정치 활동과 평가 [내부링크]

윌리엄 캐번디시, 데번셔 공작 북아메리카에서 좋지 못한 전쟁 상황은 뉴캐슬이 의회의 강력한 반발을 받게 했다. 전쟁을 선포한 1756년 겨울, 젊고 패기 찬 휘그당을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품은 폭스에게 정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뉴캐슬과 그를 따르는 휘그 무리들은 데번셔 공작을 차기 총리로 지목하였다. 데번셔 정부가 들어선 것이다. 사실 뉴캐슬은 자신의 후임으로 대(大) 피트를 추천하였지만, 그는 폭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이다 보니 폭스의 완강한 반발로 인해 성사되지 못하였다. 당시 폭스는 노골적으로 뉴캐슬도 무시하였는데 그 표현은 다음과 같았다. “그는 친구를 만들 힘도 없으며, 친밀하게 그에게 충고해 줄 사람도 없다. 그런 사람이 당내의 비난 속에서도 의회를 이끌어 가고자 새로운 인물을 생각하고 있다니… 나는 하원 내에 그를 지원해 줄 세력이 이제는 거의 없음을 확신한다.” 대(大) 피트 이듬해에도 전쟁의 양상은 그리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데번셔가 사임하게 되었고

[영국 총리의 삶] 4-2. 휘그당 신·구세력의 전환기를 담당한 총리, 뉴캐슬 공작- 총리 1 기의 정치적 활동 [내부링크]

헨리 폭스, 1대 홀랜드 남작 뉴캐슬 정부 1기 때 의회 내에서 도와줄 인물로는 전쟁 장관인 헨리 폭스와 국방부경리감직을 수행하던 윌리엄 대(大) 피트가 있었다. 그러나 폭스는 뉴캐슬이 정치적 후원 기관들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했으며, 대(大) 피트는 왕실의 하노버 지역 보호 정책을 강력히 비판했다. 이에 따라 두 인물은 뉴캐슬 정부에 기대했던 도움을 주지 못했다. 7년 전쟁 장면들 뉴캐슬 정부가 들어선 지 2년 뒤인 1756년, 또다시 전쟁의 포화가 유럽 전역에 뒤덮였다. 이번에는 7년여에 걸친 시간이 전쟁에 묶이게 되어 ‘7년 전쟁’이라 부른다. 벤젤 안톤, 카우니츠 백작 1748년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을 끝나고 각국이 맺은 엑스-라-샤펠 조약은 강화조약이라기보다 휴전조약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프로이센에 빼앗긴 슐레지엔을 되찾을 기회를 항상 엿보고 있었다. 이 지역에 대한 그녀의 강한 의지를 파악한 사람은 카우니츠 공이었는데, 그는

[영국 총리의 삶] 4-1. 휘그당 신·구세력의 전환기를 담당한 총리, 뉴캐슬 공작- 간단 소개와 초기 정치 [내부링크]

토머스 펠럼 홀스, 뉴캐슬 공작 헨리 펠럼의 형이자 펠럼가의 장남인 토머스 펠럼-홀스, 뉴캐슬 공작 (Thomas Pelham-Holles)은 케임브리지 대학의 클레어 칼리지에서 수학하였다. 1711년 그의 외삼촌인 존 홀스 (뉴캐슬어폰타인 공작, Duke of Newcastle upon Tyne)의 대 영지를 계승하여 뉴캐슬 공작 작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 아버지 영지도 계승하게 되어 그는 귀족의 서열상 선두 대열에 서게 되었다. 헨리에타, 뉴캐슬 공작부인 그뿐만 아니라 추밀 고문관인 고돌핀 백작의 딸이자 그의 부인인 헨리에타의 도움으로 휘그당 내 지도급들과 친분을 쌓아나갔다. 그 결과 1724년에 그는 (남) 국무장관이 되었고 전쟁 장관인 동생 펠럼과 함께 형제가 동시대 각료로 임하게 되는 기록을 세웠다. John Campbell, 2nd Duke of Argyll 뉴캐슬은 (남) 국무장관 시절에 누구보다도 일을 부지런히 하고 꼼꼼하게 처리하였다. 그가 의회에 출석할

[역사와 일상] 2. 역사 속에 보이는 행복의 실마리-민주주의와 보통 선거제? [내부링크]

토머스 페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은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영국 출신의 정치철학자로, 그의 사상과 저작은 미국 독립전쟁과 이후의 민주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의 저작 '상식'은 단순한 책을 넘어서,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대중에게 호소하고,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강력한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이 책은 당시 미국인들 사이에서 폭넓게 읽혔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중요한 영감을 주었습니다. 또 다른 저서인 '미국의 위기(The American Crisis)' 시리즈는 어려운 시기에 미국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데 이바지했고, '인권(The Rights of Man)'은 인간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그의 신념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토머스 페인의 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며,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토머스 페인은 민주주의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그가

[외교사] 1-3. 19세기 영러 각축- 영국의 ‘반(反) 러시아 감정(Russophobia)은 언제부터, 어떻게... [내부링크]

영국과 러시아 간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변화를 겪어왔습니다. 나폴레옹 전쟁 중이던 1813~14년 무렵, 영국의 함대는 214척이고, 프랑스는 50척, 러시아는 40척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815년에 패전국인 프랑스의 함대는 영국을 포함한 빈체제 국가들에 의해 묶였지만, 승자 쪽이던 러시아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해군력 증강을 시도하며 외교적, 군사적 존재감을 더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1588년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물리친 후에 해상 강국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했던 영국으로서는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을 도전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19세기 초반 영국 내 싹튼 '반(反) 러시아 감정 (Russophobia)'의 기원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1821년 그리스 독립 혁명 삽화 1821년 그리스 혁명은 유럽의 지정학적 균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혁명은 오스만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목표로 하였고, 러시아는 이 혁명을 지지하여 그리스 내정에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역사와 일상] 1. 요즈음 언론에 오르내리는 어느 역사학자를 지켜보면서... [내부링크]

역사학자가 갖는 책임감은 막중합니다. 역사 학도는 십수 년에 걸친 훈련 과정 중에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 아닌,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서술 능력을 익히고 비로소 학계에 역사학자로서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이런 역사학자가 갖는 책임감은 막중합니다. 그들이 표현해 내는 역사적 서술과 분석은 우리가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사유하며 미래를 설계하는 데 있어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또한 그들의 연구는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때로는 사회적 변화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역사학자들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자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한 통찰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역사학자의 훈련은 평생 지속되어야 합니다. 학자로서 연구자는 자료를 논리적으로 해석하고 문장화하는 능력을 지속적으로 키우며 그들의 연구가 동료 학자들에 의해 검증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역사학자는 자신의 연구가 객관적이고, 역사적 연속성을 가지며,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

1-1. 영국 입헌군주제의 첫 총리, 로버트 월폴-간단 소개와 정계 입문 [내부링크]

영국 입헌군주제의 첫 총리 로버트 월폴, 오르퍼드 백작은 영국 역사상 최초의 총리로 인정받는 인물이다. 월폴은 1721년부터 1742년까지 21년 동안 총리직(국가 재정위원장/ 제1재무장관)을 수행하였면서 왕과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국가 행정과 안보의 주도권을 쥐었고, 의회에서 자신의 정당을 강력하게 만들었다. 크레이턴 로버트는 《스튜워드 왕조 시기의 책임 정부의 성장》에서 월폴은 "총리라는 직함이 없었지만, 총리의 역할과 권한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라고 평가하였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킹스 칼리지 월폴의 부친은 1689년에 권리장전을 공포하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한 의회 의원이었다. 월폴은 부친의 정치적 배경과 영향력을 따라 자랐고,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칼리지에서 학문과 명예를 얻었다. 또한 부친으로부터 많은 재산과 영지를 물려받아 의회의 정치인으로서의 꿈을 쉽게 이룰 수가 있었다. 앤 여왕 초상 앤 여왕 통치 기인 1701년, 월폴은 의회 의원이 되었다. 그때 영국은 큰 전쟁에 휘

1-2. 영국 입헌군주제의 첫 총리, 로버트 월폴-정치적 성장과정 [내부링크]

선거후인 조지공( 조지 1세) 1714년에 앤 여왕이 사망하면서 스튜어트 왕조가 끝나고, 영국 의회는 왕위 계승법에 따라 신교도인 하노버 조지공을 새로운 국왕으로 선포했다. 조지공은 제임스 1세의 외손녀인 소피아의 남편이자 하노버 공국의 선거후였다.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자칭 제임스 3세) 당시 토리당 일부는 프랑스에서 망명 중이던 제임스 2세의 아들 에드워드(자칭 제임스 3세)를 정통한 후계자로 주장하며 조지공의 등장을 반대했다. 다시 말해서, 제임스 2세를 몰아낸 명예혁명(1688)의 뜻을 거부하고, 메리 모데나와 결혼한 제임스 2세의 자손을 옹호한 것이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토리당은 왕은 물론 정가로부터도 소외되었다. 국내 왕위 계승문제로 인한 토리당의 몰락은 휘그당에게 권력을 잡을 좋은 기회가 되었다. 제임스 스텐호프 백작 동상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월폴은 휘그당의 중심인물로 부상하면서 정부의 여러 직책을 맡았다. 1715년에는 재무 장관이 되었으며, 스튜어트 왕가의 복귀

1-3. 영국 입헌군주제의 첫 총리, 로버트 월폴-총리로서의 삶, 전반부 [내부링크]

월폴은 남해회사의 파산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에 개입하게 되었다. 그는 당시 정치적으로 일선에 있지 않았기에 이 사건과 관련된 직접적 책임이 없었다. 이런 연유로 월폴의 재정분야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왕이 그에게 이 사건의 해결사 역할을 해주기를 요청하자 정치 일선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다. 월폴은 다시 재무장관직에 올라 남해회사의 채무를 정리하고, 국민의 불만과 언론의 비난을 완화하는 데 이바지했다. 하원의장 아서 온슬로우 월폴은 기대 이상으로 남해거품사건을 잘 해결하였으며 그런 연유로 휘그당의 당 대표가 되었다. 당 대표가 된 그는 당내 스텐호프와 선들랜드 백작 같은 반대파를 내보내고, 자기의 정치적 파워를 확고히 하였다. 이렇듯, 월폴은 휘그당을 하나로 뭉치자 세간에서 대단한 정치가라고 평가하면서 그의 정치력에 신뢰감도 가졌다. 의회 대변인 아서 온슬로우는 “월폴은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과 기회를 잡았다. 그는 휘그당을 단결시키고 영국민의 존경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1721년,

1-4. 영국 입헌군주제의 첫 총리, 로버트 월폴-총리로서의 삶, 후반부 [내부링크]

조지 2세와 캐롤라인 왕비 그리고 자녀들 젱킨스 귀 사건이 벌어지던 1737년, 월폴은 다른 문제에도 골치를 앓았다. 조지 2세는 왕세자 프레드릭(웨일스 공)이 생김새가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해서 처음부터 싫어했다. 그러다 보니 왕세자 프레드릭은 아버지의 무관심과 멸시에 서운해하고, 왕에게 반대하는 정치인들과 협력했다. 이렇게 되자 조지 2세는 "네가 따르는 자들은 신의 뜻도 거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방진 자들이다"라고 왕세자를 욕하며, 세상에 그들의 다툼을 공개했다. 프레드릭 왕세자( 웨일스 공) 월폴은 조지 2세와 그의 왕세자 프레드릭의 갈등을 해결하고자 부단히 노력했으나, 휘그당 내 애국당 소속인 윌리엄 대(大) 피트가 왕과 왕세자를 모두 비난하는 연설을 한 뒤에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대(大) 피트의 연설로 인해 조지 2세가 월폴에게도 불만을 품게 되었고, 월폴은 총리로서의 권위와 영향력을 급속히 잃어가기 시작했다. 또한 월폴 본인도 젱킨스 귀 전쟁을 성급히 선포한 것을

2-1. “내각 수장의 정치적 독립성”을 최초로 보인 총리, 스펜서 콤프턴-간단 소개와 정계 입문 [내부링크]

“내각 수반의 정치적 독립성”을 최초로 보인 총리 스펜서 콤프턴, 윌밍턴 백작은 사적으로도 공적으로도 외로운 인물이었다. 콤프턴은 독신으로 가족이 없었고, 자신이 소속된 휘그당의 전임 총리인 월폴을 총리직에서 몰아낸 인물이다 보니 당내에서도 인기가 없었다. 이 때문에 말년을 쓸쓸하게 보내다가 삶을 마감하였다. 콤프턴이 세상을 떠날 즈음, 그에게 호되게 당한 월폴은 독설을 퍼부었었다. “그는 오직 금전( 돈)의 축적과 먹는 즐거움만 느끼는 인물이었고,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것은 형식과 관습뿐이었다. 그가 남에게 보이는 유일한 환심 거리는 굽실거림과 비굴한 웃음뿐이었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보면 “총리란 왕과 깊은 관계를 맺어서는 그 역할을 다할 수 없다”라는 선례를 보여준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서퍽주 아이 지방 모습 콤프턴은 3대 노샘프턴 백작의 셋째 아들로, 토리당계 정치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1698년에 서퍽

2-2. “내각 수장의 정치적 독립성”을 최초로 보인 총리, 스펜서 콤프턴-초기 정치여정 [내부링크]

조지 2세 콤프턴은 1727년에 조지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정치적으로 성공의 궤도에 올라선 듯 보였다. 왕은 월폴이 맡았던 여러 공식적인 업무들을 콤프턴과 함께 논의했다. 당시 왕의 생각은 콤프턴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것보다 그가 월폴에 비해 덜 적대적이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조지 2세의 부인인 카롤리네 왕비의 생각은 달랐다. 왕이 다른 여인을 바라볼 때 월폴이 왕비 편에 서서 왕에게 조언을 했었다. 이를 계기로 왕비는 월폴의 능력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다. 왕비는 당시 분위기를 파악하고 조지 왕의 생각을 바꾸고자 지혜를 발휘했다. 왕에게 건의하여 그녀의 연간 활동비를 결정하는 문제를 놓고 월폴과 콤프턴을 대결시켜 보게 하였다. 월폴은 왕비와 협상하여 10만 파운드의 활동비를, 콤프턴은 자체적 판단으로 6만 파운드를 제안하였다. 이것은 월폴이 왕비와의 신뢰가 어느 정도이고, 왕실의 권력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결과는

2-3. “내각 수장의 정치적 독립성”을 최초로 보인 총리, 스펜서 콤프턴-총리로 정치적 도약 [내부링크]

하지만 콤프턴의 정치적 성공은 자기 능력의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신은 그다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가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운 좋게도 월폴 정부가 막바지에 이르면서 그에게 기다리던 기회가 주어졌다. 콤프턴은 월폴의 정치적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전략을 세울 수 있었다. 그는 젱킨스 귀 전쟁으로 인해 국민의 불만이 쌓인 상황에서... 의회 의원들을 자신의 편으로 유도하고, 월폴의 전쟁 선포가 잘못된 정치라는 연설을 펼쳐 그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결국 월폴은 콤프턴을 비롯한 여러 형태의 정치공략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임하게 되었고 콤프턴은 월폴이 사임한 후에야 자신의 명예를 되찾았다고 생각했다. 윌리엄 풀터니, 바스백작 월폴이 사임한 후 휘그당은 분열되었다. 당시 (북)국무장관이자 당을 장악한 카트레트는 왕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지만, 휘그 애국당의 실세인 윌리엄 풀터니는 반왕실적인 태도를 보였다. 두 사람은 하원에서 각각 자신의

2-4. “내각 수장의 정치적 독립성”을 최초로 보인 총리, 스펜서 콤프턴-총리로서의 삶 [내부링크]

마리아 테레지아 당시 유럽 대륙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스러웠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카를 6세는 남자 후계자가 없어서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왕위에 올릴 수 있도록 '국사조칙 (Pragmatische Sanktion)'이라는 법을 만들었다. 1740년에 카를이 사망하고 마리아가 왕위를 계승하려고 하자, 합스부르크와 동맹한 에스파냐를 포함한 다른 유럽 왕국들이 반대하고 나서게 되었다. 프랑스가 합류한 것을 기념하는 프로이센 메달 이즈음,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 왕실의 내란을 기회로 삼아 슐레지엔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점령하려고 했다. 이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프랑스도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자기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다. 데팅겐 전투에 참여한 조지 2세가 담긴 메달 한편, 영국은 프랑스의 개입이 유럽 내 권력 균형을 위협하리라 판단하여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다. 이로써 유럽은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이라는 장기전에 휘말리게 되었

1-2. 인간의 본성이 행복의 척도를 정한다? [내부링크]

우리, 즉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보려면, 우리의 근본적인 속성(본성)을 최우선으로 파악해야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인간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정리되는 본성으로, 크게 두 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나 혼자 살고 싶고, 내 것만 가지고 싶은 본성’, 이는 ‘홀로’ 본성, 또는 ‘개인 속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고, 같이 나누고 싶은 본성’인데 이는 ‘함께’ 본성, 또는 ‘공동체 속성’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이런 두 본성을 대입시켜 생각해 보겠습니다. 혼자 있고 싶을 때에 공동체 생활해야 하는 환경이 주어지면, “우선 귀찮다, 거북스럽다.”등의 생각이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막상 홀로 있게 될 때엔 행복은 잠시뿐, "친구나 가족들, 사회 공동체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혼자 있게 된 것 아닌지…." 불안해하게 됩니다. 이 경우는 관련 공동체로부터 인정받고 함께하고 싶다는 열망이 불일 듯 일어

1-1.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정의하려면…. [내부링크]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정의하려면, 먼저 행복의 의미와 얽혀있는 우리 인간의 주관적인 경험과 감정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각자가 자신만의 행복 정의가 있고, 이를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가치관과 욕망이 반영됩니다. 행복을 위해 추구하는 가치관과 욕망으로는 돈이나 물질, 명성 또는 건강하고 가족과의 화목한 관계, 내적인 만족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런 가치관과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갈망과 불만, 그리고 불안과 스트레스가 항상 동반하는 경험을 합니다. 결국, 동반하는 불안정한 경험들이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굴레에 영향을 미쳐 진정한 행복을 놓치곤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삶 속에서 겉으로 “행복하다”라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늘 '불행하다’라고 되뇌곤 합니다. 좀 더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모든 일이 잘되고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굳이 행복이라는 말을 자주 쓸 필요가 있을까요? 진정 행복하다면, 그 말이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

1-3. 행복을 제대로 알고 찾으려면 역사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부링크]

우리 본성으로 지목된 ‘홀로’와 ‘함께’라는 부분을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관점이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예에서 '홀로'(개인)를 만족하려면 '함께'(공동체)가 만족되지 않고 '함께'를 만족하자면 '홀로'가 만족하지 못한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 두 본성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는 반비례의 특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반비례 논리로 본다면, 인간의 본성이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가정할 때 “인간은 삶의 과정에서 행복을 영구히 가질 수 없다”라고 비관적인 주장을 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가요?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시소를 타는 것을 바라보다 보면 무엇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양쪽의 아이가 균형을 맞추기 위해 노력하지만, 때로는 한쪽이 더 높이 올라가거나 내려가기도 합니다. 이런 시소의 움직임을 동영상을 슬로모션으로 보듯 보다 보면, 지켜보는 자가 놓칠 정도로 항상 수평을 유지하는 찰나의 시점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행복 탐구? 행복에 대한 내면 들여다보기! [내부링크]

행복에 대한 탐구는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자주 행복을 추구하고, 이를 삶의 목표로 삼기도 합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은 자기 삶에 대한 만족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대표적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체 내에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행복을 찾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가치관과 목표를 이해하고 달성해야 합니다. 이는 행복이 외부적인 성공이나 명예뿐만 아니라 내적인 만족과 자기실현도 중요한 요소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순간적인 기분이나 감정뿐만 아니라 균형 있는 내적 삶 속에서 우리는 행복을 배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Tal Ben-Shahar 이런 연유로 행복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을 조사하여 찾아내거나 얻어내는 탐구보다 더 깊이 내면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탈벤 샤하르 교수는 "행복에 대해 계속해서 질문하고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라고 이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4. [기독교 관점] 인간의 본성과 ‘삼위일체’ [내부링크]

기독교 관점에서 인간본성은 어떻게 이해할수 있을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창세기 1:26)” 이 구절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는 과정에 대한 말씀으로 몇 가지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부분인데, 인간은 우연히 생겨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따라 만들어진 존재란 사실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부분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는 존재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이 ‘나’란 단수 대명사보다 ‘우리’란 복수 대명사를 사용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음을 한 번 더 강조한,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세기 1: 27)”에서는 ‘자기’란 단수 대명사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의 대명사 관련 부분에서 하나님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에 관

3-1. 최초로 왕권을 견제한 총리, 헨리 펠럼-간단 소개와 정치적 성장 [내부링크]

최초로 왕권을 견제한 총리 헨리 펠럼(Henry Pelham)은 영국의 정치인으로서 1743년부터 1754년까지 총리직을 맡았다. 그는 조지 2세의 신임을 얻고 국내외 정책을 성공적으로 시행하였다. 때문에 임기 도중에 그가 사망하자 왕은 물론 그의 정치적 동료들과 친구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 조지 2세는 펠럼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의 삶에는 더 이상 평화가 없구나”라며 애도를 표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작가인 호러스 월폴은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펠럼은 최선을 다한 것은 맞지만, 과연 그의 최선이 조국에 얼마나 이익을 가져다주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라고 그의 정치적 삶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펠럼 총리, 그는 조국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주었는가? 그는 에스파냐왕위계승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국가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다. 월폴 총리의 사임 이후 불안정해진 정부를 안정화하고 체계적인 총리제도를 구축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의 업적은 후속

3-2. 최초로 왕권을 견제한 총리, 헨리 펠럼-총리 전반기의 안정과 위기관리 [내부링크]

토마스 펠럼 홀스, 뉴캐슬 공작 펠럼은 총리가 되자 형인 뉴캐슬 공작을 (남) 국무장관으로 임명했다. 당시, 카트레트 (북) 국무장관이 하노버 지방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왕을 설득하여 진행 중인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쟁에 영국군을 더 투입하였다. 카트레트는 하노버 지방이 영국의 국익에 중요하다고 생각한 조처였지만, 펠럼 형제는 그의 견해가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보았다. 오히려 카트레트가 왕의 권위를 악용하고, 영국의 자주성을 해치고,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고 있다고 비난을 했다. 이어서 펠럼은 의회에서 전쟁 자금을 통제할 수 있는 총리의 권한을 활용하여 카트레트에게 압력을 가해 1744년, 카트레트의 사임을 얻어내었다. 당내에서 큰 갈등을 초래했던 인물이 이렇게 사라지게 되자 (휘그) 당의 힘이 오롯이 펠럼에게만 집중되는 정부가 성립되었다. 컬로든 전투 장면 당내 갈등을 정리한 기쁨도 잠시, 펠럼 총리에게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였다. 스튜어트 가문의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젊은 왕위

3-3. 최초로 왕권을 견제한 총리, 헨리 펠럼-총리 후반기의 왕실 견제 [내부링크]

컬로던 전투가 벌어진 전쟁터 한편,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치른 컬러던 전투의 승리는 하노버로 피신까지 생각했던 조지 2세에게 정치적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왕실 일원(왕의 동생인 컴벌랜드 공작)이 내란으로 커질 스코틀랜드와의 상황을 끝낸 것이 큰 자랑거리가 되었다. 이렇듯 자신감이 오른 조지 2세는 진행 중인 오스트리아왕위계승전에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 했다. 그는 프랑스와 에스파냐에 대항하여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지원하고, 유럽 대륙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영국 내부에서 반대의 목소리를 불러일으켰다. 일부 귀족과 의회는 유럽 대륙의 전쟁에 너무 큰 비용과 인력을 투입하는 것이 영국의 이익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또한 스코틀랜드와의 전투가 끝났다고 해서 그들의 반항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우려의 목소리도 들렸다. 사실, 스코틀랜드는 여전히 영국과의 연합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정당한 왕으로 스코틀랜

1-1. 19세기 영러 각축-‘동방문제’의 역사적 배경 [내부링크]

런던 크림전쟁 기념관 동상 19세기의 영러 각축(英露角逐: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서로 이기려고 다투는 일)은 제국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국제 정치적 대립으로, 오늘날의 국제 관계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 시기에 영국과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으며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함께 발생한 동방문제는 두 제국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고, 크림 전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프가니스탄과 인도를 둘러싼 영향력 다툼으로 확대된 '그레이트 게임'은 중앙아시아에서의 전략적 위치 때문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현재의 국제 정세와도 연결되어, 과거의 갈등이 현재에 어떻게 반복되며 영향을 미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표토르 대제 '영러 각축'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자 먼저 러시아쪽 역사부터 살펴보면 표트르대제가 주목됩니다. 표토르대제의 통치 기간(1682-1725)은 러시아 역사에서

1-2. 19세기 영러 각축- ‘동방문제’의 중심에 있던 오스만제국과 러시아의 초기 관계 [내부링크]

오스만 1세 동방문제의 내용은 쇠퇴하는 오스만제국과 이 제국의 해체 속에 일부 지역을 장악하여 지중해로의 상업 진출을 꾀하는 러시아의 움직임이 만드는 ‘무엇인가’가 핵심입니다. 동방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오스만제국과 러시아의 초기 관계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부족들은 몽골의 압력을 피해 아나톨리아로 이주하였고, 그중 한 지도자인 오스만 1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오스만제국을 창건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원래 비잔틴 제국 (동로마제국)의 일부였으나, 1260년대부터 셀주크 튀르크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1세는 이곳에서 공국을 세우고, 혈연이 아닌 정치적 동맹을 통해 민족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제국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이러한 통치 전략은 주변의 비잔틴과 셀주크 출신들을 흡수하는 데에도 유리하였고, 결국 이 지역이 오스만제국의 중심지가 되게 만들었습니다. 마흐메드 2세 오스만 1세 이후, 메흐메드 2세(Mehmed II, 1451–1

「영국 총리의 삶과 역사」를 시작하면서 [내부링크]

유럽의 역사와 문화는 인류에게 ‘민주주의 체제’라는 중요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 체제의 기반을 다져온 나라 중에서 영국은 다른 유럽국들보다 더 큰 임무를 수행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 역사에서 마그나 카르타와 의회의 탄생, 권리장전과 입헌군주제, 산업혁명과 자유주의 정치의 확립 등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이바지한 사건들로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본 카테고리인 [영국 총리의 삶과 역사]에서는 기존의 민주주의 흔적을 다룬 영국 역사의 이해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느낄 수 있도록, 그간 근현대 역사 시기를 거쳐 간 영국 총리(리시 수낵 현재 총리 포함 57명과 이어서 임명될 미래 총리 포함)의 삶을 다루어 보고자 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카테고리 안에 올려지는 글은 역대 총리들의 순서 대로입니다. 그러나, 아래처럼 여섯 묶음 속에 총리들을 나누어 생각해 본다면, 독자 입장에서 카테고리 내에 올려지는 글의 의도와 구조를 좀 더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 묶음) 1~ 10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