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끓이다 / 이재무


라면을 끓이다 / 이재무

라면을 끓이다 / 이재무 늦은 밤 투덜대는, 집요한 허기를 달래기 위해 신경 가파른 아내의 눈치를 피해 주방에 간다 입다문 사기그릇들 그러나 놈들의 침묵을 믿어서는 안 된다 자극보다 반응이 훨씬 더 큰 놈들이다 물을 끓인다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실업을 사는 날이 더 많은 헌 냄비는 자부가 가득한 표정이다 물 끓는 소리 요란하다 한 여름 밤의 개구리 소리 같다 모든 고요 속에는 저렇듯 호들갑스런 소음이 숨어 있다 어제 들린 숲 속 직립의 시간을 사는 침묵 수행의 나무들도 기실은 제 안에 저도 모르는 소리를 감추고 있을 것이다 찬장에서 라면 한 봉지를 꺼낸다 라면의 표정은 딱딱하고 각이 져 있다 그들이 짠 스크럼의 대오는 아주 견고하고 단단해 보인다 그러나 끓는 물 속에서 그들은 금새 표정을 바꿔 각자 따로 놀며 흐물흐물 녹아 내릴 것이다 저 급격한 표정 변화는 우리 시대의 슬픈 기표다 얼마 후 나는 저 비굴 한 사발로 허겁지겁 배를 채울 것이다 도마 위 양파, 호박, 파 등속을 가지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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