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갑자사화

1504년(연산군 10년)의 갑자사화는 6년 전의 무오사화와 여러 측면에서 사뭇 다른 사건이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239명(사형·부관참시 122명, 51.1퍼센트)이라는 피화인의 규모가 보여주듯 전면적이고 가혹한 숙청이었다. 또한 무오사화가 국왕과 대신이 연합해 주도한 제한적 경고였던데 견주어 갑자사화는 폭정과 황음(荒淫)에 침윤되어가던 국왕이 신하 전체를 대상으로 자행한 거대한 폭력이었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폭정에서 한 극점을 형성했다. 강화된 왕권 무오사화 이후 중앙 정치가 변화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가장 주요한 현상은 삼사의 위축이었다. 국왕이 대간을 날로 심하게 제압하자 모두 그 관서에 임명되기를 꺼려 결국 유순하고 나약한 성품을 가진 김영정(金永貞)이 대사헌에 발탁되었다는 기사는 그런 정황을 잘 보여준다(1498년 11월 10일). 연산군은 “오늘에야 대간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면서 이런 변화를 흡족해했다(1498년 7월 15일). 이처럼 사화 이후 삼사가 상당히 온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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