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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두 개면 바다’ : 보스턴의 올드노스 교회 [내부링크]

1723년에 지어진 ‘올드노스 교회(Old North Church)’는 보스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서, 공식 명칭은 ‘보스턴 그리스도 교회(Christ Church in the City of Boston)’이며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올드노스 교회 *** 아메리카 식민지에 독립의 열망이 한창 고조되던 1775년 봄, 보스턴 교외 콩코드Concord에서 조직된 민병대는 애국파(‘Patriots’)의 지도자 존 핸콕과 새뮤얼 애덤스의 지휘 아래 필요한 무기를 확보하고 탄약고를 갖추면서 영국군에 대항할 준비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이런 활동은 다른 식민지에도 속속 파급되었다. 한편 콩코드에서 식민지인들이 무기와 탄약을 확보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보스턴의 영국군은 애국파를 체포하고 무기를 압수하기 위한 작전에 나서게 된다. 애국파에 대한 영국군의 체포 공격이 임박하자, 새뮤얼 애덤스가 조직한 보스턴의 애국파 조직인 〈자유의 아들들〉의 지도자 폴 리비어Paul Revere는 [‘

레드삭스의 홈구장 펜웨이파크 [내부링크]

11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펜웨이파크Fenway Park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의 아메리칸리그 동부지구에 속한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의 홈구장이다. 미국에서 대표적으로 오래된 도시인 보스턴에 자리 잡은 펜웨이파크는 내셔널리그 중부지구 〈시카고 컵스Chicago Cups〉의 홈구장인 리글리필드Wrigley Field(1916)와 함께 메이저리그 30개 구장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경기장이다. 펜웨이파크 이런 역사와 함께 보스턴의 상징으로 불리는 이 경기장은 개장 100주년이 되는 2012년에 국가사적지 명부에 등재되었다. 야구경기장이 정부가 관리하는 역사적 기념물로 지정됐다는 사실 자체가 펜웨이파크가 단순한 야구경기장이 아니라는 증거라고 하겠다. 펜웨이파크의 수용인원은 메이저리그 구장 중에서 5번째로 적으며(야간 3만 7,499명, 주간 3만 7,071명) 주차시설도 전혀 안 되어 있는 불리한 점에도 불구하고 한 시즌 동안 200만 명 이상의 팬이 찾는 인기

95년 만에 밤비노의 저주가 풀린 펜웨이파크 [내부링크]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는 1901년에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을 연고지로 삼아 아메리칸리그의 8개 프랜차이즈 팀 중 하나로 창단됐다. 1903년 월드 시리즈에서 첫 우승을 따낸 것을 포함해 월드시리즈 8회 우승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레드삭스 로고 레드삭스의 역사는 뉴욕 양키스와의 120년 가까운 치열한 라이벌 관계로 설명된다. 아메리칸리그 우승 타이틀을 두고 두 번 마주쳤는데 1904년에 레드삭스가 우승했고, 1949년에는 양키스가 우승했다. 레드삭스는 1903년 전설적인 투수 사이 영Cy Young의 활약으로 첫 우승을 한 뒤 1912년, 1915년, 1916년, 1918년 네 번의 우승을 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베이브 루스는 1915년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에는 타자보다는 투수로 맹활약해서 보스턴을 1918년도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사이 영 그러나 레드삭스는 1919년 팀 승률이 5할 밑으로 떨어지자 시즌이 끝나자 양키스에 베이브 루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얽힌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내부링크]

1789년의 프랑스혁명 전인 1785년에 일어난 ‘목걸이 사기사건(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은 프랑스의 귀족층에서 일어난 전형적인 사기 사건이었지만 사치와 방탕에 빠진 상류층의 운명을 암시한 사건이었다. 사건을 간단히 요약하면, 백작부인 행세를 한 여인이 궁정의 사제장이었던 로앙Rohan 추기경에게 접근하여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왕비가 고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국왕 모르게 구입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속이고, 추기경이 왕비에게 줄 뇌물 용도로 이를 사도록 유도한 후 중간에서 가로챈 사건이었다. 목걸이 사건 소식을 접한 대문호 괴테는 ‘프랑스혁명의 서곡’이라는 함축성 있는 표현을 했을 정도로 혁명 직전의 프랑스 궁중의 부패상을 여실히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이었으며 이는 결국 혁명 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 1772년 루이 15세는 자신의 애첩인 뒤바리 백작부인에게 값진 선물을 하기로 생각했다. 뒤바리

맨해튼 마천루의 시조 트럼프 빌딩 [내부링크]

맨해튼의 금융지구 월스트리트에 세워진 ‘40월스트리트 빌딩’은 1930년 5월 26일에 완공된 높이 282.6m, 지상 70층, 지하 2층의 사무실용 건물로서 맨해튼을 대표하는 건축물 중의 하나로 유명하다. 지상 255m 높이인 69층과 70층에 최대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40월스트리트 빌딩은 맨해튼 신탁은행의 본사 건물로 지어져 완공 후에는 ‘맨해튼 은행 빌딩’으로도 불렸으며,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1995년에 건물을 인수한 후로는 주로 〈트럼프 빌딩The Trump Building〉으로 불리고 있다. 트럼프 빌딩(40월스트리트 빌딩) 이 빌딩은 크라이슬러 빌딩이 완공되기 전까지 잠깐이나마 세계 최고층 건물의 왕좌를 차지하면서 맨해튼의 마천루 경쟁의 신호탄 역할을 했다. 그리고 비록 한 달 만에 크라이슬러 빌딩에게 왕좌의 타이틀을 내어주었지만, 인상적인 청록색의 피라미드형 지붕과 신고딕 양식의 첨

다리미 모양으로 유명한 플랫아이언 빌딩 [내부링크]

맨해튼의 빌딩 중에는 높이가 다른 마천루처럼 높지는 않으나 특이한 외관으로 눈길을 끄는 빌딩이 있는데, 브로드웨이와 5번가 및 23번가가 만나는 곳에 자리 잡은 ‘플랫아이언Flatiron 빌딩’이 그것으로 뉴욕의 마천루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의 하나이다. 이 빌딩은 비록 지상 21층, 87m의 높이에 불과하였지만 1902년 완공 당시에는 뉴욕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으며, 1905년 지붕을 더 올려 옥탑층을 포함해 지상 22층, 94m의 높이를 갖추어 1909년까지 뉴욕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시공주인 풀러George Fuller의 이름을 따 원래는 ‘풀러 빌딩Fuller Building’이라고 불렸지만, 당시 일반 가정에서 사용되던 다리미(flatiron)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플랫아이언 빌딩’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가 아예 빌딩의 이름이 되어버린 것이다. 매디슨스퀘어 파크와 인접한 지역의 좁은 부지 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거리 세 곳이 교차하면서 생긴 삼각형 모양의 부지는

다양한 경기와 행사가 열리는 매디슨스퀘어가든 [내부링크]

맨해튼의 7번가와 8번가 사이 및 31번가와 33번가 사이에 위치하는 매디슨스퀘어가든Madison Square Garden은 각종 스포츠 경기와 공연 및 이벤트가 열리는 실내경기장으로서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매디슨스퀘어가든 4단계의 이전 또는 재건축을 통해서 발전했는데 1879년에 세워진 첫 번째 경기장은 지붕이 없는 실외경기장이어서 악천후에서 경기가 매우 불편했다. 두 번째 경기장은 1890년에 세워졌는데 지금의 매디슨스퀘어가든과는 다른 곳이었다. 이 경기장을 설계한 건축가 스탠포드 화이트가 이곳에서 피살되는 일이 있었다. *** 1925년에 세워져 1968년에 폐장된 세 번째 경기장은 지금의 위치와 같았으며 NBA 뉴욕 닉스와 NHL 뉴욕 레인저스, 뉴욕 아메리칸스, 브루클린 아메리칸스의 홈경기장으로 사용했다. 이 경기장에서 유명한 〈2만 나치의 봉기〉라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2017년 〈A Night at the Garden〉이라는 제목

맨해튼의 종교적 랜드마크 성패트릭 대성당 [내부링크]

맨해튼의 한복판 번쩍이는 초현대식 마천루 숲 사이, 록펠러센터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성패트릭 대성당(St. Patrick Cathedral)〉은 1858년에 기공, 1879년에 헌당식을 올린 맨해튼의 대표적 랜드마크의 하나이다. 대성당 전경 라틴 십자가형의 평면을 가진 신고딕 양식의 대리석과 화강암 건물로, 크기는 너비 53m, 길이 120m에 달하며 약 3천 명이 입장할 수 있다. 대성당은 뉴욕시의 랜드마크로 지정되었으며 국가사적지명부에 등재되어 있다. 라틴 십자가형의 성당 평면 4세기 무렵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파하는데 공헌한 세인트(성)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으로 아일랜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 그래서 같은 이름의 성당이 아일랜드인(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세계 여러 곳에 있으며, 그의 업적과 ‘채색된 전설과 기적’을 기리는 〈성 패트릭 데이〉가 매년 3월 17일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아일랜드 출신의 이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미국의 도시에서 성대하게 거

미국 공연문화의 중심지 타임스·스퀘어 [내부링크]

타임스·스퀘어Times Square는 브로드웨이와 7번가 및 42번가가 교차하는 곳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맨해튼의 도로망 중에서 대각선으로 뻗은 길이 브로드웨이인데, 직선과 대각선이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삼각형 공간이 타임스·스퀘어인 것이다. 초기의 이름은 ‘롱에이커·스퀘어Longacre Square’였으나 1903년에 뉴욕타임스가 이곳에 새로 세운 빌딩(One Times Square)으로 이전해오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타임스·스퀘어의 일부인 ‘파더·더피·스퀘어Father Duffy Square’와 함께 42번가에서 47번가에 이르는 5개 블록에 걸쳐 보우타이bowtie 모양으로 형성된 거리를 일컫는다. 타임스 스퀘어 타임스·스퀘어는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보행자 거리이자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중심이며 브로드웨이 공연가의 허브hub이기도 하다. 또한 라스베이거스를 제외하면 세계에서 가장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명소이기도 하며, 뉴욕 여행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로서 매

학살사건이 일어난 보스턴 세관 앞 킹스트리트 [내부링크]

1773년의 〈보스턴 차파티사건〉과 함께 미국의 독립전쟁을 촉발한 사건 중의 하나였던 〈보스턴 학살사건(Boston Massacre)〉은 이보다 먼저 1770년 3월 5일에 일어났다. 사건의 무대는 식민지의회의 의사당에서 가까운 보스턴 세관 앞의 킹스트리트King Street 였다. 보스턴 세관 건물은 1810년 지금의 커스텀하우스 거리Custom House St.로 이전했으며, 의사당 건물은 잘 보존되어 워싱턴 스트리트와 스테이트 스트리트의 교차점에 서 있다. 실제 학살사건이 일어난 곳은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이지만 지금 그곳은 번화한 거리가 되었으므로 의사당 건물 앞의 거리 바닥에 기념조형물을 만들어 학살사건을 기념하고 있다. 의사당 건물(The Old State House)과 학살사건 기념조형물 한편 의사당 건물은 보스턴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가장 역사가 오랜 건물 중의 하나로서, 1713년 조지아 양식으로 건축되어 매사추세츠주 식민지 정부의 의사당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파티 사건이 벌어진 보스턴 항구 [내부링크]

보스턴만에 자리 잡은 보스턴 항구에서, 과거에 무역선과 화물선이 드나들던 롱Long 부두(wharf)는 오늘날 시의 중심 지역이 되어 페리나 크루즈 등이 정박하는 부두로 쓰이며, 지금은 인접한 다른 항구가 과거의 롱 부두를 대신하고 있다. 보스턴 항구의 롱 부두 이 보스턴 항구에서 미국의 독립전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보스턴 차파티Tea Party 사건〉이 1770년 12월에 일어나게 된다. 보스턴 항구에는 차파티 사건을 기념하는 〈차파티 박물관〉이 콩그레스Congress 브리지에 연해 있다. 당시 이곳에 정박해 사건의 당사자가 되었던 엘레너Eleanor와 비버Beaver 두 척의 상선이 복원되어 전시되고 있으며 박물관에는 사건 당시의 차 박스 1개를 원형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차파티 박물관에 복원전시 중인 비버호 *** 영국 정부는 식민지 정착민들로부터 결렬한 반발을 초래한 〈인지세법〉을 폐지하였지만 다시 1년 뒤인 1767년에 식민지가 영국에서 수입하는 소비재에

보스턴 포위전의 현장 찰스타운 벙커힐 [내부링크]

〈보스턴 포위전(Siege of Boston)〉은 독립전쟁 개전 직후, 식민지인들로 구성된 민병대가 렉싱턴과 콩코드 전투에서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고 계속해서 보스턴을 포위하여 영국군을 봉쇄한 작전이었다. 또한 이 포위전은 ‘애국자(Patriots)’들로 불리던 민병대와 ‘레드코트Red Coat’로 불리던 영국군 간에 벌어진 미국 독립전쟁의 첫 대규모 전투였다. 당시의 전형적인 민병대 모습 보스턴 항구를 내려다보는 찰스타운의 벙커힐과 브리즈힐 등의 언덕은 식민지인들의 민병대가 영국군을 항구에 봉쇄하기 위해 진지를 쌓고 포위하고 있었으며, 이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맹렬히 돌격해 온 영국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인 곳이다. 이 포위전의 큰 전투는 〈벙커힐 전투〉뿐이었으며 장비와 훈련에서 뒤떨어진 민병대는 싸움에는 비록 패하였으나, 훈련된 영국군에게 2배 이상의 손해를 입힘으로써 이 전투는 민병대에게 커다란 자신감을 안겨주었다. 그리고 비록 성과는 크지 않았지만 여기서 활약한 민병대를 모체로

독립전쟁의 도화선 렉싱턴과 콩코드 [내부링크]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16 떨어져 있는 렉싱턴Lexington은 1642년부터 이주민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1713년 시로 독립하였으며, 지명은 영국 잉글랜드의 렉싱턴(지금의 랙스턴Lexton)에서 유래한다. 렉싱턴은 ‘미국 자유의 탄생지’로 불린다. 미국 독립전쟁 최초의 전투인 〈렉싱턴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렉싱턴의 주민들은 렉싱턴 전투가 벌어진 곳을 ‘렉싱턴 그린Lexington Green’ 그리고 이 전투를 ‘배틀 그린Battle Green’이라고 부른다. 이런 렉싱턴은 식민지 시대로부터 독립전쟁 시기까지의 많은 역사적 건물, 전투공원, 기념비 등 당시의 유적이 도처에 남아 있으며, 민병대의 회합장이었던 ‘벅맨 선술집(Buckman Tavern)’ 등 흥미스러운 유적도 많이 남아 있다. 벅맨 선술집 한편 렉싱턴 전투에 이어 〈콩코드 전투〉가 벌어졌던 인근의 콩코드Concord에는 미국 독립전쟁의 첫 전투를 기념하는 〈미넛맨Minuteman 국가역사공원〉이 있다. 1

보스턴의 역사유적을 돌아보는 〈자유의 길〉 [내부링크]

보스턴Boston에는 미국의 독립혁명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 16개의 사적지를 연결하는 약 4의 ‘자유의 길(Freedom Trail)’이 조성되어 있다. 빨간 벽돌로 포장되어 있으며 안내표지판이 바닥에 있어 이들 16개의 사적지를 산책하듯이 쉽게 돌아볼 수 있다. 자유의 길은 보스턴의 중심지인 보스턴 커먼에서 시작하여 찰스타운의 북쪽 끝인 벙커힐전투 기념공원까지 연결된다. 이 길은 1951년, 지역의 언론인 스코필드William Schofield가 아이디어를 내고 시장 하인즈John Hynes가 실행에 옮겨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보스턴 차파티 사건의 현장〉 등 몇몇 중요한 사적지가 빠진 것이 아쉽다는 평을 받고 있다. 1. ‘보스턴 커먼Boston Common’은 시의 중심지에 있는 공원으로 미국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시민공원이다. 2. ‘매사추세츠 주청사(Massachusetts State House)’는 비컨힐Beacon Hill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의회와 주지사 사무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트리니티 교회 [내부링크]

월스트리트와 브로드웨이의 교차점에 자리한 중후한 고딕 양식의 〈트리니티 교회(Triniti Church)〉는 영국성공회 뉴욕 교구(diocese)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서 〈국가역사기념물(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등재되어 있다. 1698년 완공 당시에는 뉴욕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으며 지금도 높은 마천루 사이에서도 눈에 띈다. 현재의 트리니티 교회 ‘로어Lower 맨해튼’에서 뉴욕증권거래소, 페더럴홀Federal Hall과 함께 가장 역사적인 건축물이며 화재 및 붕괴의 위험으로 몇 번의 재건축 끝에 1846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하였다. 교회의 내부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으며 내부의 박물관에서 식민지 시절부터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교회 내부 교회 경내의 트리니티 묘지에는 미합중국의 초대 재무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정치가 존 와츠, 증기터빈선을 만든 풀턴 등 뉴욕 출신 저명 인사들의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존 와츠의 동상이 서

세계 음악가의 꿈의 무대 카네기홀 [내부링크]

카네기홀Carnegie Hall은 미드타운 맨해튼의 57번 스트리트와 7번 애브뉴Avenue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콘서트홀로서 클래식부터 팝, 재즈, 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공연과 강연회 등이 열리고 있다. 뉴욕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다음가는 수준 높은 공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카네기홀 19세기 말 ‘강철왕’으로 불리며 독점기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은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1835~1919)가 자금을 기부해서 건축했다. 뉴욕의 대표적 건축물 중의 하나로, 1962년에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 스코틀랜드 출생인 카네기는 1848년 가족과 함께 펜실베이니아주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여러 직업에 종사하다가 철강 수요의 증대를 예견하여 다니던 철도회사를 1865년에 사직하고 독자적으로 철강업을 경영하면서, 철도회사들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내는 등의 야비한 방식을 통해 경쟁회사들을 합병해 나갔다. 앤드루 카네기 마침내 1870년대부터

뉴욕의 허파 센트럴파크 [내부링크]

센트럴파크Central Park는 맨해튼 중심부에 있는 공원으로 뉴욕의 상징이자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도시공원이다. 미국 전역을 통틀어 가장 많은 사람이 찾는 공원으로 꼽히는데 연간 약 4천만 명이 공원을 이용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50만 그루 이상의 나무가 심어져 ‘뉴욕의 허파’라고도 불린다. 남북 길이 4.1, 동서 길이 0.83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면적은 3.41이다. 걸어서 돌아보려면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센트럴파크 전경 전 세계인들은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공원의 인상적인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이다. 공원은 비영리단체인 〈센트럴파크 관리위원회(the Central Park Conservancy)〉가 뉴욕시와 함께 관리한다. 공원 주변의 아름다운 건축물로도 유명하다. 센트럴파크 주변의 가장 인상적인 건물로 꼽히는 One Central Park 빌딩 *** 1800년대 중반에 맨해튼의 도시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파리의 불로뉴 숲이나 런던의 하이드파크처럼 시민들을

15년간에 걸쳐 건설된 뉴욕의 상징 브루클린 다리 [내부링크]

이스트East강 위에 놓여진 브루클린 다리는 맨해튼섬과 브루클린 자치구를 연결하는 교량으로, 뉴욕의 대표적인 상징이자 뉴욕이 배경으로 등장하는 영화에 반드시 등장할 정도로 명소로 꼽히고 있다. 네오고딕 양식의 석재 교탑橋塔과 교탑을 연결하는 4개의 주케이블 그리고 하프의 현絃처럼 흰 강철선(현수재)이 가지런하게 늘어선 모습이 인상적으로, 세계 최초로 강철선(steel wire)을 사용한 현수교懸垂橋(suspension bridge)이다. 1964년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66년 〈국가사적지명부〉에 등재되었다. 브루클린 다리 *** 브루클린은 여러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진 다민족 거주지이다. 맨해튼과 마찬가지로 브루클린 지역의 주인도 원주민 부족이었으나 1600년대에 네덜란드인들에 의해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영국이 네덜란드를 몰아낸 이후에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후, 대서양에 접해 있는 브루클린은 뉴욕의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게 되면서 교통의 이점을 활용한 공장의 건설과

대재앙의 현장 그라운드제로 [내부링크]

‘그라운드제로Ground Zero’라는 말은 원래 핵폭탄이 상공에서 폭발할 경우, 폭발한 위치 바로 아래 대재앙의 현장, 즉 ‘아무것도 남지 않은 참혹한 현장’을 뜻하는 말이었다. 1945년 7월 16일,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계획인 〈맨해튼계획〉에 의해 ‘트리니티Trinity’라는 암호명을 가진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행해졌으며 실험이 이루어진 장소를 암호명을 따서 ‘트리니티’라 부르게 되었다. 트리니티 원폭실험장은 뉴멕시코주 소코로Socorro에서 남동쪽으로 약 56 떨어진 사막 지대에 위치한 〈화이트샌즈White Sands 미사일사격장〉 내에 있었다. 그리고 트리니티 실험 후 군사 은어로만 사용되던 ‘그라운드제로’라는 용어가 1946년 <뉴욕타임즈>의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 원폭투하 관련 기사에서 사용된 후 널리 쓰이게 되었다. 이후 원자폭탄의 피폭지 외에 미국 국방부 청사인 펜타곤Pentagon의 안뜰을 가리키는 은어로도 사용되었는데, 이는 펜타곤이 냉전 시기에 소련 핵 공격의

미국 독립의 상징 자유의 여신상 [내부링크]

맨해튼의 동남쪽 약 4 거리, 뉴욕만에서 허드슨강의 어귀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한 리버티섬(Liberty Island)에는 뉴욕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명소인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이 횃불을 치켜들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이 거대한 여신상은 프랑스가 미국의 독립 100주년(1876년)을 기념하여 선물하려고 제작을 시작한 것이나, 자금 문제 등 여러 가지 사정으로 계획보다 10년 늦은 1886년에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맨해튼 쪽에서 바라본 자유의 여신상 정식 명칭은 〈세계를 비치는 자유(Liberty Enlightening the World)〉이지만 로마 신화의 자유의 여신 ‘리베르타스Libertas’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통상 ‘자유의 여신상’으로 불려지고 있다. 1892년부터 1924년까지 ‘아메리칸드림’을 안고 유럽을 출발해서 뉴욕만으로 입항한 약 1,200만 명의 유럽인 이민자들은 이민국이 있는 뉴욕만의 엘리스섬에서 입국심사를 받았다.

기증품으로 이루어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내부링크]

미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 미술관( Museum of Art)〉은 센트럴파크 동쪽의 5번가(5th Avenue)에 자리하는데, 5번가에는 9개의 미술관이 1마일에 걸쳐 모여 있어 이 거리를 ‘Museum Mile’이라고 부른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소장품 규모에 있어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과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이어 세계의 3대 미술관으로 꼽히며, 연중 관람객이 700만 명을 웃돌아 루브르 박물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관람객이 많은 미술관이기도 하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정면 약칭으로 ‘더 매트(The Met)’라고 불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특징 중 첫 번째는 소장품의 폭이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전 시대와 지역에 걸쳐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미술관이 국가나 정부 기관의 주도가 아닌 순수하게 민간이 주도하여 설립되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다른 두 박물관이 대부분 왕실 소장품 또는 제국주의 시대의 전리품이나 약탈품으로 출발한 데 비해 더 메트

뉴욕 양키스의 홈구장 양키스타디움 [내부링크]

맨해튼 북쪽 끝의 브롱크스 자치구에는 미국 프로야구 전통의 강호 ‘뉴욕 양키스Yankees’의 홈구장인 ‘양키스타디움Yankee Stadium’이 자리 잡고 있다. 2009년 새로 개장한 양키스타디움 1923년부터 뉴욕 양키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이전의 ‘양키스타디움’은 새로 세워진 양키스타디움의 건너편에 있었으나 2008년 9월 22일 시즌 마지막 게임인 뉴욕 양키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게임 후 해체되었다. 2006년 8월 19일부터 이전의 양키스타디움 건너편에서 공사를 시작한 새로운 양키스타디움은 2009년에 완공하여 그해 시즌부터 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또한 이 스타디움은 축구(soccer) 메이저리그 ‘뉴욕시 FC’의 홈구장과 대학 풋볼 경기 및 프로풋볼 ‘프린스트라이프 볼Prinstripe Bowl’ 경기장으로도 활용된다. 해체되는 구 양키스타디움과 건축 중인 새 양키스타디움 건축비는 런던의 국립 축구경기장인 ‘웸블리Wembley 스타디움(2007년 완공)’의

새로운 도시건축 개념을 적용한 록펠러센터 [내부링크]

맨해튼의 걸작 건축물 중의 하나인 록펠러 센터는 록펠러재단이 자금을 제공하여 맨해튼에 지어진, 대공황 시기의 유일한 대규모 상업용 건축물이었다. 건축가 레이몬드 후드의 지휘 아래 건축가들이 팀을 짜서 설계한 ‘도심 속의 도시’로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도시 속의 공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록펠러 센터는 단일 건축물이 아니며, 맨해튼의 중심가인 5번가(5th Ave.)와 7번가(7th Ave.) 및 웨스트 51번가(W. 51st St.)와 웨스트 48번가(W. 48th St.) 사이 약 2만 7천 평의 공간에 밀집된 다양한 높이, 디자인, 용도의 21개 빌딩을 일컫는다. 처음에는 지상 70층, 높이 259m의 GE/RCA 빌딩을 중심으로 1931년부터 1939년에 걸쳐 8년간 그 주위에 아트데코Art Deco 양식으로 13개 동의 고층 빌딩을 세웠다. 13개의 빌딩은 미국 독립 당시의 13개 주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GE/RCA 빌딩 처음에는 한 덩어리의 빌딩으로 짓고자 하였으나,

마천루의 대명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내부링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미드타운 맨해튼의 5번가 30번지에 위치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초고층 빌딩으로서 지금까지도 도시문화와 도시건축의 상징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Empire State’라는 이름은 당시 뉴욕의 별명이었다. 1931년 완공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으며 이 기록은 세계무역센터(417m, 1971년)가 완공되기 전인 1970년까지 40년 동안 이어졌다. 1981년 뉴욕시의 도시 랜드마크로 지정되었고, 1986년에는 〈국가역사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국가역사유적지명부〉에 등재되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1920년대 미국은 건설 붐의 한복판에 있었다. 1885년 시카고에 최초의 마천루가 세워진 이래, 미국 도시의 빌딩들은 점점 더 높아져 가고 있었다. 전 제너럴모터스 임원인 래스콥John Rascob이 뉴욕 주지사 출신인 스미스Alfred Smith와 함께 개발회사를 설립하고 당시 월도프아스토리아Waldorf Astoria 호텔을 헐고

맨해튼 스카이라인의 왕관 크라이슬러 빌딩 [내부링크]

맨해튼 42번가와 렉싱턴 애비뉴의 교차로에 위치한 크라이슬러Chrysler 빌딩은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아름답게 장식하면서 그 우아함을 뽐내며 서 있다. 이 빌딩은 그 우아함뿐만 아니라 1930년부터 1950년까지 크라이슬러 자동차회사의 본사가 위치한 빌딩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자동차회사를 상징하기 위해 첨탑은 자동차의 라디에이터 그릴에서 모티브를 따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들어졌으며, 자동차 디자인과 관련된 장식물이 빌딩 내·외부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하지만 크라이슬러 자동차회사의 불황 등으로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뀐 끝에 2019년 오스트리아의 부동산회사에 매각되었다. 크라이슬러 빌딩 전 뉴욕주 상원의원 출신으로 부동산 개발사업에 뛰어든 윌리엄 레이놀즈가 건축을 추진하다가 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자, 1928년 크라이슬러 자동차회사의 설립자인 월터 크라이슬러가 2백만 달러에 토지임대권과 건물개발권을 레이놀즈로부터 사들여 크라이슬러 빌딩이 탄생하게 되었다. 1930년 5월에 완공된

미국 최대의 조선소가 있는 뉴포트뉴스 [내부링크]

노퍽, 버지니아비치, 요크타운 등과 연한 버지니아주의 도시 뉴포트뉴스Newport News는 제임스강 북쪽에 있는 통관항이며 미국 최대의 조선소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체사피크만 입구에 위치한 뉴포트뉴스와 인근의 포츠머스, 노퍽, 체서피크를 합한 항만지구를 ‘햄프턴 로즈Hampton Roads’라고 부른다. 햄프턴 로즈는 연간 3,000만t 이상의 석탄을 비롯해 철광석과 기타 화물의 집하 및 출하가 이루어지는 수출입항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햄프턴 로즈 항만지구 영국의 식민지 관료였던 대니얼 구킨Daniel Gookin이 1621년 아일랜드로부터 50명의 이주민을 데리고 지금의 뉴포트뉴스 해안에 상륙하여 개발이 시작되었다. 한가한 어촌에 불과하던 이곳은 1880년 이후 체서피크 철도와 오하이오 철도가 연결되면서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하여 1896년에 시가 되었다. 1952년 워릭 카운티에서 독립하였으나 다시 1958년에 워릭 카운티와 합쳐져 뉴포트뉴스가 되었다. *** 체사피크만

남부연맹의 수도였던 리치먼드 [내부링크]

리치먼드Richmond는 앨리게니Allegheny 산맥의 동쪽에 펼쳐진 피드먼트Piedmont 평원과 대서양에 연한 해안 평야의 경계에 자리 잡고 있다. 남북전쟁 기간 중 잠시 남부연맹의 수도가 되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버지니아의 주도州都이다. 리치먼드의 위치 지명은 도시를 관통해 흐르는 제임스강이 영국의 템즈Thames강과 비슷하다고 하여 템즈 강변에 있는 작은 도시인 ‘Richmond Upon Thames’에서 딴 것이며, 지금도 두 도시는 자매도시로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의 리치먼드 1607년 지금의 버지니아비치Virginia Beach의 케이프 헨리Cape Henry에 상륙한 크리스토퍼 뉴포트Christopher Newport 선장의 탐험대가 처음 이 지역을 탐험하였고 1644년에 찰스 요새가 세워졌다. 이후 1645년에 설치된 모피와 담배 교역소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1737년경에 윌리엄 메이오William Mayo 대령이 도시를 건설하였다. 독립전쟁이

남군이 두 차례 승리를 거둔 프레더릭스버그 [내부링크]

워싱턴 D.C.와 리치먼드의 중간 지점, 래퍼해넉Rappahannock 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프레더릭스버그Fredericksburg는 낙농업과 축산업이 발달한 농업지대의 중심에 위치한 인구 3만 명의 작은 독립시이다. 프레더릭스 위치 영국왕 조지 3세의 아버지인 프레더릭 루이스Frederick Louis 대공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은 이 도시는 1671년부터 주민이 정착하기 시작하여, 1727년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었으며 영국과의 교역에 힘입어 교역항으로 발전하였다. 오늘날의 프레더릭스 다운타운 1732년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아버지가 래퍼해넉강 맞은편의 토지를 매입하여 농장을 운영하였다고 하며 조지 워싱턴의 어머니인 메리 워싱턴의 저택과 부모의 묘지도 이 근처에 남아 있다. 조지 워싱턴 생가 국가기념공원도 동쪽으로 61 떨어진 웨스트모얼랜드Westmoreland 카운티에 조성되어 있다. 워싱턴 대통령 생가 또한 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James Monroe

제퍼슨 대통령의 고향 샬러츠빌 [내부링크]

샬러츠빌Charlottesville은 버지니아주 중부, 블루리지 산맥(Blue Ridge Mts.) 기슭에 자리 잡은 인구 5만 명의 조그만 도시로서 지리적으로는 알버말Albemarle 카운티에 속해 있으나 행정적으로는 독립시의 지위를 갖고 있다. 샬러츠빌과 알버말 카운티의 인구를 합치면 약 15만 명에 달한다. 샬러츠빌의 위치 샬러츠빌은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의 고향이자 그가 설립한 명문 버지니아 주립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토머스 제퍼슨이 직접 설계한 그의 농장저택인 ‘몬티첼로Monticello’는 ‘팔라디오 양식’을 기초로 설계한 신고전주의 건축물로서 19세기 초반의 미국 건축물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꼽힌다. 몬티첼로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산’이라는 뜻이다. 팔라디오 양식은 이탈리아의 건축가 팔라디오Andrea Palladio(1508~1580)가 고대 건축을 연구하여 발전시킨 고전주의 건축 양식이다. 몬티첼로 몬티첼로는 정치인 이전에 건축가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았

불런 전투의 격전지 매너서스 [내부링크]

매너서스Manassas는 철로 교차점에 형성된 버지니아주의 독립시로서 인구 4만 2천 명을 상회하는 조그만 도시이다. 지리적으로는 프린스 윌리엄Prince William 카운티에 포함되며 매너서스파크Manassas Park 독립시와 경계를 이룬다. 매너서스의 위치 남북전쟁의 주요한 전투였던, 1861년 7월 21일 하루 동안에 벌어진 〈1차 불런Bull Run 전투〉와 1862년 8월 28~8월 30일의 〈2차 불런 전투〉가 일어난 곳이다. 이들 전투 장소 등 사적지 몇 곳이 〈국가사적지 명부(National Register of Historic Places)〉에 등록되었으며 〈국가전투사적지공원(National Battlefield Park)〉으로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매너서스 국가전투사적지공원 (일부) 매너서스에서 1861년 7월 21일 벌어진 〈1차 불런 전투〉는 남북전쟁의 첫 번째 큰 지상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병사들의 전투경험 부족과 군기이완 그리고 상대에 대한

독립전쟁 당시 대륙군의 주둔지 밸리 포지 [내부링크]

밸리 포지Valley Forge는 영국에 대한 아메리카 식민지 정착민의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77년에서 1778년 사이, 식민지인들의 군대인 대륙군의 세 번째 겨울 주둔지였다. 밸리 포지의 위치 펜실베이니아주의 주도 필라델피아에서 북서쪽으로 약 40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 주둔지 터는 1893년에 펜실베이니아 주립공원이 되었고, 미국 건국 200주년 기념일인 1976년 7월 4일에는 〈밸리 포지 국가역사공원(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지정되었다. 공원의 넓이는 3,500에이커(약 430만 평)로서 매년 120만 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밸리 포지 국가역사공원 입구 현재 공원에는 전쟁 당시의 숙영 시설인 병사들의 통나무집, 지휘부 건물, 방어 목책과 야포, 대륙군 병사의 출신 주에서 세운 기념비 등이 복원되었거나 보존되고 있으며 밸리 포지를 소개하는 영상과 전시물을 보여주는 방문객 센터가 방문객을 맞고 있다. 전시 중인 야포대 *** 1775년 4월,

미국 독립전쟁의 상징 필라델피아 인디펜던스홀 [내부링크]

미국 독립혁명의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지는 필라델피아의 ‘인디펜던스홀Independence Hall’은 식민지 시대인 1753년에 완공되어 펜실베이니아 식민지의 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18세기 중엽 유럽에서 유행한 조지안 건축양식을 따른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이다. 인디펜던스홀 완공된 지 20년 후, 필라델피아가 미국 독립혁명의 중심지가 됨에 따라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특히 이곳은 13개 식민지의 대표들이 모여 독립을 논의하던 제2차 대륙회의(1775-1781)가 열린 장소였으며, 1776년 7월 4일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미합중국의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역사적인 장소였다. 독립선언서 초안을 논의하는 제퍼슨 1788년 6월 21일에는 이곳에서 신생국 미합중국의 연방헌법이 비준되었으며, 이후 미합중국의 수도를 임시 수도였던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옮기는 1800년까지 인디펜던스 홀은 연방정부의 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1789년부

세계의 경제·금융·문화 수도 맨해튼 [내부링크]

뉴욕시의 탄생지인 맨해튼Manhattan은 뉴욕시의 5개 자치구 가운데 가장 작으나 시의 중심부에 위치하며 허드슨강과 이스트강에 둘러싸인 맨해튼섬과 다른 5개의 작은 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뉴욕시의 5개 자치구(district)는 맨해튼, 브롱크스Bronx, 브루클린Brooklyn, 퀸스Queens, 스태튼아일랜드Staten Island이다. 맨해튼은 2020년 통계로 170만 명 이상의 인구가 59의 땅 안에 살아, 1당 인구가 28,800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동시에 맨해튼은 1인당 소득이 미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으로 다른 뉴욕의 자치구를 압도하는 수준이다. 남쪽에서 바라본 맨해튼 시가지는 동서남북으로 뻗은 격자형 도로로 구획되고 있으며, 브로드웨이가 대각선 도로를 이루면서 세로축 도로인 5번 애브뉴5th Avenue가 시가지를 동서로 양분하고 있다. 편의상 가로축 도로인 72번가와 14번가를 경계로 북쪽에서부터 ‘어퍼Upper 맨해튼’, ‘미드타운

세계금융시장의 중심가 월스트리트 [내부링크]

맨해튼의 남쪽 구역인 ‘로어 맨해튼Lower Manhattan’에는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가인 월스트리트Wall Street가 자리하고 있다. 이 거리에는 1792년에 창립된 세계 제일의 규모를 자랑하는 뉴욕증권거래소를 비롯하여 대증권회사와 대은행이 집중되어 있어, 세계 자본주의 경제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다. 월스트리트, 오른쪽 건물이 뉴욕증권거래소 월스트리트라는 이름은 17세기 네덜란드인들이 자신들의 교역소와 정착지가 있던 ‘뉴암스테르담New Amsterdam’의 북쪽 거리에 목책과 방벽(wall)을 쌓았다는 데에서 기원한다. 1624년부터 네덜란드인들이 맨해튼에 정착해 살기 시작하면서 이들은 원주민들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나무 말뚝과 사각의 나무판자 울타리로 자신들이 사는 마을과 토지를 둘러쌌다. 그 후 울타리는 이곳을 노리는 여러 원주민 부족들과 뉴잉글랜드New England에 정착한 영국인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세월을 거치며 더욱 튼튼해졌다. 월스트리트 지하철역 타일벽에 묘사

워싱턴 대통령의 취임식이 열린 페더럴홀 [내부링크]

세계 금융시장의 중심가인 월스트리트 26번지에는 ‘페더럴홀Federal Hall’이라는 역사적 건물이 뉴욕증권거래소의 맞은편에 서 있으며, 〈페너럴홀 국가기념물(National Memorial)〉로서 국립공원관리국에서 관리하고 있다. 지금의 건물은 재건축된 것이며 원래의 건물은 1699년부터 건축되어 1703년에 뉴욕시의 청사가 되었다. 영국의 인지세 부과에 항의하여 1차 대륙회의가 1765년에 이곳에서 열리기도 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화가 Archibald Robertson이 묘사한 1798년경의 월스트리트 : 페더럴홀과 트리니티 교회가 보인다 독립을 쟁취한 후 뉴욕이 미합중국의 수도 역할을 함에 따라 1785년부터 1789년까지 이 원래의 건물은 연방의회의 의사당 건물로 쓰였다. 그리고 1789년에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취임식과 첫 번째 미합중국의 의회가 이곳에서 열림에 따라 이때부터 ‘페더럴홀’로 불리게 되었다. 연방의회 건물로 쓰이던 당시의 페더럴홀(모형) 이런 뜻깊은

올드타운 알렉산드리아 [내부링크]

워싱턴 D.C.에 인접한 버지니아주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시)는 독립시(Independent City)로서, 독립시란 카운티County에 속하지 않는 주정부 직할의 시를 의미한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시)는 버지니아주에 직접 속한다. 알렉산드리아 버지니아주의 공식 명칭은 〈The Commonwealth of Virginia〉로서 주州를 의미하는 용어인 ‘state’를 쓰지 않고 영국식으로 ‘commonwealth’를 쓴다. ‘state’ 대신 ‘commonwealth’를 쓰는 주는 버지니아, 켄터키, 매사추세츠, 펜실베니아의 4개 주이다. ‘버지니아’라는 이름은 "처녀 여왕"이라고 불린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를 따라 붙여졌다. 버지니아 주기 현재의 알렉산드리아 지역은 인근의 아이젠하워 계곡에서 선사시대 원주민들의 유적이 발굴되고 있어 오래전부터 인류의 거주지였음이 확인되었다. 기록에 남은 최초의 유럽계 정착민은 영국인 정착민 존 스미스로서 그는 1608년 여러 부족의 인디언들이 거

워싱턴 대통령의 농장저택 마운트버넌 [내부링크]

〈마운트버넌Mount Vernon〉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농장저택(mansion)과 그 부속 농장으로서 워싱턴 D.C.와 알렉산드리아시의 남쪽에 포토맥강 서안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마운트버넌 개관 조지 워싱턴의 아버지가 1741년부터 1742년까지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건축 스타일로 이 저택을 지었으며, 1731년 2월 11일 이곳에서 약 90 남쪽의 포프스크릭Popes Creek에서 태어난 워싱턴은 23살 때인 1754년부터 이 저택에서 살았다. 포프스크릭의 워싱턴 생가 이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서 독립전쟁을 지휘하던 시기와 8년간의 대통령직을 수행하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이곳에 살았으며, 대통령직을 마친 1797년 3월부터 사망하는 1799년 12월까지 마지막으로 이곳에 살다가 이 농장저택에 묻혔다. 마운트버넌 내에 마련된 워싱턴 대통령 부부 묘지 조지 워싱턴의 큰형인 로렌스 워싱턴이 자신이 영국군에 근무하고 있을 때의 지휘관이던 해군제독 에

명문 조지타운 대학교로 유명한 조지타운 [내부링크]

조지타운Georgetown은 지금의 워싱턴 D.C. 북서쪽으로, 식민지 시절 포토맥Potomac 강변에 생겨난 항구를 중심지로 형성된 시가지였다. 1751년부터 매릴랜드주의 일부로서 독립적인 행정구역의 지위를 유지했으나, 1871년 매릴랜드주와 버지니아주에서 땅을 떼어 수도 워싱턴이 정해진 뒤에는 워싱턴 D.C.의 한 구역(district)이 되었다. 워싱턴 D.C.의 옛 지도, 좌측 상단 붉게 칠해진 부분이 조지타운이다 1895년에는 기존 조지타운의 조례를 폐지하고 워싱턴 D.C.의 조례에 일치하도록 조지타운의 거리 이름을 워싱턴 D.C.의 도로명의 순서에 연결하여 바꾸었다. 즉 가로 도로는 알파벳 순으로, 세로 도로는 숫자로, 대각선 도로에는 50개 주의 이름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조지타운에서 바라본 워싱턴 D.C. 조지타운 비즈니스의 중심가는 위스컨신 애브뉴Avenue와 M 스트리트가 교차하는 지역으로서 고급 상점, 바, 레스토랑, 쇼핑몰 등이 밀집해 있다. 특히 유명한 곳은

남북전쟁 최대의 결전장 게티즈버그 [내부링크]

1863년 7월 1일부터 1863년 7월 3일까지 펜실베니아주 게티즈버그Gettysburg 인근에서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북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였으며, 남북전쟁의 전환점으로 평가되는 결정적인 전투였다. 전투의 결과 북군은 전투에 투입된 10만 4천 명의 병력 중에서 2만 3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 남군은 7만 5천 명 중에서 2만 3천∼2만 8천 명 이상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했으며 나머지 병사들은 겨우 몸만 살아 철수했다. 게티즈버그 전투 남군의 리Robert Lee 장군은 패전 책임이 그의 부하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부연맹의 데이비스 대통령에게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괴멸적인 패배를 당한 남군의 주력 북버지니아군은 전세가 급격히 약화되어 이후의 전투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래서 이 전투 이후 남북전쟁의 전세는 급격하게 북군 쪽으로 기울게 된다. *** 〈게티즈버그 국립묘지(The Gettysburg National Cem

현대문명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랭커스터의 아미시 [내부링크]

개신교 ‘아미시Amish파’의 교인(‘아미시’)이 집단으로 거주하고 있는 랭커스터Lancaster 카운티는 펜실베이니아주에 속하며, 약 55만 명의 카운티 인구 중에서 8만 명 정도가 아미시 교인으로 추정된다. 랭커스터 카운티 다운타운 아미시파는 개신교 ‘재세례파再洗禮派(Anabaptist)’ 계통의 최대 교파인 ‘메노나이트Mennonite’의 일파로서, 창시자는 스위스의 종교개혁가 야곱 암만Jacob Ammann으로 알려져 있다. 랭커스터의 아미시는 주로 17세기 이후 이들에게 가해진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계 아미시였다. 재세례파는 종교개혁 당시 스위스에서 일어났다. 이들은 유아세례를 부정하고 스스로 영적으로 중생重生(거듭 남)을 체험한 자들에게만 세례를 베풀었으며 이들로 구성된 공동체(교회를 이렇게 불렀다)만이 참된 교회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하며, 거듭난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

미국 해군장교의 요람 아나폴리스 [내부링크]

아나폴리스Annapolis는 메릴랜드주의 주도州都로서 체서피크만(Chesapeake Bay)과 세번Severn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된 유서 깊은 항구도시이며 워싱턴 동쪽으로 50, 볼티모어 남동쪽으로 43 떨어져 있다. 아나폴리스의 위치 식민지 시대부터 농산물과 해산물의 교역 중심지로서 발전했으며 해산물 가공, 소형선박 조선 등이 주요 산업이나 이곳에 위치한 해군사관학교(U.S. Naval Academy)와 주정부가 도시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버지니아에 정착한 청교도들이 1649년부터 ‘프로비던스(Providence)’라는 이름으로 도시를 개척하기 시작했고, 이후 ‘세번Severn 타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1694년에 ‘앤Anne 공주의 도시’라는 뜻으로 아나폴리스로 개명하였으며, 1796년에 시(city)가 되었다. 도시 이름 개명 당시에 앤 공주는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공주였으며 후에 영국의 여왕(1702-1707)이 되었다. 메릴랜드 주청사에서 내려다 본

최초의 영국인 정착민이 상륙한 버지니아비치 [내부링크]

버지니아주 남동쪽 해안에 위치하는 버지니아비치Virginia Beach는 주정부에 직접 속하는 독립시로서 약 46만 명의 인구를 가진, 버지니아주 최대, 미국 전체에서 4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이다. 인접한 노퍽Norfolk, 뉴포트뉴스Newport News와 함께 인구 100만 명의 대도시권을 이룬다. 체사피크Chesapeake만 어귀의 대서양을 바라보는 해안에 위치한 버지니아비치 일대는 ‘미국의 첫 번째 행정구역(America's First Region)’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데, 별명 그대로 영국인이 처음으로 정착하여 행정체계를 갖추고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한 곳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다. 인근의 주요 도시인 체사피크, 햄톤Hampton, 뉴포트뉴스Newport News, 노퍽Norfolk, 포츠머스Portsmouth, 서퍽Suffolk 등은 모두 독립시로서 영국의 식민지 개척 역사와 관련이 있다. 버지니아비치와 주변 도시 버지니아비치는 휴양도시로도 유명하여 좋은 긴 백사

영국인 최초의 정착지 제임스타운과 윌리엄스버그 [내부링크]

영국인 정착민이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584년과 1587년 월터 롤리Walter Rowley경卿이 이끄는 원정대가 오늘날의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주 인근의 로아노크Roanoke섬에 상륙한 것이었다. 그는 여자 17명을 포함한 150명의 원정대원을 그곳에 남겨 식민지를 개척하도록 했지만, 4년 뒤 그가 다시 그곳을 방문했을 때는 사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식량이 부족했던 원정대가 굶주림으로 모두 사망한 것이었다. 20년 뒤인 1606년 크리스마스 무렵에 104명의 영국인들이 〈수잔 콘스탄트Susan Constant 호〉를 포함한 세 척의 배를 타고 런던을 출발했다. 이 배는 대서양을 건너 144일간의 항해 끝에 오늘날의 버지니아Virginia주 리치몬드Richmond 동쪽의 반도 끝(현재의 버지니아비치 케이프 헨리)에 도착했다. 복원되어 제임스타운에 전시중인 수잔 콘스탄트호 그들은 스페인 함대의 기습을 예방하기 위해 강(‘제임스강’)을 따

독립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요크타운 [내부링크]

요크타운Yorktown은 ‘버지니아 식민지 역사유적의 삼각지(Historic Triangle)’를 구성하는 세 곳 중의 하나이며, 나머지는 영국인이 최초로 정착한 제임스타운과 윌리엄스버그를 일컫는다. 버지니아주의 남동부, 뉴포트뉴스의 북쪽에 요크York강을 연하고 있으며 요크 카운티York County에 속한다. 북부 잉글랜드의 도시 ‘요크York’를 따서 명명된 요크타운은 1691년 버지니아의 담배 플랜테이션에서 수확한 담배를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항구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격전지가 되었다. 독립전쟁에서는 영국군이 마지막으로 항복한 요새였으며 남북전쟁에서는 북군의 포토맥군이 남군을 상대로 포위전을 벌인 곳이기도 했다. 요크타운의 위치 오늘날의 요크타운은 〈식민지(Colonial) 국가역사공원〉에 포함되는 유적지로서 당시의 역사적 건축물과 격전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나 상주하는 인구는 200명 정도로 많지 않다. 하지만 요크타운을 포함하는 요크 카운티는 16

세계 최대의 군항 노퍽 [내부링크]

버지니아비치의 서쪽, 체서피크만의 입구에 있는 노퍽(Norfolk)은 버지니아의 독립시로서, 1688년에 처음으로 마을이 형성되었으며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776년 영국군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1845년에 재건하였다. 주변의 다른 도시처럼 노퍽도 독립전쟁 당시에는 영국군과의 격전지였으며 남북전쟁 때는 남군의 중요한 군사기지였으나, 북군의 손으로 넘어간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남북전쟁 이후 완만하게 발전하던 도시는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거치면서 해군의 거대한 기지가 들어서자 급속히 시가지가 확대되어 인구 20만의 도시가 되었다. 인근의 조선 도시인 뉴포트뉴스Newport News와 항구 도시인 포츠머스Portsmouth와 더불어 1926년 이래 〈햄프턴 로즈(Port of Hampton Roads)〉라고 부르는 광역항만을 이룬다. 양대 대전에서 연합국에 대한 미국의 무기와 군수품 지원이 노퍽항을 중심으로 한 ‘햄프턴 로즈’에서 이루어졌다. 햄프턴 로즈의 세 항구 : 뉴포트뉴스, 포츠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화해한 욤 키푸르 전쟁 [내부링크]

1970년 나세르가 사망하자 이집트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다트Anwar Sadat는 온건주의자로서 중동의 평화 정착을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했다. 그러나 대이스라엘 관계에 있어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차에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지 않는 것을 명분으로 전쟁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이집트는 3년 전의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에게 당한 굴욕을 복수하기 위해 이스라엘군과의 전쟁에서 드러난 군의 약점을 보완하고 대대적으로 군을 개혁하고 있었다. 특히 사회계층에 따라 장교와 사병을 구분해서 충원하던 종전의 방식을 버림으로써 군 구성원 간의 위화감을 제거하는 데도 노력했다. 6일 전쟁의 교훈을 살려 수도 카이로 가까이에 방공미사일 체제를 대폭 강화하고 전차전에 대비하여 전차뿐만 아니라 대전차화기를 보강했다. 수에즈운하를 쉽게 도하 할 수 있도록 신형 부교와 장비를 갖추고 도하 훈련, 요새파괴 훈련 등을 반복했다. 한편 6일 전쟁 후인 1968년, 이스라엘군 참모총장

소련의 베트남전쟁이 된 아프가니스탄 전쟁 [내부링크]

아프가니스탄은 역사적으로 중동과 아시아 여러 지역의 문화가 만나는 곳이었으며 여러 세기를 거쳐 다양한 민족들이 이곳을 거쳐 가거나 또는 고향이 되었다. 독특한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페르샤, 마케도니아, 몽골, 오스만터어키, 영국, 소련,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미국이 이곳의 수렁에 빠지기도 했다. 19세기 말, 영국령 인도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이라고 불린 전략적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아프가니스탄은 그 전략적 위치 때문에 두 제국의 완충국 역할을 하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외교정책까지 통제할 정도가 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의 위치 이렇게 영국의 반식민지가 된 아프가니스탄의 저항으로 양국이 맞붙은 〈제3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양국 간에 1919년 〈라발핀디 조약〉이 체결되자 ‘아마눌라 칸’ 국왕은 아프가니스탄을 주권국이자 완전한 독립국으로 선포했다. 아마눌라 칸은 여러 근대화 개

영국의 자존심을 지킨 포클랜드 전쟁 [내부링크]

〈포클랜드 전쟁(Falklands War)〉은 1982년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자국에서 가까운 포클랜드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섬을 침공함으로써 영국과 벌인 전쟁이었다. 전쟁은 75일 만에 아르헨티나군의 항복으로 종료되었나, 이로 인해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정권은 실각하게 되었으며 전쟁을 지도한 영국의 대처 총리의 지지율은 사상 최고로 치솟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포클랜드제도를 말비나스Malvinas제도로, 이 전쟁을 〈말비나스 전쟁〉이라고 부른다. 1690년 영국인이 처음으로 이 섬에 상륙한 기록이 있으며, 1764년부터 프랑스인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다가 1766년에 이 섬의 권리를 스페인에게 팔았다. 1766년에 영국인들이 이 사실을 모르는 채 정착촌을 세우자, 프랑스인에게 이 섬의 권리를 매입한 스페인과 영국이 1771년 전쟁을 벌일 뻔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영국은 1774년, 스페인은 1811년에 각각 경제적인 이유로 이 섬에서 철수했다. 포클랜드제도의 위치 이후 이 섬

승자 없는 이란·이라크 전쟁 [내부링크]

20세기의 마지막에 10년 가까이 끈 〈이란·이라크 전쟁〉은 두 나라가 지역의 패권을 놓고 싸운 각축전이었다. 두 나라는 모두 이슬람 국가였으나 이란은 페르시아 문화권을, 이라크는 아랍 문화권을 대표하는 국가이자 종교적으로 다른 입장이었다. 이란은 국민의 80% 이상이 시아파였으며 나머지는 수니파였다. 이라크는 전통적으로 소수파인 수니파가 상대적으로 다수파인 시아파를 지배함으로써 양국은 과거부터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여 강경 급진 시아파가 집권하자 양국 관계는 악화 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1979년 이란의 이슬람 혁명 또한 양국은 이슬람 파벌의 주도권 문제뿐만 아니라, 각각 자신들만이 이슬람 정통의 계승자 겸 페르시아의 상속자임을 자처하면서, 호르무즈 해협의 3개 섬과 ‘샤트 알 아랍’ 수로를 둘러싸고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었다. ***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호메이니가 영도하는 이란의 시아파 정부는 이라크가 이란 후제

싸우기 전에 이겨놓고 싸운 사막의 폭풍 작전 [내부링크]

1990년 8월 2일, 사담 후세인의 통치 아래 팽창 정책을 시도하던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이라크군의 쿠웨이트 점령은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으며 유엔 안보리는 즉각적으로 이라크에 대한 제재안을 발동했다.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는 즉각 미군을 사우디아라비아에 파견, 배치하고 다른 국가들에게도 병력을 보내 이라크 응징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 전차부대 이에 미국, 영국, 사우디아라비아, 그리고 이집트의 주도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연합군이 탄생했다. 페르시아만 일대에서 벌어졌다고 해서 걸프전쟁이라고 불린 이 전쟁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연합군의 군사비용 600억 달러 중 360억 달러를 부담하였다. 다국적군에 참여한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등의 중동 국가 부대 미군을 주축으로 편성된 연합군의 전쟁개념은 신속한 군사작전으로 승리를 거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말만 연합군이었지만 동맹군도 아니었으며 사령부도 없었다. 다만 실질적으로 미군이 주축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중월 전쟁 [내부링크]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정부를 누구도 예상 못 한 빠른 속도로 유린, 함락시킴으로써 베트남 민족은 30년간의 항쟁을 끝내고 감격적인 통일을 성취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공산화 통일이었다. 한편, 베트남의 이웃 나라 캄보디아에서는 1975년 4월, 론 놀이 이끌던 친미 군사정권이 전복되었으며, 1976년 1월 친중국계인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탈취함으로써 「민주 캄보디아(캄푸치아)」의 수립이 선언되었다. 크메르루주의 프놈펜 시가행진 북베트남은 베트남전쟁 중에 중국 공산당 정부로부터 많은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국의 역대 왕조로부터 여러 차례 침략을 당해 조공국 지위를 유지하던 베트남의 대중국 감정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베트남을 통일한 공산정권이 남쪽의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를 탄압하자 양국관계는 험악하게 발전하였다. 캄보디아 역시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대립적이며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다. 특히 베트남의 남부 삼각주 지역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 아피아가도 [내부링크]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기원전부터 건설이 시작된 아피아 가도와 그 이후 장기계획하에 로마 영토의 경계선까지 촘촘히 건설된 로마 가도를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 에트루리아인들이 지배했던 초기의 로마 시대에 지어진 몇몇 도로들은 로마와 에트루리아를 이어주는 데 그쳤기 때문에, 로마는 기원전의 공화정 시기부터 새로운 도로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아피아 가도 유적 전투 후 군대를 재정비하고 다시 전투에 투입될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수의 병사들을 수용할 수 있는 기지가 필요했으며 이 기지는 원활한 물자 보급을 할 수 있는 도로를 필요로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원전 4세기 중반부터 군수물자 보급과 병력수송을 위한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아피아Appia 가도街道’였다. 아피아 가도는 공화정 시대에 로마 공화국의 영역을 벗어나서 건설된 최초의 도로라고 할 수 있다. *** 길이 563, 폭 8m에 달하는 아피아 가도(Via Appia)

세계의 제8의 대기적 : 진시황의 병마용 [내부링크]

시황제는 13세에 즉위하면서부터 여산驪山 기슭에 자신의 능묘陵墓를 만들기 시작하여 50세에 이르러서야 겨우 완성하였다. 36년의 오랜 세월에 걸친 이 대공사는 서안시 임동臨潼 동쪽으로 5~6 되는 지역에서 이루어졌는데 여산릉이라고도 하고 시황릉이라고도 부른다. 1974년 봄 여산릉 동북쪽 약 1.5 되는 서양촌西陽村이란 마을에서 우물 파는 공사를 하던 농부가 고대의 도용陶俑 파편을 다량으로 발견하였다. 그 후 발굴 결과 2천여 년간 땅속에 묻혀 있던 시황제의 근위병 도용갱에서 완전무장한 병사 및 전차와 이를 끄는 군마 등 약 6천여 점에 달하는 도용이 발견되었다. 1호 갱은 1974년에 발굴되었는데 모두 14,260의 넓이이며, 진용秦俑(진나라무사의 모습을 한 병용) 약 6,000구에 전차 40대가 발굴되었다. 2호 갱에서는 기병과 근위대의 병용兵俑 약 1,300구가 발굴되었다. 가장 작은 3호 갱은 1976년에 발굴되었는데 520의 넓이로서 지휘관의 것으로 보이는 채색된 전차 1량

북베트남(월맹)의 구정 공세 [내부링크]

1953년, 오랜 기간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던 단맛을 잊지 못하고 다시 베트남에 진주한 프랑스군에게 총반격을 개시한 베트민(월맹)군은 1954년의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거의 궤멸시켰고, 그해 제네바에서 평화협정이 맺어지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프랑스는 군대만 철수시킨 채 〈제네바 평화협정〉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트남 전국에서 실시하기로 했던 총선거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미국이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군 지상군 투입 한편 1955년의 부정선거로 세워진 남베트남 정부는 친미를 지향하면서 노골적인 부정부패와 불교 탄압을 자행함으로써 국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자 북베트남(월맹)의 사주를 받은 남베트남의 공산주의 혁명 세력이 남베트남 정부에 분노한 국민들을 규합하여 전면적인 무장투쟁에 나서게 된다. 공산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결합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

베트남 패망 : 사이공 탈출의 날 [내부링크]

닉슨 행정부의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에 따라 베트남 주둔 미군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1971년 3월 5일 미군의 전투부대 중에서 가장 먼저 베트남전쟁에 투입되었던 ‘그린 베레’ 제5특수전단(the 5th Special Forces Group)이 가장 먼저 자신들의 본부였던 노스캐롤라이나주의 포트 브래그Fort Bragg로 철수하였다.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정책은 남베트남군에게 전투임무를 맡기는 한편, 미군은 전투병력의 수를 꾸준히 감소시켜 궁극적으로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종결시키려는 닉슨 행정부의 정책이었다. 철수하는 미군 (사이공 떤선녓 공항) 1973년 1월 27일, 북베트남의 외무장관 레득토와 미국의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사이에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자, 남베트남의 대통령 응옌반티에우(‘티에우’)는 마지못해 협정에 서명하였으며 이어서 1월 29일,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전쟁의 종전을 선언하였다.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키신저와 레특토 닉슨 대통령은 1973년 3월

역사산책을 떠나기에 앞서 [내부링크]

우리들은 여러 기회를 통해 「역사와 접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특정한 시대, 특정한 나라의 역사일 수도 있으며 특정한 인물의 역사일 수도 있다. 역사와 접할 수 있는 방법도 다양하다. 역사책이나 역사소설 또는 영화와 드라마는 역사와 접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흔한 방법이다. 또 자기가 살고있는 곳은 물론 새로운 곳 또는 어느 유적지나 관광지를 가더라도 그곳이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다. 우리는 ‘실화에 근거한 영화’를 더욱 재미있게 보는 것처럼 우리와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일어난 사실에 이처럼 호기심을 갖는다. 어떤 방법으로 역사를 접하든지 역사는 인간만이 가진 본능인 호기심을 채워줄 수 있으며 아울러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는 공통점이 있다. 호기심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역사를 대하는 이유의 다음 단계는 무엇일까. 물론 사마천의 말처럼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노력한다면 좋을 것이나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사를 읽다 보면 굳이 교훈을

이스라엘의 전격전 : 6일 전쟁 [내부링크]

1967년의 〈6일 전쟁〉 또는 〈제3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이 이웃 국가인 ‘아랍연합공화국(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의 ‘아랍 연합군’을 상대로 싸운 전쟁이었다. 이 중 아랍연합공화국은 1958년 2월 이집트와 시리아가 통합하여 수립한 국가연합체였으나, 1961년 9월 시리아가 탈퇴하여 이집트 한 나라만 남았다가 1971년 9월에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이 국호를 ‘이집트아랍공화국’으로 바꾸면서 자동으로 해체되었다. 따라서 6일 전쟁이 발발할 당시의 ‘아랍연합공화국’은 곧 이집트였다. 이스라엘군 병사들 이스라엘과 주변 아랍국가 사이의 관계는 1, 2차 중동전쟁 이후에도 항상 불안 불안했다. 이스라엘은 〈독립전쟁(1948-1949)〉과 〈수에즈전쟁(1956)〉으로 불리는 1, 2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평화를 보장받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랍국가들은 자기 땅에 들어선 이스라엘의 존재를 결코 인정하지 않았으며, 언젠가는 1, 2차 중동전쟁에서 당한 군사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