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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라면이 발단이 되어 발생한 사고 [내부링크]

젊어 한 때 군에서 각급 지휘관 경험을 해 보았던 Y는 나이가 든 요즈음도 가끔 야식으로 컵라면을 먹는다. 그런데 그 컵라면을 먹을 때마다 그것과 관련된 사고 하나가 생각나곤 한다. '89년 11월 중순경이었다. 서울을 방호하는 수도 방위사령부 예하 0000부대 0대대 0중대 내무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2100시 점호를 마친 후 내무반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음 야간 근무를 나갈 근무자들은 복장을 착용하고 나머지 병사들은 취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평균적으로 체구가 다른 부대원들보다 더 키가 큰 병사가 많아 내무반은 비좁은 느낌까지 드는 듯 했다. 당시 병사들에게는 야식으로 컵라면이 보급되어 야간 근무를 나가기 전이나 후에 내무반에서 물을 끓여서 손쉽게 먹을 수 있도록 비치되어 있었다. 그날 야간 근무자들은 병장들이 많았다. 병장도 진급 시기에 따라 서열이 정해져 있다. 갓 병장을 단 병사는 진급한지 오래된 병장에 대해서 항상 예를 갖추어야 했다. 그런데 그날 밤 후임 병장

신혼 방에서 연탄개스에 중독되다. [내부링크]

'76년 2월중순 경이었다. 강원도 인제의 화장실 밑에서 돼지가 꿀꿀대던 집을 벗어나서 새롭게 얻은 신혼 방은 한평 남짓한 작은 방이었다. 연탄 아궁이가 방문 앞 마루 밑에 있던 시골의 옛날식 개량 한옥 형태에서 볼 수 있는 그런 방이었다. 그러나 일 주일에 한 번씩 서울에서 내려오는 아내와 지내기에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그 공간은 절대적으로 너무 협소해서 남들이 보면 어떻게 그렇게 좁은 방에서 신혼부부가 살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할 만한 방이기도 했다. 그러나 물건이라야 반상기 한 세트에 비닐 옷장 작은 것 하나가 다였기에 문제는 없었다. 그냥 둘이서 함께 있을 수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런데 어느날 장인어른과 장모님이 찾아 오셨다가 그 방을 보시고 않되겠다고 하시면서 다른 방을 구해보고 없으면 방을 새로 만들어서라도 옮겼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장인 어른께서 그 비용을 미리 지불해주시고 가신 덕에 우리 내외는 한달 가까이 걸린 공사 끝에 인제 읍 큰 골목 길 가의 상점터를

등산하던 군무원과 반려견의 울부짖음 [내부링크]

'91 년 5월 초순의 일요일 오전이었다. 서울의 도봉산 등산로에는 많은 향춘객들과 등산객들이 몰려 들고 있었다. 자신들의 체력 증진과 건강관리를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화창한 봄날에 산행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국방부 예하 0000부대에 근무하던 K군무원은 평소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며 생활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다. 체력과 건강 증진에는 등산이 최고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 있었지만 실천을 못하고 있던 중 큰 맘을 먹고 일요일부터 등산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평소 심장이 좋지 않아 과격한 운동은 삼가하고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건강과 체력관리에 신경을 써오고 있던 K군무원이었다. 또한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정년 퇴직을 앞두고 있어서 심사가 여러가지 생각으로 인해 복잡한 상태였다. 그 날 K 군무원은 집에서 기르고 있던 귀엽게 생긴 반려견인 츠피츠 한마리를 데리고 천천히 산책하듯이 등산로를 따라 올라 가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경사가 급하지 않은 산길이었

'하나회 명단'이 폭로되던 날의 풍경 [내부링크]

'93년 4월 2일 아침 서울 동빙고동에 있는 군인아파트에 살고 있던 Y의 예하 중대장 K대위가 군 내 비밀 사조직인 '하나회 명단'이 적힌 A4용지 한장을 들고 와 보고를 했다. 그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우체통에 그 명단이 꽂혀 있더라는 것이었다. 그 것은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중장 계급이었던 육사 20기 부터 중령급이었던 육사 36기까지 140여명의 하나회 회원들의 이름들이 기수별로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명단은 사실여부가 아직 확인이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 명단의 살포행위는 목적이 아무리 선한 의도였다 할지라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그 명단은 즉각 국방부 장관실 보좌관을 통해 K국방부장관에게 보고 되었다. 이미 그 명단은 그 아파트에 살고 있던 수많은 장교들에게 전파되었고 많은 장교들이 그 명단을 살펴보고 울분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말로만 들었던 '하나회'의 실체가 들어났기 때문이었다. 국방장관실 의전실에서 근무하고 있던 J

12.12에 생긴 일 [내부링크]

'79년 12월 12일은 Y에게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날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 날은 그가 위관 장교면 반드시 받아야 하는 필수 보수과정인 고등 군사반 교육을 마치고 일선 부대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들을 만나보러 갔다가 친하게 지냈던 부하 간부 한명이 10.26 사건 이후 발령되었던 계엄령 하에서 강화된 지역순찰 임무를 심야에 수행하던 중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사망한 사실을 들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전방에서 서울로 돌아오던 도중에 버스 안에서 흘러나오는 긴급 뉴스를 듣고 또 한번 더 놀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시 육군 참모총장 경호대장의 임무를 띄고 임무 수행 중이었던 동기생 K대위가 당시 J육참총장을 체포하러온 12.12 주체 중 한 그룹인 합동수사본부 요원들이 쏜 총을 맞고 국군 통합병원에 후송되었다는 뉴스 보도였다. 그 이틑날 오전 Y는 국군 통합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국군 통합병원에는 육참총장 경호대장 K 대위 말고도 참모 총장 수행부관 P소령도 옆 침상에

중국 시안(西安) 의 설중홍매 그림 [내부링크]

'97년 9월 두번 째 주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학생의 일원으로 북경에서의 군 부대 시찰과 문화탐방을 마치고 시안(西安)으로 출발 했다. 시안의 시내는 온통 매연과 냄새등 공해가 큰 문제처럼 느껴졌다. 중국 인민군사령부가 운영한다는 5성급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중국의 군부대에서는 우리와 달리 군에서 경제적 자급자족을 할 수 있도록 합법적인 경제활동이 보장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하 부대에서도 영내에서 다양한 농축 산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자기 부대에서 필요한 식량과 육류와 채소등을 가능한만큼 자신들이 기르고 가꾸어 먹는다고 하였다. 군 부대에서 실제 영농실태나 축산활동 장면을 살펴보니 말처럼 큰 성과는없어 보였다. 주간에 계획된 시찰 지역과 진시황제의 사후까지 지키도록 만들어졌다는 토용군단을 포함한 문화탐방까지 마치고 돌아와 석식을 한 후 자유시간을 가졌다. 호텔 문을 나서서 몇발자국을 걸으니 도저히 숨을 쉬지 못 할 정도로 공기가 안좋아서 더 이상 걸을 것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호텔

북경지역 군부대 시찰 기간 중 보고 들은 것 [내부링크]

'97년 9월이었다. 나는 일선 근무에서 떠나 국방대학원 안보과정 학생으로서 교육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머리 아픈 당면업무를 떠나서 국방과 관련한 다양하고 폭 넓은 지식과 견문을 쌓을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9월에는 세계의 주요국가 중 몇개국을 선정하여 그룹별로 나누어 10여일간 국가별 국방외교 겸 관련분야에 대한 시찰을 실시하였다. 나는 중국 시찰그룹에 속해 해군 제독을 조장으로 하여 중국 방문길에 올랐다. 당시 우리나라와 중국과는 정식으로 수교를 한지 5년차밖에 되지 않은 상태로 국방분야의 상호 교류는 많치가 않은 상태였다. 중국의 국방대학원장은 3성 장군으로 우리를 극진히 환영해 주었다. 그가 우리가 방문하고 시찰할 중국군의 각급 주요부대와 관련시설 등을 사전에 협조하여 주었다. 중국의 수도인 북경의 수비 사령부를 비롯한 예하 주요 경비사단들과 교육 시설 및 훈련내용 등을 가감없이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6.25 한국전쟁 중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부대라고 자랑

진해 벗꽃 축제 때 생긴 일 [내부링크]

'85년 4월경이었다. Y는 육군대학 참모과정이라는 영관장교 필수 보수교육과정에 다니고 있었다. 당시에는 육군 대학이 경남 진해에 있었다. 많은 영관 장교들이 육군대학 독신자 숙소에서 숙식을 하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부는 가족과 함께 관사에서 살림을 하면서 공부를 하기도 했으나 그 숫자는 시설 부족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 진해의 벗꽃은 옛날부터 유명했다. 육대 영내에도 벗나무가 많이 있어서 봄이 되면 흐드러지게 핀 벗꽃들이 눈 꽃처럼 날린다. 진해의 벗꽃 축제가 시작되면 진해 시내가 온통 사람 물결이다. 당시 진해시에는 큰 나이트 클럽이 두개가 있었다. 그 곳에는 밤이 되면 외로운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하였다. 벗꽃 축제가 시작되면 그 나이트클럽도 사람들로 더욱 더 북적댄다고 하였다. 육대 참모과정을 Y와 같은 기수로 교육을 받고 있던 P소령은 진해에서 혼자 생활하면서 그 나이트 클럽을 출입하다가 벗꽃 축제가 시작 되던 날 한 젊은 여성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단순한 차 한잔

0사단 보병대대 교육훈련시 총기 사망사고 [내부링크]

나는 요즈음 1주일에 한번, 화요일 오후에 1800시로 잡혀진 저녁 식사 준비 전 3시간 30분쯤 외출을 하고 돌아온다. 아내의 병간을 하고 있는 나에게 아내가 특별히 배려하여 준 것이다. 기원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바둑 한 수를 두고 올 수 있는 시간이다. 그 곳에 갈 때마다 만나는 친구 한명이 있는데 그 친구만 보면 그가 옛날 보병 대대장을 하고 있을 때 발생했던 사고가 생각난다. '87년 5월 중순경이었다. 그 친구가 지휘하던 보병대대가 서울 가까이 위치한 정예부대인 0사단에서 교육시범을 보이는 대대로 선발되었다. 그 친구는 새로운 실전적이고 효과적인 각개전투 시범을 보이기로 하고 철저한 계획과 준비를 하였다. 제 0사단 전 지휘관 및 참모들이 운집하여 관망하는 가운데 시범이 시작 되었다. 경사가 약간 가파른 듯 한 야산의 각개 훈련 교장에서 병사들이 목표인 고지의 8부 능선에 위치한 적군의 진지까지 공격해 올라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교육훈련 시범이었다. 낮은 포복으로 전진하는 병

날개회관에서 일어난 일 [내부링크]

하나의 사건이라는 것은 간혹 미미하고 사소한 것으로 보이는 일이 발단이 되어 생각치도 못한 상황으로 전개되어 발생하는 것 같다. '77년 늦가을에 일어난 일이었다. 제 0군단 사령부 0000부대의 부대장은 깐깐하기로 소문이 난 지휘관이었다. 그 날도 그 부대장은 전방의 예하부대를 지도방문하기 위해서 차량을 대기 시켰다. 통상 지휘관 차량은 항시 출동이 가능하도록 잘 정비를 해 놓아야 했다. 부대를 출발한 그 부대장은 정해진 시간에 늦지않기 위해 신경을 쓰며 운행을 하고 있었는데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추운 계곡에서 갑자기 차량의 시동이 꺼져버렸다. 당시는 통신수단이 잘 발달하지도 않아서 특별히 차량에 설치된 비상 무선통신망을 열어서 부대와 교신 끝에 예비차량을 불러 내어 목적지까지는 갈 수 있었으나 시간이 지연되고 말았다. 그 지휘관은 대단히 화가나서 일을 마치고 부대에 복귀하는 즉시 부대 수송관 G 중사를 불러 호통을 쳤다. 그리고 차량정비 불량 등의 책임을 물어 한 달 동안 부대

포천군 이동읍 '청자다방'의 총기 인질사건 [내부링크]

'78년 5월 초순경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서 발생한 일이다. 이동읍 근처에는 특전사 00여단이 주둔해 있었다. 당시 특전사에 근무하는 병사들은 단 기간에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야 했다. 따라서 수개월 간의 집체교육을 통해서 태권도 실력을 속성으로 높히고 있었다. 그런데 병사들의 태권도 실력을 단기간에 향상시키려면 고도의 정신집중력을 키워야 했다. 따라서 엄정한 군기를 강조할 수 밖에 없었고 그것이 때로는 강압적인 수단과 힘든 얼차려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날도 태권도 집체교육을 실시하던 교육 현장에서 교육을 받던 S일병은 교육간 자세가 불량하다는 이유로 가혹한 특성교육을 받았다. 그런데 그동안 S일병은 번번히 동작불량으로 많은 특성 교육과 때때로 폭행까지 당해왔었다. 하루 종일 몹시 고통스러워 하던 S일병은 교관이 자신만 유독 힘들게 하고 감정적으로 자신만을 괴롭힌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러한 감정은 분노로 변했고 교관뿐만아니라 부대에 대한 분노로 변질이 되었다. 그

어떤 경리장교의 이중생활 [내부링크]

'93년 6월 초순 경이었다. 국방부와 군의 보안업무를 담당하는 00사령부로부터 소속대 경리 장교의 비리에 대해 국방부 수사기관에 고발이 들어왔다. 00사령부 예산집행과 회계를 담당하면서 동 사령부 본부를 지원하던 경리 장교가 공금을 횡령했다는 것이었다. 00사령부 C소령은 사령관의 직속으로 사령관의 명에 따라 수시로 예산을 집행하고 있었는데 항상 현금 보유잔액이 일정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당시 C소령은 명석한 두뇌와 판단력으로 주위의 평판이 좋았고 성실한장교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런데 00사령부의 안정적인 자금보유 상태와 지출예상액의 예측이 어느정도 가능하게 되자 C소령은 엉뚱한 발상을 하게 되었다. 자신이 금고에 보관 및 관리하고 있는 현금 중 일부를 임의로 주식 투자에 활용하여 수익을 낼 수 있다면 부수입도 생기고 부대 자금 운영상 여유도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C소령은 생각했던 것을 실행에 옮겼고 실제로 주식시장이 호황일 때는 수익을 올리기도

0사단 전차중대 병사 수류탄 자폭사고 [내부링크]

'78년 4월 말 경이었다. 중서부 전선을 책임지고 있는 0군단 예하 0사단의 주요 기동화력인 전차중대에서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전차병 P병장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적으로 항상 부족한 상황하에서 자라면서 나중에 자기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사업을 하겠다고 다짐을 하고 군 복무를 하면서도 비록 많지는 않지만 매달 받는 사병 봉급을 정기 적금으로 저축하기로 하고 중대 본부에서 통장을 보관 및 관리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맘 편히 생활하다가 전역 일자가 가까워지면서 자신의 예금통장을 확인하기 위해 중대 본부를 찾아갔다. 전역 일 주일을 앞두고 확인한 예금 통장은 잔고가 불과 몇 백원 밖에 안남은 빈 통장이었다.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가 적금을 해약해버리고 빼가버린 것이었다. 부대 내 판매점인 P.X.에서 먹고싶었던 것들도 많았지만 참고 참으면서 전역후 적지만 적은대로 본인의 힘으로 만든 자금으로 작은 장사라도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면서 기

병사가 영내에서 쥐약을 모은 사연 [내부링크]

'76년 4월 중순경이었다. 강원도 인제군 근처에 위치한 00연대 2대대 0중대에서 발생한 일이다. 그 당시 부대 내의 쥐들을 퇴치하기 위해 쥐약을 보급받아 중대별로 날을 잡아 쥐약을 놓곤 했다. 그런데 K상병이 남 몰래 쥐약을 숨겨 사물함에 모아놓고 있다는 이야기를 0중대장 S 대위가 듣게 되었다. 이것은 대단히 걱정스러운 내용이었다. 쥐약을 모은다는 것은 잘못하면 자살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인데 어찌 걱정이 안되었겠는가. 중대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특히 자살 사고나 총기사고 등이 발생할 경우 부대나 병사관리 부실로 근무 평가에서 결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평가는 부대내의 수 명에 달하는 중대장들을 분모 집단으로 해서 차 상급 지휘관이 상대 평가를 하기 때문에 사고발생 중대장은 당연히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었다. 0중대장 S대위는쥐약을 회수한 후 K상병을 불러 면담을 실시했다. 무슨 연유로 쥐약을 사물 함에 보관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고민

전 국방부장관 수행부관과 정주영 회장의 통큰 선물 [내부링크]

'93년 당시 국방부 장관실 의전실에 전해오는 전설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한 때 모래 땅이었던 잠실 등 한강 이남의 땅들은 해마다 장마만 지면 한강 물이 범람해서 온통 물바다가 되곤했었다. '71년 강변 북로를 따라 지나갈 때 건너편 지역에 뚝을 쌓고 있던 수많은 중장비들과 차량들이 이동하던 것들을 보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지역이 홍수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많은 기업들이 안심하고 그 지역의 개발사업에 투자를 하기 시작하고 나서부터 수 많은 아파트가 들어 섰다. 그 때의 아파트 값은 현재에 비하면 월등히 쌌다고 하지만 그 때는 그 때대로 낮은 국민소득으로 인해 결코 싼 값은 아니었다. 그러나 땅값은 현재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쌌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월남전에 참전해서 돈을 좀 모았다는 선배 한사람이 말하기를 귀국 후 잠실의 모래땅 30,000평을 사 두었는데 개발이 시작 되면서 땅값이 폭등하여 10,000평을 자기에게 팔라고 졸라대던 지인에게 팔았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후

변사체와 0사단 개인점호 결과 [내부링크]

'78년 4월 중순 경 어느날 밤이었다. 0사단 사령부가 가까이 있는경기도 포천군 Y면 의 야산에서 뻘건 불덩어리 하나가 뒹굴 뒹굴 구르는 모습이 지나가던 행인에 의해서 발견되어 군 초소에 신고가 들어왔다. 신고를 받고 뛰어간 경찰과 그 지역 관할 헌병(군사경찰)이 확인한 결과 그 지역 마을 뒷산의 한 무덤 앞에 시커멓게 불에 타서 그을린 사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고열에 의해 열을 받아 복부가 터질 듯이 팽창되어 있었고 입고 있던 옷은 모두 타버리고 손목에 타다 남은 소매 모양이 군인 들이 잘 입는 항공잠바의 소매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현역 군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민간인을 상대로 확인을 하고 헌병은 0사단과 인접한 0군단의 장병들을 상대로 이상유무를 확인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신원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이야 영내에 있으니까 확인 대상은 영외 거주 장병들이었다. 하룻밤 새 확인하는 방법은 오로지 부대 영외거주자에 대한 개인점호를

Melbourne의 K 프라이드 치킨 점에서 생긴 일 [내부링크]

'11년 5월의 어느 주말이었다. 가까운 인접 County에서 하는 Yard Sale과 Garage Sale을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유명한 K프라이드 치킨점에 들렸다.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보통 미국인들은 어린이나 어른 할것 없이 거의가 다 크거나 작은 프라이드치킨 1상자씩을 시켜 먹는 것 같았다. 우리 부부는 보통 치킨 크리스피 3피스에 프렌치프라이 1봉지와 코울슬로1개, 그리고 머핀 하나와 음료수 하나를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극히 소량으로 식사를 하는 아내때문에 많이 시킬 필요가 없었다. 적게 시킨다고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한국에서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메인 메뉴 하나에 백반 하나만 추가하면 둘이서 충분히 요기할 수 있었다. 우리가 K프라이드 친킨점에서 음식을 거의 다 먹고 프렌치프라이와 함께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제일 큰 사이즈의 치킨 박스를 앞에 두고 식사를 하고 있던 백인 노부부 중 남성 노인이 우리에게 말을 건네왔다. 자기들이 시킨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의 심술 [내부링크]

'90년 2월 이탈리아 헌병군(Carabinieri )사령부를 방문해서 2 주간 연수를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 기간중 휴일에 Carabinieri 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바티칸 성당 벽화들과 바티칸 미술관을 안내하고 설명해줄 수 있는 중년 여성 가이드의 안내를 받은적이 있었다. 그 중 잊지 못할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바티칸 미술관에서 들은 이야기다. 르네상스 시대에 유명한 그림 <아테네 학당>,<라 포르나리나>, <시스티나성모> 등을 그린 화가 라파엘로 산치오는 자신의 그림 속에 동시대의 화가들의 모습을 모델들로 등장시키거나 자신의 자화상을 자주 그려 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한 커다란 벽화가 그려진 방에 들어갔을 때였다. 그림 내용은 천국과 지옥을 그린 것이었는데 그림의 중 하단 우측부분에 지옥으로 떠나는 배를 묘사하고 있었다. 조그만 보트에 지옥으로 데리고 갈 사공과 그 배를 마지못해 탄 듯한 사람 한명이 배위에 서있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라파엘로가 바

$24 짜리 NEW 골프 셑 [내부링크]

'82 년 2월의 주말에 미국의 플로리다 주 Melbourne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살던 아파트 단지 바로 앞에 Public Golf Course가 하나 있었는데 잔디 상태도 좋았고 주변 경관도 아름다워 한번 쯤 라운딩을 하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더군다나 Fee도 한국에 비하면 터무니 없을 정도로 낮은 가격이었다. 집에 가까워서 잘 활용하면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의 새학기가 시작하기 전에 골프 한 셑을 준비해야겠다고 맘을 먹고 그 지역의 보통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K-Mart를 찾았다. 같은 물건이라도 다른 고급스런 Mart 에서는 K-Mart 보다 월등히 비싸게 팔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먼저 고급 Mart에서 물건을 확인한 후 동종의 것을 찾아 구입하는 방식을 택했다. 당시 유명한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새로 나온 연습하기에 적절한 골프셑을 하나 골랐다. 당시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잘 맞을 것 같은 믿음이 가는 브랜드였다. 많이 사용하는 W

돼지우리 위의 화장실 [내부링크]

'75년10 월 하순의 마지막 토요일 이었다. 서울 친정에서 살고 있던 아내가 강원도 인제에서 소대장을 하고 있는 나에게 오던 날이었다. 10월 중순에 결혼을 한후 처음 나와 함께 인제에서 신혼생활을 하러 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육군 소위로 소대장을 하고 있던 나는 아내가 오는 그 날까지도 신혼방을 구해 놓지 못했다. 업무와 시간에 쫒기다가 방을 구하러 다닐 시간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아내가 도착하기 두시간 전에 조기 퇴근 허락을 받아 방을 구하기 시작해서 아내가 도착하기 직전에야 겨우 조그만 골방 하나를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집 주인의 쌀 뒤주가 하나 놓인 작은 방이었다. 둘이서 누으면 꽉 찰 정도의 작은 방이었다. 그래도 그거라도 얻었으니 다행이다 싶어 안심을 하고 아내를 기다릴 수 있었다.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강원도 인제까지 세시간 반 이상의 어렵고 힘든 길을 달려서 아내가 도착했다. 둘이서 사용할 반상기 한 세트와 함께 덮을 이부자리

플로리다주 Ocala에서의 Yard Sale [내부링크]

'11년 5월 중순경이었다. 내가 미국의 플로리다주에 두번 째 유학을 갔을 때이다. 아내의 뇌수술 이후 두번 째 장기 여행이기도 하다. 주변의 모든 신경쓰이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환경 속에서 아내는 요양을 하고 나는 새롭게 미술 공부를 시작하기 위한 유학기간이었다. 플로리다 주 중부 지역에 위치한 작지만 아름다운 도시 Ocala에 있는 대학에 적을 두고 살 때의 이야기다. 주말이면 우리는 자동차를 끌고 Ocala시 주변의 이곳 저곳을 누비며 볼거리를 찾아 여행을 하곤 했다. 자동차는 출고된지 3년이 지난 예쁜 빨간색의 미국산 클라이슬러 중고차였다. 작지만 튼튼하고 내부 공간이 제법 넓은 여행하기 좋은 차였다. 그 지역은 사철이 따뜻해서 시내를 벗어나면 다양한 꽃과 나무들이 우거진 그림같은 집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집들을 구경할 기회는 그런 집에서 Garage Sale(차고세일)이나 Yard Sale(마당세일) 등을 할 경우에만 가능하였다. 따라서 주중에 지방신문이나 광고지에

Melbourne 아파트 옆집 할아버지 [내부링크]

'82년 11월의 4번째 수요일이었다. 다음날이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이었다. 우리가 살던 미국의 플로리다 주 Melbourne 시의 아파트 단지라는 표현보다는 빌라단지라는 말이 적절할 것 같은 곳에 살 때였다. 2층으로 지어진 유럽식의 운치가 있는 목조 건물이었다. 옆집에는 백인 노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 노 부부는 자주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볼 때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우리를 대해주면서 호감을 표시하곤 했다. 그 날은 그 백인 노부부에게 소포가 왔었는데 우리 부부가 집에 들어가다가 물건을 들고 들어가는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그 때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그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소포 상자를 보여주며 자랑을 하는 것이었다. 워싱턴주에 살고 있는 아들이 추수감사절을 맞아 잊지않고 선물로 맛있는 치즈 한 상자를 보내왔다는 것이었다. 큰 사이즈 피자 박스 크기의 치즈 상자였다. 명절 때마다 아들이 찿아오지는 못하지만 이렇게 여러가가지 선물을 보내온

"네 아버지 누구야!" [내부링크]

71년 4월 중순 어느날 오후였다. 서울의 동북쪽 태능골에 위치한 육군사관학교 대강당에 전 생도들과 생도대장 이하 전 훈육관들이 학교장의 특별 훈시를 듣기 위해 앉아 있었다. 제 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이 '69년 10월 삼선연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삼선개헌에 성공을 한 후 실시하는 제 7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에 앞서서 실시하는 학교장의 훈시였다. 학교장 C장군은 6.25 한국 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렸던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에서 대대장으로서 북괴군들과 백병전까지 치루면서 방어에 성공하는 데 기여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장군이었다. 그렇게 존경받고 있던 학교장이 한 훈시의 내용은 이제 갓 육사에 입교하여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던 P생도에게는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하지만 결정적인 한 순간에 그 분의 훈시는 P생도를 실망시키고 말았다. 아니 전 생도를 실망시켰을 것이다. 그 것은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대통령을 우리는 무조건 절대적으로 지지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말씀이

Garage Sale 에서 구입한 Realism 그림 [내부링크]

'07년의 5월 따뜻한 어느 봄날의 주말이었다. 미국의 Michigan 주의 행정수도인 Lancing 시의 Okemos라는 County에 있는 아파트 단지에 살던 때이다. 고풍스럽게 지어진 건물의 주 청사 등 오래된 건물들이 많이 있는 East Lancing과는 달리 우리가 살던 서쪽 지역의 Lancing은 주로 새로 개발된 잘 꾸며진 아파트 단지들과 전원주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더불어 주변에는 대규모 쇼핑 단지들이 곳곳에 새롭게 들어서 있었다. 그날은 날이 화창해서 차를 몰고 동네 한바퀴를 돌아보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날이 좋은 주말이면 곳곳에 Garage Sale표지가 붙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봄이면 차고를 정리하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인 듯 하다. 사전에 그 지역 광고지를 통해 차고세일을 하는 곳을 확인해 두어서 그 지역 미국인들의 집구경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의 독립 주택에서 차고세일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을 떠올리게 하는 것 [내부링크]

'90년 수도 방위사령부 00단에서 대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이태리와 프랑스 출장을 다녀오라는 육군 참모총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참모총장이 유럽 순방길에 들른 이탈리아군과 프랑스군에서 알게된 이탈리아의 헌병(군사경찰)군 CARABINERI와 프랑스의 헌병(군사경찰)군 GENDARMERIE에 관해서 알아 오라는 지시였다. 그들의 탁월한 요인 경호 수행방식과 국가 치안유지 체제를 겪어보며 배울만 하다고 느꼈던 것이 그러한 지시의 배경인 듯 했다. 조장격인 대령 선배 한 분과 함께 한 달 가까운 유럽 출장길에 올랐다. 먼저 이탈리아 CABINIERI 사령부를 방문했다. 그 곳 사령부에서 제공해주는 호텔 수준의 게스트룸에 여장을 풀고 사전 계획에 따라서 CARABINIERI의 관련부대 및 시설과 그 예하기관에 대한 단계별 방문 일정을 잡았다. 이탈리아에서의 공식 방문일정은 일과 시간에만 이루어졌으며 일과 후와 휴일은 우리의 자유 시간이었다. CARABINIERI 사령부에서 지원

이탈리아 '까라비니에리'헌병(군사경찰)군 이야기 [내부링크]

이탈리아에는 우리나라와 다른 그 나라 특유의 군 조직이 있다. 그것이' CARABINIERI '라는 조직이다. 이 것은 1814년 7월 13일 사르데냐 왕국의 경찰조직으로 창설되었다가 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이 된 후 이탈리아 군에 통합된 조직이다. 우리나라 군은 육군, 해군, 공군으로 나뉘어 있는데 이탈리아 군은 육,해, 공군 외에 CARABINIERI(헌병(군사경찰)군)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CARABINIERI는 우리의 헌병(군사경찰)규모와는 비교가 않될만큼 조직이 방대하고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그 것이 수행하는 임무와 기능이 대단히 다양하고 중요하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우리의 헌병(군사경찰)과 기무사령부가 수행하는 임무와 기능을 함께 갖고있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외국에서 귀빈이 방문하면 이탈리아의 국가경찰보다 CARABINIERI의 경호작전 팀이 우선적으로 경호를 실시하며 그들의 우수한 경호 능력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경호를 받아

바티칸 성당 앞 기념품 가게 한국인 알바생 [내부링크]

이탈리아의 CARABINIERI 사령부의 공식적인 한주간의 안내가 끝난 주말에 바티칸 성당 앞의 기념품 가게를 찾아갔다. 가족들에 대한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 이탈리아 로마에서는 이 것이 유명하다고 서울에서도 소문이나서 그 것을 사다 주면 좋아할 것이라고 그곳 주재 대사관 직원이 조언을 해주었다. 삼색금으로 만든 목거리나 팔찌 등 여성들의 장신구였다. 기념품 가게에는각국에서 온 많은 관광객들이 선물들을 고르느라 법석대고 있었다. 한 가게에서 한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점원이 다가와 서울에서 왔느냐고 인사를 하면서 자신은 한국 유학생인데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오기 시작하면서부터 거기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찾는 물건을 골라주며 상품 설명까지 자세히 해주었다. 물건 값은 생각보다 싸지 않았다. 그런데 가게 주인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 한국인 알바생이 잠깐 나를 보자고 하더니 속삭이는 목소리로 그 곳의 값은 너무 비싸게 매겨 있으니까 주소만 알려주면 똑

소렌토 시티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 [내부링크]

'90년 9월의 두번째 주말에 이탈리아 폼페이의 유적을 보러가면서 들른 곳이 소렌토 시티 해변의 절벽과 푸른 파도가 거기에 부딛치며 끊임없이 토해내는 듯한 포말들을 멀리서 내려다 볼 수 있는 도로변의 언덕이었다. 안내하는 지인의 설명을 들으며 멀리 내려다 보는 소렌토 시의 전경은 노랫말 때문인지 웬지 서글프고 쓸쓸한 느낌을 느끼게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수 많은 소렌토 시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더 잘 살아보겠다고 아메리칸 드림을 꾸면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그 곳 항구가 멀리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 보내면서 느끼는 애절한 마음을 표현하는 듯한 노랫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아름다운 저바다와 그리운 그 빛난 햇빛 내맘 속에 잠시라도 잊을 길이 없도다. 향기로운 꽃 만발한 아름다운 동산에서 내게 준 그 귀한 언약 어이하여 잊을까 ........................돌아오라 소렌토로!" 특히 루치아노 파바로티가 부르는 그 노래는 잊을 수가 없을 정도로

미국 플로리다 Ocala 에서 있었던 이야기 [내부링크]

2010년 말 부터 나와 아내가 미국의 플로리다 주의 중부지역에 위치한 조그만 도시 Ocala라는 곳에서 1년 이상 살 때의 이야기다. 그 곳에 있는 College에서 어드미션을 받아 2년간 미술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갔던 곳이다. 학교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깨끗하고 조경이 잘된 커다란 2층 아파트 단지에 세를 들어 살았었다. 작은 도시지만 있을 것은 다 있고, 살기 편하며 조용하면서도 문화적으로도 타도시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소도시다. 미국의 많은 다른 도시들처럼 그 곳도 신 시가지가 개발되고 새로운 주택단지가 만들어지면서 다수의 대형 마트가 건설되었다. 그에 따라 원래부터 있던 시가지는 오래된 옛날 주택과 건물들이 모여있는 구 시가지로 전락하고 전기회사와 같은 공익을 위한 회사나 시청같은 관공서 들이나 남아 있는 구도시로 변해 버렸다. 그 카운티에 사는 나이든 사람들은 많은 수가 겨울이 되면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이거나 대단히 추운 지역인 미국의 북동부 지역에 살다가

딸 아이의 Melbourne 초등학교 입학 심의 [내부링크]

'82년 9월 미국의 플로리다 주 Melbourne시에 있는 한 초등학교에 우리의 큰 딸을 입학시키기기 위해 찾아 갔다. 서울에서 초등학교 1학년 1 학기를 마치고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 학업을 계속 시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담당자를 만났더니 아이가 영어를 좀 하느냐고 물었다. 전혀 모르지만 입학만 시켜주면 우리가 영어를 가르치면서 공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그냥 입학만 시켜달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담당자는 영어를 모르기 때문에 유치원 과정을 거쳐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1학년 과정을 다니던 아이를 유치원 과정에 넣을 수 있겠느냐고 항변을 했다. 담당자는 학교장에게 보고를 하고 결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며 학교장을 만나게 해 주었다. 우리는 학교장을 만나 우리의 뜻을 전달하고 도와 줄 것을 바랐다. 학교장은 우리의 말에 어느정도 동조를 하면서도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 함께모여 토의를 해보자고 제안을 했다. 회의는 저학년 감독관 1명

플로리다의 어떤 방문 판매원 이야기 [내부링크]

'82년 10월의 어느날이었다. 미국 플로리다 주 Melbourne에서 우리 아이들 셋과 함께 살 때였다 베드 룸 2개에 거실이 하나인 작은 빌라형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1층에 살았는데 거실 미다지 창문을 열면 바로 몇 미터 앞에 수영장이 있어서 아이들이 수시로 드나 들면서 수영을 하며 뛰어 놀기가 좋은 집이었다. 수영장을 중심으로 여러채의 아파트들이 마주보고 있어서 여러 이웃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도 있었다. 저녁을 먹고나서 아이들과 함께 TV 앞에 앉아 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우리를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일까? 문을 안쪽으로 걸어놓은 쇠고리를 풀지 않은 채 문을 열었다. 낯 선 얼굴의 백인 미국인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물었다. 그는 손에 책을 한권 들고 있었다. 어린이들 위해 잘 만들어진 영어 사전이라며 한권 사줄것을 부탁했다. 마침 큰 딸이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을 해서 필요하던 차에 찾아온 방문 판매원이 오히려 반가울 정도였다. 그러나 미

엄마 나도 갈래 [내부링크]

'82년 1월 1일 아내가 세 딸 중 젓먹이 막내만을 데리고 미국 플로리다 주의 Melbourne시에서 유학생활 중이던 나에게 떠나오던 날, 공항으로 떠나는 아내의 뒤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엄마와 막내를 전송하던 당시 네살짜리 두째 딸이 갑자기 "엄마 나도 갈래"하며 소리를 질렀다. 한동안 못 볼 엄마를 생각하며서 갑작스럽게 엄마를 외치는 둘째의 울음섞인 목소리는 절절했을 것이다. 그 때 아내의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다시 생각해도 그때의 아내와 두째딸의 심정이 애절하게 느껴지는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막내만을 데리고 플로리다의 볼거리들과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곳을 갔을 경우 아내는 잘 웃지를 못했다. 어떤 것을 봐도 서울에 두고 온 두 딸들이 생각나서 즐겁지가 않았던 것이다. 두고온 아이들 생각에 가슴아파 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두아이를 데리고 오기로 했다. 그렇지만 두 아이들에 대한 비자 발급과 출국 수속을 해야하는데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Melbourne Florida 까지의 여정 중 생긴일 [내부링크]

'81년 9월 4일이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김포 공항을 출발했다. 생후 외국행 비행기를 처음 타보는 것이었다. 목적지는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조그만 해변의 도시 Melbourne 시였다. 그곳에 있는 대학교에서 대학원 과정의 어드미션을 받아서였다. 가는 중간에 하와이에서 입국 수속을 마쳤다. 미국 본토로 들어가면 다시 들르기 가 쉽지 않으니 들러서 볼 것은 미리 보고오면 좋을 것이라는 선배들의 조언에 따라 하와이를 들러가는 것으로 일정을 잡은 것이었다. 일행은 나를 포함해서 남자들만 3명이었다. 유학을 가는데 가족은 나중에 합류하기로 하고 먼저 출발을 한것이었다. 그림이나 영화에서나 보았던 하와이를 실제로 본다는 것은 정말 가슴이 설레는 일이었다. 말 그대로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섬이라는 것을 잘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섬이었다. 우리의 선조 조선인들이 일제에 의해 거의 강제적으로 이곳에 이민을 와서 땀흘리며 고생했다는 설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 이야기를 들을 때는 가슴이

Melbourne에서의 중고 자동차 구입 이야기 [내부링크]

'81년 9월 초 미국 Florida 주 Melbourne시에 도착하면서 부터 의지했던 먼저 와 있던 선배의 도움으로 숙식과 차량까지 제공받으며 하룻 밤을 묵은 뒤 우선 해야할 우리의 급선무는 빨리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기동력이 생기고 아파트도 자력으로 구할 수 있고 식사도 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배의 픽업을 받아 중고차 시장을 찾아갔다. 수많은 중고 자동차들이 넓은 주차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같이 간 일행 3명이 한꺼번에 차를 사겠다고 하니 중고차 딜러가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각자 마음에 드는 차를 골라 거래를 시작했다. 먼저 와 있던 선배분이 딜러가 제시하는 차값에 무조건 50%를 잘라서 제시하라고 사전에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고른 차는 당시 출고 된지 4년이 된 미국산 포드 77년형 머큐리 밥 캣이라는 6기통 왜건차량이었다. 미국산이 고장시 수리하기가 용이하고 수리 비용도 타국산에 비해 저렴하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왜건형 차량은 우리 아

Mr. Lee의 중고차와 Florida 교통 경찰 [내부링크]

'81년 9월 미국의 플로리다 주 Melbourne 시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할 당시 같은 학교에 나보다 10살 정도 더 나이든 40대 남자 한 분이 같은 시기에 들어왔다. 서울의 다니던 직장에서 직원들이 모두들 자신을 부를 때 아는 것이 많다고 "박사님 박사님"하고 불러대는데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었다. 도저히 견딜수가 없어서 결국 더 늦기 전에 박사학위를 따자고 결심하고 서울의 전세살던 집을 정리하고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데 올인 하기로 작정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하였다. 그의 전재산이었던 전세비를 털어서 유학을 온 그는 이제 물러 설 곳이 없다고 하였다. 오직 빨리 박사학위를 취득해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용기있는 결단과 실천력이 존경스러웠다. 그리고 유학은 반드시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만 오는 것이 아니로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 새로운 세계에 도전할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들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우리는 그를 이선생님 하고

Florida에서의 첫 교통사고와 보험사& 정비업소 [내부링크]

'81년 10월초순 경이었다. 아침 수업을 받으러 학교에 가는 시간대에는 학교 주변 도로가 대단히 혼잡했다. 인근에 있던 제법 큰 기업체로 가는 길이 조금 겹치는 코스가 되어 그러는 것 같았다. 내가 자동차를 몰고 주 도로에서 학교 주차장으로 우회전하여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주차장에서 다른 자동차가 한 대 튀어 나오는 바람에 급정거를 해야만 했다. 그러자 뒤따라 달려오던 중형 승용차 한 대가 내 자동차의 뒷문짝을 들이 받아버렸다. 너무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자 나는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때 어떻게 해야하지?' 생각하며 일단 자동차 밖으로 나왔다. 사고차량 운전자도 차 밖으로 나와 미안하다고 하면서 자신의 신분증을 보여주고 명함에 자신의 보험회사 전화번호를 적어주며 자기가 지금 회사에 가는 즉시 자동차보험사에 연락을 하겠다고 하였다. 사고차량 번호와 신분을 확인했으니 별걱정이 않되어 알았다고 하며 그냥 보내주었다. 그리고 나의 자동차보험사에도 연락을 바로 했다. 오전 수

Florida에서의 두번 째 교통사고와 보험사 처리 [내부링크]

'82년 5월 초순의 일요일 오후였다. 젖먹이 막내 딸을 안은 아내와 함께 '77년 산 '포드 머큐리 밥 캣'이라는 튼튼한 왜건형 자동차를 몰고 플로리다 멜버른의 해변으로 드라이브를 나갔다. 강과 바다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다리를 지나갈 때면 기분이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우측에 있는 대서양과 좌측에 있는 Indian River의 사이에 있는 지방도로를 따라서 차를 몰고 지나갈 때는 양 길가에 그림같이 아름다운 집들이 많이 있어서 한번 쯤 들어가 보고싶은 충동을 자주 느낄 정도였다. 그 날은 궁금하던 그 주택가를 관통하는 넓지 않은 길을 따라서 드라이브를 하며 마을 구경을 하기로 했다. 제법 먼곳까지 길을 따라 가면서 곳곳에 있는 볼만한 뷰를 감상하고 골목 골목까지 들어가며 비록 외견이지만 집구경을 할 수 있었다. 사철 내내 꽃이 피어나는 지역이기 때문에 온갖 꽃들이 만발하고 다양한 나무들이 집들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도로는 주 도로가 아니어서 그런지 차량들은 간간히

아내의 뇌출혈 [내부링크]

오월의 오늘, 25일은 두고 두고 잊지 못할 날이다. 왜냐하면 나의 아내가 처음으로 쓰러졌던 날이기 때문이다. 2003년 이날 오후 2시 30분 경이었다. 본래 나는 이 시간이면 골프장 필드에서 다른 동료들과 함께 운동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부킹되어 있던 운동을 다른 동료에게 양보하고 집에서 아내와 함께 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서재의 컴퓨터 앞에 있던 아내가 갑자기 "아 ! 내 머리가 왜 이러지?" 하면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두통이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아내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온 몸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몸이 굳어오는 것 같다고 말하며 동시에 속이 메슥거린다며 토하기 시작했다. 조금 토하고 나자 굳어가던 몸이 좀 유연해지는 듯 보였다. 좀처럼 병원을 찾지 않았던 아내가 아무래도 병원에 가봐야겠다고 말했다. 그 것은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일까? 전에는 다른 사람들만의 일인 것처럼 여겨

나의 일상 [내부링크]

오늘은 5월 25일, 어제와 다름없는 날이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나의 아내가 처음 쓰러진 날이기 때문이다. 2003년 오늘, 비록 간간이 피곤해 하긴 했었지만 건강하게 살아왔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처음에는 이런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이러한 불행한 일은 누구에게도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신의라고 불리울만큼 훌륭한 의사 선생님 덕분에 후유증 하나 없이 수술을 받고 완쾌되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아내의 병 수발을 들고 있다. 그 후 아내가 두번째로 쓰러진 것이 2016년 5월이다. 이번에는 간 이식을 받아야 하는 큰 수술을 받았다. 급성 신 부전증으로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아내는 혈장 교환시술을 받은 후에야 생명이 조금 연장되는 듯 보였다. 조금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는 방법이 있다면 모든 수단을 다 강구했다. 병원측으로부터 시험적으로 돼지의 간을 활용한 실험을 해보자는 제안이 왔다. 국가적으로 지

행주치마 [내부링크]

행주치마는 사랑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아내가 가족들을 위해 그 것을 두르고 삼시 세끼를 준비하고 궂은 일을 할 때마다 허리에 동여 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것은 또한 희생의 상징이다. 미혼시절의 그 곱던 손이 마디 마디 굵어져 설움이 북받칠 수 있을 법 한데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져 묵묵히 그것으로 손을 훔치며 잠시 생각에 잠길 수 있게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주치마는 부엌 책임의 상징이다. 이것을 걸치면 집안 식재료와 먹거리의 과 부족을 항상 확인하고 필요시 적기에 구매 혹은 주문 해야한다. 그리고 주방 청결 상태와 정리 정돈을 부단히 유지 및 관리해야 한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발생하는 재활용 자원들에 대한 분류처리 등도 포함된다. 부엌은 식구들의 건강을 관리하는 핵심 장소이다. 여기에서 물을 사용하거나 국물들을 다룰 때 제일 필요한 것이 행주치마다. 특히 김치 국물을 만질 때에는 더욱 중요하다. 옛날에는 이 행주치마를 입고 있는 남자를 보면 '고추'를 떼버려라고 말할 정도

"분대장님 제가 죽어야 합니까 살아야 합니까?" [내부링크]

서울의 외곽에는하루 24시간 동안 서울 시민을 보호하고 유사시 서울 외곽의 주요 진 출입로를 통제하는 검문소들이 운영되고 있다. 거기에는 우리의 아들들이 항시 긴장을 풀지 않고 철저히 근무를 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 곳이 우리를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적들로부터 국민을 지키는 최 전선이며 진지인 것이다. '89년 가을 초저녁 무렵이었다. 서울의 북쪽 지역의 한 검문소에 서울 시민으로부터 긴급 신고가 들어왔다. 2명의 무장한 탈영병들이 서울 지역으로 진입했다는 신고였다. 신고를 받은 검문소 헌병(군사경찰)은 즉각 사령부에 상황보고를 한 후, 평소 훈련했던대로 출동하여 무장 탈영병들을 추적하고 서울 와곽의 야산에 위치하고 있던 2명의 사고자들을 포위하였다. 헌병들은 지침에 따라 3회에 걸쳐 경고를 하였다.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투항하라, 투항하라" 세번의 경고를 마치고 반응이 없자 헌병은 서서히 접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무장 탈영병들이 헌병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6.29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시의 기적 [내부링크]

'95년 6월 29일 17시 55분경 서초동에 있었던 삼풍 백화점이 붕괴되었다. 502명의 무고하고 정말 순수한 우리의 국민들이 참변을 당했다. 불법적인 설계 변경및 허술한 날림공사와 불실한 건물관리로 발생된 대참사였다. 즐거운 쇼핑과 함께 당시 그 곳에서 열리고 있었던 보석전시회도 관람하면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던 그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말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실제로 붕괴된 건물 잔해 속에서 정상적인 주검들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바로 그 시간에 나는 신도안 육군본부에서 근무중이었는데 갑자기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 삼풍 백화점이 사라져 버렸어요!" 믿을 수 없는 대형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순간 국가적 재난사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상황실로 올라가 실시간 뉴스를 틀었으나 사고 속보는 아직 나오고 있지 않았다. 우리 아파트가 삼풍 백화점 바로 옆에 있었기에 아내가 실시간에 사고소식을 알려줄 수 있었고 그만큼 신속한 조치가 가능했었다.

어떤 인연 [내부링크]

근간에 TV를 켜면 끔직한 살인 사건에 관한 내용들이 많이 보도되고 있다. 어떻게 저런 일 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끔찍한 사건들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이루어 지는 인연에 의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원인이 존재할 것이다. 원인없는 결과는 없는것이 진리일진데 과연 어떤 악연이 있어서 그들 사이에 그러한 일이 발생했을까. 사십여년 전에 있었던 일이 불현듯 생각난다. 현역에 있을 때이다. 상황실에 교통사고 보고가 올라왔다. 고급직위자가 사망한 교통사고로 상부에 올릴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이름이 동일하게 타자되어 있었다. 순간, 오자가 아닌가 생각하고 급히 수정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자가 아니었다. 사고자와 피해자가 동명이인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사실이었다. 확률적으로 그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한 것이다. 그러나 살다보니 그러한 현상들은 종종 발생하고 있는 듯 하다. 흔히들 그들이 전생에 잘못된 인연이

참새와 박쥐의 죽음 [내부링크]

섬진강 6년 전 안좋아진 아내의 건강 관리를 위해 지리산 자락의 아담한 시골 동네에 깔끔하게 새로 지은 한옥 한채를 빌려 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집 안의 나무 가지에는 참새 떼들이 몰려들었고 기와지붕과 처마사이를 많은 참새들이 즐거운듯 드나들곤 하였다. 거실 뒷문 위의 처마 안 쪽에는 박쥐 몇마리가 둥지를 꾸린듯 했다. 그것은 아침마다 뒷마루 위에 잔뜩 흐트러져 있는 박쥐 똥을 쓸어내면서 알게되었다. 면역 억제제를 매일 먹지 않으면 안되는 아내는 실내에서 자유롭게 화초를 가꿀 수 없었는데 시골의 화단과 텃밭에서 여러가지 꽃들과 다양한 채소들을 가꿀 수 있어서 좋았다. 자연 속에서 몸과 마음을 힐링할 수 있었고 가까이에 흐르고 있는 강과 시냇가를 산책하며 자연스럽게 체력 증진과 정서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아내의 정기 진료를 위해 집을 일 주일 정도 비웠다가 돌아온 어느 여름날, 거실에 놓여 있던 수석들의 어두운 틈새에서 박쥐 새끼 한마리의 말라버린 사체가 발견되었다. 마루에 놓

반려견의 질투 [내부링크]

반려견은 선천성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와 같다. 왜냐하면 태어 날 때부터 관심을 갖고 죽을 때까지 돌봐 주지 않으면 않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과 마찬가지로 관심을 소홀이 하거나 차별을 한다고 느끼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칠투하고 샘내고 심하면 나름대로 사람이나 다른 물건들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30여년 전 지방에서 근무를 할 때 였다. 관사에 누런 강아지 한마리를 분양받아 키운적이 있었다. 그렇게 예쁘지도 않고 명견도 아니었지만 노는 것이 귀엽고 하는 짓이 좀 달랐다. 퇴근 후에 같이 놀아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유독 짧은 다리 때문에 높히 뛰지도 못하고 다른 큰 개들처럼 빨리 달리지도 못했지만 무척 영리하고 눈치도 빨라서 귀엽고 정이 많이 들었던 반려견이었다. 시골에 있는 관사여서 주변에 뱀도 나타나는 일이 많았는데 강아지가 가끔 뱀을 물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방 문 앞에 하루종일 앉아 있다가 제일 먼저 내 자동차 소리를 듣고 뛰어 나오는 것도 강아지 였다.

대전차지뢰폭발 사고 [내부링크]

'98년도 서울 인근의 군단 직할부대에서 발생한 대전차지뢰 폭발사고는 지금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고 가슴아프게 하는 잊을 수 없는 사고였다. 대전차지뢰가 폭발하여 병사 1명이 사망하고 장교 1명이 중상을 입은 사고였다. 성실하고 착한 병사가 교육훈련 중 부실한 안전관리로 인해 한 순간에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고 분해되어 산화되어버린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군단 공병대대 병사들이 지뢰 매설 훈련을 받는교육훈련장에서였다. 대전차지뢰는 그 위에 무거운 하중을 올려야 폭발하기 때문에 그 위에서 병사들이 올라 서도 폭발하지 않는다고 교관이 가르쳤고 실제로 대전차 지뢰를 매설한 뒤 시범까지 보여주었다. 실습은 한병사가 대전차지뢰를 매설하고 다른 병사는 그것을 해체하는 식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 병사가 매설된 대전차지뢰 위에서 뛰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온 몸의 체중을 실어 뛰어 올랐다가 내려 섰다. 그 결과는 참으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체중이 가중되면서 대

멍텅구리 포탄은 말이 없었다. [내부링크]

'87년 가을 의 어느날, 서울 인근에 위치한 예비사단의 00연대 0대대 연병장에서 일명 멍텅구리 포탄에 의한 사망사고가 발생했다. 연병장 가운데 지름이 10m 정도 되는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 훈련탄을 발사해 떨어뜨리면 합격하는 훈련인 것이다. 소위 멍텅구리 포탄은 크기나 모양 무게등이 실제 81mm 박격포탄과 유사한 훈련용 모의 박격포탄으로서 내부에 폭발물질만 않들어 있는 것이다. 사고 당일, 훈련탄은 영내 낮은 야산 뒷편에서 박격포를 발사해서 야산 앞쪽의 연병장의 원 안에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었다. 사고 병사는 탄착점 주변 에 위치하여 합격 여부 판정을 하는 병사로서 원칙적으로 훈련탄이 발사되면 안전한 방호시설에 대피하여 대기하다가 훈련포탄이 떨어진 이후에 나와서 판정 해야헸다. 그런데 사고 당일 그 병사는 거의 모든 훈련탄이 원 안에 떨어지자 대피를 하지않고 원 옆에서 기다리다가 판정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무모한 행동을 했던 것이다. 아니면 그동안 모든 훈련을 안전의식 없이

휴가 백을 든 생도유령 [내부링크]

6월 말이 되면 육사 생도들은 3주 동안의 하기휴가를 생각하며 가슴 설레이기 시작한다. '70년대에는 경부선, 전라선, 호남선, 경춘선 등 귀향열차를 편성하여 지역별로 통합하여 주로 야간에 귀향하였다. 육사 생도들이 생활하는 생도대 건물은 '70년대 초반까지 슬러브로 지어진 2층 건물로 되어있었다. 생도들이 일과를 마치고 취침을 할 시간인 밤 22시가 되면 1명씩 불침번을 1시간씩 서야한다. 밤새 환자가 발생한다거나 화재 발생시에 신속히 조치를 해야할 필요성도 있고 동시에 임관후 지휘해야할 병사들이 근무하듯이 경험을 쌓을 목적도 있다. 그런데 하기 휴가가 시작될 무렵이면 구생도대 광장 입구 쪽에 가까운 1동 건물에서 언제부터인가 생도들이 심야에 불치번을 설때에 2층 계단을 휴가백을 들고 소리없이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생도 유령이나타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 당시, 몇해 앞선기수에서 기말고사를 마친 후 최종 성적이 평균 67점이 되지않아 휴가를 다른 생도들과 함께 출발

괴이한 진중전설 [내부링크]

'98년 4월 초봄의 나른해지는 어느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육군 특수전 사령부 00특전여단 정문 초병 2명은 정문에서 바라보이는 야산의 윗쪽을 향해 몇개의 관을 메고 올라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장례행렬을 목격하고 그 음침하고 소름끼치게하는 광경에 아연 실색 한 일이 있어다고 한다. 그런 광경은 금방 사라져 버렸지만 그 잔상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그 병사들의 맘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사전에 불행한 사고가 발생할 것을 예고하는 징후였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일이 있고 난지 며칠 후 그 부대에서 천리행군 훈련을 하던 중 수명의 우리 젊은 자식들이 순직하는 안타까운 대형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것도 4월의 봄에 평온하던 산악지형에서 전혀 예측할 수도 없었던 기상 이변에 의한 폭설이 내려 많은 장병들이 저 체온증 등으로 희생된 정말 가슴아픈 사고가 일어난 것이었다. 충북 영동군 용화면의 민주지산에서 발생한 소위 '민주지산 사건'으로 장교 1명과 부사관 5명이

반려견의 투정 [내부링크]

20여년 전 지방 관사에 살던 시절에 조그맣고 귀여운 강아지 한마리를 분양받아 기르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진도에서 순종 진돗개를 데려와 키우고 있던 지인이 그 개가 새끼를 낳았다며 새끼 한마리를 가져왔다. 젖을 뗀지 한참 지나서였는지 제법 키가 크고 하얗고 준수하게 생긴 순종 진돗개였다. 그래서 그런지 하는 짓이 다른 개와 달라보이기도 했다. 귀엽고 영리하며 눈치빠른 먼저 있던 작은 강아지는 관사의 베란다 에서 키우고, 위엄있고 힘있어 보이는새로 데려온 진돗개는 마당에 있는 개집에 줄을 묶어 살도록 했다. 정기적으로 산책과 운동을 시켜주는 일은 빠지지 않았다. 진돗개는 제법 믿음직스럽에 생겨 집을 지키기에는 안성맞춤인 것처럼 보였다. 먼저 있던 강아지와도 문제없이 잘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먼저 있던 강아지는 영리한만큼 진돗개 앞에서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얼마 않있어 가까이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만큼 친해졌다. 그러나 밥을 같이 먹거나 잠을 같이 자지는 않았다. 집안에서 자유롭

선행 주자의 피눈물 [내부링크]

'쪽박을 찬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경우 그 결과가 뻔히 보여 염려하며 비꼬듯이 하는 말이다. 해서는 않될 일은 결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필히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된다. 이정도쯤은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사고와 자신에게 관대한 행동과 처신은 생각보다 더 큰 안좋은 결말을 불러올 수 있다. 또한 그렇한 나쁜 결과는 나에게만은 안일어날 것이라는 근거없는 선민의식에 젖어 무리한 행위를 한 끝에 감당하기 벅찬 힘든 시련을 겪어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있다. 21세기에 막 들어 섰던 해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어느 일선 부대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K대령은 부대에서 부하 장병들과 단체운동을 마친 뒤 격려회식을 끝내고 퇴근 길에 올랐다. 보통의 경우는 회식시 술을 마시면 차를 부대에 두고 다른교통 수단을 이용하여 퇴근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는 불필요한 머리를 무모하게 굴렸다. 가까운 동료들이 모두 음주를 한 까닭에 차를 태워다 줄 사람이 없어서

'83년 8월 31일의 KAL 007기를 못 탄 것이 불운? [내부링크]

'83년도 6월 말 미국에서의 대학원 과정이 끝나, 이제 그동안 다녀보지 못한 서부지역을 포함한 많은 지역을 여행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귀국은 미국에서 체류 가능한 마지막 날인 동년 8월 31일에 KAL을 타고 올 예정이었다. 같이 데리고 갔던 세 명의 딸들도 귀국 전에 미국의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볼거리를 더 접하고 견문을 넓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소식이 서울에서 전해왔다. 처제가 곧 결혼식을 올려야 하니 빨리 돌아오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딸만 넷인 집안의 장녀였던 아내에게 처제의 결혼식은 거부할 수 없었던 집안 대사였다. 하는 수 없이 모든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귀국길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까지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로운 일반인과 달리 나는 공적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시 조기에 미국에 들어 갈 수 있는 기회는 얻기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처

어떤 '장포대'의 눈물 [내부링크]

'99년도의 여름이 시작될 무렵, M대령은 지방에서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었다. 직업군인들의 애환이기도 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당시 그는 장군이 지휘하는 부대의 부지휘관으로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었다. 그동안 쌓아온 경력이나 능력면에서도 남못지 않게 인정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부심 강한 장교였다. 보통의 경우에는 장군진급 심사에서 세번이상 탈락하면 거의 희망을 버리고 앞으로 남은 인생의 설계를 하는데 신경을 더 많이 쓰는 경향을 띤다. 소위 '장포대'가 된다. 장군진급을 포기한 대령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기실 내적으로는 완전히 희망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같은 해 6월의 어느날 저녁무렵이었다. 일과를 마치고 다른 동료와 함께 인근 소도시로 저녁 식사를 하러 나갔다. 가족들을 위해 지방에서 혼자 사는 장교의 경우에 외식을 자주 하게된다. 식사와 함께 가벼운 반주도 한잔 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동료와 함께 어느정도 거리가 있는 숙소를 향해

이상한 초병의 죽음 [내부링크]

'98년 7월 중순경 어느날 심야에 서울 인근 도시에 위치한 군단 을 지원하는 직할 부대에서 병사 1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하였다. 익사 사고였다. 한 밤중에 웬 익사사고가 발생했단 말인가? 사고 현장은 인천시와 인접한 공단에서 필요한 커다란 바닷물 저수지의 좁은 둑길을 따라 설치된 경계 철조망 옆에 세워진 경계 초소 앞이었다. 야간에는 반드시 2명이 복초로 경게임무를 서고 있었는데 그 중 후임병사 한명이 물에 빠져 숨진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이었을까. 원인을 규명해야 하는데 사망자는 말이없다. 선임병의 부당한 얼차려나 가혹행위가 있었을지도 몰라 다각도로 확인도 해보았다. 자살을 했다면 유서나 혹은 평소의 행적에 흔적이라도 있었을텐데 그런 흔적도 없었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그 장소에서 종종 익사사고가 발생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것은 그 곳에서 자주 여자유령, 다시 말하면 '처녀귀신'이 출몰한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고가 있기 전에 거기서 근무했던 한 병사의 이야기는 그냥 넘기고 지

목 없는 소령귀신의 하소연 [내부링크]

'98년의 여름이었다. 인천시 가까이 위치하고 있던 군단 직할 부대에서 복무중이던 병사 한명이 초병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오던 중 현지 탈영을 했다는 보고가 접수되었다. 무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상이 걸리고 긴급히 수배령이 전파 되었다. 그 병사의 집에도 통보가 되어 혹시라도 연락이 오면 알려달라는 협조도 구했고 다른 연고지에도 확인하여 그 병사의 흔적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다른 지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목마다 경찰과 함께 검문을 강화하고 혹시라도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여 협조 체제를 구축하는 등 일사 불란한 체포 작전을 전개했다. 그렇게 서너시간이 흐른 뒤 상황은 종료되었다. 영내의 야산에서 기절해 있는 그 탈영병을 발견한 것이다. 그렇다면 탈령병이 아니었다. 즉각 신문을 한 결과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내용이었다. 그 병사가 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돌아오던 중 전방에서 걸어오는 소령 계급장을 한 장교를 만났는데 어둠 속에서 그 장교가 "니 밥 묵었나? 나는

어떤 신병의 선택 [내부링크]

오랜 옛날의 이야기 같지만 바로 엊그제 같은, '76년도 여름 이었다. 그 당시는 대부분의 장정들은 논산 훈련소에 입소하여 그곳에서 훈련을 마치고 일선부대에 배치명령을 받았다. 서울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가정에서 편히 자란 A병사는 훈련이 끝날즈음 주위 동료나 선임조교 등이 하는 말들을 듣고 마음이 졸여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지역에 있는 보충대로 명령이 나는가에 따라 앞으로의 군생활이 쉬울 것인지 아닌지 결정이 난다는 것이었다. 먼저 들은 것이 춘천시에 위치한 보충대에만 않가면 된다는 말이었다. 그 곳으로 가면 강원도 산악 지역에서 힘들게 근무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A병사가 바로 춘천시 쪽의 보충대로 명령이 났다. '그 곳으로만 명령이 않나면 살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병사는 절망감을 느끼면서 다른 병사들과 함께 공포에 싸여 훈련소를 출발했다. 그래도 다른 동료들이 많이 함께 가니까 하고 자위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춘천 보충대에 도

어떤 초급 장교의 죽음 [내부링크]

'98년도 여름, 심야에 수원시 인근에 위치한 00부대의 영내에서 정체 불명의 폭발물이 폭발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모든 병사들이 잠들고 불침번들과 야간 순찰을 하는 간부들만이 움직이 고 있을 시간에 예기치 못한 폭발물이 폭발하는 소리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 소리에 놀라 부대에서는 비상이 걸렸고 5분 대기조가 비상출동을 했다. 폭발소리가 들린 곳은 영내에 구축된 사격장 쪽이었다. 사격장 광장 중앙에는 신체의 허리부분에서 정확히 둘로 잘려 분리된 사체가 한구 뒹굴고 있었다. 참혹한 광경이었다. 보통 폭발물이 사람과 함께 폭발할 경우에는 신체가 산산이 부서져 버린다는 것이 상식인데 그 밤의 폭발사고 현장은 달랐다. 분리된 하체에는 허리에 차고 있던 탄띠와 거기에 부착되어 있던 장구와 장비들이 고스란히 그대로 결합되어 있었다. 신원을 확인했다. 사망자는 그 부대에서 착실하고 유능한 장교로 정평이 나 있던 K 중위였다. 그는 그날 당직 근무장교였다. 확인된 바에 의하면

장마와홍수 그리고 남은 것 [내부링크]

섬진강 물이 밀고 올라와 둑을 넘쳐 흐르고 있는 전경 섬진강 물이 마을로 밀고 올라온 광경 곡성군 섬진강 자연습지 장마가 졌다. 연일 비가 내린다. 장마는 사람들의 분노와 같다. 왜냐하면 그것이 길어지면 감당하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가져오는 재앙은 한 순간에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고 많은 재산을 일시에 사라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장마로 인한 홍수피해는 우리가 신경을 써서 잘 관리하면 예방이 가능하거나 아주 면할 수 있다. 물 관리를 잘못해서 국민들이 입는 피해는 예로부터 나랏님이 책임져야 헸다. 그런데 오늘날은 물난리가 나도 책임질 관리도 없고 책임을 묻는 사람도 아예 없는 것 같다. 물관리를 잘 못해서 수많은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혀 놓고도 몇개의 군들과 시들의 지자체 장들이 합심해서 수자원 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야만 겨우 몇푼의 보상을 해주는 한심한 작태를 보여주고 있는 실정이다. 2014년 부터 아내의 건강을 위해 아담한 한옥 한채를 빌려 지리산

어느 재벌가 종손의 탈영생활과 부대생활 [내부링크]

'76년도 나는 강원도 인제군에 위치한 00연대에서 소대장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내설악이 가까워 훈련 지역은 주로 산악지형으로 형성되어 있어 야외 훈련은 항상 힘들기 마련이었다. 물론 야외훈련 그 자체가 힘이 든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특히 산악지형에서의 장거리 행군은 언제 해도 쉽지가 않았다. 소대원 중에 혹시라도 사고로 낙오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했고 행군 도중 휴식을 마치고 출발할 때에는 계속 잠들어 있는 병사는 없는지 특히 더 신경을 써야했다. 그런데 행군을 했다 하면 유독 낙오를 많이 하게 되는 약하게 보이는 병사가 있었다. 작은 체구는 문제가 될 수 없었지만 발이 문제였다. 발 뒤꿈치에 티눈이 박혀 있어서 장거리 행군시에는 너무 고통이 심해져 행군 속도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 소대원의 더 큰 핸디캪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가 다른 병사들보다 나이가 월등히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 소대원은 다른 소대원들보다 많게는 15살

화재로 인한 절명직전의 소대원 구하기 [내부링크]

'76년의 겨울은 말그대로 대단한 혹한이었다. 때를 맞춰 내가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부대의 혹한기 훈련이 시작되었다. 내설악에 가까운 한계령 계곡에서 부터 흘러 나오는 두갈래 시냇물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삼각주 같이 평탄한 지역을 혹한기 훈련장으로 선정하여 단위대별로 훈련을 실시하게 되었다. 꽁꽁 얼어붙은 땅을 2미터 가까이 파내고 10여명 정도 들어가 취침할 수 있는 공간을 분대별로 만들고 거기에 연통을 만들어 불을 피울 수 있도록 아궁이(벽난로)까지 설치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루 종일 땀흘리며 작업을 해야 했다. 연기가 잘 빠지지 않으면 병사들이 취침간 일산화 탄소에 중독될 수 있기 때문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했고 취침시에는 반드시 불침번을 배치해야 했다. 또한 외부에서 바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지붕을 마른 갈대나 나무 혹은 판초우의 등으로 견고하게 방풍 작업을 해야 했다. 취침호가 완성되어 불을 지피고 나면 그야말로 혹한 속의 아늑한 반지하 내무반처럼 된다. 그 안에는 필

절지작업시 감전사한 어느 병사의 아버지 [내부링크]

'87년도 여름이었다. 당시 일산읍 인근에 위치한 교육대대에서 영내에 심어져 있던 미루나무들의 가지치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 위로 뻗어있던 2만볼트 고압선에 나뭇가지가 닿을 경우 위험하기 때문에 사전에 안전조치를 하기 위해서였다. 사고 예방을 위한 사전조치였으나 오히려 그것이 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되었다. 사전에 전기를 차단하지 않고 절지작업을 하는 바람에 감전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한 병사가 톱을 들고 나무위에 올라가 높히 자란 미루나무 가지 밑부분을 잡고 톱질을 하던 중 나무가지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기울어지면서고압선과 접촉하고 말았다. 그 순간 2만 볼트라는 고압전류가 그 병사의 몸에 흐르면서 튕기틋이 나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바로 나무 아래에서 참혹하게 사망한 것이었다. 그 병사가 생활하던 내무반 바로 앞에서 끔직한 감전사망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그 병사의 손바닥은 새까맣게 타버렸고 그 의 발바닥은 전류가 흘러 빠져 나가면서 생긴듯 몸에서 무엇이 튕겨 나간 것처

박격포 지원반의 불운 [내부링크]

'76년 가을이었다. 아직 여름이 채 끝나지 않은 듯 무더운 날씨였고 소나기도 자주 내리던 시기였다. 강원도 인제군과 원통읍 주변 산악지형은 깊은 계곡이 많고 대부분이 협곡이다. 그 지역 일대에서 각종 훈련이 실시되고 각 훈련마다 많은 병력이 전개되고 이동한다. 그 해에도 어김없이 부대 전투력 평가를 위한 연대 전투단 시험이 치러졌다. 공격과 방어시험은 타부대에서 지원나온 대항군을 상대로 치루어진다. 방어를 하던 부대는 전력을 보강하며 적에 대한 역공을 시작하는 단계였다. 그 예하 단위대들은 각각 할당받은 공격 목표를 향해 공격 개시선을 통과하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전투는 눈 비를 가리지 않고 이루어 진다. 원통읍 인근의 야산을 목표로 인접중대가 공격을 실시하는데 박격포반은 소총 소대들이 목표를 향해 접근할 때 중대 후방에서 박격포 지원을 하다가 어느 정도 상황이 전개된 이후에 그 뒤를 따라 전방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공격 목표가 하천의 건너편에 있었기 때문에 박격포 지원반

한강 하구 경계초소 총기 사망 사고 [내부링크]

'87년 여름이었다. 서울에 가까우면서도 북괴군이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한강 하구의 강변을 24시간 지키고 있는 경계초소들이 많이 있다. 그 곳에서 고생하는 우리 병사들을 의식하는 서울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 한 느낌이었다. 그 전에는 바닷물이 만조시 차오르는 한강물길을 타고 북괴군 특수 요원들이 손쉽게 침투해 들어 왔었다고 한다. 옛날에 강안에서 야간경계를 서던 초년병이 심야에 물길을 타고 침투한던 적의 공작요원 들을 미리 설치해둔 크레모아를 폭발시켜 섬멸하는 공을 세워 많은 상금과 함께 훈장도 수여받고 뉴스와 신문지상에 대서 특필 되었던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 지역이다. 그리고 그 침투 코스가 그 북괴군 특수부대 요원들의 담력훈련의 마지막 과정이었다라는 말도 있었다. 서울과 가까운 한강하구는 지금도 늘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않되는 중요한 지역이다. 그 지역의 경계 초소는 본부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간부들이 수시로 순찰 등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곳이었다. 한 초소에 경계병 2

반려견과의 안타까운 이별 [내부링크]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 처음 입양했던 강아지 한마리가 있었다. 영국산 개량종인 듯한데 하얀색으로 체구가 작고 다리도 길지는 않았으나 균형 잡힌 모습이 외견상 제법 귀티가 흐르는 예쁜 강아지였다. 평소 대단히 영리히고 눈치가 빨라서 사람 말을 잘 알아듣는 듯 했다. 강아지 집은 화분들이 놓여 있는 관사 베란다 안에 두었다. 베린다 안에는 슬리퍼들이 놓여 있었는데 그 강아지는 절대로 그것을 깔고 앉거나 물어 뜯거나 하지 않았고 빈드시 그것들을 피해 다녔고 가로질러야 할 때에는 껑충 건너 뛰었다. 화초는 물론 손대지도 않았고 일체 접촉 자체를 하지 않으려 했다. 한마디로 주인이 가꾸거나 사용하는 물건에 대해서는 일체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듯 했다. 관사에 고양이 한마리도 같이 키웠는데 우연히 엄마를 잃어버린 것을 주워와서 키우게 된 것이었다. 그 고양이와 한 집에 살면서도 텃세를 부리지도 않고 잘 데리고 놀았다. 고양이가 용변을 보고나서 땅을 파고 덮는 보습을 보고 강아지도 그게 좋아 보

반창회 [내부링크]

어젯 저녁에 51년 전에 헤어졌던 고등학교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이 '반창회'라는 이름으로 모임을 갖었다. 3학년 4반 반창회였다. 적지 않게 15명이나 모였다. 모임은 전에부터 있어 왔었지만 나는 10여년 전에 한 번 참석해 본 이래 참으로 오랫만에 참석 한 것이었다. 10여년 전에야 60세 내외의 나이로 아직 혈기가 왕성할 정도로 젊어 보이던 친구들이었는데 어제 보니 대부분 고희를 지낸 늙은이들의 모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모두들 어떻게 건강하게 잘 살다가 잘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화의 핵심이었다. 나는 2003년 5월에 일어난 아내의 뇌출혈에 의한 뇌수술 이후부터 병간을 시작해서 아내가 다시 2016년 6월에 급성 신부전증으로 간 이식수술을 받은 뒤 더 바빠지게 되어 줄곧 반창회 모임에 동참을 하지 못하였었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개인별로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들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의 아내 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의 부인들도 많은 숫자가 병마와 싸우고 있었고

생명줄 [내부링크]

생명줄이라는 것이 있다. 생명줄은 말그대로 그것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절대 필요한 줄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명처럼 소중이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생명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소중한 것일 지라도 그것이 없어졌다고 바로 죽음에 이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유일한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그 생명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특전부대에서 낙하산을 메고 저공에서 실시하는 전술 점프를 할 때의 생명줄은 바로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낙하산과 비행기 내부 천정에 설치된 강철 와이어로 제작된 안전줄을 연결하여 등에 짊어진 낙하산을 끌어 당겨 짧은 시간내에 펼쳐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노란색의 생명줄이다. 그 생명줄은 할일을 다한뒤 낙하산과 분리되어야한다. 낙하자의 체중과 주 낙하산 및 예비 낙하산의 하중에 의해 생명줄과 낙하산의 연결선이 자동으로 끊어지게 되어 있다. 낙하할 지점이 가까워지면서 기내 안전 요

총기장난은 죽음을 부른다. [내부링크]

'78년의 초의 봄이 멀지 않은 어느 겨울날이었다. 전방 중서부 전선의 0사단 포병연대의 진 출입로는 인접지역과 유사하게 산악지형의 산을 깎아 만들어진 것이라서 길의 커브가 많고 협소한 편이었다. 따라서 겨울에 눈만 내리면 모든 부대가 그럿듯이 제설작업을 최우선으로 실시해야했다. 부대가 항시 출동을 할 수 있으려면 작전도로가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제한된 전투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최선의 방편이기도 하다. 그날도 눈이 많이 내렸다. 하루 종일 내리던 눈을 계속 내린다고 방치해 두고 다음날 눈이 그친뒤 한꺼번에 치우려면 너무 벅차기 때문에 수시로 치우지 않으면 않되었다. 오후 1500시경 연대 경비소대의 일부만 제외하고 전 병력이 출동을 했다. 작전 도로상의 눈을 치우는 제설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도로 구간을 단위대별로 할당하여 최대한 많이 눈을 치우도록 했다. 치워도 치워도 눈은 계속 내려 쌓였다. 한마디로 눈과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것

1번 국도의 검문소에서 생긴 일 [내부링크]

'87년의 가을이었다. 문산읍 방향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모든 차량들이 반드시 통과를 해야 하는 1번 국도상의 검문소 하나가 있다. 서울을 방호하기 위해 구축된 축선상의 마지막 대전차 방벽의 바로 앞에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헌병(군사경찰), 기무요원, 경찰 등이 함께 근무를 섰다. 따라서 그 곳에서는 다양한 범법자들이 잡히곤 하였다. 수년간 숨어 살던 기소 중지자들도 간간히 잡히기도 하고 가볍게 반주 몇잔 했다가 음주운전으로 적발된 운전자들도 있었다. 특히 전방에서 군복무를 하던 병사가 면회 온 가족들의 자동차 트렁크 속에 숨어 서울로 들어가려다가 발각되어 현지탈영병으로 체포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그런 경우는 당사자인 그 병사보다 그의 가족들이 더 놀라서 한동안 소란스런 광경이 연출 되곤 하였다. 그러나 가족들이 울고 불고 사정을 해도 예외없이 의법 처리될 수 밖에 없다.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는데 가족들까지 동조를 해서 자식을 망치려 했는지 좀 이해가 않되는 상황이었다.

구월산 유격대원 육사생도가 되다. [내부링크]

'50년도 6월 25일 평양의 휴일은 조용했다. 당시 명문고교로 알려져 있던 평양 제1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K는 친구하고 휴일을 즐긴 다음 집에서 쉬고 있었다. 그런데 라디오에서 남조선이 갑자기 북침을 해서 삼팔선에서 쌍방간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는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K의 부모는 놀라서 다음날 학교를 나가지 말라고 당부하고 그냥 집에 있도록 했다. 고학력의 부유한 부르죠아 계층으로 분류되어 재산도 몰 수 당하고 핍박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있던 부모들로선 당연한 불안심리가 작용한 것이었으리라. 일견에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었다고 직감을 한 것이었다. 월요일 오전 등교시간이 지났는데도 학교를 오지않는 K와 이웃의 친구 한명을 학교 담임 선생이 자전거를 타고 데리러 왔다. 전교생을 등교시키라는 지시가 당에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이웃 친구와 함께 담임선생을 뒤따라 학교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자전거를 탄 담임선생을 따라 대동강 지류의 제방 길 위로 올라서

산골 아가씨와 어떤 부사관의 사랑 [내부링크]

'78년도 가을이 깊어 갈 무렵이었다. 중서부 지역 0군단의 예비사단인 0사단의 포병부대는 사단 사령부보다 더 전방에 배치되어 있었다. 그 포병부대에 중사로 진급한지 얼마 되지 않은 부사관 P가 전입을 해 왔다. 누구나 새로 전입을 오게되면 적응하는데 한참이 걸린다. 우선 부대 독신자 숙소가 있으면 거기서 숙식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숙소를 부대 밖에다 얻어야 한다. 그 당시 전방지역의 영외 거주자는 통상 행동이 자유로운 인근 마을의 민가에서 방을 한칸씩 빌려 월세를 내며 살곤 하였다. 당시는 오늘날처럼 인터넷이 발달되어 있지도 않았고 PC방처럼 전자게임같은 것을 즐길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특히 전방의 소읍이나 산골 마을에는 일과 후에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장소는 찾기 힘들었다. 고작해야 작은 음식점들과 소위 옛날식 다방이나 소주나 막걸리 등을 파는 주점등이 있었다. P중사도 마찬가지로 부대 인근의 작은 마을에 방 한칸을 얻어 살기 시작했다. 부사관이 중사가 되면 이

선 후배간의 삼각관계가 남긴것 [내부링크]

'77년도 가을 K는 전방의 예비사단인 0사단 00연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제 초급 장교로서 군생활을 시작하는 단계라서 매사에 적극적이었고 두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야전에서 실제로 배워야할 것이 많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시기였다. 전방의 가을은 왔는가 싶으면 금방 겨울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군단 사령부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에 그런대로 최전방지역보다는 일반 사람들을 자주 볼 수도 있고 만나볼 수도 있는 소 읍이 있는 곳이어서 사령부 인근에는 상가도 제법 형성되어 있었고 사람들의 왕래도 많은 편이었다. 특히 요식업소들은 장병들을 면회 오는 타 지역 사람들 덕에 연명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서울을 왕래하는 시외버스 터미널이 작은 규모로 운영될 정도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사람들이 제법 많은 전방 지역이었다. 따라서 장병들도 출입이 잦은 편이라서 시골의 작은 소읍임에도 불구하고 군단 헌병대에서 헌병(군사경찰)초소를운영하고 있었다. 보통 교통초소는 24시간 상주시설을 운영하지않는 것이 원

갑자기 찾아온 친구의 치매 [내부링크]

S라는 한 친구가 있었다. 외모도 훤칠하고 잘 생겼을 뿐만 아니라 지적이나 인격적인 면에서도 대단히 훌륭한 친구였다. 그래서 그랬는지 친구들 중에서 제 1번으로 결혼을 했다. 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바로 첫번째로 교정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었다. 많은 친구들이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S는 육군 대위로 근무하던 중 일반 공무원 사무관으로 신분을 전환하여 건설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본성과 친화력 있는 성품을 바탕으로 능력을 인정 받아 다양한 경력을 쌓고 계속 승진하여 국립의 K 공단 이사장까지 역임했다. '19 년 가을 S는 정년 퇴임을 한 뒤 친구들과 등산을 통해서 체력과 건강관리를 해오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S는 종종 등산 약속을 잊어버리고 빠지는 일이 잦아졌다. 그 때마다 연락을 하면 약속했던 일을 까막케 잊고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 등산시 친구들과 산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산을 내려온 S는 한동안 어디로 가야할지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왜 같은 방 선배의 차를 훔쳤을까? [내부링크]

'93년도 가을이 깊어갈 무렵이었다. 지금은 대통령실이 들어선 건물을 군의 '합동참모본부'가 쓰고 있던 시절이었다. 보통 '합참'이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한 과사무실의 팀 중에는 대령인 과장 밑에 중령들이 몇 명 있었다. 그중 선임인 M중령은 영외로 점심식사를 하러 갈 때 후배인 P중령을 다른 과원과 함께 자신의 차에 태우고 나가곤 했다. M중령의 자동차는 새로 산지 얼마 되지 않아 늘 깨끗하고 깔끔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함께 동승한 후배 P 중령은 늘 부러운 눈길로 그 차를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그 선배 자동차를 바라보던 P의 눈빛은 언제부턴가 음흉한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P는 M선배의 자동차를 훔치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하고 고심하다가 우선 먼저 M선배의 자동차 키를 복사하기로 했다. M중령이 자리를 장시간 비우는 틈을 노렸다. 인근의 자동차 키를 복사해주는 곳도 물색해 놓았다. 어느 날 M중령이 영내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자동차 키가 들어있는 설합에서

전역 하루 전 K병장의 분노와 결과 [내부링크]

'77년의 늦가을이었다. K병장은 중서부 전선 0군단 사령부 본부대에서 근무중이었다. 겨울이 되기 전의 병영 안의 가을은 참 할 일이 많다. 겨울을 나기 위한 준비를 많이 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는 병사들의 내무반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는 뻬치카라고 하는 것을 내무반 중앙에 설치해서 거기에서 방사되는 열로 내무반 공기를 따뜻하게 하는 식으로 난방을 실시했다. 이러한 것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보수를 하거나 다시 재설치를 해야한다. 그리고 뻬치카는 불을 온돌방처럼 내무반 밖에 있는 아궁이에서 불을 때야 하기 때문에 겨울 내내 땔 나무를 해다가 쌓아 놓아야했다. 그럴 경우 그 베치카 곁은 항상 따뜻하고 좋아서 그자리는 통상 내무반장이나 고참 병장의 자리가 되곤했다. 그리고 아궁이는 특별한 날 병사들이 군용장구인 반합에 라면을 끓여먹기 좋은 장소이기도 했다. K병장은 이제 며칠 후면 전역신고를 하고 전역을 하게 되어 있었다. 이 기간 동안에는 매사에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선배들로부터

운좋은 Y 원사 이야기 [내부링크]

부사관 Y원사는 하사계급 시절 전방 0군단 사령부 헌병(군사경찰)대에 근무했다. 주로 헌병 작전을 수행하는 요원으로 근무를 하다가 성실하고 근면한 근무태도에 따라 부대 본부 작전과에 발탁이 되었다. 그 부서에서 그는 군기유지업무와 작전지원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하면서 상급부대와 예하부대간 교량역할을 잘 하면서 그의 능력을 대 내외적으로 인정을 받았다. 따라서 다른 동기들 보다 우선적으로 진급을 할 수 있었다. 부사관 진급심사도 장교 진급 심사처럼 결코 쉽지는 않다. 특히 헌병(군사경찰)과 같은 특수 병과는 부사관도 육군본부에서 중앙 심사를 하기 때문에 남보다 빨리 진급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중사로 진급한 후에도 Y는 변함없이 성실했으며 퇴근 후에는 끊임없이 자기 발전과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또한 봉급을 타면 매달 내야하는 월세 방값을 내고 나서 최소한의 필요한 용돈 외에는 모두 정기 적금등 저축을 하였다. 건실한 태도와 바른 몸가짐을 갖춘 Y

특전부대 K중사의 마지막 점프 [내부링크]

'77년도 5월 경이었다. 북한군들 30여명이 집단으로 도끼를 휘둘러 미군 2명 등을 살해했던 '76년 8월 18일의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한 이후 우리 군의 국토 방위 훈련은 더욱 강화 되었었다. 또한 언제 도발해 올지 모르는 적의 특수 부대의 우리 후방지역 침투에 대비해서 우리 특수전 부대들은 대침투 훈련을 강화 했다. 그리고 유사시 우리의 특전부대원들도 즉시 북한 후방지역에 침투하여 전략적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이러한 훈련은 실전과같이 이루어지는데 그해 5월에 실시하는 훈련도 그렇한 목적하에 이루어지는 대침투 훈련이었다. 특전사 0공수 특전여단은 작전지역으로 할당된 경상도 예천과 영주 지역에 공중으로 침투하여 적군의 게릴라 부대처럼 그 지역에 있는 우리의 주요시설을 폭파하거나 주요인사를 생포 혹은 사살하는 특수작전 임무를 수행 하는 것이었다. 반면에 우리의 향토 예비군들은 우리 특전요원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주요시설을 경비하고 방어하면서 특전요원들을

어떤 대령의 교통치사 사고 [내부링크]

'93년도 10월 중순이 지나 가을이 깊어가는 날의 새벽에 발생한 일이었다. A대령은 일요일 새벽 0500시경에 집을 나서서 서울에서 좀 떨어진 소읍에 있는 골프장으로 차를 운전해 가고 있었다. 골프 부킹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운행을 해야했다. 어둠이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새벽녘의 빠른 자동차 운행은 위험을 동반한다. 골프장 가는 길은 시골 마을 길을 통과해야 했다. 새벽이라서 사람의 통행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A대령은 비교적 빠른 속도로 자동차를 운행하고 있었다. 마을 모퉁이를 돌아서 언덕길에 접어들어 속도를 조금더 올려 차를 몰던 A대령은 차 앞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길을 건너는 사람 한명을 목격했다. 새벽에 돌연히 나타나 길을 건너는 사람을 A는 피할 수 없었다. A대령은 브레이크를 급히 밟으며 차를 정지 시켰으나 이미 사람을 친 후였다. A대령은 온 몸이 식은 땀으로 젖어버렸고 눈 앞이 깜깜해졌다. 한 순간에 커다란 공포와 함께 온갖 상념이 다 떠올랐다.

토네이도를 체험하다. [내부링크]

2006년 12월 말경,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한지 4년이 조금 넘은 때에 아무래도 아내가 여러가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미국으로 잠시 요양을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미국의 오대호 를 끼고 있는 동북부의 미시간 주를 선택해서 비행기를 탔다. 그 미시간주는 겨울에도 오대호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심하게 춥지도 않고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미국 동부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들을 손쉽게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미시간주의 행정수도인 '랜싱(Lancing)'이라는 크지 않은 도시의 외곽에 형성된 전원 아파트 단지에 1년 조금 넘게 살았었는데 건물은 목조건물로 전통적인 서구식 방식으로 지어진 3층 빌라 형 아파트였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려 아파트주변이 온통 눈으로 덮히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우리는 2층에 살았었는데 오르내릴 때마다 계단에서 나는 삐걱 거리는 소리도 싫지가 않았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앉아 있으면 조용하고 아늑한 것이 저절로 힐링이 되는 것 같은 느

육본 전산처 K대령에게 생긴일 [내부링크]

'93년도 10월 초였다. 당시 K대령은 육군본부 기획관리부 전산처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전산처에서는 그동안 격무로 고생했던 전 근무자들을 격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주말인 10월 9일 토요일에 단체로 바다낚시를 가면 좋겠다는 의견이 받아들여져 낚시하기에 최상의 명소로 정평이 나 있는전북 부안군에 위치하고 있는 '위도'를 주말 낚시 모임 장소로 선택을 했다. 그런데 당시 전산처 과장이었던 K대령은 갑자기 주중에 복부에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다. 진료 결과 담석이 발견되었다. 그 아픔이 참을 수 없을만큼 컸다. 군의관은 그렇다면 당장 수술을 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K대령은 쓸개 없는 사람이 되기 싫다며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으로 가서 치료하겠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담당 군의관은 많이 아플 경우에 담석이 있는 부위에 염증이 발생할 수 있다하며 소염제를 처방해주었다. K대령이 처방전대로 소염제를 먹고나자 신통하게도 어느정도 진통이 사그러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X

간이식 환자 아내의 식단 [내부링크]

나의 아내는 2016년 5월에 간혼수 상태에서 하루 이틀의 생명 연장을 위해 돼지 간을 활용한 간 기능 대체 실험의 대상이 되었었다. 병원에 실험 중 죽어도 이의 없다는 각서를 작성해주고 중환자실에서 대기중이었다. 돼지간 실험은 아내의 혈액을 관을 통해 체외로 빼어내어 돼지의 간을 엷게 잘라 만든 인공간을 통과하도록 해서 기능이 망가진 체내의 간을 대신하도록 하는 단기 생명 연장 실험이었다. 잘못되면 죽을 수도 있는 실험이었던 것이다. 성공하더라도 잘해야 이틀간 생명을 연장할 수 있다고 했다. 그 기간 중에 간 기증자가 나타나면 간 이식 수술을 통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정되어 있던 실험 당일 새벽에 기적적으로 간 기증자가 나타났다. 40대 초반의 젊은 청년이 주말에 놀러 나갔다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를 당해 사망하면서 유지에 따라 유가족들이 장기를 기증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청년으로부터 받은 간은 대단히 튼튼하고 건강했던 것 같다. 전생에 어떤

방위병 P의 건빵 사고 [내부링크]

'86년의 봄이었다. 방위병 P는 매일 아침 일찍 집에서 출근하였다. 근무지는 육군사관학교 근무지원단이었다. 집은 서울의 미아리에 있었다. 보통은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시내버스를 타고 갈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P는 그냥 걸어서 태능에 있는 육사까지 가는 것이었다. 건강을 위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P는 버스 요금을 아끼기 위해서 걷는 것이었다. 넉넉치 않는 살림에 걱정하시는 부모님을 위하는 한 방편이기도 했다. 보통 자식이 군대에 가면 군 복부기간 만큼은 입을 하나 덜 수 있어 좋다고 하는데 P는 군에 입대를 했는데도 계속 집에서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부모님께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다. P는 부대에 일찍 출근하면 부대에서 아침을 먹을 수 있어서 좋았다. 군 복무 18개월 동안 출퇴근 하면서 생활하는 것이 방위병에게 주어진 특전처럼 생각되지만 P에게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영내에서 생활할 경우는 출퇴근 하는 고충은 없었을텐데 하는 생각도 했다. P가 하는 일은 부대

중환자실 아내의 앞 병상 [내부링크]

'03년 5월25일, 이날은 평생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일 것이다. 아내가 뇌출혈로 쓰러진 날이기 때문이다. 뇌 동맥류가 원인이었다. 뇌 속의 혈관에 많은 혈액이 통과하면서 약해진 혈관이 부풀러 올라 꽈리 모양이 형성되어 있다가 결국 한 순간에 터져버린 것이었다. 사전에 무심했던 나의 잘못이 크다는 생각이 든다. 평소 머리가 많이 아파하는 경우가 많아서 주로 펜잘을 많이 먹다가 나중에는 타이레놀을 옆에 두고 살 정도였다. 늘 머리를 숙이면 피가 앞으로 쏟아지는 것 같다고 했었다. 아내가 쓰러지기 1년전이었다. 어느날 가족들이 돌아가며 혈압을 재보던 중 아내가 나도 한번 재보자는 식으로 혈압을 재보고서야 윗혈압이 최고 200이 넘고 아랫혈압이 130을 넘는 고혈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혈압이 높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아내는 그 때부터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몸무게가 70 Kg을 넘나들던 때였다. 아내는 매일 8시간 이상 운동을 하고 음식도 꼭 필요한

친구 K의 고소공포증 [내부링크]

친구 K는 '74년 여름에 '타워 마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명예로운 호칭인듯 하지만 그 반대다. 특전사 공수 교육대에서 공수 훈련을 받을 때 붙여진 불명예스런 별명이다. 공수 훈련은 본래 지상에서 3주동안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강하를 할 때에 필요한 모든 것을 숙달할 수 있도록 훈련을 한다. 그리고 나서 4주차에 실제로 비행기에 탑승하여 강하를 하는 것이다. 최소한 3회의 주간 강하와 1회의 야간 강하를 해야 공수훈련 수료를 하고 공수휘장을 받을 수 있었다. 지상훈련은 한여름 땡볕과 무더위 속에서 실시하는 것인만큼 대단히 힘들고 사람들을 쉽게 지치게 하였다. 낙하산을 메고 비행기에서 뛰어 내릴 때 제대로 자세를 갖추지 않고 내릴 경우 잘못하면 낙하산이 꼬일 수가 있고 몸에 이상이 올 수도 있기 때문에 뛰어 내릴 때의 몸의 자세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래서 지상에 비행기 모형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서 뛰어 내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것을 막타워라고 부르는데 그곳에서 뛰어 내리는

인생의 유통기한과 기차여행 [내부링크]

곡성 기차마을의 옛날기차 인생은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마트의 가공식고품과 같다. 왜냐하면 유통기한이 정해져 있는 가공식품은 기한이 차면 찾는 사람이 많이 없고 반액세일 정도 해야 팔릴까 말까 하는 것처럼 사람도 유통기한이라고 할 수 있는 자력으로 힘있게 걸을 수 없는 나이가 되면 더 이상 상품가치가 없는 사람으로서 누구하나 거들떠 보는 사람이 없게 된다. 단지 유통기한 안에 적립해둔 재고가치를 덤으로 내 놓아야 관심을 갖는 척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뿐이다. 한마디로 사람은 유통기한이 지나면 주위에 부담만 주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뒤따라 오는 것은 외로움 뿐이다. 그러나 인생이 유통기한이 있는 가공식품과 다른 점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인생의 유통기한은 인간들의 개개인의 의지에 따라서 더 연장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유통기한을 갖고 있다면 그 얼마나 삭막한 세상이 되겠는가.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개개인의 다양한 사고와 창

울고넘던 박달재 [내부링크]

'77년 5월초 나는 다른 팀원들과 함께 중무장을 한채 산길을 걷고 있었다. 내가 특전사 0여단 00지역대 00중대 부팀장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천리행군은 강원도 정선에서 출발해서 충청북도를 거쳐 경기도 그리고 서울의 거여동까지 걸어가는 기나긴 장정이었다. 천리행군 코스는 들길이나 산길로만 걷도록 되어 있었다. 큰 길로 행군을 해서는 안되었다. 전시에 적진 후방에 침투하여 적지역을 교란하거나 적의 주요 전략시설등을 폭파하는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특전사 요원들이 큰길을 걸어갈 수는 없기때문이다. 모든 부대 이동은 전술적인 원칙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천리행군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야간에 중무장을 하고 산악지형으로 공중침투를 했다. 강원도 평창지역의 산골로 야간에 커다란 수송기를 타고 집단강하를 실시했다. 그런데 우리가 낙하한 곳은 넓은 개활지가 아니고 산골의 조그만 마을 옆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떤 팀원은 너와집 지붕 위로 떨어지기도 하고 일부는 나무위에 걸려 매달리기도 했다

상급생도의 정신교육과 폭행 [내부링크]

'21년 9월27일은 Y의 돌아가신 장인어른의 육신을 화장하던 날이었다. 충북 국립 괴산호국원에 도착해서 화장장으로 들어가던 중에 다른 장례행렬을 만났다. Y는 그 장례객들의 맨앞에 들려 있는 큰 영정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옛날 군의 현역시절에 Y가 육사에서 함께 근무했던 장군이었다. 자신을 많이 아껴주었던 고B장군의 장례행렬을 바라보며 그 옛날 그분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고 B장군이 옛날 생도시절에 같은 중대에 성격이 좀 거칠고 독특한 선배가 한사람 있었는데, 후배 생도들을 'ㄷ'자 광장에 집합시켜놓은 뒤 한 생도씩 세워놓고 뒤로 물러 섰다가 달려오면서 2단 옆차기로 가슴을 차는 가혹한 폭행을 정신교육을 한답시고 했다고 하였다. 옛날 육사의 생도들이 생활하는 생도대 건물의 뒷편 모양이 'ㄷ'자처럼 보인다고해서 일명 'ㄷ'자 광장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광장에서 많은 후배들이 단체로 선배들로부터 얼차려 교육을 받곤했다. 그래서 장군이 된 후에도 "그 선배만 보면 기분이

꿈은 생명의 원동력 [내부링크]

꿈은 깨끗한 산소와 같다. 왜냐하면 산소가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듯이 꿈도 사람들에게 생명력을 유지하면서 미래 지향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살기 위해서 항상 산소를 마셔야 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람답게 활력을가지고 살아가려면 매일매일 아름다운 미래를 향한 꿈을 꾸어야 한다. 아무리 현실이 슬프고 고달프고 힘들다 하더라도 한평생 그렇게 침체되고 우울한 인생을 살 수는 없는것이다.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로지 생명의 원동력인 꿈을꾸는 것이다. 청년은 청년의 꿈을, 중년은 중년의 꿈을, 신 중년은 신 중년의 꿈을 각각 꾸면 되는 것이다. 비록 꿈의 지향하는 방향이 각각 다르고 크기가 다를지라도 모든 꿈들은 결국 더 나은 삶의 질과 더 큰 정신적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꿈만 꾼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계획을 수립해야한다. 그리고 그 구체화 된 계획

초등 동창 K 이야기 [내부링크]

친구 K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시골의 초등학교에서 학급 반장을 졸업할 때까지 나와 함께 한 학기씩 교대로 했었던 친구였다. 음악 시간에는 내가 큰 북을 치면 K는 작은 북을 두드렸다. 학교가 파하면 학교에서 제일 가까운 집에 사는 K의 집에 가서 놀다 가곤 했었다. 그 친구 방에서 빌려온 만화책을 보다가 집에 늦게 들어가기도 했었다. 봄이면 말 그대로 산과 들이 온통 꽃으로 물들었었다. 복숭아 꽃 살구꽃이 많았었는데, 복숭아보다는 매화꽃이 더 많았고 살구 꽃이 제일 많았던 같았다. 초등학교 교정엔 일본인들이 심어 놓았을 벗꽃들이 가득히 피어나서 참 아름다웠다. 봄에 앞 산에 올라가면 꽃이 만발한 숲 속에 커다란 집보다 더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바위 위가 평평해서 '평바위'라고 불렀다. 그 위에서 20명 이상 앉아서 쉴 수 있을 정도로 큰 바위였다. 그 바위 위에서 아직 덜 녹은 계곡의 얼음을 깨 먹으며 친구 K와 함께 뛰어 놀았던 기억이 새롭다. 여름이면 다른 친구들과 함께 동네

예비역 H 장군이 무릎을 꿇은 이유 [내부링크]

'0000년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다. 0군 사령부 참모장실에서 군 헌병(군사경찰)대장 실로 전화가 걸려왔다. 참모장이 사무실로 급히 와달라는 전갈이었다. 군 헌병(군사경찰)대장 Y대령은 이유를 묻지 않고 바로 참모장실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얼마전에 0군 예하 00사단장을 마치고 전역한 H장군이 함께 있었다. 안색이 무엇엔가 충격을 받은 듯 새하얗게 질려 있는 것 같았다. Y대령은 그럴만한 이유를 짐작케 하는 사건이 떠올랐다. 그 당시 그 H 장군이 지휘했던 부대의 살림살이를 관장하던 P 소령이 개인적인 욕심과 사행심으로 부대의 운영상 책정되었던 예산의 일부를 사적으로 사용하다가 결손이 생겨 불법적인 행위를 한 사실이 발각되자 출근을 하지 않고 잠적을 해버린 사건이 발생했었다. 따라서 군의 헌병(군사경찰)대 수사팀이 출동을 했고 추적끝에 P소령을 체포하였다. 그런데 체포된 P소령이 조사과정에서 진술한 내용을 바탕으로 확인된 횡령금액과 그 사용처의 일부가 그가 모셨던 H장군

2년 전의 오늘 물난리 [내부링크]

어제 8월 8일 내린 집중폭우로 서초구 우리 아파트 동네 주변에서도 물난리가 났다. 교대역에서 강남역에 이르는 주변 도로가 완전히 범람한 강물같이 변해버렸다. 그리고 오늘은 진정이 되는 듯 보인다. 2년전 오늘, '20년 8월 9일은 아내의 요양을 위해 내려가 살던 지리산 자락에 있는 시골의 아담한 우리의 한옥 주택이 섬진강이 범람하여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모습을 들어낸 날이다. 2년 전 8월 8일 하룻밤을 자동차 속에서 노숙을 한 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의 모든 것들이 온통 흙탕물에 젖어 참혹고 끔찍한 상태로 변해 있었다. 당시 계속된 장마와 이번 비처럼 내렸던 집중 호우 외에도 운암댐 물관리 실패로 빚어진 인재가 겹친 재난이었다. 집안의 모든 가재도구와 전자제품은 쓸 수 없게 되어버렸고 아끼던 우리의 오리지널 LP 원판 음반 1500여장과 2000여권에 달하는 서적들이 쓰레기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했던 모든 추억물들과 평생 동안 모아놓은 공적 사적 참고자료들이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