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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내부링크]

통도사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영축산은 부처님 당시 마가다국 왕사성의 동쪽에 위치한 산 이름이다. 이 산의 모양이 불법을 직접 설하신 인도 영축산과 통한다 하여 통도사라 한다. 또한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사라 한다. 창건 당시에 대웅전·적멸궁(寂滅宮)·법당 등의 건물이 있었고, 금강계단에 진짜 부처인 진신사리가 안치되어 있으므로 대웅전에는 부처의 모형인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절 이름은 영취산의 기운이 서역국 오인도(西域國五印度)의 땅과 통한다고 하여 통도사라 불렀다고 한다. 자장은 이 절에서 금강계단을 쌓고 보름마다 불법을 설하여 계율종의 근본 도량이 되었다. 대웅전은 본래 석가모니를..

고려문화의 꽃 청자와 그외의 문화들 [내부링크]

고려청자 고려청자(高麗靑磁)는 고려 문종(文宗) 시대 전 후에 송(宋)의 화남 절강성 월주요(華南浙江省越州窯)의 영향을 받고 일어난 것으로서 고려청자는 고려시대 만들어진 푸른색 도자기로 당시의 뛰어난 기술과 화려한 귀족 문호를 엿볼 수 있다 조상들의 전통적인 도자기 제조 기술을 바탕으로 송나라의 기술을 받아들여 더욱 발달하였다 초기의 청자는 매우 소박한 데서 출발하여 점차 기술이 숙련됨에 따라 예종(睿宗)·인종(仁宗) 때에 이르러 이른바 비색청자시대(翡色靑磁時代)를 이루며 고려청자의 진면목을 보이는 상감청자를 낳는데 이는 순전히 고려인의 창의력에 의한 것이다. 상감 법이란 자기를 완전히 건조시키기에 앞서 무늬를 음각하거나 새김판으로 찍고 그 자국에 백토(白土) 혹은 적토(赤土)를 메워 일단 초벌구이한 후..

고려의 문화 [내부링크]

고려 불교의 발전 고려 사람들은 대부분이 불교를 믿었고 건국 초부터 나라의 지원과 보호를 받으며 크게 발전하였다 태조 왕건은 후대 왕들을 위해서 훈요 10조를 유언으로 남겨 불교를 숭상할것과 또한 불교 행사인 팔관회와 연등회를 성대히 열것을 당부 하였다 승려를 대상으로 한 과거시험 승과가 시행 되었고 시험에 합격한 승려들은 나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 학식이 높은 승려를 나라의 스승인 국사 또는 왕의 스승인 왕사로 임명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승려로는 대각 국사 의천과 보조 국사 지눌이 있다 대각국사 의천은 고려 제11대 임금인 문종의 아들이었는데 송나라에서 불교를 공부 하고 돌아와 고려 불교 발전을 위해 노력했으며 해동 천태종을 창시하였다 보조 국사 지눌 은 승려들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것을 ..

삼별초 항쟁 [내부링크]

삼별초의 항쟁(1270년 ~ 1273년)은 고려, 몽골 전쟁이 끝나고서 삼별초가 원나라에 대항해 일으킨 항쟁으로 삼별초의 대몽항쟁이나 삼별초의 항쟁으로 불리기도 했다. 배경 원래 삼별초는 봉기하기 전에는 고려 조정의 휘하에 있었다. 또한 삼별초는 최 씨 무신정권의 사병 집단이었고 군부독재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애초 고려 무인 정권의 사병 집단이면서 대몽 항쟁에서 선봉에 섰던 삼별초는 고려와 몽고 사이의 강화와 굴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개경 환도가 발표되자 즉각 반기를 들었다.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자 최 씨 무인정권은 1232년에 강화도로 천도하고서 몽골의 침략에 맞섰다. 하지만 기반이 허약한 고려는 잦은 반란에 직면한다. 반란 중 일부는 평정되었지만, 북부 지역의 반란 무리는 몽골로 이탈하고 그 영토..

몽골의침략과 고려의 항쟁 [내부링크]

고려가 최 씨의 무신정권하에 있는 동안 중앙아시아 대륙에서는 테무친이 등장하여 몽골족을 통일하고, 1206년(희종 2년)에는 칭기즈 칸이라 칭하고 강대한 제국(帝國)으로 성장하였다 몽골 제국은 유라시아 대륙 대부분을 차지하며 대제국을 이루었고 하나의 커다란 나라이면서도 그 안에서는 여러 개의 작은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고 자손들이 정복 지역을 나누어 받았다 그중 원나라는 중국 대륙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나라이다 칭기즈칸은 세계를 정복할 목적으로 동·서양의 각국을 공격하여, 요나라 유민의 일부분은 대요국(大遼國)을 세우고 여진족과 화합하여, 재기의 기회를 노렸으나 다시 몽골에 쫓기어 1216년(고종 4년)에는 마침내 고려의 국경을 넘어서게 되었다. 이에 몽골은 여진족의 동진국(東眞國)과 동맹을 맺고, 거란족..

고려의 정치 변화 [내부링크]

문벌 귀족 사회 고려의 문벌 귀족 11세기에 이르러 고려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자리 잡은 문벌 귀족은 이자겸을 비롯한 경원 이 씨 가문과 김부식을 비롯한 경주 이 씨 가문 등이 대표적이다 왕실 또는 세력이 비슷한 가문 끼리 혼인 관계를 맺어 문벌을 이루고 권력도 장악했다. 과거에 합격하거나 음서제를 이용해 높은 관직을 독점하고 나라에서 공음전을 받아 자손에게 물려주었다. 이자겸의 난 (1126년) 이자겸은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 귀족으로 왕이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고 이 사건은 문벌 귀족 사회를 흔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럼 여기서 이자겸은 누구일까?? 이자겸의 아버지 경원 이 씨 집안은 대대로 왕족과 혼인 관계를 맺었고 이자 겸도 자신의 딸을 예종과 인종에게 시집보내면서 고려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다 이자겸..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며 [내부링크]

덕수궁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태종이 서울로 재 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태조의 궁을 세웠을 때에도 같은 이름인 덕수궁이라 하였다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궁궐로서,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 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

고려 전기의 대외 관계 [내부링크]

고려와 주변 나라와의 관계 고려는 고려가 세워질 무렵 한반도 주변 여러 나라에서도 변화가 나타났고 건국 이후 고려는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거란 여진 등의 북방 민족과 갈등을 겪기도 했다 거란 (요나라 ) 거란은 중국 북쪽 지역에 흩어져 살던 유 목 민족으로 916년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요라고 바꾸었다. 태조 왕건은 북진 정책을 추진하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멀리 하고 942년 태조 왕건이 고려 거란에서 온 사 신들을 귀양 보내고 선물로 가져온 낙타를 만부교 다리 밑에서 굶겨 죽인 '만부교 사건' 이있었다 이후 두 나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다 송나라 송나라는 960년 중국 대륙의 혼란을 수습 하며 세워졌고, 고구려는 자신을 보내 신 선 관계를 맺었다 송나라는 거란을 견제하기 ..

고려의 성립 [내부링크]

고려의 정책들 광종의 정책 태조 왕건의 죽음 이후 왕위 계승이 치열하게 벌어져서 왕권 강화를 위해 광종은 여러 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노비 안검 법 원래 양민이었던 사람들을 해방시켰고 호족들이 거느린 노비의 신분을 잘 살펴 호족의 힘을 크게 약화시켜 고 세금을 내는 양민들이 늘어나서 나라의 재정이 튼튼해졌다 과거제 시험을 통해 능력 있는 사람을 관리로 뽑고 왕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인물들의 관직에 임명 할 수 있었다 시험과목으로는 유학에 대한 지식이나 문장을 짓는 능력들이 있었다 공복제 나라의 관리들이 일할 때 입는 옷의 색깔을 지정했다. 관리들 간에 지위의 높낮이를 한눈에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성종의 정책 광 종이 후 호족들의 반발이 심해지는 상황이 왕위에 오른 성종은 강한 왕권을 바탕으로 나라의 기틀을 ..

병자호란 [내부링크]

병자호란(丙子胡亂)은 1636년 12월 28일 ~ 1637년 2월 24일까지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 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 제국으로 끌려가 사회적 피해가 심하였다 병자호란의 개요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었으나, 강화조약에 따라 명과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선이 친명 정책을 변경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한 홍타이지는 명과의 전면전 전에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고자 1636년 12월 2일, 12만 군사로 조선을 침공했다. ,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

고려의통일 [내부링크]

고려의 건국 후 고구려에서 활약한 왕건은 궁예의 신하로 활약하며 세력을 키워 고려를 세웠다 후 고구려의 왕건은 후백제의 나주 일대를 점령하여 궁예의 신임을 얻었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궁예가 점차 난폭해져 호족과 백성들의 민심을 잃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왕건은 세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의 고려를 정하고 이듬해에 도읍을 다시 송악 개성으로 옮겼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왕건은 고려를 세운 다음 후삼국을 통일 했다 . 견훤은 신라를 공격해서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에게 왕위를 이어 가겠다 신라를 돕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는 왕건은 신라를 공격하고 돌아가던 견훤과 공산 지금의 대구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견훤이 크게 승리하였다 930년 고창 전투 견훤이 다시 고창 지역을..

임진왜란 [내부링크]

임진왜란은 1592년 4월 14일 (선조 25년) 도요토미 정권 치하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발발하여 1598년(선조 31년)까지 이어진 전쟁이다. 임진년에 일어난 일본의 난리란 뜻으로 지칭되며 그 밖에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으로 조일전쟁, 임진년에 일어난 전쟁이란 뜻으로 임진전쟁, 임진년에 왜가 일으킨 란이라고 해서 임진왜란이라고도 하고 도자기공들이 일본으로 납치된 후 일본에 도자기 문화가 전파되었다하여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은 두 차례의 침략 중 1597년의 제 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뿐만 아니라, 대명과 여진족 등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전쟁의 결과, 조선은 경복궁과 창덕궁 등 2개의 궁궐이 소실되었고, ..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고분 [내부링크]

고분의 형태 돌무지무덤 : 고구려 장군총으로 가운데에 돌방을 만들어 시신을 모시고 돌을 쌓아 올려서 만들었다 벽돌무덤 : 백제 무령 왕릉은 내부에 벽돌을 쌓아 방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서 만들었다 굴식 돌방무덤 : 고구려 덕흥리 고분은 돌로 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서 만들었다 안쪽에는 시신을 모신 방이 있고 무덤 입구에서 방까지 길이 이어져 있다 천장과 벽에는 다양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돌무지 덧널무덤 : 신라 천마총에는 시신과 껴묻거리를 넣은 나무덧널을 만들고 그 위에 많은 돌을 쌓은 다음 다시 흙으로 덮어서 만들었다 또한 도굴이 어려워서 많은 유물이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시기와 형태는 조금씩 다르지만 주로 돌무지무덤을 만들고 뒤로 갈수록 굴식 돌 방 무덤을 만..

후삼국시대 [내부링크]

역사 신라는 통일 이후 안정적인 사회를 유지하며 진골 귀족의 힘을 통제하려 하였지만, 8세기부터 소수의 귀족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진골 귀족들 간에 분열이 나타났다. 또 계속된 왕위 다툼으로 인해 왕권이 흔들리게 되었고, 정부의 지방 통제력도 약해지면서 지방의 호족들이 성장하였다. 결국 각 지방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진 호족들이 중앙정부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면서 후삼국 시대가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러한 배경은 후삼국 통일 이후 고려 태조가 지방 호족을 경계하여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들을 펼친 이유가 된다 신라의 성시(盛時)로부터 무거운 조세와 역역(力役)을 부담하고 있던 농민은 유민(流民) 혹은 도적이 되어 질서를 교란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질서는 금성(金城, 경주)을 중심으로..

발해의건국 [내부링크]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 옛 땅을 지배했다 고구려 유민들을 당나라 이곳저곳 이동시켜 흩어져 살게 했고 이에 반발해 대조영의 유민들을 모아 발해를 세우 게 되는 과정을 함께 살펴보자 대조영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영주를 탈출했다 천문령에서 뒤를 쫓던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698 연 대조영이동모산 기슭에 고구려의 기상과 문화를 계승한 발해를 세웠다 발해 주요 왕의 업적 대조영의 아들 무왕 고구려를 멸망 시킨 당나라 신라와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당나라를 먼저 공격하기도 했고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과는 친 성관계를 맺었다 나라의 안정을 도모한 문왕 당나라와 친선 관계를 맺고 신라와도 교류를 시작하였고 일본과 친선 관계를 이어갔다 당나라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고 제도를 정비하여 나라의 ..

경주 원성왕릉경주 원성 왕릉 (괘릉) [내부링크]

경주 원성 왕릉 앞에 세워져 있는 석상을 통해서 신라가 서역과 교류했으며 서양인들이 신라에 머물러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경주에 원성 왕릉을 찾아가 보았다 원성 왕릉 주변은 정비가 잘 되어서 주차장도 넓었고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 먹기에도 너무 좋은 장소 같았다 가을햇살도 도시락을 유발했지만 오히려 썰렁한 느낌이 들까 봐 도시락은 삼가했다 아이들과 통일신라 시대의 괘릉을 이야기하면서 석상의 생김새나 부리부리 한 눈과 매부리 코 덥스룩 한 턱수염 등이 서역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것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인해서 통일신라가 서역과의 교류했음을 이야기 나누었다 무열 왕계를 종식시키고 내물왕 12대손이던 원성왕이 하대 신라의 새로운 왕통을 일으킨 실질적인 개창자라고 볼 수 있다 원성왕이라는 그의 시호에도 드러..

만파식적에 관한 전설과 감은사터를 찾아~~~~ [내부링크]

신문왕이 아버지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받아 감은사를 완성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고 한다. 동해 가운데 작은 산이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온 것이다. 신문왕이 신하를 불러 점을 쳤더니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과 김유신이 함께 나라를 지킬 보물을 내려 주려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 왕은 감은사로 가서 배를 타고 작은 산에 올랐고 그곳에서 용을 만나 "섬의 대나무를 베어 피리를 만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섬에 대나무는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하나로 합쳐지는 신기한 나무였다고 한다. 신문왕은 용의 말에 따라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나고 병이 나았으며 가물 때는 비가 오고 장마가 지면 날이 개였으며 바람이 잠잠해지고 파도가 잔잔해졌다고 하니 신문왕은 이..

통일신라의 발전 [내부링크]

통일신라의 정치와 경제 통일 이후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은 왕권 강화와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자 여러가지 정책을 추진했다 지방 행정 제도 정비 전국을 9개 주로 나누고 지방의 주요 거점 도시에는 5개의 소경을 설치했다 소경이란 작은 소원이라는 뜻으로 경주의 귀족들과 함께 옛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들을 소명으로 옮겨서 알도록 했다 군사 제도 정비 도읍인 금성에 중앙군인 9서당을 두고 9서당에는 신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말갈인등이 포함되어 있다 지방이 군대로는 10종을 배치 했고 9주에 각각 하나씩 정을 두고 국경지역이자 가장 넓은 한주에는 2개의 정을 두어 모두 10정을 되었다 유교 교육 강화 신문왕은 왕을 충실히 보살필 신하들을 기르기 위해서 국학 이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했다 국학은 유학의 기본 경..

수·당 전쟁과 삼국통일 [내부링크]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589년 수나라는 오랜기간 분열 되어 있던 중국 대륙을 통일 했다 598 연 수나라의 위협에 고구려가 멋진 군사를 이끌고 수나라의 요서 지방을 공격했다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순환하는 30만여 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 했지만 홍수와 전염병 태풍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났다 수나라 뒤를 이은 황제 수 양제는 612년 1 13만여 명의 군사를 보내 우리를 다시 공격했다 고구려의 장군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으로 수나라 군대의 상황을 염탐하고 수나라 군대를 평양성까지 유인했다 살수에서 수나라 군대를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 당나라의 상황은 당 태종에 즉위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주변을 정복 함의 영토를 확장 했다 고구려의 상황은 연개소문은 당나라와 싸울것을..

삼국과 가야의 사회와 문화 [내부링크]

신분에 따른 사람들의 생활모습 평민: 삼국시대 사람들 대부분은 평민이었다 주로 농사를 짓고 살았고 세금을 내고 군대 가거나 큰 공사에 동원됐다 귀족 : 지배 계층으로 높은 관직에 올라 나라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했다 노비 : 가장 낮은 신분으로 주인이 사고팔 수 있었다 전쟁에서 걸려온 코로나 주의 빛을 진 사람들도 노비가 되었다 신라의 엄격한 신분제도 신라는 정복한 지역의 군장들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켰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신분제도가 골품제도이다 골품제는 왕족을 성골과 진골로 나누고 귀족을 6두품에서 1두품까지 6개로 나누 었다 성골은 왕이 될 수 있었고 진골은 가장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다 두품에 숫자가 높을수록 신분이 높으며 골품에 따라올 수 있는 관직에 한계가 정해져 있다 ..

김제 금산사 [내부링크]

2년 전 남편과 함께 다녀온 금산사 견훤의 이야기와 미륵전 이야기만 알고 갔었던 기억이었는데 알수록 볼수록 멋진 추억으로 오늘은 어머님을 모시고 남편과 함께 다녀오게 되었다 김제 금산사는 백제 법왕 원년에 창간되어 통일신라 때 진표율사가 낡은 사찰을 대규모로 고쳐지었고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의 아들 신검과의 불화로 인해 가두어 두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고려 문종 혜덕 왕사 소현이 다시 한번 고쳐 지은 다음부터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한국 불교 역사상 삼보를 모두 갖춘 사찰이다. 삼보사찰은 불교에서 중시하는 3가지 보물이 있는 사찰로 불보(석가모니 부처님) 법보(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 승보(부처의 말씀을 수행한 큰 스님) 모두 있다고 한다 금산사의 나무 이야기부터 견훤의 이야기 까지~~ 미륵전 앞 마당에 ..

상당산성의 가을 [내부링크]

우리나라에는 산성이 많은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워낙에 많은 나라들의 침략으로~~@@:: 우리나라의 산성은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흙이나 돌로 튼튼하게 쌓아 올린 큰 담을 말한다~~ 흙으로 쌓은 성을 토성이라 하고, 돌로 쌓은 성을 석성이라고 한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마을 둘레에 흙으로 작은 토성을 쌓아 외적의 침입을 막았지만, 차차 성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돌로 튼튼한 성을 쌓게 되었다. 성에는 도성 · 읍성 · 산성 · 행성(장성) 등이 있다. 도성은 그 나라 서울 주위를 둘러막은 성이고, 읍성은 지방의 도시를 둘러싼 성이다. 산성은 적이 쳐들어오기 어렵게 적을 막기 알맞은 산 위에 쌓은 성이다. 행성은 길게 둘러쌓은 성이다. 그리고 도성이나 읍성의 안쪽에 있는 성을 내성이라 하고, 바깥쪽에 둘러..

삼국과 가야의 발전 [내부링크]

고구려의 성장 오늘은 고구려의 성장부터 시작해보자 고구려는 다섯 개의 부족이 모여 왕국을 이루었고 삼국 중에 가장 먼저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유리왕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태조왕은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고국천왕은 행정구역을 정리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진대법을 가져왔다 진대법은 가난한 백성을 돕기 위해 나라에서 곡식을 빌려두는 제도이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생활이 안정되고 왕이 백성을 도와줄 수 있었다는 점에서 왕을 중심으로 한 정치였음을 의미하고 있다 백제의 성장 백제는 한강유역에 자리 잡아 농사에 유리했고 중국과도 교류할 수 있어 빠르게 발전하였다 마한에 위치한 백제는 고구려에이어 중앙집권체제의 기틀을 다졌다 고이왕은 법령을 만들고 관리 등급에 따라 입어야 하는..

합천해인사 [내부링크]

해인사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려대장경과 이를 보관하고 있는 장경판전이 있는 해인사. 신라 애장왕이 왕비의 병을 낫게 해 준 두스 님에게 감사의 뜻으로 절을 지어줌 해인사가 지어질 때까지 원당암에서 지켜보며 귀하게 여겼다고 한다 해인사는 양산 통도사, 순천 송광사와 함께 우리나라 삼보 사찰 중 하나로 삼보사찰은 불교에서 중시하는 3가지 보물이 있는 사찰로 불보(석가모니 부처님) 법보(부처님 말씀을 기록한 경전) 승보(부처의 말씀을 수행한 큰 스님) 합천 해인사는 법보사찰로 부처님의 말씀을 새긴 팔만대장경이 있고 양산 통도사는 불보사찰로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놓은 금강 계단이 있고 순천 송광사는 승보사찰로 국사 16명을 배출했다고 한다. 해인사 올라가는 길에는 성철 스님 승탑과 대종사 부도가 있었다 해인..

합천 청량사 [내부링크]

합천 해인사를 가면서 잠시 들러 가게된 청량사였다 청량사의 역사로 볼 때는 천년고찰이지만 대웅전 등 전각 대부분 근래에 들어 중건되었고 그럼에도 청량사가 전통사찰로 명성이 높은 것은 3개의 보물 때문이다. 청량사 대웅전과 마당에 일직선으로 배열된 석조석가여래좌상 (보물 제265호), 석등 (보물 제253호) 삼층 석탑(보물 제266호)이 그것이다. 청량사 대웅전 앞 석등은 통일신라 석등으로 보물 제253호로 배가 불룩 나온듯한 장구의 몸통처럼 생겨서 고복형 석등이라 한다. 석등은 크게 3종류로 나누는데 팔각석등 고복형석등 이형석등으로 나뉜다 팔각 석등 -석등을 이루는 각 부분의 평면이 팔각을 이루는 것으로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전형적인 양식이다. 고복(장구의 몸통처럼) 형 석등-..

철기.삼국시대 시작 [내부링크]

철기시대 철기시대 기원전 5세기경~ 한반도에 철기 보급되었다 철은 청동보다 강하고 단단했고 구하기도 쉬웠다 철제 농기구: 따비 괭이 낫 보습 호미 등 사용 농업 생산량도 증가했다 청동기의 사용 : 세형동검 잔무늬 거울이 있었다. 중국과의 교역을 활발히 하면서 명도전 반량전 등의 금속화폐가 발견되었다 여러 나라의 성장 부여 : 5 부족 연맹 국가로 12월 영고라는 제천행사가 있고 순장풍습이 있고 동서남북에서 사출도를 나누어 다스렸다 도둑질 한 물건의 12배를 갖도록 하는 1 책 12 법을 실행하는 엄격한 법률이 있었다 고구려 5 부족 연맹국가로 10월 동맹과 결혼하면 신랑이 신부 집 뒤편에서 서옥이라는 집을 짓고 일을 도우며 살다가 아이가 크면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서옥제가 있었다 옥저 왕이 없는 군장국가로..

선사시대 [내부링크]

선사시대부터~가볍게 집고 가는 한국사 꿈샘의 한국사 이야기 구석기시대 사용한 도구는 뗀석기 (주먹도끼 긁게 찍게 슴배찌르개 등) 생활모습은 사냥 채집 고기잡이 이동생활 동굴이나 바위 그늘 막 집에서 살았다 특징은 불을 사용하여 어둠을 밝히고 음식을 익혀 먹었다 신석기시대 사용한 도구는 간석기 뼈 도구 토기 (돌 보습 돌괭이 갈돌과 갈판 가락바퀴 등 ) 생활모습은 농경과 목축을 시작하였고 정착 생활을 하면서 강가나 바닷가에 움집을 짓고 모여 살았다 특징은 평등 사회와 원시 신앙을 가졌고 토테미즘 애니미즘 샤머니즘 등의 원시 신앙이 등장했다 주요 유적지로는 서울 암사동 부산 동삼동 양양 오산리 제주 고산리 등이 있다 청동기 시대 청동기가 만들어져 주로 제사 누구나 지배 계급의 무기나 장신구로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