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박스 개봉 후 누액흔적 등 불량 유무 체크 2. 흡기 탈거 출고 후 처음 교체하는 건데 배터리가 메이커도 없는 개똥 같은걸 넣어서 주나 했느데 생각해보니 쓰긴 오래썻네요 16년 7월 받아서 지금 21년 2월..
생각의 길
우리내촌마을의 연중행사라고 할 수 있는, 주로 어른들이 중심이 된 전통적인 놀이나 축제에 대하여 기억을 더듬어 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이러한 여가생활 속에서 조상들의 얼이나 슬기를 맛보며 자라..
성과 이름을 잊었지만 내촌마을에 괴짜 이발사가 한사람 살고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무보수 야학선생 노릇을 했다. 그는 40대 후반의 마치 어린애처럼 순박한 사람으로서 언제나 남에게 겸손했으며 어린..
4. 입학 나는 열 살때 덕진초등학교(당시에는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에는 식민지하에 있는 우리 한국사람은 아직 의무교육제도가 아니고 지원하는 사람만이 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나는 동무들과 학교..
이러한 갑작스런 가난 속에서 아버님과 어머님은 걸핏하면 부부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도 그런것이 가난한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주역을 맡으신 어머님은 고되고짜증이 나셨을 것이다. 아버님은 평소 말이 없으..
성과 이름을 잊었지만 내촌마을에 괴짜 이발사가 한사람 살고 있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무보수 야학선생 노릇을 했다. 그는 40대 후반의 마치 어린애처럼 순박한 사람으로서 언제나 남에게 겸손했으며 어린..
8 내촌 마을 사람들 내가 살았던 내촌 마을은 남쪽으로 월출산을 바라보고 들 앞에는 덕진강이 흐르고 있는 포근하고 아담한 마을이었다. 주민은 30여 가구에 한 120명 가량 되는데 모두 한결같이 가난한 사람..
돌이켜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실시한 이러한 운동회나 학예회 때에 나는 비교적 체육기능도 좋은편이었고 연기력도 좋았다. 물론 덩치가 나보다 큰 아이들과 힘겨루기에는 미치치 못하지만 또레집단에서는 행동..
7. 학 교 생 활 (덕진 초등 학교 시절) 학교생활은 아기자기하고 재미있었다. 아니 학교라기 보다는 하나의 가족사회라고 말할 수 있었다. 선생님도, 교장까지 두 분뿐, 교실도 두 칸, 학생수도 겨우 120명 안..
6. 나가누마 교장 (일본인) 나가누마 교장은 일본인이었으나 성격이 쾌활하고 대중적이며 유머감각이 뛰어나 재치가 있고 잘 웃겼다. 그래서 나가누마 교장이 있는 곳은 항상 분위기가 부드러웠다. 학생들이나..
5. 은사 김방현 선생님 김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 생각하면 김선생은 인격이 높으신 훌륭한 교육자이셨다. 선생님은 키가 크시고 안경을 낀 백면신사였다. 항상 깔끔하시고 안정한 옷차림이었으며 가..
할머니를 실망시킨 할아버지는 내 기억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항상 활기에 차 있었다. 양미간에 냇천자 주름살이 패어어있는 할아버지는 걸을 때에는 힘차게 걸으셨고 잘 웃지도 않은 강직한 분이셨다. 그러나..
3 유년시절(幼年時節) 여일곱 살 때부터는 보다더 활동적인 놀이로 바뀌고 놀이의 무대도 넓어졌다. 주로 달리기, 팽이치기, 도롱태 굴리기, 연날리기 등이다. 그 중 연날리기 놀이는 특히 그 기억이 생생하다..
교변집은 내촌집보다 훨씬 컸으며 영업을 하기에 좋은 집으로서, 할머니는 여기서 반남에서와 같이 음식점 (지금의 식당)을 차려놓고 장꾼들에게 밥, 떡국, 팥죽 따위를 팔았다. 할아버지는 한 쪽 봉놋방에서 여..
22. 나의 은퇴생활 2 (78세~ ) < 2,000 ~ > 131 아내는 전술한 바와 같이 휘귀한 병으로 고생 고생하다가 갔다. 아내가 꼼작도 못하고 의식만 깜박거리는 이삼 년 동안, 드나드는 간병사 10명과 장남 내외의..
(2) 아내의 죽음 아내는 갔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이면서 나보다 먼저 간 것이다. 서기 2,000년 6월 8일 8시경 72살로 이 세상을 마감했다. 단말마의 고통도 모르는 채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