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렁해, 슬픈 것들 / 김신용


물렁해, 슬픈 것들  /  김신용

물렁해, 슬픈 것들 / 김신용 마당가의 작은 텃밭에 씨 뿌려 틔운 어린 배춧잎에 쬐그만 달팽이들이 기어오른다 흙빛의 보호색을 띤 물렁한 것들, 낮이면 흙 속에 엎드려 있다가 밤이면 몰래 배춧잎을 기어오르는 마치 텃밭이 자신을 위해 차려놓은 풍성한 식탁인 것처럼 포만에의 기대감으로 잔뜩 몸을 늘어뜨린, 야행성들 그 연체의 흐느적거림이 비애스럽지만 이빨이 없어, 부드러운 새싹부터 갉아 먹는 食性들의 습격을 받으면 배추밭은 전멸이므로 어쩔 수 없이, 밤마다 손전등 불빛을 켜들면 그 불빛이 닿을 때마다 잽싸게(?) 흙빛의 보호색을 띤 패각 속으로 몸을 웅크리고 물방울처럼, 흙바닥으로 도르르 굴러 떨어지는 것들 밟으면, 뱉어 놓은 침처럼 힘없이 으깨지는 것들 상징은 무섭다. 한때, 나도 은유의 달팽이였다. 지게를, 달팽이의 집처럼 등에 얹고, 세상의 배춧잎을 기어오르던. 세상이 자신 앞에 차려진 풍성한 식탁인 줄 알고 어두워지면, 맛있게 갉아먹던 그 벌레의 길이 자신의 길인 줄도 모르고,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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