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과 기축옥사


정여립과 기축옥사

정여립(鄭汝立, 1546∼1589)은 조선시대의 인물 중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는 한 사람이다. 그렇게 된 핵심적 원인은 그가 조선시대 당쟁의 중심적 사건인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선조 22년)를 불러온 장본인이었지만, 여러 의문을 남긴 채 사망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 결과 기축옥사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조작과 진실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명민한 능력과 순탄한 출세 정여립의 본관은 경상도 동래(東萊)고, 자는 인백(仁伯)이다. 아버지는 군수ㆍ첨정(僉正, 종4품) 등을 지낸 정희증(鄭希曾)이다. 전주에서 태어났고 대동계(大同契)의 거점이자 피난했다가 죽음을 맞은 곳도 진안(鎭安) 죽도(竹島)였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정여립의 지역적 기반은 전라도였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지녔고 상당히 순조롭게 출세했다. 1570년(선조 3년) 우수한 성적(5등)으로 문과에 급제했다. 24세의 나이였다. 조선시대 평균 급제 나이가 30세 정도였음을 감안하면, 상당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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