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투쟁


신분투쟁

기원전 494~287년동안 평민들은 법적인 평등과 정치권력의 참여를 위해 투쟁, 귀족들은 전쟁이나 토지 수효 측면에서 평민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음. 하지만 완만함과 보수성의 전개로 인해 실질적으로 호민관 -> 원로원에 진출하고 명사들(노빌레스 nobiles)을 형성하며 과두정의 성격을 띈 소수의 부유한 평민들이 수혜를 입음, 결국 기원전 3세기 말, 귀족과 평민 간의 일체감을 강조한 정치체제 원로원과 로마인민(SPQR, Senatus Populusque Romanus)이 탄생 기원전 494 성산 철수 사건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의 가혹한 통치로 인해 평민의 보호자이며 대표자인 호민관직 설치 및 평민회의 기원이 됨. 기원전 471 푸블릴리우스법 Lex Publilia : 평민회 -> 부족회, 입법권 없음 기원전 451 12표법 : 최초의 성문법, 귀족과 평민 간 통혼 금지, 부채노예제 인정(채권자 권리 규정), 귀족의 자의적 법 운영 배제, 기존 관습법 성문화, 극형은 켄투리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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