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은 조선의 희대의 폭군으로 알고 있으며, 그가 저지른 악행중에 하나는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로 형벌을 받은 인원은 관련자 당사자들만 계산 했을 때 23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필자의 생각에는 여기에 연좌제를 통한 가족과 친족들까지 합하면 , 1,000여명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화를 일으킨 원인에 대하여 현재까지 우리는 아래와 같이 알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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