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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화된 청사진 [내부링크]

<개화도 곧 폭우에 시든다.> 무주강산 중원에 드리운 동북방 눈비 흩날리며 강직한 기풍의 민족 수백만 팔기군 철갑아래 말발굽 요란떨며 대지를 장엄하게 울리네. 수천년 위엄떨던 화북의 맹주를 용감히 몰아내고 새롭게 방문하여 휘황찬란한 천하를 다시 물들이네. 동방의 주인이 되어 역사의 문턱의 첫걸음일 터인데 서쪽에서 엄습하는 생소한 기운은 꿀 묻은 손길 내어밀며 일통화친 넌지시 건네보니 천지아래 무궁하니 만년이 평안하다는걸 보아 그저 소경의 금치산자일세. 강산이 변하니 억눌린 최후의 보루, 중압감 못견디고 우후죽순 각양각색 난립하네. 혁명의 불꽃 사방에 영매가 도래하니 격정적인 공멸의 횟불, 뒤엉킨 그들 비로소 이합집산 민족단결일세. 치욕에 벗어나 속박에서 해방하니 이제 그들은 폐립되어 척박한 북방으로 내쫒으며 산해관을 무너뜨린 그저 옛 봄날 불청객. 개혁의 선취점 이면에 결승점에 기다리며 아른거리는 삼민주의 변혁의 시대 뒷편에 도사리는 중원쟁패의 야욕은 유구한 민중정신 송두리체 탈취하

이념 노선의 이중적 패권주의 [내부링크]

오늘날 서구사상은 보편적인 문명의 발전에 있어서 일반적인 가치관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리고 문화적인 관념에 치중된 오리엔탈리즘이 강화되어 산업혁명을 구심점으로 하여 서구문명은 발전을 상징하고 동양을 비롯한 그외에 문화권은 경시적인 태도를 견지하며 퇴보와 구시대의 잔재로 양분할된 세계관이 광범위하게 시대를 바라보는 식견,역사를 보는 관점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일괄화되어 이미 인식된 개념으로 아편전쟁이후 서구세계관이 진실로써 수용되고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발전과 경쟁은 자유사상이고 거기서 파생된 가치는 민주주의를 필두로 한 통치체제를 확립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아직도 가시적으로 노골성을 국제적으로 표방하며 중심축을 구성하고있으며 서구진영의 이념이나 종교관이 다른 타국가나 집단에게 배척하기위한 수단적 근거는 "평화와 안위를 위협하는 대상"이라며 대립하고자 하는 대상이 그저 다양성을 내포한다면 관철시키기위한 근거가 부실하므로 우회적인 의미를 생성시킨 개인에 결부된 인권위협으로 미국언론을

용기가 장점이 아니라 장점이 용기가 되는 간사함 [내부링크]

위에 그는 한때 미군에 몸담았고 다양한 훈련을 받고 여러곳의 전장에 참여한 만큼 본연의 성격에서 직업적 성품으로 변형된 사람은 외부 세계관 마저도 흡수하려는거처럼 득달같이 자신이 구축해놓은 사고의 틀을 극복하지못하면서 보편적 환경과 상식임에도 주관적인 가차관에 얽메이니 어긋나면 비난만 일삼으며 카이스트 출신,떳떳하고 대담한 인생을 살아온 오현민의 길목에 훼방을 놓는 추태이다. 주먹다짐,스포츠, 신체위주의 활동을 하지 않은것을 허술하게나마 근거로 삼은거 자체는 엄연히 훈련을 견디는데 있어 전문적인 군인에 일괄적인 동기부여 필요성을 무조건적인 합리화를 통해 일반적인 체험활동에서 꿈의 목표도 개별적인 "군에 종사하지 않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본질적 취지마저 간과한 미국에서 유행하던 루이소체 치매 초기 발작 증세를 보이는 텍사스 양조장의 노동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의 성격인듯하여 우스갯소리 그 이상도 아니다. 그리고 그의 비난하고자 하는 근거의 핵심은 군인의 강인함과 인내심이 상대적으로

견해와 목적성의 반비례정수 [내부링크]

#러시아 #전쟁 요즘 역사를 손쉽게 접하면서 전쟁을 후에와서 고찰하고 비평할때 우리는 흔히 "참상"이라고 일컫는다. 하지만 그 생각이 기반되는데엔 "전쟁을 사람을 죽인다" 의 맹목적인 존엄성에만 치중되고 의존된 하나의 고정관념의 일차원적인 방정식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되묻는다면 특정한 조건이 따라온다. 과연 "사람을 죽이는 원인이 전쟁 뿐인가?" 라고 역설적 비평이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많다. 그것도 매우, 불균등한 가치분배도 전쟁만큼이나 인류를 죽여왔다. 지나쳐온 시대속에서 간접적인 인간의 실수 또는 과정으로 인해 많은 궁핍과 가난으로 희생되고 대기근이 터져 수천만명이 아사하거나 정부실패로 희생되는 국민, 흑사병,팬데믹 바이러스, 자연재해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할지언정 전쟁에 대한 시각처럼 도덕적 잣대를 들이내밀지는 않는다. 왜냐면 "현상" 이기때문이다. 현상은 필연적임을 동반한다. 그러나 전쟁도 목적 이전에 과정과 흐름과 정세가 분명한곳에서 탄생하는 명분에 방

관념이 축적되면 상식이 되는 논리적비약 [내부링크]

일단 사진속 글쓴이에 따르면 은 성공의 기준과 구분을 흔한 동기부여 연설과 매체에 광고성으로 노출되어 성공의 자질론을 나열하여 단일한 사고로 결집시켜서 자유로운 성공의 과정인데도 일관되어 엄격한 가치로만 객관적 사회에 배분하려는 의도로 시작되는 서론이다. 재능과 노력의 상호보완 관계임을 망각하고 주장하기를 탁월한 재능으로 적은 노력을 기울여 성공하거나 미비한 재능으로 많은 노력을 소비한다 라며 인생 목표의 결론을 이분법적인 반비례 잣대를 들이대는것은 모순이다. 무슨말이냐. 인간의 선천적으로 부여되는 삶의 결과를 창출하는데 있어서의 영향력이 높게 발휘되고 그부분에 필요성을 중점적으로 작용되었던 과거에 기술혁명이전에나 가능했던 소리다. 과학이 발달되지 못하고 평등하지못하였던 고대, 중세,근대초기에는 후천적인 노력과 무관한 신분제,계급제가 강했던 만큼 경쟁을 통해 판별할 수단을 대조해본다면 노력보다 재능에 근접했었다. 인간의 지능과 능력을 대신할수있는 생산수단이나 기술부족으로 인간의 천성

심취된 철학은 과학을 거부한다. [내부링크]

우리는 흔히 동기부여 연설이나 철학과 관련된 문학서적을 매체나 서적으로 접해볼수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에 몰두하여 속단하느라 다른 학문적이고 심리 이론적 변수를 망각하여 전달된 정보들이 우리 곁에서 수없이 넘쳐난다. 그들이 주입시키는 자기만의 경험적 관념은 상대성과 개별성을 배제하여 다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거라 착각하여 주변 환경적 대상에 주로 은유적인 비유를 하여 삶의 방식에 있어서 획일화가 진행중이다.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은 비판적인 여과없이 지극히 차등된 개별적인 경험에서 도출된 철학적 결론을 진리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왜, 어떤, 과정으로 개인적 성격과 그 사람의 철학소견이 성립이 되는지 연계된 사고를 하는데 있어서 한계점은 심리적 복합적인 구조에 의해 순수하게 "그 사람" 에게 나타나는 고난이나 겪은 사건들은 절대다수에 있어서 긴 삶에서 확률적으로 무조건 발생되는 "비록 그의 경험이지만 포괄적인 개념에서 형용된 감정은 지극히 공통된 인간적 경험"이라는 명확한 근거 하나만

사회적 순종은 과연 개인적 추구일까? [내부링크]

범죄를 예시로 들면서 성품의 개념을 광범위한 사회적 범주로 넓혀서 대입하여 개인적 실현보다는 공동체지향적인 맹목적인 신뢰와 일방적인 충성심을 사실상 강요하는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성격과 인품의 결함으로 발생된 범죄이지만 그러한 인격적인 보완점을 마련하기위한 목적성은 어디까지나 개인에게만 국한되어 판단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위에 영상의 주관적 견해에서는 사회적 복종심에 오직 기반되어 귀결되어야만 자질이 완성되는것 처럼 집단주의적 가치관을 옹호하는 사고방식에 불과하다.그렇게 따진다면 "자아실현" , "삶의 목적 추구" 라는 뜻은 존재 이유조차 없을것이다. 성품이란 지극히 개인으로 부터 나와서 사회환경을 내면의 테두리안에 개성화시켜서 정체성을 형성해나가는 과정일 뿐이다. 환경이나 사회의 이념이나 형식적인 절차개념을 주입시키는것은 유연한 사고를 제한하는 지름길이다. 집단의 정통성과 합의점의 맥락과 쟁점을 비판할 여지를 마련해야하며 교육에 있어서 개인에게 순응 보다는 관념지향적 자발성으로 우

자아본능주의 [내부링크]

흔히 우리는 자본주의체제에 관해 비판적 견해를 표현하거나 사회적으로 묘사한다면 개인적 자질론과 무능력을 옹호하는 논리적인 식별력이 결여된 사람으로 치부된다. 자본주의는 능력에 의해 전반적으로 구성되고 순환되는 이론이지만 현실적인 변화에 도래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초기자본주의,후기자본주의,신자유주의 로써 3번의 물결을 거치면서 변천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형식적인 원론적 부분만 다루어서 자본주의의 개념을 주입시키는 교육이 원인이 되어 초기자본주의 형태를 보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의미인 능력주의가 사회전체적 구조에 안정화된 인간적 평등을 가져다준다는 관념을 지금에 모순점이 새롭게 등장하고 수정해야할 사안들이 난무한 현대사회에도 자본주의 비판여론에 대해 "능력을 부정하는 자들" 이라며 마치 순수하게 능력만이 요구되는 체제는 초기자본주의임에도 원론적인 일관성에 의존하여 신자본주의 마저도 핵심가치로 오판한다. 중요한 쟁점은 신자본주의의 절충적인 배경에 초점을 봐야하는데 능력하나로 소외받는 부류에

순수철학을 왜곡성 다목적을 통한 오용과 추태 [내부링크]

"악행을 하고 지탄받을 삶을 살아온 인간이 합리화하는 수단은 성악설"이라면서 그가 주장하는 장면인데 황랑한 누군지 모를법한 대화를 카페에 잡담나누듯이 경시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현학적인 자아상에 자부심을 가지는 청년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다. 성악설이라는 본질자체에 어떠한 행위결과적 정당성 의미부여를 내포하지않은 순수이론에 자기 주관적인 상념을 가치투영시켜서 악행을 합리화하는데에 흔한 의미도구는 "인간이 악하다는 본성"이 효과적이다 라고 주장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성악설의 본래의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주의적 방향성은 인간 본능의 역기능이 미치는 결과와 핵심적 가치와 자질을 파악하는데 성악설 이라는 사회적 방점을 두고 자아성찰 개념에 가깝기에 깨우치고 역방향에 해당되는 "선함"이라는 당위성을 의식시키기 위한 동기부여가 바로 성악설인데 악행에 대해 인간 보편적 합리화 수단으로 통용된다고 광범위한 착란증세를 일으키는 청년으로 보고 나는 느꼈다. 애초에 철학은 쉽사리 가볍게 접근할 학문이 아니며 공

선험적지표와 자아관맹신을 분별하지 못하는 마술사 [내부링크]

마술의 속임수를 내포한 직접적인 안목을 통한 감각적 경험이랑 확산되고 넓은 개념의 사회적인 경험을 동일선상에 비교하는 무논리로 기존의 모든 진리를 마술 하나로만 귀결시켜서 일반화논증으로 의미를 곡해시키는 성급한 그의 단견이다. 우선 사회적 경험이란 마술과 다르게 정서적 분위기와 집단이나 동질의식,이질감,사실과 원인을 구분지을수있는 상황적 경험 등 모든 요소를 포괄적으로 구성된것이 "경험"이다.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토대로 모순점을 명확하게 판별할수 있는 수단들은 매우 용이하게 주변에 잠재되어있으며 충분히 현명한 사고를 발현시킬수있는것이 바로 "지성"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총체적인 특성을 간과하고 마술이라는 직업적 수행능력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기위한 필연적인 당위성이 부여되는데에 기반되므로 선동적 가치와 대중들을 최대한 가식적으로 교란시키는것이 목적성에 중점적으로 형성되야만하는 원리를 내포하는것이 바로 마술이다. 그러나 사회에서 경험은 이해관계나 상업용에 의한 선택적 현혹성이 발생된다는것

판단은 결코 일렬된 지향점이 아니다. [내부링크]

지적임과 도덕성간의 상호 가치를 상위와 하위의 범위권에 적용시켜야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개별적인 비례원칙에 중점적으로 대입시킨 단면적인 착각이다. 지적능력과 도덕성은 동일선상의 직렬적인 영향력이 양방향차원에서 전달되는것이 아닌 다양하고 복합적인 다양한 지능들이 공존하는 범주 내에 도덕성은 그저 하나의 정적인 인간적인 사회화와 대인관계 속에서 인지기능에 해당되는 편파적 선별능력에 포함될 뿐이다. 정리하면 도덕성의 증대는 지적임을 상징하는것이 아니라 지적인 분야의 일부분이 개별적인 우선순위를 선호하기위한 고려와 여러 상황이나 환경을 보는 관점적 성향에 의해 선별적 판단력이 기여하는것이 바로 도덕성이다. 이것은 "이타심,의협심,관계주의를 총체적으로 내포한 사회적 차원에서의 강요"와, "본능과 자기만족, 관계무시, 이기심이 잠재된 목적동기인 개인적 욕망 추구"와 양분되어 상충되는 일렬의 진행을 통해 상호보완관계를 형성지으면서 개인자유,공동질서 이 두가지의 병존구조를 확립하여 민주주의라는 기틀

삶의 질량이되는 몇구절 [내부링크]

<뒤엉켜진 곡경> 어딘지 모를 흠집하나없는 푸른하늘아래 난데없이 몰려와 구름뭉치 차곡차곡 모이니 칠흙같은 어둠 드리우네 고요한 하늘에 전문하듯 청아한 색감 비추던때는 언제그랬냐는듯이 요동치는 그늘의 파도로 응수하네. 푸른 나선형 파도 위에 새로이 겹겹히 쌓인 세찬 물방울 모두 결집하여 횐색 물커품은 저항하듯 몸부림치며 솟구치는 푸른파도를 아랑곳않고 억누르네. 다시 뒤엉키듯 튀어오르는 파도를 보니 흰거품은 지평선 가로지르며 스스로 머금었다지. 잔잔하고 차분할땐 모두 통합된 색조 그러나 한복판 번잡하던 소용돌이, 그저 바람과 폭풍에 동요될뿐. 요동치면 그대들끼리 우여곡절 얼키고설키는 조우할듯 갈등하는 융화된 조류일세. <갈라진 흙> 까다롭기 그지없는 곤충들 포용하며 대지를 넘나드네 풍족한 초원과 산기슭 못지않은 생명과 꽃피울양분 휘황찬란한 여름앞서서 기다리네. 한기서리는 계절풍 난잡한 휘감음이라도 빗방울 맺힘 허락않네. 직면할 가뭄 인정하듯 끝도없는 깊이로 갈라지는 소복한 골 사이 비치

장애물이 없기에 암묵적 장애물 [내부링크]

역사이래로 인류는 자연에서 생존을 위해 본능을 외부활용가치로써 인식하여 향유해왔고 문명이 발전하면 필수적이고 과학적 원리를 부정할수없는 본능만 선별하여 그 외에 가치들은 철학적사상과 윤리적이념 등 수많은 진보적임을 추구하는것들로 대체하여 고등한 사고를 체계화하는데 오늘날까지 일조하였다. 인간에게 경쟁을 통해 발전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이기심은 사회적으로 합의점에 용인되어 충분히 인류가 보편적으로 접근하는데 있어서 지극히 도덕의식을 배척하려는 성향보다는 원리와 순환구조라는데에 초점을 맞추어 거기에 기반한 수많은 정치제도와 경제관념이 배태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개인의 이기심을 극대화함과 국가존립과 협치시키는것과 동시에 상호지향점에 도달하여 궁극적으로 조직된 구조는 자본화와 최소화된 역할적 범위의 공권력이 양립되어 있는 야경국가가 바로 그것이다. 야경국가의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최대한의 권력과 무력을 수반함과 동시에 최소한의 권력기관의 개입범위이다. 그러나 최대한의 자

MBTI는 절대다수의 객관적 수용일뿐, 맹목적 신뢰로 착각하는 아둔함. [내부링크]

일단 주장 자체는 일관된 단견으로써 검사 자체의 인간적 심리를 사회에 대입해서 변질되므로 선천적으로만 한정시켜서 평가해야 그게 심리검사라고 말하며 심리학에대해 기초적인 접근을 하는 군중들이 가지는 일반적인 선입견인 "선천적 성향이 오직 심리" 라고 근거를 잠재적으로 축소시키는게 보인다. 그렇다면 심리학회의 근본적인 기준점을 보면 지표와 통계,사실적 경험으로 3요소가 취합되어 판단하여 인정되는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실험의 증명에 중점을 둔다는것이다. 그러나 처음 말머리와 같이 mbti는 많은 사람들에게 쉽게 이해를 얻었고 큰 역할로 활동성을 기여한것 자체는 이미 신빙성의 진입에 있어서 결정적인 지표와 근거인데 심리 전문성이 기반하는 원리는 문화적 확산의 사례를 토대로 정식으로 공인된 것도 적지않게 존재하는데 주체를 별도의 심리적 기관으로 용도를 왜곡하는게 모순이다. 즉, mbti의 확산 과정의 특성이 이미 학회에 부여된 사례가 실제로 많다는것이다.커뮤니티 글 자체는 개인적인 관점일 확률

다양성조차도 다양성을 존중하지못한다. [내부링크]

다양성이라고 양보해서 가정해보자. 다양성을 인정하는거 자체는 차이점을 통한 이질성만을 보는 관점에서 베타적이라는 착각에서 나오는 선입견을 통해 중국에 전가함으로써 힘의 논리로 보편화 된 민주주의 베일에 가둔 고집만으로 중국을 섣불리 오판하는거로 밖에 안보인다. 그래, 그렇다면 힘의 논리가 타당하다. 많은 국가들이 경험을 통해라는것 자체가 힘과 이념적 확산에 기반한다. 그래서 중국도 강한국력을 가지고 사상을 널리 범위적으로 보급화를 이룩하면 정당함이 되는것이다. 저 가치관은 엄연히 다양성으로 보는게 아니라 그저 서구식 민주주의를 타국가에 관념적 일반화의 감투를 쓴것이다. 순수히 다양성을 주관으로 내세울거면 엘리트주의,사회주의의 장점도 충분히 수용하면서 고려해야할 사항임은 부정할수 없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는 다채로운 사상과 이념, 개별적 특성, 등이 존중받고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견해와 주장을 펼칠수 있는 사회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국가에 대입해서 보면 내부적 환경에 한정된

보편화가 강요되는 과정 [내부링크]

삶은 지속하면서 인간은 수많은 지식을 겸비하고 섭렵해나가는 과정이다. 정녕 그걸 원하지 않거나 의도가 동반되지 않더라도 경험과 행동으로 하여금 자의적으로 고초를 겪고 감정적으로 번뇌하는것 자체는 미래에 교훈을 얻기위한 배움의 진행단계이다. 그런 수많은 지혜를 수용하고 축적하는 절차속에서 개인적 사고와 가치판단은 거부되어나타나는 경우는 부정할수없다. 그것이 바로 시대적인 세습적 이론이며 모두가 이해되어야만 정당화되는 지식을 의미한다. 이제 구체적인 맥락을 분석해본다. 대표적으로 "인간은 이성적임" 이다. 다윈의 진화이론에서 파생되어 오늘날까지 상식이 되어버렸다. 그것이 도덕적 강요로 군림하여 나 자신을 비롯한 인류의 책임속에 가둬버렸다. 무엇이 대체 이성적인가? 과학에서 주어를 수식하는걸로는 분명 인간을 설명하는 정체성의 본능을 의미한다. 동물들과 차등된 생물로 나누어서 자연으로부터 인간의 우월함을 표방하기위한 근거로 탄생된 만큼 그당시 산업혁명이 한창이었고 자연을 극복할수있는 가능성

통제라고 쓰지만 일방적양보인 위선적세계관 [내부링크]

우리는 지나간 추억이든 현재진행이든 학교생활에서 양보를 가르친다. 타인을 위해 봉사하라, 배풀면 돌려받는다, 타인을 도울때 뇌에 호르몬이 분비된다, 등 허울좋은 사탕발린 말들을 구현해내며 자신을 위한다는 감투를 쓰며 타인에게 향하는 능동성과 적극성이 담긴 이타주의 순기능을 기대하는데에서 비롯된 결과에 집착된 강요를 한다. 그러나 현실적 거리는 교육과 늘 멀어지는게 실상이다. 우리가 받는 교육은 이론과 원론만 늘 강조하여 이상적세계관을 교육적 분위기에 투영시켜서 "교실"이라는 공간을 부여받으며 암담하지만 익숙해질수밖에 없는 최적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거기서는 그저 집단적 존속만을 위한 배려,양보를 피할수없는 구조로 형성되었다. 교실 내부에 집단에 근거한 활동을 거부한다면 이기적이고 불량하며 게으르며 개인마저도 삶을 소홀히 할것이다 라는 식으로 비난받을 이유의 정당성을 선점해 놓았다. 그리고 여기까지는 과거 교육적 차원에 기반한 내용이라고 치자. 그러나 오늘날 개인주의가 짙어지면서 시대

가는 세월에 정체된 인격 [내부링크]

급속한 진보를 이룩하기 이전 과거사회에는 직업과 활동, 사회진출 연령대는 현재보다 낮았고 기술력이 부족했던만큼 개인이 해야할 일의 부담도 크고 생계를 유지해야한다는 책임을 부여받은 만큼 현실적인 목표는 공동체지향이었다. 농업이 발달한 동양에서는 특히 깊숙히 형성된 개개인의 자질로써 시대상으로 합의될만큼 성숙했던 시기이다. 인간은 환경적 자극없이 편해지고 나른해지면 내세적 세계관을 가지는 본능이 있다. 내세적 세계관은 통시적인 개념이었지만 사실 현대문명에 와서 "개인주의"로 변천했다. 개인주의가 탄생하게 된 배경은 물질적,시대 환경적 안정되고 풍요로움이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한국은 50년만에 급속하게 다양한 분야의 성장과 함께 시대적변화를 겪은만큼 여러세대가 밀집되어 공존하는 기형적이고 복잡한 양상을 띈다. 결국 풍요로 인해 긍정적인 결과의 베일 뒤에 감추어진 이면의 새로운 성격들이 생겨났다. 흔히 말하는 MZ세대이다. 그들이 누린 세월은 대체적으로는 어느때든 고난인건 마찬가지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