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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란 이름 [내부링크]

계절엔 불러줄 그의 이름이 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가을엔 부르고픈 그의 이름이 있다 단풍,낙엽,억새 그리고 국화 제 붉음으로 제 무게로 고개 숙이는 것, 바람을 희롱하는 억새도, 그윽한 향기짙은 국화도 그 모든 것이 가을의 이름이다 오랜 시간 햇살과 바람, 모든 말들이 얹혀 알알이 익어 가만히 와글거리는, 그런 그런 이름이다

가을의 유희 [내부링크]

사그락 스르륵 찬 바람 일렁이는 오후. 늦가을 펼쳐든 캔버스엔, 붉은 색 노란빛 온 몸 채색한 세상 위에, 어느 돌담 모퉁이 숨죽인 계절, 뒤따라 길 나선 나뭇잎 하나 못내 드러난 손 마디 뒤덮고, 볕 좋은 한 켠 웅크린 강아지 포근한 털의 질감속으로 슬금 감춰보는 제 온도 그렇게 바꾼 몸 빛과 되돌린 햇살, 어느 오후 계절의 숨바꼭질 그것은 한참 계속된, 정겨운 유희였습니다

공허함은 되돌아 온다 [내부링크]

공허함은 되돌아 온다. 그것을 없애려 서로를 만나지만, 서로는 더 공허해 진다. 사람은 공허해서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나기 위해 공허해 진다. 누구를 만나 공허를 덜어낸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 모순이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내야 한다. 끝내 사람이 공허롭고 그리로 되돌아 온다는 것이 그러하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건 공허가 아니다. 오히려 주변에 사람이 넘쳐, 자지러지는 웃음이 허허로운 것이다. 가을의 자연을 보라! 수 많은 감탄을 입에 물은 사람들을 맞는 일에, 그는 가지를 드러내고 잎을 떨궈내어 스스로를 공허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그는 갈곳을 돋힌 배경화면처럼 펼친다 . 사람이 빈 손으로 가는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 붙잡고 집착함은 풍부함이 아니며, 비우는 게 비로소 넘쳐 흐름인 것일 게다. 그래서, 무엇을 칭하든, 깨달음을 얻는 일엔 새삼 빈 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중하게 살기 [내부링크]

생명을 구하고자, 병을 고치고자 병원을 찾습니다. 그럼에도 그곳은 죽기만큼 가기 싫은 곳입니다. 어린애들에겐 그런 무서운 곳도 없습니다.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병원은, 어른이나 애들 할 것 없이 모두 힘든 곳입니다. 고마우면서도 만나기 꺼려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의사가 아닐까요! 일생에 만나지 않아도 된다면, 기꺼이 그러고 싶은 사람은 의사일겁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무슨 일로든 그를 만나게 됩니다. 혹은 그를 만나든 전혀 마주치지 않든, 마지막 의식을 주관하는 이조차 바로 의사입니다. 병을 고치는 의사, 죽은 이의 마지막 길을 인도하는 이. 업종은 달라도 삶의 곁을 돌보는 건 다름이 없습니다. 고통을 덜기 위해 고통을 줄 수 밖에 없는 사람들. 어쩌면 사람들은 삶이란 고통에서 벗어난, 마지막에 기쁨을 얻고, 그럼으로써 문득 산다는 것이 무엇인 지 새삼 되돌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오랜 여정 끝의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더 소중하게 사는 모양입니다.

[4년 전 오늘] 절차적 정당성에 대하여 [내부링크]

2019.10.11. 4년 전 오늘 절차적 정당성에 대하여 산업 자본주의 초기나 그 진행과정에서는 그나마 근면, 성실이 사회적 덕목이었다. 근검절약과 소명 의식에 입각해 부의 축적을 정당화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그럭저럭 작동하기도 할 때였다. 사회구조가 근대화하면서 자신이 열심이기만 하면, 기회의 싹들은 어디에서나 성장 가능성으로서 뿌리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금융... 살다 마주치는 이야기, 그냥 일상

침묵하는 말 [내부링크]

모든 말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 것을 침묵한다. 모든 말하지 않는 것은 말할 수 있는 것을 침묵한다 말하지 않는다고 말이 드러나지 아니함, 말한다고 비로소 말이 있는 건 아니다 ~일 것이라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말하는 것이다 아닌 것을 말할 수 있는 것, 말은 비로소 거기에 있다 침묵은 비겁을 초월하는 은밀함이다. 침묵은 아닌 것을 저항하는 온갖의 몸짓이다 그러니, 말한다고 재갈 물리지 않기. 말하지 않는다고 비틀지 않기

파도가 전하는 말 [내부링크]

잠들지 않는 재잘거림. 내내 해안선은 물러 앉지만, 파도는 밤새 건너편 세계, 끝없는 이야기를 건너고 있습니다. 대양 한 가운데에서는 방금 일어난 힘들고도 딱한 일. 그물에 갇혀 아빠를 잃은 멸치 가족, 포식자에 저항하다 다리 하나를 내놓은 문어...... 밤새 파도가 전하는 이야기엔 상념들이 온통 비릿하게 뒤섞이고, 바닷속 억만 개의 삶 만큼, 땀으로 쏟아 낸 짠 맛이 배어 있나 봅니다. 그렇지만, 그의 언어는 자갈돌을 굴려 만든 둥근 말, 사금파리 반짝이는 고운 모래들을 닮았습니다. 그곳 무수한 알갱이들 점으로, 선으로, 발딛는 땅으로 펼쳐 진. 내게로, 네게로 다가 오는, 한 낮 살풋 졸리운, 세상 포근한 일상처럼.

거울을 닦는 일 [내부링크]

인적없는 거리, 고적한 유리창 밖 유행 지난 노래가 흐느적인다. 이윽고 골목 한 켠. 한 때의 눈이 시린 어린 시절이 진열되고 창 밖 세계, 거울에 비친 세상이 온전히 그것인 줄 알던 나날. 무엇이라도 다 될 듯, 세상이 내게 안기던 시절. 이제 유리창은, 거울은 그대로인 데, 스스로 흐려진 탓이리라 유리창을, 거울을 훔칠 일이 아니다. 스스로의 눈을, 스스로의 마음을 닦아 낼 일이다.

아버지의 굽은 길 [내부링크]

아직도 그 자리엔, 언덕배기 휘돌아 감긴 길. 삶의 무게를 짐져, 늙은 아버지 등줄로 내려 앉은, 닮은 두 길이 있습니다. 스스로 바라지는 않았지만, 참으로 많은 삶이, 어마한 힘겨움이 주저리 얽혀 세월의 주름으로 패인 길. 하지만, 그렇게 그렇게 굽이쳐도, 고달픈 아버지의 언덕은 우리에겐 언제나 단단하고 편안한 길이었습니다. 한참만의 세월이 지나 이제야 알게 된 것은, 비뚤비뚤한 길 이 편에서는, 마구 꺾여 험로인 저 편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게, 한참을 돌아야 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제 맘대로 굽은 길, 아버지의 굽은 등이 두고두고 한 일이었습니다.

은행 열매의 기이함 [내부링크]

넉넉한 오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은행나무 결실이 어지럽게 뒹굽니다. 보도를 지나는 이들, 그 열매를 피해 이리저리 뒤뚱거리지만, 결국엔 발에 밟혀 파열한 몇 개의 알멩이. 참으로 기괴한 악취를 터뜨립니다. 사람들이야, 제 몸의 냄새는 외면하면서, 열매에서는 잔뜩 찌푸린 이마, 코를 틀어 쥐어 호흡을 차단합니다. 가만히 보면, 은행나무 열매 위로는, 둥그런 주판알을 스치듯, 그 위에서 지폐같은 잎이 바스락거립니다. 은행이라는 같은 소리로, 널부러진 열매와 잎. 어느 현금 수송 차량이 뒤엎어져 은혜로운 돈을 쏟아 내듯, 누렇고 푸른 동전과 지폐 다발로. 욕망을 잔뜩 풀어 헤쳐 제 맘대로 나뒹굴듯, 은행나무 열매에서는, 경배하는 화폐에서는, 이토록 비슷한 냄새로 빛 좋은 한 낮 제 몸뚱이를 일광욕하는 탐닉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위생이라는 문제 [내부링크]

최근 한 연예인이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한 일이 또다시 벌어졌다. 깊은 연유야 자세히 모르겠지만, 알려진 바로는 악플에 의한 괴롭힘을 견뎌내지 못한 결과라고 한다. 이를 두고 어느 한 라디오 방송에서는, 사회관계 망의 '배설적 기능'을 언급한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공중 화장실'같은 것이란 이야기이다. 우리는 화장실이란 은밀한 공간에서 몸속의 찌꺼기. 더러움을 덜어냄과 함께, 자기의 노출에 대한 외설적 시선을 회피한다. 그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익명성과 비대면의 분리된 시선 처리이다. 만일 그것이 드러나고 마주치게 될 것 같으면, 추함의 자기 처분 노출 사실에 스스로는 극한 모멸감과 더불어, 행위의 중단으로 돌아서게 된다. 사회적 관계망은 화장실에서의 배설처럼, 익명성과 비대면성을 닮았다. 요즘의 사회적 관계망은 공감의 시대 이면에서, 한 편으로는 그야말로 악취를 풍기는 하수 종말 처리장이고, 쓰레기 집하장으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 많은 듯하다. 그런데, 그러한 점은 유사성이 있다고

영원한 빛 - 전혁림 [경남 도민의 집 10.14 - 10.29] [내부링크]

주제 1. 빛나는 예술의 혼 물감을 씻어내고 그 위에 새로운 푸른 물감을 덧칠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새겨진 푸른 흔적은 마치 아름다운 문양과도 같다. 주제 2. 삶의 희망과 원천 바다 위에 얽히고 설킨 돛배들, 돛과 돛 사이로 아침해가 들어와 붉게 물든 바다. 한국전쟁으로 엉망이 된 상황에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화백의 삶이자 영감이었다. 주제 3. 소년의 순수한 시선 순수했던 유년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자연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꽃,나비,태양,구름,개나리 등 자연을 소재로 유년시절 순수함과 추억을 생동감있게 담았다. 주제 4. 코발트 블루 바다의 화가 푸른색을 사랑한 화백은 평소 좋아한 통영의 풍경들을 작품에 많이 담았다. 고향에 대한 애정과 독특한 시선을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주제 5. 전통에 감탄하다 목어와 석류,바위,전통 십장생 등 민화의 법칙을 따라 사물의 본질과 특성을 선과 색,면으로 표현했다. 주제 6. 색채의 마술사, 끝없는 열정 기존 만다라의 시각적 요

경남현대작가회전 - 창원성산아트홀 10.17~10.23 [내부링크]

상복동591, 이미혜 / 피어나다, 박재희 / beyond the mirror, 전서희 unfading flower, 신미경 / silence, 최현정 / beautiful day, 최현미 원초적 생명성, 정현숙 / 2023 story - m1, 임의복 / 공감, 강영화 긍정의 오뚝이, 조경영 / 몽유, 정경섭 / 사랑의 소통, 양한길 겹(layer), 이정희 / 화왕산 new moon, 성용섭 / eternal now, 박미숙 관계적 집합 -obelisk, 정상섭 / Fauna, 김령아 / 은하철도999, 강윤현 태초-생성 이미지, 민병권 / 흔적-바람 2310, 박점영 / 그리움, 김미영 day out, 김기운 / 호미의 일기, 강육식 / the roof no.4, 최대선 flying_on a beautiful day, 전귀련 / 꽃피우다, 김희숙 / pass the border, 김선희 무한의 공간성, 김미화 / time, 송영은 / 그리움23-2, 이순석 창조, 이강석 /봉강

한국-독일 국제 교류전, 창원 성산아트홀 10.18~10.23 [내부링크]

1.안네 그리트 졸타우 인내를 통해 근본, 본질에 본질에 닿는 정체성을 찾는 작가 2. 디터 글라스마허 classical modernism에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의 사회적 억압과 왜곡에 관심 3. 유스티네 오토 형상으로부터 생성하는 추상을 표현. 앞면은 형상을 이루지만 뒷면은 어지러운 흔적을 남기는 카펫을 짜듯이. 4. 베른트 우데 5. 미하엘 되르너

창원의 집 풍경 [내부링크]

창원의 집 입구 수령 350년 느티나무 창원의 집 입구 수령 400년 회화나무 멍석과 달구지 장독대 절굿공이/떡메/디딜방아 기름틀, 절구방아 각종 농기구 베틀/씨아 각종 농기구 연자방아 그네 퇴은정 정자 널뛰기 물레방아 투호 다듬잇돌, 뒤주 등 안채 살림 세간 안채 아궁이 안채 부엌 안채 전경 안채 우물 사랑채 사랑채 마루 사랑채 디딤돌 사랑채 전경 마당엔 산수유 열매가 풍성

창원 역사 민속 박물관 [내부링크]

디딜방아 넉가래 메통 따비 가래 길마 멍에 맞두레 / 그네 삼태기 도리깨 / 갈퀴 쟁기 옹기초병 / 옹기단지 옹기 주전자 / 옹기 양념병 술통 / 옹기병 떡살 국자 / 밀대 풀무 / 도시락 화로.인두 / 다리미 갓 / 정자관 패랭이 / 방갓 등등거리 토시 / 등토시 짚신 / 나막신 물레 배솔 씨아 / 자새 바라 / 꽹과리 / 징 / 북 / 장구 태평소 / 대금 / 해금 /가야금 / 거문고 웅천 도요지 분청사기 봉림사지 출토 수,암막새 / 진경대사 보월 능공탑 비 청동거울 청동검 철기 제철 석기 도구 빗살무늬토기

계절의 자리 [내부링크]

계절이 떠나 간 자리 한 낮 햇살 재잘거림도 멈춘, 그리하여 낙엽으로서만 살풋 쉼을 앉히는 시간. 언제나 완성을 닿지 못한 탱자며 땡감의 설익음뿐이었어도, 그리고는, 가슴 골 세월의 주름만 깊이 패였더라도, 사랑에 이르는 마음, 언제나 완성이며 푸르렀던 것. 하늘 거렸던 것, 마침내 조화를 꿈꿔, 한 잎 한 잎 우주의 책장이 되다.

삶을 속으로 저미는 [내부링크]

햇살 따가운 가을 오후 물 빛 좋은 개울에서는, 저마다 유영하는 또 다른 삶들이 있었습니다. 인생이든 그 무엇이든,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숭고한 사건, 세상에 파문을 일으키는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겐 , 서로 부딪히며 사라지는 무엇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이곳이라면,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 삶의 극점이 드러나는 시공간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다만 시간은 무심히 횡단할 뿐, 삶은 단락짓지도 않으며, 제각기 흘러 나갈 틈을 남겨 놓는 것이라면....하는 생각을 비춰 봅니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자연을 닮아 겉으로 속으로 누렇게 붉게, 그렇게 온 힘으로 삶을 받아내듯이...

경계 [내부링크]

경계는, 서로를 나누는 다름이 아니다 경계는, 어느 다름을 내치지 않는, 서로 닮음의 반영일 뿐이다

소문자 'i'로 살기 [내부링크]

소문자 'i'를 대문자 'I'로 바꾸는 일에는, 많은 것을 채워 넣어야 한다. 돈, 권력, 지위, 인맥, 학벌...... 숱한 허위를 덧붙인 후에야 'I am' / '나는 존재한다'가 된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I am'이라 할 수 있을까? 비로소의 'I'는 한없이 텅빈 존재이니 말이다. 이럴땐 차라리 'I have'일 것이다. 대문자 마디마디의 규칙과 통일성, 그 획일화는 존재의 자유를 향해 뻗은 것은 아닐 터이니. maska666, 출처 Unsplash 대문자 'I'는 언제나 'I'인 것도 아니다. 비스듬한 'I' , 'I'아닌 'you', 'it'도 있다. 대문자 'I'는 언제나 드러나 앞서는 것도 아니다. 'I am thirsty'/'나는 목말라'로 말하지 않고 그냥 '목 말라'로도 충분하다. '나는 나이다'를 목 놓아 외치지 않아도 '너', '그것'은 알아 듣는다. '나는'하는 주체성을 내세우지 않아도 '저는', '폐인은'.....은 '나는'보다 훨씬 드러내는 것이다

시선(視線 : eye line)을 잃은 시선(時線 : time line) [내부링크]

멍하니 초점을 흐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서 일까? 아니 그것이 내려 앉을 곳은 정작 어디에나, 그리고 몹시도 많다. 그런데, 마주하기 싫은 의도적 회피이듯, 시선은 대상을 빈번히 상실한다. 시간이라는 ‘때의 간격’에서 그 벌어진 틈새로, 시선들을 마구 구겨넣고는 채깍임조차 삼킨 공허함 탓일 까? 시선(視線 : eye line)은 시선(時線 : time line)을 마주하지 못하고 서로는 무관심처럼 비껴간다. 절룩이는 시각(時刻) 혹은 시각(視覺). 질식한 청각마저 앓아 눕는다. 망상에 빠지는 시간이 많아졌다. 와글거리듯 일제히 시간이 도열하는 곳. 그런데도 한 낮의 시간위엔 엉성한 시선만이 내려 앉는다. 다시금 초점이 흐려지고, 시선(視線)은 시선(時線)을 달아난다. 누가 쫓고 쫓기든, 초침 위로는 끝내 아킬레스 신화만이 덜컥거린다. (2019.10.8)

산책로 야생화 [내부링크]

천남성 꽃 / 둥근잎 유홍초 구절초 / 보석십자수 해바라기 애기똥풀 / 클로버 나팔꽃 / ? 붉은 토끼풀 / ? 오이꽃 / 고마리 싸리비꽃 / 개망초 금계국 / ?

계절의 황혼 [내부링크]

담쟁이는, 언제 하늘을 우러렀을까? 한낱 나무의 지향성을 부여잡고 그저 한 뼘 두 뻠 올랐을 뿐, 이윽고는, 계절의 정점. 가을조차 황혼을 담는, 그리하여 노을은 추락 아닌 가장 높은 곳 계절을 저항하는 비틀림, 겨드랑이 사이 마른 바람이 흔들리는 시간. 마침내 타 오르던 붉은 손사위 내려앉으며, 이제는 한겹 벗겨내듯 풍경이 시려운 계절의 종점 온 몸 가려 덮을 일에도 외려 제 살갗 다 내주고는, 오직 성긴 뼈대로만 새 날의 격함으로 맞서다

뼈는 추리고 사셔? [내부링크]

예를 들어, 소의 경우를 살펴보자 먼저 소뿔은 활시위를 당길 때 손가락을 보호하는 숫각지로 가공된다. 소뼈는 임플란트 잇몸뼈 이식, 설렁탕 재료 따위로 쓰인다. 소머리는 소머리 국밥. 편육으로, 혓바닥은 수육. 스테이크 재료로 활용된다고 한다. 소는 내장도 내장탕. 곱창 등 재료로, 소꼬리는 소꼬리 곰탕으로 요리에 제공된다. askkell, 출처 Unsplash 소의 무릎뼈와 발목 연골 주변을 감싸는 도가니는 도가니탕. 소피는 선지. 발톱은 강아지 수제 간식인 천연 개껌으로, 배설물조차 제철소 화력 연료로 언급될 정도이다. 이 정도이면, 소 이빨 정도나 뚜렷한 사용처를 모를 뿐이다. 소는 살아서는 우유, 노동력 따위를 제공하고도 죽음에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동물이다. 물론 우리의 경우엔 워낙 먹을 것이 부족하다 보니, 무엇이든 걸려 들기만 하면(?) 최대한 활용하려 들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는 하품 밖에 버릴 게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소는 목심. 등심. 안

알지 못하는 길 [내부링크]

버스조차 허락 않는 길. 아니, 가로등 한 줌 보탬 없는 길. 밤새 터덜 걷는 길. '장난감을 사 주마' 던 아버지에 끌려, 나는 그나마도 구름에 가린 겨우 한 뼘 달빛을 따라 나섰다. 물길을 건너는 맨발 아랜 닳은 자갈이 동그랗게 밟히고, 시냇물은 쉼없이 발끝을 돌돌거렸다. 충분히 크고도 나이 든 플라타너스는, 내내 제 위세로 팔을 휘휘 휘젓던, 예닐곱 어린 시절, 그렇게 희미한 길을, 아버지와 나는 밤을 도와 걸었다. 알지 못하는 그 어떤 일로.

내가 너의 등을 두드려 주기 전에는... [내부링크]

일이 인간, 사회관계 등 '관계'를 매개하며 작동하는 시절이다. 이전에도 그러한 성향은 존재해 왔으니 굳이 들춰 낼 이유는 없어 보이나, 다만 시대 변화에 따라 의미와 기능 등이 사뭇 달라졌다는 것에서 새로운 시선이 도달하는 것이다. raddfilms, 출처 Unsplash 그런데, 예전엔 '일'이 공동체와 집단의식에서의 충성도. 경제 성장과 발전에 기여한다는 사명감 등이 결집된, 과한 표현으로 '총체성' 역할을 수행해왔다. 지금이야 -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 일(직업)은 일정 생계 수단 획득이나, 경제 활동을 위해 인적. 물적 수단이 제공되는 것 정도로, 그러면서도 참가하지 못하면 이 사회에서 매개 받지 못한 잉여 인간으로 만드는 가혹한 수단 정도이다. 어쨌든, 요즘 세상에서야 일이 매개체라면 그것에 관해서만 집중하면 되고, 그 외에는 어떤 핑곗거리나 의미 부여를 절제함이 권장된다. 조직 내 화합을 빙자한(?) 회식을 예로 들어 보자. 그것은 상호 간 협업과 소통을 위한, 결

스스로 그러한 것, 자연 [내부링크]

나는 그를 온전히 품을 수 없다. 나는 불가피하게 그의 윗머리칼이며 구렛나루, 그리고는 그가 솟구친 땅 마저 덜어내야만 한다. 하지만 그는 홀로 우뚝 선다. 온 하늘을 떠 받친 팔로 나 자신의 뒷걸음질조차 받아 들인다. 그래서 언제나 물러 앉는 것은 나이다. 세상은 언제나 그 만의 채색을 불러내지만, 사람은 언제나 스펙트럼으로 본다. 엷은 분홍이 흘러 내려 흰 꽃을, 그리하여 되돌림에서는 이미 지나쳐 버린 분홍이다. 보아라. 그러하기에 가을은 언제나 설익어 아직 바람에도 주춤거리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두는 게 자연이다. 코스모스(cosmos)는 일반적으로, 우주를 질서 있는, 조화로운 시스템으로 간주하는 우주관이다. '질서, 정렬'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κόσμος라는 말에 유래해, 카오스와 대를 이루는 개념이다. 현대 영어에서는 Universe의 유의어로서 사용되어 러시아어로는 단지 '우주'를 의미하고 있다. 화장을 의미하는 화장품이나 화장학을 의미하는 코스메톨로지도 같은 어원이

불안 없음이 불안입니다 [내부링크]

사람들은 절박한 지경에 이르면 무언지는 모르지만 절대적 존재에 의탁하려고 한다. 인간은 대단한 그 무엇처럼 행세하고 있지만, 기실은 한없이 보잘것 없으며, 한계가 있다는 사실만 무한계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patrickian4, 출처 Unsplash 인간은, 제아무리 과학을 통해 자연을 굴복시켜도 여전히 자연현상이라는 불확실성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으며, 결국 뻔한 가시적 행동을 노출시키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상징적 조작을 할 수 있는, 절대자의 유일한 적자란 자긍심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타 존재에 비추어 그의 탁월성을 강변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결국은 신경 작용의 외피에 불과한 것을 두고 전능함의 유사성이라도 자처하는 것은 분명 과잉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인간을 쳐다본다는 것은 너무 자조적이다. 적어도 일견 자연을 지배하고, 그것의 불가능성에 끊임없이 맞서고 있는 유일한 존재가 그인 데 말이다. jkoblitz, 출처

달처럼, 소망처럼 [내부링크]

달은 제 자신이 뜨는 게 아니다. 간절함의 소망, 기원이 그를 띄운다 달은 그냥 차오르는 게 아니다. 넉넉함의 꿈, 충만함이 그를 채운다. 달은 그냥 밤을 밝히는 게 아니다. 그저 어둡기만 해도, 헤쳐 갈 길이 있음이다.

삶이란 연속 [내부링크]

등굽은 나무줄기. 수직의 시간 위로 세월의 피복이 내려앉고, 제 몸 다 털어내어 낙엽짓지만, 춘란,산죽,마삭줄의 사철 푸르름을 잉태하다

관엽,열대, 다육식물 [내부링크]

* 집 근처 자연학습장에서 담아 본 식물들입니다 벵갈 고무나무 / 필로멘드론 / 필로멘드론 세리움 팔손이 / 홍콩야자 / 문주란 에반시 / 자스민 / 행복나무 콩짜개난 / 크로톤 / 피어리스 / 무지선 / 유포르비아타루칼라 / 금황환 꽃기린 / 라메리 / 장군선인장 기린각판 / 호피산세베리아 / 무륜주 대은룡 / 사해파 / 대봉룡 알로에사포나리아 / 귀면각 / 금호 크라슬라 / 불야성 / 마천주 한라봉 / 금귤나무 / 핑퐁나무 바나나 / 유자 / 리치 왁스잠부 / 용안 / 벤자민고무나무 하귤 / 로즈애플 / 패션프루트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다. [내부링크]

앎이란, '특정한 물건이나 사람 혹은 추상적인 어떠한 것을 이해할 수 있거나 그에 대한 지식이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 한다. 이를 받아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하라'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고, '과학과 객관적 사실의 언어로 철학. 종교. 문학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이 그의 본의라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세계의 지평을 넓히는 사태를 의도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앎'이란 적용하는 문법이 다를 뿐, 객관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다. clever_visuals, 출처 Unsplash 그래서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어떤 쟁점에 대해 격론을 벌일 때나 진행되는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대를 대할 때에는, '뭘 아는 것도 모르고 그딴 소리를 하느냐?' 내지는 '좀 제대로 알고 이야기에 끼든 지...'하는 식으로 비판한다. 그런데 그런 표현을 액면 그대로 적용하면, 곡해된 비트겐슈타

타자는 나의 천국 [내부링크]

'며느라기'라는 드라마를 보면, 맞벌이 부부로서 마냥 임신 사실이 반갑지만은 않은 상황에서, 전날 임신 사실을 확인한 여주인공(박하선)은, 어쨌든 다음날 출근길을 지하철에 맡기고는, 좌석을 확보 하지 못하고 선 채로 이동한다. 그러다가 임산부 자리가 비어 있음을 보고는, 슬금슬금 옮겨 앉을 눈치를 보다가는, 다음 역에서 탑승한 중년 아줌마가 털썩 앉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 볼 수 밖에 없게 된다. "왜, 임산부예요? "아, 아뇨..." weekendw0rrier, 출처 Unsplash 아직도 임산부라는 변화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얼떨결에 자신이 임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만다. 그렇지만 뻔히 지각하듯이, 임산부 자리를 덜렁 차지한 염치없는 중년 아줌마는 주인공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 부인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임산부 자리는 그들에게만 허용되는 자리이므로, 실제 그런 사람의 존재 여부와는 관계없이 늘 임산부들이 차지

[4년 전 오늘] 아름답고 추함의 뒤집힘 [내부링크]

2019.9.17. 4년 전 오늘 아름답고 추함의 뒤집힘 한때 춘란 채집에 탐닉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난을 캐러 가기로 한 전날 밤이면, 눈을 감고 누운 천장엔 온통 노란색 이파리 하며, 붉은색을 머금은 꽃이 상상을 메웠더랬다. 주말임에도 평일보다 더 이른 시간에 기상해 서둘러 산지에 다다르면, 그렇게 가슴이 쿵쾅거리고, 또 세상 어디에도 없는 큰 기대감으로 산 높... 살다 마주치는 이야기, 그냥 일상

[1년 전 오늘] 또 다른(같은) 호모 사케르가 있다. [내부링크]

2022.9.17. 1년 전 오늘 또 다른(같은) 호모 사케르가 있다.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고대 그리스 용어로, 희생물로는 바쳐질 수 없지만, 법의 보호를 벗어나 죽여도 살해의 책임을 지지 않는 존재를 말한다. 호모 사케르는 법의 영역에서 추방당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예외 상태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사케르'라는 단어에는 라틴어 어원상 '성스러운 것&#x... 살다 마주치는 이야기, 그냥 일상

대왕암 풍경 [내부링크]

1. 대왕암 공원으로 향하는 입구에는 출렁 다리가 놓여 있다. 그것은 전국에서 경간장이 가장 길며, 몸무게 70kg 성인 1,200여명을 견뎌낼 수 있는 다리이다 2. 용이 지나 다녔다는 용굴 3. 할미 바위 또는 남근암으로 되어 있었는 데, 사진으로 남기고 보니 차라리 새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듯하다 4. 탕건암 옛사람들이 쓰던 탕건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5. 민암 그냥 밋밋해서 붙여진 이름인 듯 하다. 현대 중공업이 뒷 배경이라 더욱 그렇게 보인다 6. 문무대왕이 수장되었다고 전해지는 대왕암. 실제 확인은 되지 않고 있다 함 7. 세상이 뒤집혀도 해녀는 바다에서 물자맥질 중이다 8. 고깃배들도 세상 소음을 가르고 고기떼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질주한다 9. 제일왼쪽으로는 편두를 한 사람,중간에는 길게 늘어뜨린 얼굴, 그 옆에는 무언가에 깔린 얼굴 같은 게 보인다 10. 스핑크스나 로봇 전사를 닮은 모습도 보인다 11. 곳곳의 주상절리가 아름답기만 한 곳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이유 [내부링크]

"내가 제일 싫어하는 나라야 거기가! 일본 사람들 다 죽이고 싶어" 한국에서 유투버로 활동 중인 여성이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로 50대 남성에게 욕설과 고성을 들어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는 사연이 전해졌습니다. mbn 9.19 이 뉴스를 접한 많은 사람들은 비록 일본이 밉더라도, 한 개인일 뿐인 유투버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는 건 잘못이라 비난한다. 일본 도쿄의 한 고급 식당이 한국인 고객에게 '세제 섞인 물'을 제공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물을 마신 한국인 손님은 병원에 입원해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아시아경제 9.19 이 흉측한 소식에는 일본의 속물적 인종주의에다가 사악한 족속들의 혐오 범죄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ashni_ahlawat, 출처 Unsplash 그러면 이 두 뉴스를 동시에 우리나라와 일본에 던져 놓으면, 국적을 불문하고 각각의 그릇된 행위를 비난하던 태도는 아주 달라질 것이다. 즉 각각의 사태는 결코 옳은 행동이 아니지만, 각각의 국민이 상대편 국가에서 그런 꼴을 당한

경남 청년작가 초대전 작품[경남 도민의 집 9.5 - 10.1] [내부링크]

"현실 환경은 인공물과 자연이 공존하며, 우리는 그러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일상을 살아간다. 우리가 시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모든 대상에서 자연스러움은 매우 보편적이며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주변의 익숙한 풍경과 허구의 대상을 조화시켜 자연스럽게 그리는 것을 주축으로, 다양한 정물의 조합과 구성을 시험하고 있다. " [작가 1 노트중] "점의 표현은 가장 기본적인 회화 요소를 가지며, 여러 방식의 표현을 가능하게 해 주는 표현법이다. 미점준법은 자연의 형태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반복적 점의 중첩으로 강렬한 표현과 시간성을 가지며, 사물을 분해하고 재결합하는 모습이 개미가 자신들의 도시를 만들며 살아가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상한 것이다." [작가 2 노트중]

울어야 젖을 얻어먹지만, 애가 될 수는... [내부링크]

아기는 불가능성으로서 가능한 소통을 한다. 엄마나 그 주변 사람들에겐, 내가 배가 고프니 얼른 먹을 걸 달라는 온전한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충분히 요구 사항을 관철한다. 심지어 칭얼거림은, 본래 목적 외에 기저귀를 갈아 치우거나 씌워진 모자가 답답하니 벗겨달라는 등 부수적 효과까지 얻는다. liangkevin, 출처 Unsplash 물론 아기는 표정이 소통 수단이다. 그렇지만 보호자는, 특히 엄마는 온 심혈을 기울여 뭘 요구하는지를 탐색한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아기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 지[엄마는 단번에 알아차리지만...] 아기의 표정, 울음의 고저 등을 통해 알아차린다. 이렇게 아기가 칭얼거리는 때에는 몇 가지 시행착오를 통해 그 의도를 알아내는 데, 그보다 탁월한 소통 수단을 갖고 있는 어른들은 오히려 경청하지도, 최선을 다해 상대의 요구가 무엇인 지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떼쓰기, 드러눕기, 제 요구 사항만 강변하기 등 퇴행 행동은 참으로 가관이다. 이것은, 서로가

화단이 있는 풍경 [내부링크]

제가 사는 아파트 화단에 노부부께서 몇 년 째 가꾸시고 계신 반려 식물들입니다. 란타나 / 꽃무릇 / 강황 아스파라거스 / 아스클레피아스 (금관화) / 예루살렘 체리 플록스 / 맨드라미 / 둥굴레 흰분꽃 / 꽃범의 꼬리(피소스테기아) / 몽키 바나나 벽오동 / 용과 백향과 / 케일 적근대 루콜라 / 필레아 / 괴마옥 토란 / 생강 / 비트 남작두콩 / 양배추 / 단산 좁은 잎 백일홍 / 수선화 / 만수국

[4년 전 오늘]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읽고 - 하버마스 [내부링크]

2019.9.24. 4년 전 오늘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읽고 - 하버마스 의사소통 행위는 상호 주관적 이해를 바탕으로 한 의사합치 행위이다. 그에 입각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 이론에서 주장하는 바의 ‘의사소통적 이성’으로 상호 간 합의가 이루어지는 이상적 세계이면 인간의 삶은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① 인간은 충분히 합리적이지는 않다. 그런데, 의사소통 행위 이... 살다 마주치는 이야기, 그냥 일상

환상 횡단하기 [내부링크]

'한 아이를 국내 최고의 의대나 세계적 명문대로 진학시키고자 모든 것을 제 자식에 투자하는 부모가 있다. 선행 학습은 물론이고, 각종 예체능에서도 시늉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다 갖추게 한다. 이 부모 아래에서 처음엔 그럴듯하게 역량을 발휘하던 아이는, 점점 자신의 성향이 그와 같지 않음을 깨닫지만, 기실 부모가 원치 않는 아이돌 가수가 되기를 꿈꾼다.' 말을 배우는 과정을 지나면서 아이는 명문대에 진학해 사회. 경제적 지위 획득을 통한 엘리트 시민 되기의 부모 욕망에 위치하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부모 욕망은 아이의 취향. 역량 등을 넘어서는그 어떤 것으로 확장된다. 아이의 현실을 넘어서는 부모의 욕망은 팔루스이다. 처음에는 부모를 기쁘게 해 예쁨 받는 자식으로서 기꺼이 팔루스가 되고자 했던 아이는, 자신이 거기에 미칠 수 없음을 깨닫고는 부모의 희망에서 조금씩 이탈해 가기 시작한다. 상징적 거세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부모의 부정은 히

[4년 전 오늘] 사회적 바코드 [내부링크]

2019.9.11. 4년 전 오늘 사회적 바코드 의사소통이란 언어를 매개로 상호주관적 이해를 도모하는 것이다. 그런 정도의 정의를 내리려면 문화적 다양성에 따른 미묘한 어감 차이, 개념 간 오해를 조정한 합의에 의한 상호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이 말을 하는 데, 네가 알아듣지 못할 리가 있는가?"하는 것과 같은 이해가 있는 것이... 살다 마주치는 이야기, 그냥 일상

옷입고 삽시다! [내부링크]

주체의 신체 그 자체와 생명 형식 속으로 침투하는 권력의 구체적인 양태는 1) 정치 기술, 2)자아 테크놀로지[주체화]라는 것이다.[호모 사케르, 아감벤] 비유를 든다면, 정치 기술은 전 국민 건강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이에 대한 다양한 지원과 보상책을 시행한다. 그러면서 금연 정책의 경우는, 금연 교실. 금연패치 등 지원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성공 사례에 대해서는 금전적 보상도 병행한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 주체 유지, 노동자로서의 조건을 구비하기 위한 자아상을 형성하는 주체화를 지향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일과를 마친 후 내일의 건강한 직장 복귀를 위해서는, 알맞은 운동. 적절한 휴식. 충분한 수면과 영양 섭취를 권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건강 관련 비용을 줄이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를 가동하는 노동력을 신체를 통해 조율하고 계속성을 유지하는 이런 양태는, 정치 기술과 주체화를 결코 분리해 시행할 것은 아니다. 정치란 바로 이런 벌거벗은 신체를 대상으로 조직되

글 읽기 [내부링크]

글을 읽는 기법은 각자가 읽는 내용, 목적, 취향, 배경지식 등에 따라 다양한 것들이 있는 것 같다. 글이야 주어진 텍스트를 읽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달리 기법 따위를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마는, 여기서는 글의 여백. 행간을 읽어서 실재를 포착하고자 하는 의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물론 기법을 동원해 읽는 과정에서 그것을 포착하기도 하겠지만...] 더불어, 읽기 어려운 책은 덮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그냥 읽히는 서적이 아니라 한 번쯤 몹시 힘들게 읽어야 하는 것들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뭔가 난해한 저술을 통해 그것을 대한다는 현학적 속내는 은폐하더라도(?), 어려운 도서 1권이 쉬운 책 10권 분량 또는 그 이상의 생각거리를 제공해 준다는 측면에서, 질적 측면의 우월성은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독하시는 분들은 하루에도 몇 권씩의 책을 읽어내신다 하니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책을 대할 때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지 몹시 궁금하기도 하다. 그런 방법을

과거는 아름다워! [내부링크]

2주 전부터 진행해 온 종기 치료차 병원을 들렀다. 그간 쥐어짜고 주사 맞고 하다 보니 벌써 2주일이나 지났다. 얼추 붓기와 곪았던 부위의 딱딱한 느낌도 거의 없어져 아마 오늘은 일단락 선언을 받을 것 같았다. 아침부터 대기 환자들이 제법 되던 터라, 한 시간 가량을 기다리다 마침내 호출을 받았다. "왜 왔어요?" 옆 의자에 앉자마자 의사는 퉁명하게 대뜸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아니, 일주일 전에 오늘 내원하라 그래서 왔잖아요!"라고 은근히 반발하면서 대답했다. 그랬더니, 컴퓨터 모니터를 몇 초 응시하던 의사는 환부를 봐야 하겠으니 예의 옆방 침상으로 옮겨 가라는 것이었다. '아니, 오라 그래 놓고 뭣 땜에 왔느냐 라니?' '아무리 옛날(?) 사람이라도, 이런 불친절한 사람이 있나!' 속으로는 불쾌하기까지 하던 참이었다. 진단은 예상대로 이제 평상시처럼 생활하면 되며, 만약 3개월 후쯤 재발하면 그땐 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는 원론적 처방이었다. 병원을 빠

길을 읽어 길을 잃다. [내부링크]

만약 내비게이션 도움없이 창원시청에서 서울 어느 곳을 간다고 하면, 그 이정은 우선, 남해1지선 고속도로 동마산 나들목으로 진입해 중부내륙고속도와 갈라지는 내서분기점에 닿는다. 그리고는 그 분기점에서 김천.대구 방면의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변경후 계속 진행하다가 중부내륙지선으로 들어서는 현풍분기점에서 서울.김천 방면 램프를 택한다. 이후 양평 나들목에서 오른쪽 램프로 고속도로를 빠져 나온 후...... 그 이정을 지명으로 표현했을 때는 대략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진행한다. dnevozhai, 출처 Unsplash 그것을 표지판에 기재된 고속도로 번호 등으로 안내한다면, E102(세 자리 짝수 번호로 봐서는 지선이며 동서간 고속도로이다)→ 31B(31번 분기점 오른쪽 방향)→E45(남북 방향 고속도로)→8A(8번 분기점 왼쪽 방향)→30(30번 나들목에서 고속도로 진출)..... 이 방식으로는, 진행중에 미리 확인 한 목적지를 기준으로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동서남북)를 점검할 필요

침묵하는 절규 [내부링크]

지하철 자전거 칸에 탑승한 할머니에게 자전거 동호회원들이 폭언을 퍼부은 사실이 알려지며 공분이 일고 있다. 지난 14일 YTN에 따르면, 지난 9일 오후 경의 중앙선 지하철에서 한 할머니가 자전거 칸에 탔다는 이유로 자전거 동호회원들에게 욕설을 듣고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 뉴시스 9.15 약자를 보호하거나 나이 든 사람들을 존중한다는 식의 전통 윤리가 붕괴되고 있다는 견해는 일면 맞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양적. 객관적 가치를 재단하는 공리주의쯤이 덜 행세할 때의 일이다. 자신들의 취향. 추구하는 바가 비슷한 동호회라는 말 그대로인 것 같으면, 그 모임은 이해타산을 벗어나 정서적 일체감으로 연대한 그룹일 것임에도 이런 일은 벌어졌다. mannyb, 출처 Unsplash 하지만 그것의 이면은, 자전거를 타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누군가 관심을 갖고 지지할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는, 타인. 배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고속으로 이동하는 '자전거 칸'이라는 시간과 공간이 그

소유보다는 공유? [내부링크]

한계비용이 '0'이란 것은, 제품 한 단위 생산에 추가 비용이 더 들어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본주의는 생산도 이윤도 잉여를 전제로 하는 데, 그렇다면 이는 그것의 종말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hagwall, 출처 Unsplash 하지만, 자본주의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체제라는 것이지만, 기실은 역설적으로 비효율적이어야 생존이 가능하다. 어쨌든,협력적 공유 사회는 그와 같은 자본주의에 대한 대체나 새로운 경제 체제가 될 가능성이라 말하지만, 여기에는 가슴 부푼 환상만큼이나 매우 큰 문제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것이 어느 순간에는 사그라들거나 완화될 것이기는 하지만, 각자의 소유 효과. 과시 욕구. 구별짓기에 의한 공유 기피 등의 비협력을 들 수 있다. 물론, 대중적이고 통속적인 부문에서는 공유경제가 작동할 여지는 많아 보인다. 예를 들어, 대중음악의 음원. 간이생활 용도의 중저가 승용차. 자전거 같은 가벼운 이동 수단 따위이다. dmjdenise, 출처 Unsplash

태양은 다수이다 [내부링크]

'태양은 언제나 변함이 없고 모든 것들을 볼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최고신이나 통치자와 종종 동일시 되곤 했다. 또한 만물을 자라게 하는 생의 원천이라는 점 때문에, 모든 신들중에서도 가장 으뜸에 위치해 있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을 죽음과 생명은 물론, 부활의 영원한 순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나무위키] jonathanborba, 출처 Unsplash 한 마디로, 태양은 생명의 원천과 순환을 관장하는 최고로서의 존재이다. 이런 후광(?)을 빌리는 각종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태양을 설화와 관련 지은 예를 보자. 고대 이집트인들은 세계가 아툼이라는 태양신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생각했다.[위키백과] 주몽은 오인(烏引)·오위(烏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큰 강을 만났는데, 건너려 해도 다리가 없었다. 부여인들의 추격은 매우 급박하였다. 주몽이 물에 고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日子]이요, 하백의 외손이다....[매일경제] 그

일단 멈춤 [내부링크]

공교육 멈춤의 날인 4일, 다수의 학부모가 교외 체험학습으로 연대하고 있습니다. 학교 차원의 재량 휴업이 어려워지자 체험 학습으로 교사의 부담을 덜어주겠다는 것인데요. 오늘 학부모들은 자녀의 일일 선생님이 되어 교권과 인권을 가르치겠다는 계획입니다 노컷뉴스 9.4 milancsizmadia, 출처 Unsplash 폭주하던 주식회사 대한민국이 여기저기서 과속 등 교통법규 위반 딱지를 발급받고 있다. 그 간에 교통단속 경찰이 슬쩍 눈감아 주었거나 창문을 내리고는, "내가 누군지 알기나 해! 느그 경찰서장 전화 연결해!"쯤의 권력형 부조리에 굴복해 왔더랬는 데... 이제서야 부랴부랴 안전지대를 만들고 과속을 단속한 들, 여태껏 달려왔던 속도는 제어되지 않을 만큼 원심력이 크다. 그래서 사회이고 국가이고 간에 곳곳에 파열음이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간에 그렇게 간절했던 국가이며 공동체는, 단지 주식회사같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반인들이 과속 사고, 무고한 교통사

네모난 원 [내부링크]

누가 길을 알아, 사람들이 갈 곳을 알려줄 수 있겠는 가? 그런다고 해봐야 기껏 자신의 실수. 실패를 유추해, 그런 일들이 인생사라고 위안을 건네줄 역할 밖엔 달리 있을 게 없다. 세상 사는 일이 확연히 달라졌으니, 예전 경험 따위는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질 못한다. abebarrera, 출처 Unsplash 물론 세상 일은 꼭 맞는 사례에서 교훈을 얻거나 해결책을 획득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만, 타인의 드라마가 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계기가 되기는 한다. 굳이 세대 차이나 패러다임 변화라고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어쩌면, 세상이 일정 궤도에 진입하기 위한 추진력이 각각 달라 속도가 다를 뿐이고, 전체가 임계치라는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하므로 차이가 날 뿐이다. 거기에 적응하지 못하면 제 자리에 있거나, 어지러운 속도를 못 따라잡아 마구 달아나는 시대의 뒤꽁무니를 좇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속력이 붙은 시대는, 최대한의 원심력을 끌어 들여 본래 궤도를

글쓰기의 뺄셈 [내부링크]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빈 여백에 자신의 사유, 느낌, 이미지 따위를 그려 넣는 것이다. 맞다. 그런데 아니기도 하다. 그것은 오히려 여백에 무수하게 흩어져 와글거리고 있는 사실들을 제거해 나가면서, 표현이든 사유든 간에 새로운 의미에 도달하는 게 아니겠는가? 따라서 단순히 여백을 메꿔 나가면서 의미에 도달한다는 건 오해다. 예를 들어 더 이상 글이 써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재현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그 위에 또다시 재현을 반복하거나 덧씌워 구겨 넣으려니 이미 공백은 다 차버려 더 넣을 여지가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어떤 것에 대해 쓸려면, 많은 사람들이 이미 거쳐가 버려 더 이상 언급하는 것이 동어반복이 되거나, 남의 생각을 거듭 자신의 것처럼 써버리듯 의의를 잃어버리는 것 아닌가? 그래서 글쓰기는 오히려 엄청나게 넘치도록 펼쳐져 있는 말들의 꾸러미에서 자신만의 뺄셈을 가해 버리면, 텍스트는 흘러내리고, 그래서 새로운 사실관계를 만들어 내지 않을까? 텍스트를

애꿎은 뺨 [내부링크]

보편자는 구체적 내용을 아우르는 담지자, 개별성들의 갈등을 평화로이 중재하는 배경이 아니다. 보편자 자체가 참을 수 없는 적대, 자기 모순의 현장이다. 그것의 다양한 개별적 종들이란, 궁극적으로 이 반목을 흐리고 화해시키고 지배하려는 무수한 시도들에 다름 아니다. 한 권으로 읽는 지젝 누구나 알다시피, 미국은 다인종으로 구성되었으며 여러 나라가 합쳐진 연합국이다. 남북 주정부간 성향. 인종. 민족 등 역사적 문제들이 수시로 봉합된 부위를 뚫고 수면위로 부상하는 나라이다. 흔히 드러나는 현상이지만 그중, 백인과 흑인간 해묵은 갈등은 대표적으로 상징계를 뚫고 등장하는 실재인 것이다. 사실, 흑인은 자본주의 변증법의 전형처럼 여겨지는 미국에서, 흔히 비유되는 주인과 노예의 역사라는 부정성을 안고 있는, 결코 백인 주류 사회에 통합될 수 있는 부류는 아니다. 인용문처럼, 보편자라는 의미 자체가 적대, 모순이 융합된 것에 불과하지 결코 용해되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결코 화해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