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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란드의 노래(Chançon de Roland): 사라구츠의 마르실리어 [내부링크]

Carles li reis, nostre emperere magnes, 우리 위대한 황제(Emperere)이신 카를르스 왕(Reis)께서는 Set anz tuz pleins ad estet en Espaigne: 칠 년 동안 내내 에스파이뉴에서 상주하시었으며, Tresqu’en la mer cunquist la tere altaigne. 바다(Mer)에 이르기까지 고지(Tere Altaigne)를 정복하시었다. [ 여기서 카를르스(Carles)는 프란켄(Franken)의 왕(Kuning)인 카를(Karl)이다. ] 카를 N'i ad castel ki devant lui remaigne; 이제 그 분의 앞에 저항하는 성(Castel)은 더는 없을 뿐더러, Mur ne citet n’i est remes a fraindre 성벽(Mur)도 도시(Citet)도 점령할 곳이 남아 있지 않다. Fors Sarraguce, k'est en une muntaigne. 그것도 산(Muntaigne

롤란드의 노래(Chançon de Roland): 조언을 구하는 마르실리어 [내부링크]

Li reis Marsilie esteit en Sarraguce: 마르실리어(Marsilie) 왕(Reis)은 사라구츠(Sarraguce)에 있다. [ 여기서 사라구츠(Sarraguce)는 현대의 사라고사(Zaragoza)이다. ] 사라구츠 Alez en est en un verger suz l'umbre; 그는 과수원(Verger)의 그늘로 가서는, Sur un perrun de marbre bloi se culched, 청색 대리석의 석계(Perrun de Marbre Bloi)에 몸을 눕혔다. Envirun lui plus de vint milie humes. 그의 주위로 20,000인 이상의 규모의 사람들이 둘러선다. Il en apelet e ses dux e ses cuntes: 그는 공작(Dux)들과 백작(Cunte)들에게 간청했다. "Oez, seignurs, quel pecchet nus encumbret: 경(Seignur)들은 우리 앞의 죄악의 화신(Pecche

자신이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귀갓길에 오르는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26892441)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와 직접 대면해 갈등을 해소할 목적으로 꼬르띠(Corti)로 이동했다. 나뽈레옹 빠스꽐레 빠올리 1793년 5월 4일에 나뽈레옹은 목적지인 꼬르띠로 이동하던 중에 출발지인 비바리우(Vivariu)와 뽄떼 디 베띠우(Ponte di Vechju)의 사이의 위치에서 아얏츄(Aiacciu)로 이동하던 듀반니 빠울루 메우론(Ghjuvanni Paulu Meuron)이라는 인물과 대면하게 된다. 메우론은 나뽈레옹에게 꼬르띠로 갈 경우 빠올리에 의해 체포당할 위험이 있음을 알리며, 아얏츄로 귀환할 것을 조언한다. 비바리우에서 뽄떼 디 베띠우까지의 거리는 3km이다. A: 비바리우 B: 뽄떼 디 베띠우 결국 나뽈레옹은 직접 대면을 통해선 빠올리와의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단하면서 목적지를 고향인 아

정적의 지지자들에 의해 체포된 만 23세 청년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31100359)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자신과 정적 관계이던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와의 갈등을 직접 대면해 평화롭게 해결하려다 빠올리가 자신을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목적지를 자신의 고향인 아얏츄(Aiacciu)로 변경한 이후 부꾸냐(Bucugnà)의 입구에서 자신의 심복(Partigiano)인 안듈루 산뚜 보넬리(Anghjulu Santu Bonelli)와 헤어진 이후 뽀디올루(Poghjolu)에서 거주하고 있던 친척인 펠리체 뚜솔리(Felice Tusoli)의 저택에서 숙박을 하게 된다. 나뽈레옹 빠스꽐레 빠올리 지난 주제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은 심복인 안듈루에게 두 도로(Strada)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아얏츄로 이동할 때 사용할 말(Cavallo)들을 준비해놓고 대기할 것을 명령했는데, 1795년 5월 5일에 나뽈레옹은 본래 친척인 펠리체와 함께

심복, 친척, 가문의 심복들의 도움으로 생존한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32191028)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자신과 정적 관계이던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와의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기 위해 부꾸냐(Bucugnà) 지역 내의 촌락(Borgata)인 꼬르사치(Corsacci)에서 빠올리의 지지자(Partigiano)들은 설득했다가 빠올리의 지지자 중 하나인 모렐리(Morelli) 가문의 가주(Chef)에 의해 체포되어 그의 저택에 구금되었다. 나뽈레옹 빠스꽐레 빠올리 그런 상황에서 나뽈레옹의 심복(Partigiano)인 안듈루 산뚜 보넬리(Anghjulu Santu Bonelli)는 자신이 섬기던 나뽈레옹을 구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나빠흐뜨(Bonaparte) 가문의 심복 가문인 비차보나(Vizzavona) 가문의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결과 비차보나 가문의 사람들 중 하나가 나뽈레옹을 구출하기 위해서 모렐리 가문의 가주의 저택

만 17세 소년 뤼시앵(나폴레옹의 동생)의 연설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10736205)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의 첫째 남동생 뤼시앵(Lucien)은 나뽈레옹을 견제하던 인물인 꼬르시까(Corsica)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인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의 비서(Segretario)로 근무하다가 가족들의 강요로 부득이하게 빠올리와 결별하게 된다. 뤼시앵 빠스꽐레 빠올리 나뽈레옹 그런 상황에서 1793년 1월 26일에 꼬르시까에선 꼬르시까 내 모든 꼬뮌(Commune)들의 의원(Député)들로 구성된 심의회(Consulte)와 임시 회의(Assemblea Straordinario)가 조직되었고, 빠올리는 총사령관(Generalissimo)과 총통(Chef Supremo)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프항스(France)를 버리기 위한 정책이 추진되는데, 혁명(Révolution)으로 인해 망명을 하게되

만 17세 소년 뤼시앵의 연설로 인한 프랑스와 코르시카의 대립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12555280)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의 첫째 남동생 뤼시앵(Lucien)은 자유와 평등 친우회(Société des Amis de La Liberté et de L’Égalité)의 뚤룬(Tolon) 지회에서 나뽈레옹을 견제하던 인물인 꼬르시까(Corsica)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인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와 그의 지지자인 까를루 안드레아 뽀초 디 보르고(Carlu Andrea Pozzo di Borgo)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게 된다. 뤼시앵 빠스꽐레 빠올리 까를루 안드레아 뽀초 디 보르고 나뽈레옹 청중들은 이 만 17세 소년 뤼시앵의 연설에 찬사를 보냈는데, 문제는 이것이 청중들의 찬사로 종식된 것이 아니었다. 이 연설 내용을 바르(Var)의 의원(Député)인 장-프항수아 에스뀌디에흐(Jean-François

서신 하나로 프랑스의 국민 공회를 설득시킨 코르시카의 파올리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13800812)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의 첫째 남동생 뤼시앵(Lucien)이 꼬르시까(Corsica)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인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와 그의 지지자인 까를루 안드레아 뽀초 디 보르고(Carlu Andrea Pozzo di Borgo)를 비난하는 연설을 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에 의해 인민의 적(Ennemi du Peuple)으로 규정된다. 뤼시앵 빠스꽐레 빠올리 까를루 안드레아 뽀초 디 보르고 이에 대응해 빠올리는 1793년 4월 26일에 국민 공회 측에 서신을 보낸다. 이 서신의 내용이란 자신의 나이은 나이가 들었으며 빠히(Paris)까지 이동하기엔 이동 중에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빠올리의 나이 만 66세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는 설득력 있는 이동

총평의회 의장 파올리와 국민 공회가 파견한 위원 살리체티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16433738)에서 언급했듯이 꼬르시까(Corsica)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인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는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에 의해 인민의 적(Ennemi du Peuple)으로 규정된 상황에서 서신 하나를 보냄으로써 국민 공회를 납득시켜 "인민의 적" 으로 규정된 것을 유예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빠올리에 의해 납득당한 국민 공회 측에선 2명의 위원(Commissaire)을 추가로 파견했다. 2명의 위원은 아바이루(Avairon)의 의원(Député)인 장-바띠스뜨 보(Jean-Baptiste Bô)와 바르(Var)의 의원인 샤흘-루이 앙띠불(Charles-Louis Antiboul)이었다. 빠스꽐레 빠올리 1793년 6월 7일에 2명의 위원은 빠히(Paris)에서 꼬르시까로 출발했다. 당시 상황은 17

고향 땅의 점령 임무를 다시 부여받았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13800812)에서 언급했듯이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는 3인의 위원(Commissaire)들을 꼬르시까(Corsica)로 파견했고, 3인의 위원들에게 꼬르시까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인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를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하자 나뽈레옹(Napoléon)은 대외적으론 프항스(France)와 꼬르시까 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지역 내부에선 3인의 위원 중 하나이자 반 빠올리 정파와 빠올리를 지지하는 정파인 빠올리스따(Paolista) 간의 전쟁이 발발했음을 인지했다. 나뽈레옹 빠스꽐레 빠올리 반 빠올리 정파의 수장은 국민 공회에서 파견한 3인의 위원 중 일원인 안또누 끄리스뚜파루 살리체띠(Antonu Cristufaru Saliceti)와 전직 의원(Député)이었던 바르뚤루메우 아레

산보를 마친 이후 귀갓길에 암살 시도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 [내부링크]

1793년 4월 27일의 사건이다. 나뽈레옹(Napoléon)은 이술리 상귀나리(Ìsuli Sanguinarii)의 뿐따 디 라 빠라따(Punta di La Parata)에서 기분 전환을 목적으로 혹은 고향인 아얏츄(Aiacciu) 지역의 요새화(Fortification) 계획을 목적으로 아침에 미겔레 안듈루 도'르나노(Mighele Anghjulu d'Ornano)와 산보를 하면서 뿐따 디 라 빠라따에 소재한 탑(Torra)인 또라 디 아 빠라따(Torra di a Parata)의 설계도(Piano)를 그린다. 나뽈레옹 미겔레 안듈루 도'르나노 뿐따 디 라 빠라따 또라 디 아 빠라따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8015953)에서 언급했듯이 오르나노(Ornano) 가문에는 나뽈레옹과 이름이 같은 종조부인 나불리오네(Nabulione)의 외손자였던 필리쁘 앙뚜안 도'르나노(Philippe Antoine d'Ornano)가 있었는데

갈등을 해결하러 출발했으나 동생의 대형 사고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26037113)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산보 이후 귀갓길에 암살 시도 소식을 접했다가 "바갈리노(Bagaglino)" 라는 목자(Pastore)의 호위를 받으면서 집이 있는 아얏츄(Aiacciu)로 귀환했다. 이후 나뽈레옹은 1792년 5월 2일까지 고향 아얏츄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뽈레옹 그리고 5월 2일의 저녁에 심복(Partigiano)인 안듈루 산뚜 보넬리(Anghjulu Santu Bonelli)가 말을 타고 무장한 상태로 아얏츄에 도착해오자, 나뽈레옹은 새벽에 보넬리와 함께 바스띠아(Bastia)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보넬리는 "산뚜 리치(Santu Ricci)" 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당시 보넬리 이외에도 나뽈레옹과 동행했던 인물이 있는데 이 인물이 니꼴루 프라떼(Nicolu Frate)이다. 그 역시 나뽈레옹의 심복으로 부꾸냐(Bucugnà) 출신이며,

집요하게 나폴레옹의 사르데냐 원정을 방해했던 파올리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95110888)에서 언급했듯이 꼬르시까(Corsica)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이었던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는 프항스(France)와 나뽈레옹(Napoléon)이 사르디냐(Sardigna) 원정(Expédition)에서 패배하길 기대했다. 나뽈레옹 빠스꽐레 빠올리 빠올리는 프항스와 나뽈레옹이 원정에서 실패하도록 공작을 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95110888)에서 언급했듯이 후제독(Contre-Amiral)이 로항 뜨휘게(Laurent Truguet) 지휘하던 함대(Flotte)는 혁명 육군(Armée Révolutionnaire) 소속의 3,000 병력을 아얏츄(Aiacciu)로 수송시켰는데, 이 병력 수송 과정에서 사실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 그것은 육군 소속 장병(Sol

높으신 분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진행된 나폴레옹의 원정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96041272)에서 언급했듯이 사르디냐(Sardigna) 원정(Expédition)에 참전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은 꼬르시까(Corsica)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이었던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의 방해로 인해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서 1793년 2월 18일 야간에 출항을 하게 되면서 원정을 수행하게 되었다. 나뽈레옹 빠스꽐레 빠올리 하지만, 불행히도 익일인 2월 19일에 목적지인 수 마달레나(Sa Madalena)가 보이는 곳까지 도착했음에도, 폭풍(Tempête)으로 인해 상륙이 불가능해지면서 병력을 수송했던 꼬흐베뜨(Corvette)인 라 포베뜨(La Fauvette)가 출항지였던 부니파치우(Bunifaziu)로 귀환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부니파치우에서 2일을 지체하게 된다. 그렇게 2일 지체한 이후 2월 22일 오전 9시에

나폴레옹과 프랑스의 사르데냐 원정을 실패하게 만들었던 파올리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97298168)에서 언급했듯이 사르디냐(Sardigna) 원정(Expédition)에 참전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은 꼬르시까(Corsica)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이었던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의 방해로 인해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서 원정을 수행했음에도 순조롭게 공격 임무를 수행했다. 그 결과 공격 임무의 달성이 임박하게 되었다. 나뽈레옹 빠스꽐레 빠올리 하지만, 이런 상황은 빠올리가 심어놓은 방해꾼인 공격 임무를 총괄 지휘했던 뻬뜨루 빠울루 꼴론나 체자리 델라 로까(Petru Paulu Colonna Cesari della Rocca) 입장에선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결국 체자리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1792년 2월 24일 저녁에 체자리는 점령했던 산뚜 스떼파누(Santu Stefanu)의 무기고(Magazzino) 무기고

수병들의 나폴레옹 암살 시도 [내부링크]

사르디냐(Sardigna) 원정에 참전했다가 실패를 경험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은 1792년 2월 27일에 꼬르시까(Corsica)로 귀환하게 된다. 나뽈레옹 이후 익일인 1792년 2월 28일에 나뽈레옹은 자신이 지휘했던 대대인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동료들과 함께 어떠한 증명서(Attestation)에 서명을 하게 된다. 그 증명서란 수 마달레나(Sa Madalena)의 공격 임무를 총괄지휘했던 뻬뜨루 빠울루 꼴론나 체자리 델라 로까(Petru Paulu Colonna Cesari della Rocca)의 지휘관으로서 열정(Zèle)과 애국심(Patriotisme)에 대해 증명해주는 증명서였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99760766)에서 언급했듯이 체자리는 프항스(France)의 사르디냐 원정을 방해해서 실패하게 만드는데 성공했던 인물로, 그러한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

국민 공회의 견제를 받는 인민의 적, 파올리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03594676)에서 언급했듯이 꼬르시까(Corsica)의 의원(Député)인 안또누 끄리스뚜파루 살리체띠(Antonu Cristufaru Saliceti)는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에서 파견한 3인의 위원(Commissaire) 중 하나로서 꼬르시까로 파견되었다. 안또누 끄리스뚜파루 살리체띠 이 3인의 명목상의 임무는 꼬흐시까의 4개의 의용군 대대(Bataillon de Volontaires)를 엽병 대대(Bataillon de Chasseurs)로 전환시키고, 2개 대대만을 꼬르시까에 남기게 하고, 나머지 2개 대대를 알쁘 군(Armée des Alpes)과 바르 군(Armée du Var)에 원군으로서 파견하는 것이었는데, 국민 공회가 3인의 위원들에게 이런 임무를 부여했던 이유는 4개의 의용군 대대가 꼬르시까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

10대 비서 뤼시앵(나폴레옹의 동생)과 60대 정치가 파올리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407089360)에서 언급했듯이 꼬르시까(Corsica)의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인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는 국민 공회(Convention Nationale)에 의해 인민의 적(Ennemi du Peuple)으로 규정된다. 빠스꽐레 빠올리 이렇게 인민의 적으로 규정될 당시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이 있었는데, 이 인물은 빠올리가 견제했던 인물인 나뽈레옹(Napoléon)과 관련이 있었다. 이 인물이 바로 나뽈레옹의 첫째 남동생 뤼시앵(Lucien)이다. 뤼시앵 나뽈레옹 뤼시앵은 본래 까스뗄루 디 루스띠누(Castellu di Rustinu)에서 빠올리의 비서(Segretario)로서 6개월을 근무했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57311944)에서 언급했듯이 뤼시앵의 부친 샤흘(C

1792년 8월 10일의 사건과 만 22세 대위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80307273)에서 언급했듯이 대위(Capitaine)로 진급했으나, 전쟁부(Ministère de La Guerre) 산하의 포병과(Bureau de L'Artillerie)에서 자대 복귀를 명령한 것에 불만을 느껴, 포병과의 명령을 거부하고 빠히(Paris)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뽈레옹 그러다 1792년 8월 10일에 혁명(Révolution)의 대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이 사건이 바로 1792년 8월 10일의 날(Journée du 10 Août 1792) 사건이다. 1792년 8월 10일의 날 이 사건은 빨레 데 뛸르히(Palais des Tuileries)에서 발생했는데, 당시 2,000인 병력 규모의 피유-생-토마 대대(Bataillon des Filles-Saint-Thomas)와 200인의 무장한 상태의 귀족(Noblesse)들, 900인 병력의 슈비츠 근위대(Schwiizergarde)

자대 복귀 명령을 불복종해 해군 장교 임관을 시도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80307273)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대위(Capitaine) 진급에도 불구하고, 자대 복귀 명령에 불만족을 느껴 자대로 복귀를 하지 않고 빠히(Paris)에서 생활했다. 나폴레옹 그렇게 빠히에서 생활하던 도중에 나뽈레옹은 합법적으로 자대에 복귀하지 않아도 되는 방안을 찾게 된다. 1792년 8월 30일에 나뽈레옹은 해군 장관(Ministre de La Marine)인 가스빠흐 몽쥬(Gaspard Monge)를 접견했다. 가스파르 몽쥬 나뽈레옹이 생각했던 합법적인 자대 복귀 불이행이란 해군 포병대(Artillerie de Marine)의 중령(Lieutenant Colonel)으로 임관하는 것이었다. 나뽈레옹은 해군 장관 몽쥬에게 해군 포병대의 중령직으로 임관하는 것을 승인해 달라고 청원했다. 당시 나뽈레옹은 경력은 해군 포병대하는데 문제가 없을 수준으로 우월했다. 프항스(Fran

여동생의 학교 문제를 이용해 자대 복귀 문제를 해결한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87502960)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자대 복귀 명령에 불복종할 목적으로 해군 포병대(Artillerie de Marine)의 중령(Lieutenant Colonel)으로 임관하는 것을 시도했는데, 임관 요건을 모두 충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군 장관(Ministre de La Marine)이 나뽈레옹의 임관을 거부하면서 나뽈레옹의 합법적인 자대 복귀 명령 불족종 계획은 무산되게 된다. 나뽈레옹 하지만 나뽈레옹에겐 해군 포병의 중령으로 임관하는 것 이외에도 또 하나의 합법적으로 자대 복귀 명령을 불복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그것은 나뽈레옹의 첫 번째 여동생 마히 안(Marie Anne)과 관련이 있었다. 마히 안 나뽈레옹이 해군 포병대에 임관하는데 실패했던 당시 마히 안은 만 15세의 나이였고, 8년 이상을 생-시흐(Saint-Cyr)에 위치한 메종 후아얄 드 생-루이(Maiso

나폴레옹과 질책만 하는 높으신 분 파올리 [내부링크]

1792년 10월 15일에 나뽈레옹(Napoléon)은 여동생 마히 안(Marie Anne)과 함께 고향인 아얏츄(Aiacciu)로 귀환했다. 나뽈레옹 마히 안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80307273)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은 형 조제프(Joseph)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2등 중령(Lieutenant Colonel en Second) 직을 사임할 예정임을 통지했었는데, 이렇게 통지했음에도 나뽈레옹은 실제론 2등 중령 직을 사임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단순히 형 조제프에게 그럴 예정임을 통지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조제프 나뽈레옹은 다시 제2 의용군 대대를 지휘하기 위해 제2 의용군 대대의 6개 중대(Compagnie)가 주둔하고 있던 지역인 꼬르띠(Corti)로 이동했다. 나뽈레옹은 1792년 10월 21일에 꼬르띠에 도착했고, 꼬르띠에서 꼬르시까(Co

발미 전투 이후의 프랑스 [내부링크]

1차 동맹 전쟁(Guerre de La Première Coalition)에서 신성 롬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과 프로이슨(Preußen)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던 프항스(France)는 1792년 9월 20일에 발미(Valmy) 전투에서 신성 롬 제국과 프로이슨을 승리하게 된다. 발미 전투 발미 전투 당시 프항스 측 지휘관은 아흐메 뒤 노흐(Armée du Nord)의 총사령관(Général en Chef)이었던 샤흘 프항수아 뒤 뻬히에 뒤 무히에(Charles François du Perrier du Mouriez)였고, 신성 롬 제국 측의 지휘관은 프리드리쉬 빌헬름 추 호엔로어-키르슈베르크(Friedrich Wilhelm zu Hohenlohe-Kirchberg), 프로이슨 측의 지휘관은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브론스비크-불픈뷔들(Karl Wilhelm Ferdinand von Bronswiek-Wulfenbüddel)이었다. 샤흘 프항수아 뒤 뻬

만 40세 후제독 트뤼게와 만 16세의 소녀 엘리자(나폴레옹의 여동생)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90593654)에서 언급했듯이 국민 의용군(Volontaires Nationaux)의 장교(Officier)였던 나뽈레옹(Napoléon)은 사르디냐(Sardigna) 원정(Expédition)에 참전하게 되었다. 나뽈레옹 당시 프항스(France)는 사르디냐를 정복해 지중해(Méditerranée)를 장악해서, 피오렌차(Fiorenza)와 나뿔르(Napule)에게 위협을 가함과 동시에 사르디냐 지역의 곡물(Raccolto)을 약탈해서 루 미엣쥬르(Lo Miègjorn) 지역의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1792년 12월 15일에 후제독(Contre-Amiral)이 로항 뜨휘게(Laurent Truguet) 지휘하던 함대(Flotte)가 아얏츄(Aiacciu)에 도착했다. 이 함대를 통해 혁명 육군(Armée Révolutionnaire) 소속의 3,000 병력이 아얏츄로 수송되었다. 이렇게 3

지역의 평안을 위해 허위 보고를 해야만 했던 연대장 마이야르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60730936)에서 언급했듯이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만 22세 지휘관 나뽈레옹(Napoléon)은 제42 보병 연대(42ᵉ Régiment d'Infanterie)의 지휘관 프항수아-샤흘 드 마이야흐(François-Charles de Maillard)와 아얏츄(Aiacciu)의 시(Municipalité)를 상대로 승리했다. 나뽈레옹 이후 마이야흐는 1792년 4월 14일에 전쟁부(Ministère de La Guerre)에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미 패배한 상황에서 또다시 의용군 대대를 상대로 항거할 경우 지역의 평안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판단해서 보고서에다 의용군 대대의 명목상 대대장인 듀반니 바띠스따 꾸엔차(Ghjuvanni Battista Quenza)와 실질적 대대장이었던 나뽈레옹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았고, 의용군 대대 측에서 제42 보병

장병들의 민간인 학살 행위를 방관했던 의용군 지휘관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72613973)에서 언급했듯이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만 22세 지휘관 나뽈레옹(Napoléon)은 아얏츄(Aiacciu)에서 점령 과정에서 장병(Soldat)들을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고 방종하게 행동하도록 지휘했는데, 이것이 원인이 되어 대대의 장병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게 된다. 아얏츄는 나뽈레옹의 고향으로, 나뽈레옹의 가문인 부오나빠르떼(Buonaparte) 가문이 기반으로 했던 지역이자, 나뽈레옹의 가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기도 했다. 나뽈레옹 나뽈레옹이 지휘했던 민간인 학살은 1792년 4월 9일에 오전 7시에 발생했다. 당시 의용군 대대의 장병들은 자신들의 병영(Caserma)이 소재해 있는 그란데 세미나리오 디 아얏츄(Grande Seminario di Ajacciu)의 탑(Torra)과 또라 디 산 됴르듀(Torra di San Ghjorghju

의용군 지휘관 나폴레옹에게 원한을 가진 입법 의회 의원 페랄디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73998441)에서 언급했듯이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만 22세 지휘관 나뽈레옹(Napoléon)은 자신의 고향 아얏츄(Aiacciu)에서 장병(Soldat)들을 의도적으로 무질서하고 방종하게 행동하도록 지휘했는데, 그 결과 장병들이 민간인들에 대한 학살을 행하게 된다. 나뽈레옹 이 사건의 결과 나뽈레옹은 어느 인물과 원수 관계가 되는데, 이 인물이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66788879)에서 언급했던 마리우 듀제뻬 라비듀 뻬랄디(Mariu Ghjuseppe Lavighju Peraldi)였다. 마리우는 사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나뽈레옹에게 적대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동생인 듀반니 듀제뻬 마떼우 뻬랄디(Ghjuvanni Ghjuseppe Matteu)가 제2 의용군 대

학살 행위를 방관하고도 처벌받지 않았던 의용군 지휘관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72613973)에서 언급했듯이 전쟁 장관(Ministres de La Guerre)인 삐에흐 오귀스뜨 라자흐(Pierre Auguste Lajard)는 나뽈레옹(Napoléon)이 지휘했던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가 아얏츄(Aiacciu)에서 행했던 학살 행위들에 대한 증거들을 입수하면서 이 학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상황은 장병(Soldat)들의 학살 행위에 대해 방관하며 지휘했던 나뽈레옹의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뽈레옹 하지만 상황은 나뽈레옹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사건의 최종 처리 결정권은 전쟁 장관 리자흐가 아닌 법무 장관(Ministres de La Justice)인 에띠엔 드 졸리(Étienne de Joly)에게 부여되었으며, 사건에 대한 재판역시 일반 판사(Juge Ordinaire)가 담당하게 되었다. 에띠엔 드

군 당국의 잘못된 행정 처리로 퇴역당했다 복직에 성공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61641975)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전쟁부(Ministère de La Guerre)의 잘못된 행정 처리로 퇴역을 당하게 된다. 그 결과 나뽈레옹은 잘못된 행정 처리로 인한 퇴역을 취소시킬 목적으로 전쟁부가 소재한 빠히(Paris)로 이동했다. 나뽈레옹 그리고 1792년 6월 21일 포병 위원회(Comité de L'Artillerie)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당시 프항스(France)의 상비군(Armée de Métier)이었던 아흐메 후아얄(Armée Royale)에서 많은 장교(Officier)들이 혁명(Révolution)에 반대해서, 퇴역을 하고 망명을 해버린다. 당시 프항스에선 혁명에 반대해 망명을 했던 자들을 에미그헤(Émigré)로 호칭했는데, 아흐메 후아얄 소속의 장교들 다수가 에미그헤가 퇴역과 동시에 망명을 선택해 에미그헤가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지난 주

대위 진급에도 불만족스러웠던 만 22세 장교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77410897)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전쟁부(Ministère de La Guerre)의 잘못된 행정 처리로 퇴역을 당했다가, 이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만 22세의 나이에 대위(Capitaine)로 진급하게 된다. 나뽈레옹 하지만, 나뽈레옹은 다시 복직을 했던데다 대위로 진급까지 했음에도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 이유는 진급했던 날인 1792년 7월 10일에 전쟁부(Ministère de La Guerre) 산하의 포병과(Bureau de L'Artillerie)에서 나뽈레옹에게 자대로 복귀해 자대의 대위로서 중대(Compagnie)를 지휘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나뽈레옹은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2등 중령(Lieutenant Colonel en Second)으로서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고 있었기에 이런 명령은 나뽈레옹의 입장에

이간질 전략으로 목표를 달성하려 했던 의용군 지휘관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55553322)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이 지휘했던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는 아얏츄(Aiacciu) 시(Municipalité)와 지구 집정부(Directoire du District)가 협력해서 법적으로 아얏츄에서 철군하게 만들면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나뽈레옹 나뽈레옹은 어떻게든 점령 목표인 치따뗄라 다'얏츄(Citatella d'Aiacciu)를 점령해야 했기에, 한 가지 묘안을 기획했다. 그것은 치따델라 다'얏츄에 주둔하고 있는 제42 보병 연대(42ᵉ Régiment d'Infanterie) 소속의 부사관(Sous-Officiier)과 장병(Soldat)들과 자대의 지휘관인 프항수아-샤흘 드 마이야흐(François-Charles de Maillard) 대령(Colonel)의 관계를 이간질시키는 것이었다. 나뽈레옹은 자신과 마이야

20대 대대장 나폴레옹과 50대 연대장 마이야르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58684306)에서 언급했듯이 이간질 전략 실패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은 자신이 지휘했던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 휘하 장병(Soldat)들에게 아얏츄로 유입되는 식량(Alimento)들을 원천 차단시켜 버리고, 시민들이 샘(Fontana)에서 식수를 공급하지 못하도록 접근을 차단시키는 명령을 유지하게 했다. 나뽈레옹 이 명령의 결과 아얏츄 지역은 빵(Pane)과 장작(Legno) 부족 상황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나뽈레옹이 지휘했던 제2 의용군 대대는 시민들이 경작지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차단했고, 저수조(Cisterna)에서 생수를 길러오는 것 역시 차단해버렸다. 지역 내 빈자(Indigente)층 의 주민들의 불만 여론이 조성되었다. 이에 아얏츄의 지구 행정부(Administration de District) 측에서는 무력을 사용해 나뽈레옹이 지

고향 사람들의 민심도 잃고 진급 조차 없었던 나폴레옹의 승리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59519710)에서 언급했듯이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만 22세 지휘관 나뽈레옹(Napoléon)은 만 51세의 제42 보병 연대(42ᵉ Régiment d'Infanterie)의 지휘관 프항수아-샤흘 드 마이야흐(François-Charles de Maillard)를 상대로 유리한 상황에서 교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나뽈레옹 1792년 4월 12일에 나뽈레옹은 데빠흐뜨망 집정부(Directoire du Département)에서 파견한 2명의 위원(Commissaire)들인 뻬뜨루 빠울루 꼴론나 체자리 델라 로까(Petru Paulu Colonna Cesari della Rocca)와 바르뚤루메우 아리기(Bartulumeu Arrighi)가 아얏츄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마이야흐에게 통지했다. 그리고 아얏츄(Aiacciu)의 시(Municipalité)에게

군 당국의 잘못된 행정으로 퇴역 처리를 당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48210932)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법령(Décret)을 이용해서 왕립 육군(Armée Royale) 소속 장교(Officier)직과 국민 의용군(Volontaires Nationaux) 소속 장교직을 겸업하게 된다. 하지만 법령이 개정되면서 국민 의용군 장교 계급 중 중령(Lieutenant Colonel) 이상 계급만이 겸업이 가능하게 되게 되었다. 나뽈레옹 이렇게 법령이 개정되었음에도 나뽈레옹은 선거를 통해 중령 계급 진급에 성공하게 되면서, 국민 의용군 장교직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한다. 1791년 12월 25일부터 1792년 1월 10일까지 프항스(France) 전국에서 근무하는 전쟁 위원(Commissaire des Guerres)들에 의해 프항스 전국의 부대들에 대한 총 감사(Revue Générale)가 단행되었을 당시, 나뽈레옹의 본래 소속

파리에서 적도 만나고 과거의 친구도 만났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1792년 4월 28일에 끼에브행(Kievin)에서 1차 동맹 전쟁(Guerre de La Première Coalition)의 첫 전투가 발발했다. 이 전투에서 신성 롬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은 프항스(France)를 상대로 승리했다. 당시 프항스 측 지휘관은 대장(Général d'Armée)이었던 아흐망-루이 드 공또-비룬(Armand-Louis de Gontaut-Biront)이었는데, 당시 비룬은 아흐메 뒤 노흐(Armée du Nord)의 총사령관(Général en Chef)이었던 장-바띠스뜨-도나띠앵 드 비뫼흐(Jean-Baptiste Donatien de Vimeur)의 명령에 따라 전투를 지휘했었다. 비뫼흐는 보통 호샹보 백작(Comte de Rochambeau)으로 알려져 있던 인물이었다. 아흐망-루이 드 공또-비룬 호샹보 백작, 장-바띠스뜨-도나띠앵 드 비뫼흐 신성 롬 제국 측 지휘관은 장-삐에흐 드 보리외(Jean-Pierre de

파리의 저택들을 임대해 전대 사업을 시도했던 청년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66788879)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퇴역 처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792년 5월 28일에 수도인 빠히(Paris)에 도착한 이후 우연히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 시절의 친구였던 루이 앙뚜안 포블레 드 부히엔(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과 재회했다. 그리고 오랜 친구와 재회했던 나뽈레옹은 친구와 함께 같은 호텔에서 투숙하게 되면서 빠히에서 함께 활동하게 된다. 나뽈레옹 루이 앙뚜안 포블레 드 부히엔 부히엔은 자신의 작품인 나뽈레옹에 대한 므시외 드 부히엔의 회고록(Mémoires de M. de Bourrienne sur Napoléon)에서 빠히에서 나뽈레옹과 함께 빠히에서 활동했던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notre amitié d’enfance et de collége se

1792년 6월 20일의 사건과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67888601)에서 언급했듯이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 시절의 친구였던 루이 앙뚜안 포블레 드 부히엔(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과 빠히(Paris)의 저택들을 임대해 "전대 사업" 을 시도했다 실패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은 6월 20일에 식당(Restaurant)에서 부히엔과 함께 식사를 하러가던 도중에 혁명(Révolution)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나뽈레옹 루이 앙뚜안 포블레 드 부히엔 이 현장이란 1792년 6월 20일의 날(Journée du 20 Juin 1792)의 현장이었다. 당시 나뽈레옹과 부히엔은 빨레-후아얄(Palais-Royal) 인근의 휘 생-또노헤(Rue Saint-Honoré)라는 거리에 소재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려 했는데, 5천 혹은 6천 규모의 군중들이 레 알(Les Hal

법을 이용해 2개의 군대의 장교직을 겸직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34506774)에서 언급했듯이 제4 포병 연대(4ᵉ Régiment d'Artillerie) 소속 중위(Lieutenant en Premier) 나뽈레옹(Napoléon)은 연대장 이자끄 자끄 들라흐 깡빠뇰(Isaac Jacques Delart Campagnol) 대령(Colonel)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과거 자신의 상관이었던 장-삐에흐 뒤 떼유(Jean-Pierre du Teil) 소장(Maréchal de Camp)의 도움으로 휴가를 통해 고향 꼬르시까(Corsica)로 귀향했다. 나뽈레옹 장-삐에흐 뒤 떼유 그리고 나뽈레옹은 휴가의 목적 중 하나였던 국민 의용군(Volontaires Nationaux) 소속의 장교(Officier)로 임관하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1791년 11월 1일에 소장(Maréchal de Camp)이었던 안또누 프란체스꾸 로시(Antonu Francescu Rossi)

투표를 통해 중령으로 선출되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48210932)에서 언급했듯이 제4 포병 연대(4ᵉ Régiment d'Artillerie) 소속 중위(Lieutenant en Premier)임에도 나뽈레옹(Napoléon)은 국민 의용군(Volontaires Nationaux) 소속의 장교(Officcier)로 임관하는데 성공했으나, 1792년 2월 3일에 국민 입법 의회(Assemblée Nationale Législative)가 왕립 육군(Armée Royale) 소속 장교들이 중령(Lieutenant Colonel) 이하 계급의 국민 의용군 소속 장교를 겸직하지 못하게 하는 법령(Décret)을 제정함에 따라서 나뽈레옹이 국민 의용군 장교직을 유지하기 위해선 중령으로 진급해야 하게 되었다. 나뽈레옹 국민 의용군에는 한 대대(Bataillon)에는 2명의 중령이 있었는데, 이 2명의 중령은 선거에 의해 의용군 소속 군인들의 투표로 선출되었다.

고향 땅에서 의용군 장교로서의 첫 임무를 부여받았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47333592)에서 언급했듯이 꼬르시까(Corsica) 내에서 왕당파(Royaliste) 세력은 1791년의 의회 선거(Élections Législatives)에서 빠올리스따 소속 정치인들, 혁명파(Révolutionnaires) 소속 정치인들, 혁명을 지지하는 국민 위병(Garde Nationale) 소속 장교들이 대체로 국회의원(Député)으로 당선되면서, 궤멸 상태에 빠지게 되면서 해체되었다. 하지만 이는 정계에서 왕당파가 퇴출되었던 것이지, 꼬르시까 내에서 완전히 왕당파 세력이 축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꼬르시까 내의 왕당파 세력들은 정쟁에서 패배 이후 꼬르시까 내 주요 요새(Fortezza)들에 주둔한 왕립 육군(Armée Royale) 소속의 군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이유에서 총평의회 의장(Président du Conseil Général)인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

고향 땅의 폭도들과 대면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52168542)에서 언급했듯이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2등 중령(Lieutenant Colonel en Second)이었던 나뽈레옹은 검사장 위원(Procureur Général Syndic)이었던 안또누 끄리스뚜파루 살리체띠(Antonu Cristufaru Saliceti)에게서 치따뗄라 다'얏츄(Citatella d'Aiacciu)를 점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나뽈레옹 안또누 끄리스뚜파루 살리체띠 치따뗄라 다'얏츄 나뽈레옹은 대대 예하의 4개 중대(Compagnie)를 지휘해서 치따뗄라 다'얏츄가 소재한 지역인 아얏츄(Aiacciu)에 입성했다. 아얏츄는 나뽈레옹의 고향이었기에 나뽈레옹은 당시 아얏츄의 정치적 여론이 왕당파(Royaliste)에 대한 지지가 우세한 상황임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나뽈레옹이 지휘했던 중대 소속 장병(Soldat)들의 경

의용군 중령 나폴레옹과 왕립 육군 대령 마이야르의 협상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53278896)에서 언급했듯이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2등 중령(Lieutenant Colonel en Second)이었던 나뽈레옹(Napoléon)은 검사장 위원(Procureur Général Syndic)이었던 안또누 끄리스뚜파루 살리체띠(Antonu Cristufaru Saliceti)에게서 치따뗄라 다'얏츄(Citatella d'Aiacciu)를 점령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아얏츄 입성해서 주둔하자 현지의 폭도들과 대면하게 된다. 나뽈레옹 안또누 끄리스뚜파루 살리체띠 치따뗄라 다'얏츄 나뽈레옹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서든 치따뗄라 다'얏츄를 점령해야 했는데, 당시 치따뗄라 다'얏츄에서 수비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은 1740년 8월 6일 출생의 만 51세의 지휘관이었던 프항수아-샤흘 드 마이야흐(François-Charles de M

의용군 지휘관으로서 고향 땅에서 약탈을 명령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54402581)에서 언급했듯이 1791년 4월 9일에 제2 의용군 대대(2ᵉ Bataillon de Volontaires)의 2등 중령(Lieutenant Colonel en Second)이었던 나뽈레옹(Napoléon)과 대대장인 듀반니 바띠스따 꾸엔차(Ghjuvanni Battista Quenza)은 제42 보병 연대(42ᵉ Régiment d'Infanterie)의 연대장인 프항수아-샤흘 드 마이야흐(François-Charles de Maillard) 대령(Colonel)과 함께 협상을 했고, 그 결과 오후 11시에 일시적인 휴전을 확정짓게 된다. 나뽈레옹 이렇게 평화롭게 일이 진행되는 것 같았지만, 이는 위장 평화 협상이었다. 협상 당일 야간에 나뽈레옹은 자신이 지휘하던 대대에게 스뜨라다 델라 꼴레따(Strada della Colletta)라는 아얏츄(Aiacciu)에서 가장 높은 거리에 위치

연대장을 속이고 휴가를 갔던 만 22세 중위 나폴레옹 [내부링크]

제4 포병 연대(4ᵉ Régiment d'Artillerie) 소속 만 22세 중위(Lieutenant en Premier) 나뽈레옹(Napoléon)는 1791년 8월 26일에 뽀미에-드-보흐뻬흐(Pommier-de-Beaurepaire)를 방문했다. 나뽈레옹은 이 지역을 방문해서 과거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상관인 장-삐에흐 뒤 떼유(Jean-Pierre du Teil) 소장(Maréchal de Camp)의 저택인 샤또 드 뽀미에(Château de Pommier)를 방문했다. 방문의 이유는 휴가 때문이었다. 나뽈레옹 장-삐에흐 뒤 떼유 A: 발렌소 B: 뽀미에-드-보흐뻬흐 나뽈레옹이 군복무를 수행중이던 발렌소(Valença)에서 뽀미에-드-보흐뻬흐까지의 거리는 81km로, 서울에서 천안까지의 거리인 85km와 근소한 차이가 나는 거리였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31339960)에서 언급했듯이 떼유 소장은 포병대 감찰감(

독서를 좋아했던데다 스스로 작가로도 활동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생전 나뽈레옹(Napoléon)은 다양한 분야의 서적을 읽었다. 나뽈레옹 그 서적들은 다음과 같다. 1. 알끼비아데스(Ἀλκιβιάδης)와 관련한 소설(Roman) 2. 자끄-앙히 베흐나흐댕 드 생-삐에흐(Jacques-Henri Bernardin de Saint-Pierre)의 자연에서의 생활을 주제로 했던 소설인 앵디엔의 초가(La Chaumière Indienne) 3. 심리학(Psychologie)과 관란한 서적인 요한 카스파르 라바터(Johann Caspar Lavater)의 인간 본성에 관한 지식과 인간애의 증진을 위한 관상학 단편 (Physiognomische Fragmente, zur Beförderung der Menschenkenntniß und Menschenliebe) 4. 조흐주-루이 르끌레흐 드 뷔홍(Georges-Louis Leclerc de Buffon)의 자연사(Histoire Naturelle) 5. 프항수아 오지에 드 마히니(François Aug

영웅으로부터 외면당했던 만 21세 소위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27492425)에서 언급했듯이 1791년 1월 23일에 만 21세의 소위(Lieutenant en Second) 나뽈레옹(Napoléon)은 휴가 중에 삼부회(États Généraux)의 귀족(Neblesse) 대표였던 마떼우 부따푸오꼬(Matteu Buttafuoco)에게 "탐욕스러운 시종(Avidité de Valet)" 으로 비난하는 서한을 보냈다. 나뽈레옹 당시 나뽈레옹은 부따푸오꼬를 "탐욕스러운 시종" 으로 비난한 것 뿐만이 아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O Lameth! ò Robespierre! ò Pétion! ò Volney! ò Mirabeau! ò Barnave! ò Bailly! ò Lafayette! voilà l'homme qui ose s'asseoir à còté de vous! tout dégoùtant du sang de ses frères; souillé pa

학회에서 개최하는 논문 대회에 참가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37071710)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아흐메 후아얄(Armée Royale) 소속의 장교(Officier) 신분임에도 작가(Auteur)로 활동했다. 나뽈레옹은 작가로서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다른 활동역시 했었는데, 그것은 학회(Académie)에서 개최하는 대회(Concours)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나뽈레옹 1791년에 리용 과학 순문학 예술 학회(Académie des Sciences, Belles-Lettres et Arts de Liyon)에서 1,200 리브흐(Livre)의 상금을 걸고 논문(Discours) 대회를 개최했는데 나뽈레옹은 이 대회에 참가했었다. 1791년의 1,200 리브흐는 현대 기준으로 12,446.68 유로이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08963002)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이 소위(Lieut

의붓 아버지 때문에 황후가 될 기회를 놓쳤던 여인 [내부링크]

1788년 6월 15일에 휴가를 끝내고 자대에 복귀했던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만 18세 소위(Lieutenant en Second) 나뽈레옹(Napoléon)은 오손(Auxonne)에서 군복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대에 복귀했던 년도에 오손에서 만 14세 소녀와 대면하게 되었다. 나뽈레옹 그녀는 루이즈 데지헤 포흐뛰네 삐예(Louise Désirée Fortunée Pillet)라는 여성으로 보통 "마네스까 삐예(Manesca Pillet)" 로 알려져있던 여성이었다. 그녀는 앙뚜안 샤흐베흐(Antoine Chabert)라는 사내의 의녀(Belle-Fille)였는데, 그녀가 "마네스까 삐예" 로 호칭되었던 이유는 그녀의 모친인 잔 흐네 샤흘로뜨 드 몽디옹(Jeanne Renée Charlotte de Mondion)이 앙뚜안 샤베흐와 재혼하기 이전에 "삐예(Pillet)" 라는 남성과 "마네스까(Manesca)"

종조부의 그늘에서 벗어난 9명의 부오나파르테 사람들 [내부링크]

1991년 10월 15일에 나뽈레옹(Napoléon)이 만 22세 당시에 나뽈레옹의 가족들의 후견인이자 부오나빠르떼(Buonaparte) 가문의 가주를 담당하고 있었던 루치아누(Lucianu)가 사망했다. 그리고 루치아누가 담당했던 가주의 자리는 나뽈레옹의 형인 조제프(Joseph)가 승계하게 되며, 루치아누가 보유했던 자산들은 나뽈레옹의 가족들에게 상속된다. 나뽈레옹 조제프 당시 조제프는 가족이 거주하던 지역인 아얏츄(Aiacciu)에서 지구(District)의 지구집정부 총재(Président du Directoire du District)를 역임했던데다, 1791년의 의회 선거(Élections Législatives)에 국회의원(Député)으로 불출마하는 대신, 데빠흐뜨망 집정부(Directoire du Départemen)의 집정위원(Directeur)을 역임했었다. 그러니까 꼬르시까(Corsica) 내에서 정치인(Politico)으로 활동했었다. 그것도 나뽈레옹보다 겨우

분열의 시대를 보냈던 18세기 말기 코르시카 [내부링크]

1789년 당시 꼬르시까(Corsica)의 정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삼부회(États Généraux)의 귀족(Neblesse) 대표와 마떼우 부따푸오꼬(Matteu Buttafuoco), 성직자(Clericus) 대표인 까를루 안또누 디 뻬레띠 델라 로까(Carlu Antonu di Peretti della Rocca)가 프항스(France)의 왕(Roi)을 지지했던 왕당파(Royaliste)의 중심 인물들이었고, 제3신분(Tiers État) 대표인 뻬뜨루 빠울루 꼴론나 체자리 델라 로까(Petru Paulu Colonna Cesari della Rocca)와 안또누 끄리스뚜파루 살리체띠(Antonu Cristufaru Saliceti)가 과거 꼬르시까 공화국의 국가총통(Generale di a Nazione)이었던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를 지지하는 빠올리스따(Paolista) 정파의 중심 인물들이었다. 안또누 끄리스뚜파루 살리체띠 빠스꽐레 빠올리 꼬르시

정치에 지나치게 관심이 많았던 발랑스의 20대 장교 나폴레옹 [내부링크]

1791년 6월 20일의 사건이다. 당시 시점은 만 21세 중위(Lieutenant en Premier) 나뽈레옹(Napoléon)이 부득이하게 전출을 당한지 4일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나뽈레옹 이 사건은 바헨 도주 사태(Fuite de Varennes)였다. 바헨 도주 사태는 프항스(France)의 왕(Roi)인 루이 16세(Louis XVI)가 수도인 빠히(Paris)에서 탈출해 마디(Mâdy)로 도주를 시도했다 실패한 사건이었다. 당시 마디에선 중장(Lieutenant Général)이었던 프항수아 끌로드 드 부이예(François Claude de Bouillé)가 왕에 충성하는 10,000명의 병력을 지휘하고 있었는데, 루이 16세는 마디로 탈출해 부이예의 군대를 이용해 혁명(Révolution)을 진압할 계획으로 탈출한 것이었다. 부이예가 지휘했던 병력들은 아흐메 후아얄(Armée Royale) 소속이었던 장병(Soldat)들이었다. 바헨 도주 사태 루이 16세 프항수아

대화와 인정에 목마른 만 21세 장교 나폴레옹 [내부링크]

1791년 6월 16일에 부득이하게 전출로 인해 만 21세 중위(Lieutenant en Premier) 나뽈레옹(Napoléon)은 4년 9개월 만에 다시 발렌소(Valença)에서 군복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나뽈레옹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08963002)에서 언급했듯이 발렌소에서 군복무를 수행했을 당시 나뽈레옹은 마히-끌로딘 부(Marie-Claudine Bou)라는 만 50세 노처녀(Vieille Fille)가 운영했던 까페 세흐끌(Café Cercle)의 1층에 위치한 방에서 숙박했는데, 다시 발렌소에서 군복무를 수행하게 되면서 이 까페의 방을 다시 숙소로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여주인 부의 나이 1736년생으로 만 55세였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30316627)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은 자대 복귀 당시 동생 라비듀(Lavighju)를 오손(Auxonne)

만 12세 동생에게 병영 생활을 체험하게 했던 만 21세 소위 나폴레옹 [내부링크]

1791년 2월 11일에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만 21세 소위(Lieutenant en Second) 나뽈레옹(Napoléon)은 고향 꼬르시까(Corsica)에서 1년 3개월 이상의 휴가를 보낸 이후 자대로 복귀했다. 복귀 당시 나뽈레옹은 모친의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켜 주기 위해 자대 복귀 당시 둘째 남동생 라비듀(Lavighju)를 함께 데려갔다. 나뽈레옹 라비듀 or 루이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16908353)에서 언급했듯이 오손(Auxonne)에서 나뽈레옹은 군복무를 수행할 당시 병영(Caserne) 안에 위치한 르 빠비용 드 라 빌(Le Pavillon de La Ville)에서 감방(Cellule)같은 느낌을 주는 창문(Fenêtre) 하나에, 침대(Lit) 하나, 탁자(Table) 하나, 안락 의자(Fauteuil) 하나가 구비되어있던 방에서 생활했는

부득이하게 홀로 전출을 경험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1791년에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만 21세 소위(Lieutenant en Second) 나뽈레옹(Napoléon)은 장-삐에흐 뒤 떼유(Jean-Pierre du Teil) 소장(Maréchal de Camp)과 연대장인 루이 세자흐 드 랑스(Louis César de Lance) 대령(Colonel)과 우호적인 관계로 지냈다. 나뽈레옹 장-삐에흐 뒤 떼유 이렇게 상관들에게 호감을 사면서 군복무를 수행했던 나뽈레옹에게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그의 정치(Politique)에 대한 관심이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27492425)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은 고향 아얏츄(Aiacciu)에서 헌법 친우회(Société des Amis de La Constitution) 지부가 창설될 당시 창설 멤버 중 하나였을 정도로 정치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장교(Offi

자대 복무 기간보다 휴가 기간이 더 길었던 만 21세 장교 나폴레옹 [내부링크]

1790년 10월 초에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만 21세 소위(Lieutenant en Second) 나뽈레옹(Napoléon)은 휴가 만료일인 1790년 10월 15일에 자대에 복귀하기 위해서 자신의 고향인 아얏츄(Aiacciu)에서 선박에 탑선해서 복귀를 시도했으나 수 차례 해풍(Régime de Brise)으로 인해 선박이 운항 중에 회항하면서 자대에 복귀하지 못하게 된다. 나뽈레옹 결국 나뽈레옹은 자신의 직속 상관인 연대장이었던 루이 세자흐 드 랑스(Louis César de Lance) 대령(Colonel)에게 휴가를 연장해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나뽈레옹의 휴가일은 1791년 2월의 1분기(1~10일)까지 연장되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23095183)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은 1789년 9월 9일부터 정식 휴가일인 10월 15일보다 일찍 부대를 떠났

코르시카의 20대 정치인 형제 [내부링크]

1789년 11월 초에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만 20세 소위(Lieutenant en Second) 나뽈레옹(Napoléon)이 꼬흐스 국(États de Corse)의 수도인 바스띠아(Bastia)에서 주재할 당시 사건이다. 이는 1789년 7월 15일에 창설된 국민 위병(Garde Nationale)과 관련이 있었다. "국민 위병" 이란 혁명(Révolution) 당시 시민(Citoyen)들에 의해 창설된 민병대(Milice)였는데, 1789년 10월 31일에 나뽈레옹의 고향인 아얏츄(Aiacciu)의 시민들이 국민 위병 소속의 민병대를 창설하면서 폭동(Émeute)이 발생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24195813)에서 언급했듯이 아얏츄 지역에선 혁명을 지지했었다. 이렇게 아얏츄의 시민들이 민병대를 창설해서 폭동을 일으켰던 원인은 귀족(Neblesse) 대표

프랑스 혁명 초기 코르시카의 정치 상황 [내부링크]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만 20세 소위(Lieutenant en Second) 나뽈레옹(Napoléon)은 1789년 9월 21일에 고향인 아얏츄(Aiacciu)에 도착했다. 나뽈레옹 나뽈레옹이 고향에 도착했을 당시 꼬르시까(Corsica)에 주둔한 부대들 총괄 지휘했던 인물은 바행(Barrin) 자작(Vicomte)으로 알려진 아흐망 샤흘 드 라 갈리소니에흐(Armand Charles de la Galissonnière)이었다. 당시 갈리소니에흐는 꼬르시까에 주둔한 부대들을 총괄 지휘했던 총사령관(Commandant-en-Chef)이었는데, 그가 지휘할 당시 꼬르시까 내에 주둔한 부대는 총 6개 대대(Bataillon)였다. 나뽈레옹은 꼬르시까에서 정치 활동을 시작하려 했을 당시 내심 혁명(Révolution)을 지지했었지만 그래도 본인은 아흐메 후아얄(Armée Royale) 소속의 장교(Officier)였던 데다 지난

혁명을 진압해야만 했던 국왕의 장교 나폴레옹 [내부링크]

1789년 7월 14일에 프항스(France)의 수도인 빠히(Paris)에서 바스띠유 점거 사태(Prise de La Bastille)가 발발하면서 프항스의 전국에서 혁명(Révolution)이 발발하게 되었다. 당시 나뽈레옹은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 소위(Lieutenant en Second)로서 오손(Auxonne)에서 군복무를 수행했었는데, 1일 후인 1789년 7월 15일에 디종(Dijon)에서 폭동(Émeute)이 발발했다. 오손에서 디종까지의 거리는 34km로 오손의 인근 지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울에서 고양까지의 거리가 34km이다. 나뽈레옹 A: 오손 B: 디종 그렇다. 혁명이 프항스 전국에서 발발하면서 이제는 나뽈레옹이 군복무를 수행하던 지역 인근에서 까지 발발했던 것이다. 디종에서 폭동이 발발했던 날에 나뽈레옹은 종조부인 루치아누(Lucianu)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Je reçois

고향이 프랑스에 병합되던 과정을 경험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이 만 19세의 소위(Lieutenant en Second)로서 군복무를 수행했던 1789년 4월 1일의 사건이다. 당시 나뽈레옹의 소속 부대인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는 오손(Auxonne)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오손의 인근 지역인 쇠흐(Seurre)에서 폭동(Émeute)이 발발했다. 나뽈레옹 라 페흐 포병 연대는 이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서 3개의 중대를 파견하면서 장교(Officier)와 장병(Soldat)을 포함한 100인의 인원을 투입했다. 당시 나뽈레옹이 소속된 사석포(Bombardier) 중대역시 투입되면서, 나뽈레옹역시 100인에 포함되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11169389)에서 언급했듯이 과거 나뽈레옹은 첫 임무로서 리용(Liyon)에서 발발한 폭동을 진압했는데, 쇠흐 폭동 진압은 나뽈레옹의 두 번째 임무였다. 당시 나뽈레옹이

만 18세 천재 소위 나폴레옹과 소장 테유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17979708)에서 언급했듯이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 만 18세의 소위(Lieutenant en Second)였던 나뽈레옹(Napoléon)은 왕립 포병 학교(École Royale d’Artillerie)의 수학(Mathématiques) 교수에 의해 오손(Auxonne)에 주둔한 포병 부대들을 총괄 지휘했던 소장(Maréchal de Camp)이었던 장-삐에흐 뒤 떼유(Jean-Pierre du Teil)에게 추천되었다. 나뽈레옹 장-삐에흐 뒤 떼유 1788년 8월 12일, 13일, 18일, 19일에 띠유나이(Tillenay)에 소재한 포병사격장(Polygon)에서 떼유가 주관했던 실험(Expérimentation)이 진행되었는데, 이 실험이란 공성포(Canon de siège)를 이용해 포탄(Obus) 발사하는 실험과 박격포(Mortier

교수에 의해 소장에게 추천을 받았던 18세 소위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17979708)에서 언급했듯이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 장교(Officier)로서 군복무를 수행하던 시절에 나뽈레옹(Napoléon)은 어느 교수(Professeur)에게 인정받게 되었다. 나뽈레옹 이 교수는 오손(Auxonne)에 소재한 왕립 포병 학교(École Royale d’Artillerie)의 수학(Mathématiques) 교수였던 장-루이 롱바흐(Jean-Louis Lombard)였다. 나뽈레옹이 롱바흐를 만났던 시점은 1788년인 오손에서 군복무를 수행했던 시기였고, 당시 나뽈레옹의 계급은 소위(Lieutenant en Second)였었으며, 나이는 만 18세였다. 장-루이 롱바흐 이 수학 교수는 나뽈레옹을 우수한 장교로 평가했는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고 한다. "Ce jeune homme, ira très loin." "이

포병 연대 소속 장교 시절 나폴레옹의 인간 관계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94482337)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를 졸업한 후 장교(Officier)로 임관하면서 학교에서 친분이 있던 선임(Supérieur) 생도(Cadet)였던 알렉상드르 앙히 데 마지(Alexandre Henri des Mazis)와 함께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에 배치되었다. 이렇게 빠히 생도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기에 마지는 부대 내 사람들 중에서 나뽈레옹의 친구 중 하나였다. 나폴레옹 그리고 나뽈레옹에게는 마지이외에도 부대 내에서 친구 관계를 가졌던 인물이 있었는데, 이 인물은 나뽈레옹이 임관하기 6년 전 시점인 1779년 6월 3일에 대위(Capitaine)로 진급했던 인물이자 1748년 12월 18일 생으로 나뽈레옹보다 20살이나 연장자였던, 장 자끄 바질리앵

만 18세 젊은 장교 나폴레옹의 오손에서의 군생활 [내부링크]

1786년 9월 1일부터 휴가로 인해 부대를 떠나 1787년 12월 31일까지 1년 3개월 30일을 휴가로 부대를 떠나있었던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만 18세 장교(Officer)였던 나뽈레옹(Napoléon)은 1788년의 신정(Le Premier de L’An)에 고향 꼬르시까(Corsica)로 다시 귀환했다. 나뽈레옹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12012393)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은 1787년 9월에 꼬르시까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에 생전에 부친이 정부(Gouvernement)로부터 지급받지 못한 뽕나무(Mûrier) 사업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받기 위해 빠히(Paris)로 이동하게되면서 꼬르시까를 떠났다. 불행히도 급여를 포기하면서까지 휴가 연장을 했음에도 보조금을 받아내지 못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

고모에 의해 강제로 혼인했던 마르티니크 소녀 조제핀 [내부링크]

1787년 11월에 만 18세의 당시에 나뽈레옹(Napoléon)은 "조국애에 관하여(Sur l’Amour de la Patrie)" 라는 작품을 쓰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나뽈레옹 “그대, 남자의 마음을 자신의 마차 바퀴에 사슬로 묶는 자여, 장점이라고는 오로지 번쩍이는 겉모습에만 담아 둔 여인이여, 그대들의 승리를 여기에서 성찰하고 이제 더는 그대들이 아닌 모습을 부끄러워하라.” 이 글에서 "여기" 는 고대 시대의 라께다이몬(Λακεδαίμων)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당대의 여성들은 번쩍이는 겉모습에 집착하는 것들이니 그렇지 않은 고대 시대의 라께다이몬 여성들을 본받아라는 의미였다. 이런 내용의 글을 썼던 나뽈레옹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비난했던 그런 성향의 여성과 훗날 혼인하게 된다. 그것이 조제핀(Joséphine)이다. 조제핀 나뽈레옹이 저런 글을 작성했을 당시에 조제핀은 4년 전 시점인 1783년 4월 10일에 오흐땅스(Hortense)를 출산했고, 그보다 더 이전인

집을 비우는 남편 알렉상드르와 홀로 남은 부인 조제핀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14202548)에서 언급했듯이 조제핀(Joséphine)과 그녀의 남편인 알렉상드흐 드 보아흐네(Alexandre de Beauharnais) 사이에서 혼인한지 1년 9개월 만에 장자인 외젠(Eugène)이 출생했다. 그렇게 외젠이 출생한 이후 두 남녀는 몇 주간을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결국에 알렉상드흐는 다시 집을 비우게 된다. 조제핀 알렉상드흐 드 보아흐네 외젠 결국 남편이 집은 비운 집은 지루했는지 만 24세의 여성 조제핀은 자작 부인으로서 빠히의 귀족(Noblesse) 신분의 사교계에 참석하면서 살롱(Salon)에 빈번히 방문하게 된다. 사실 조제핀의 남편 알렉상드흐는 집을 비우고 빠히에 소재한 프항-마쇼네히(Franc-Maçonnerie) 단체의 집회소(Loge)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1714년 2월 8일이 출생이었던 그녀의 시아버지 프항수아(François)에게는 1717년 1월

만 18세 장교 나폴레옹이 생각했던 이상적인 여성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12012393)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휴가 중에 극장(Théâtre)에서 시간을 보냈다. 사실 나뽈레옹은 극장 뿐만 아니라 다른 장소역시 방문했다. 나뽈레옹 그것은 당시 그 장소(Quartier Chaud)로 유명했던 빨레-후아얄(Palais-Royal)이었다. 나뽈레옹은 1787년 11월 22일에 빨레-후아얄을 방문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06554307)에서 언급했듯이 과거 나뽈레옹은 자신과 동행했던 이들이 리용(Liyon)의 그런 곳(Bordel)을 방문했을 당시 유일하게 방문하지 않았을 수준으로 여성에 대해 관심이 없었는데, 그것은 만 16세의 갖 빠히의 학교를 졸업했던 나뽈레옹이었지, 만 18세의 나뽈레옹은 달랐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나뽈레옹의 부친 샤흘(Charles)은 나뽈레옹이 이렇게 그런 장소를 방문했던

1년 9개월을 휴가로만 보냈던 젊은 장교 나폴레옹 [내부링크]

1786년 9월 15일에 7년 9개월 만에 고향 아얏츄(Aiacciu)로 귀향해서 좋아하던 서적을 읽고 형인 조제프(Joseph)와 다양한 주제로 토론을 하며 시간을 보냈던 만 17세의 장교(Officier) 나뽈레옹(Napoléon)은 휴가 중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나뽈레옹 조제프 그런데 이 평화의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정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나뽈레옹은 형인 조제프와 함께 자신들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모의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87598933)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의 부친 샤흘(Charles)은 프항스의 왕(Roi)과 정부(Gouvernement)로부터 보조금을 지급받아서 뽕나무(Mûrier) 농사 사업에 투신했다 지급받았던 보조금 전액을 탕진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실패한 뽕나무 농사 사업이 나뽈레옹과 그의 형 조제프가 해결해야 할 재정적인 문제였다.

7년 만에 고향에서 휴가를 보냈던 젊은 장교 나폴레옹 [내부링크]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장교(Officer)로서 발렌소(Valença)에서 군복무를 수행했던 만 16세의 나뽈레옹(Napoléon)은 1786년 8월 12일에 리용(Liyon)에서 발발했던 되 수 폭동(Révolte des Deux Sous)의 진압때문에 발렌소를 떠나 리용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나뽈레옹 리용에서 폭동이 발발했던 원인은 견직물(Soie) 제조 노동자(Ouvrier)들이 폭당이 발발하기 2개월 이전에 제조 수당(Tarif)을 1온(Aune) 당 2 수(Sou)로 인상하는 것을 요구해서 약속까지 받아냈는데, 약조한 대로 수당을 지급하지 않아서 였다. 1786년의 2 수는 현대 기준으로 1.08유로이다. 발렌소에서 리용까지의 거리는 108km였는데, 서울에서 아산까지의 거리가 98km이다. A: 발렌소 B: 리용 정예 부대였던 라 페흐 연대의 부대까지 투입되어서인지 결국 폭동은 진압되었고, 폭동을 주도했던 3인은

우울 장애를 경험했던 정예 부대의 젊은 장교 나폴레옹 [내부링크]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장교(Officier)였던 나뽈레옹(Napoléon)은 발렌소(Valença)에서 군복무를 수행했는데, 나뽈레옹 군복무 중에 작가(Écrivain)를 겸업했다. 나뽈레옹은 장-자끄 후소(Jean-Jacques Rousseau)의 작품을 좋아했는데, 작가로 활동하며 자신이 좋아했던 작가인 후소를 비난하는 서적들에 대해 논박하는 작품들을 집필했다. 장-자끄 후소 나뽈레옹이 집필했던 작품들 중에는 1787년인 만 18세의 당시에 집필했던 예언자의 가면(Le Masque Prophète)이라는 작품이 있었는데, 이 작품은 승승장구하다가 최후엔 패배해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자결하는 아랍(عَرَب) 출신 예언자와 관련한 작품이었다. 예언자의 가면이외에도 그의 비망록(Mémorandum)들에선 그가 중동(Moyen-Orient)에 매료되었음을 시사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이런 행적 때문에 지난 주제(https:

최고의 학력과 최고의 직장에도 궁핍하게 생활했던 소위 나폴레옹 [내부링크]

프항스(France) 최고의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였던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 출신이었고, 프항스 전국의 학교들에서 우수한 학생들만 지원하는 포병대(Artillerie)에 지원해서 만 16세의 나이에 포병대의 소위(Lieutenant en Second) 임관했던데다, 프항스의 육군인 아흐메 후아얄(Armée Royale) 소속의 포병대들 중에서 정예 부대로 평가받았던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로 부대를 배치받았던 나뽈레옹은 임관 당시 모든 것이 완벽했다. 나뽈레옹 단, 나뽈레옹은 임관 당시 군 경력적인 부분에선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군 경력 이외의 부분에서 고충이 있었다. 그것은 경제적인 문제였다. 나뽈레옹의 연봉은 1,120 리브흐(Livre)였는데, 나뽈레옹이 장교(Officier) 수습(Période d’Essai)을 마쳤던 1786년의 1,120 리브흐를 현대

정예 부대의 소위로 임관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은 1785년 9월 28일에 임관 시험에 합격함과 동시에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를 졸업한 이후 1785년 10월 28일에 부대를 배치받으면서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소위(Lieutenant en Second)로 임관하게 되었다. 나뽈레옹 라 페흐 포병 연대의 본부대(Quartier Général)는 발렌소(Valença)에 위치했었는데, 빠히의 학교를 졸업했던 나뽈레옹은 빠히에서 발렌소까지 남쪼으로 이동했다. 빠히에서 발렌소까지의 거리는 563km였는데, 서울에서 제주까지의 거리인 530km보다는 먼 거리였다. A: 빠히 B: 발렌소 나뽈레옹은 빠히에서 출발하기 이전 아베이 드 생-제흐맹-데-쁘헤(Abbaye de Saint-Germain-des-Prés)에서 숙식을 하고있던 오뙹(Autun)의 주교(Episcopus)인 이브 알렉상드흐 드 마흐뵈프(Y

황후가 될 기회를 불운하게 놓쳐버린 나폴레옹의 첫 사랑 [내부링크]

1786년 1월 10일에 나뽈레옹(Napoléon)은 라 페흐 포병 연대(Régiment de La Fère Artillerie) 소속의 소위(Lieutenant en Second)로 임관한지 2개월 만에 장교(Officier) 수습(Période d’Essai)을 마쳤다. 나뽈레옹 소위 나뽈레옹의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경계(Garde) 근무를 수행하고, 장병(Soldat)들을 관리하고, 수학(Mathématiques), 요새 구축(Fortification), 화학(Chimie), 물리학(Physique) 강의를 수강하는 것이었다. 나뽈레옹이 남겼던 다수의 노트(Notes)에 기록에는 어떻게 근무 시간 이외에는 어떻게 자유 시간(Temps Libre)을 보냈는지 알 수 있다. 아르데쵸(Ardecha)에 소재한 루초꿀룸보(Ròchacolomba)라는 산을 등반했고, 스케이트(Patins à Glace)를 즐기거나, 루만스 디'세라(Rumans d'Isèra)와 뚜르누(Tornon)를

나폴레옹과 파리의 팜 파탈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303481391)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의 부모님의 친구의 딸이었던 로흐(Laure)는 자신의 회고록(Mémoires)인 아브항떼스 공작부인의 회고록(Mémoires de Mme la Duchesse d'Abrantès)에서 충격적인 사실을 폭로했다. 로흐 그것은 나뽈레옹이 자신의 부친이 사망해 자신의 모친 빠노리아 꼼넨(Πανοριά Κομνέν)이 과부이 되자 자신의 모친에게 청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부친 샤흘 마흐땡 뻬흐몽(Charles Martin Permon)은 1795년에 10월 9일에 사망했는데, 당시 그녀의 모친의 나이 만 37세였다. 당시 나뽈레옹의 나이 만 26세였던 준장(Général de Brigade)이었다. 나뽈레옹 그런데 로흐의 주장에는 문제점이 있는 것이 나뽈레옹이 자신의 배우자가 되는 조제핀(Joséphine)과 처음 대면했던 시기가 1795년 8

부모님의 친구의 딸을 귀부인으로 만들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1785년에 부친 샤흘(Charles)이 뭄뻬예(Montpelhièr)에서 사망했던 이후 나뽈레옹(Napoléon)은 종종 뭄뻬예를 방문했다고 한다. 나뽈레옹이 뭄뻬예에서 방문했던 곳은 빠노리아 꼼넨(Πανοριά Κομνέν)라는 여성의 저택이었다. 나뽈레옹 나뽈레옹의 부친 샤흘은 이 여성의 친구였는데, 이 여성의 저택에서 사망했었다. 그리고 이 여성은 나뽈레옹의 모친이었던 레띠시아(Laetitia)의 친구이기도 했다. 빠노리아는 1758년생이었는데, 1750년생이었던 레띠시아보다 8살 어렸다. 샤흘 레띠시아 빠노리아의 고향은 꼬르시까(Corsica) 내의 지역인 까르뎨제(Carghjese)였는데,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35702769)에서 언급했듯이 까르뎨제는 엘라스인들이 많이 거주해왔던 지역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꼰스딴디누 스떼파노스(Κωνσταντίνου Στεφανόπολι)라는 인물로 까르뎨제 지역에서 엘라스인(Έ

나폴레옹이 어느 친구와 절교했던 이유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이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에 재학중이던 시절에 친구가 있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90142530)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이 브히엔의 학교를 졸업하고 프항스(France)의 최고의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였던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로 진학했을 당시 나뽈레옹이외에도 빠히의 학교로 진학했던 브히엔의 학교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이 학생들 중에 나뽈레옹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바로 삐에흐 프항수아 마히 로지에 드 벨꾸흐(Pierre François Marie Laugier de Bellecour)이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 나뽈레옹의 친구 로지에는 왈로네이(Waloneye) 내의 지역인 벨꾸흐(Bellecourt)의 영주(Seigneur)였던 루이 앙드

생전에 실망시키고 사후에는 자신을 비난했던 나폴레옹의 친구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이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에 재학중이던 당시 친구가 있었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그 친구가 바로 루이 앙뚜안 포블레 드 부히엔(Louis Antoine Fauvelet de Bourrienne)이라는 친구이다. 부히엔은 1769년 7월 9일 생으로 나뽈레옹과 동갑이었는데, 브히엔의 학교를 조기 졸업해서 프항스(France)의 최고의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였던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에 진학해서, 진학한지 1년만인 1785년에 만 16세의 나이에 아흐메 후아얄(Armée Royale) 소속의 장교(Officier)로 임관했던 나뽈레옹과 달리, 부히엔은 1787년에 만 18세의 나이로 브히엔의 학교를 졸업했음에도 자신보다 먼저 졸업했던 친구인 나뽈레옹처럼 아흐메 후아얄 소속의 장교로 임관하지 않고, 외교관(Diplomat)으로 임용되기

프랑스를 혐오하고 고향 코르시카를 좋아했던 파리의 생도 나폴레옹 [내부링크]

학창 시절 나뽈레옹이 영향을 받았던 인물은 장-자끄 후소(Jean-Jacques Rousseau)였다 후소는 나뽈레옹의 고향인 꼬르시까(Corsica)를 외호쁘(Europe)에서 진정한 자유(Liberté)와 평등(Égalité)이 실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고 평가했던 인물이었다. 나뽈레옹 장-자끄 후소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83359893)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은 학창 시절에 고향인 꼬르시까에 대해 극성 민족주의(Ethnonationalisme)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데, 후소의 꼬르시까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평가는 꼬르시까에 대해 극성 민족주의 사상을 가졌던 나뽈레옹이 호감을 가질만한 것이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61905561)에서 언급했듯이 후소는 꼬르시까가 프항스에 정복당하기 이전에 꼬르시까에 공화국(Ripublica)을 건국했던 빠스꽐레 빠올리(

나폴레옹이 기독교를 혐오하게 되었던 이유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의 모친 레띠시아(Letizia)는 나뽈레옹을 출산하기 이전 성당(Cathedralis)에서 미사(Missa)에 참례를 했었고, 나뽈레옹은 출생 이후 종조부 루치아누(Lucianu)가 대부제(Archidiaconus)를 역임했던 성당에서 유아세례(Baptisma)를 받았으며, 미사 참례를 의무시하는 가톨릭계 수도회(Ordo)에서 운영하는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의 졸업생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뽈레옹은 가톨릭(Catholicus) 교도였다. 나뽈레옹 하지만 나뽈레옹은 명목상 가톨릭 교도였음에도 스스로는 가톨릭 교도로 생각하지 않았을 뿐더러 가톨릭을 경멸했다고 한다. 이유는 가톨릭이 자신들의 교리(Doctrina)에 위반하는 행위를 한 자에 대해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죄(Peccatum)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는 상환(Redemptio)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다. 단, 나뽈레옹은 가톨릭의 교리 중 하나인 원죄(

파리의 생도가 된지 1년만에 포병 장교로 임관되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94482337)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의 가정의 경제적 상황은 부친 샤흘(Charles)이 사망하면서 악화되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의 생도(Cadet)였던 나뽈레옹은 학교를 조기 졸업해서 장교(Officier)로 임관되는 계획을 세웠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 나뽈레옹은 포병대(Artillerie) 소속 장교로 임관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는데,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77955151)에서 언급했듯이 당시 포병은 프항스(France) 전국의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지원하던 병과 중 하나 였다. 포병대에 배치되려면 1차 시험과 2차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우선 수학자(Mathématicien)였던 에띠엔 베주(Ét

귀족 가문의 자제들을 업신여긴 천재였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나뽈레옹은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과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를 졸업했는데, 이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들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두 학교 모두 사회적 평등(Égalité Sociale)을 장려할 목적으로 설립된 군사 학교들이었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 하지만 학교 측에서 이렇게 사회적 평등을 장려해서 생도(Cadet)들을 받아들였지만, 대체로 생도들은 재력가(Rihce) 가문의 자제였었고, 그렇지 못한 생도들은 비참함을 느껴야 했다. 그런 비참함을 느꼈던 것이 나뽈레옹이었다. 특히 빠히의 군사 학교의 경우 공식적으로 학비(Frais de Scolarité)를 지불했던 생도 82인과 장학금(Bourse)을 지원받았던 생도 132인 간의 차별은 없었지만,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9

파리 생도 시절 부친의 사망을 경험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1785년 2월 24일에 나뽈레옹(Napoléon)의 부친이었던 샤흘(Charles)이 사망했다. 이는 나뽈레옹의 입장에선 여태 교육에 있어 재정적으로 지원해주었던 이가 없어진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당시 나뽈레옹은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의 생도(Cadet)였다. 나뽈레옹 샤흘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 부친의 사망 이후 나뽈레옹은 까떼드랄레 디 산따 마리아 아순따(Cattedrale di Santa Maria Assunta)에서 대부제(Archidiaconus)를 역임하고 있던 종조부인 루치아누(Lucianu)에게 서한을 보내서 장교(Officier)로 임관될 때까지 가족을 부양해 달라고 요청했다. 나뽈레옹의 입장에선 교육에 있어 재정적으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도 문제였지만, 꼬르시까(Corsica)에 남아 5명의 동생들을 부양하고 있던 모친 레띠시아(Laetitia)가 더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보다는 과부가 되면서 홀로

나폴레옹의 파리 군사 학교에서의 생활 [내부링크]

1784년 10월 22일에 나뽈레옹(Napoléon)은 만 15세의 나이에 프항스(France) 내 최고의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였던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에 진학했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 에꼴 밀리데흐 드 빠히의 학교는 다음과 같이 운영되었다. 교내 생도(Cadet)들은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휴식(Pause) 시간을 제외하고 1일 8시간을 공부했다. 각 과목의 수업(Leçon)은 2시간 진행되었고, 수업당 교수(Professeur) 1인과 조교(Adjoint) 1인이 함께 한 수업을 담당했으며, 20~25인의 생도들이 수강했다. 교내에서 교육했던 과목은 수학(Mathématiques), 지리학(Géographie), 역사(Storia), 프랑스어(Français)의 문법(Grammaire), 요새 구축(Fortification), 제도(Dessin), 펜싱(Escrime), 춤(Danse)으로 총

은혜 갚은 와이프의 이부동생(나폴레옹의 외숙부) [내부링크]

지난 주제 (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87598933)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의 부친 샤흘(Charles)은 나뽈레옹이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를 졸업하면 나뽈레옹의 첫째 동생 뤼시앵(Lucien)을 그 학교에 진학시킬 계획이었는데, 나뽈레옹이 졸업 후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로 진학하면서 뤼시앵은 형이 졸업했던 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나뽈레옹 샤흘 뤼시앵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하지만 부친 샤흘이 사망한 이후에 뤼시앵은 형 나뽈레옹처럼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를 졸업해서 장교(Officier)로 임관하는 것이 아닌 성직자(Clericus)가 되고 싶어했는데, 그 결과 진학한지 2년만에 브히엔에서 중퇴하고 1786년에 아이스 데 쁘루벤소(Ais de Provença)의 신학교(Seminarium)에 입학했다.

시골 학교 졸업 후 파리에서 호화로운 대접을 받았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1784년 10월 22일에 나뽈레옹(Napoléon)은 만 15세의 나이에 프항스(France) 내 최고의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였던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에 진학했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의 학교 건물은 1751년에 제1 왕실 건축관(Premier Architecte du Roi)을 역임했던 앙주-자끄 가브히엘(Ange-Jacques Gabriel)에 의해 시공되어서 나뽈레옹이 입학하기 13년 전 시점인 1780년에 완공되었다.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 학교의 건축물은 꼬린토스(Κόρινθος) 양식의 기둥(Colonne)과 도리스(Δωρίς) 양식의 열주(Colonnade)로 건립되었었다. 학교에선 샹-드-마흐스(Champ-de-Mars)가 내려다 보였는데,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에서 내려다 보는 샹 드 마흐스는 당대에 빠히(Paris)의 절경으로 평가되었다고 한다. 샹-드-마흐스 학교 건물 내부에는 무언가

나폴레옹의 파리 군사 학교 입학 [내부링크]

1784년 9월 22일에 만 15세의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의 학생 나뽈레옹(Napoléon)은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École Militaire de Paris)의 부장학관(Sous-Inspecteur)이었던 마히-앙뚜안-세하삐옹 헤노 데 몽(Marie-Antoine-Sérapion Reynaud des Monts)으로부터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로 입학할 자격이 된다는 심사를 받았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 당시 나뽈레옹은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로 진학이 어렵다고 스스로 판단했는데, 그 이유는 고전어(Langue Classique) 성적이 우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나뽈레옹에게 운이 좋았던 것이 당시 전쟁국무경(Secrétaire d'État de la Guerre)을 역임하고 있던 필리쁘 앙히 드 세귀흐(Philippe Henri de Ségur)가 에꼴 밀리떼흐 드 빠히의 입학

성직자 진로를 포기했던 나폴레옹의 형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86587472)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의 부친 샤흘(Charles)은 1784년 6월 21일에 나뽈레옹이 재학중이던 학교인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을 방문했다. 샤흘은 아들의 학교를 방문하면서 아들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전달했다. 그것은 나뽈레옹의 형 조제프(Joseph)가 소명(Vocatio)을 받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성직자(Presbyter) 진로를 포기한 소식이었다. 이는 나뽈레옹 입장에선 단순히 성직자 진로를 포기했다는 소식이 아니었는데, 조제프가 성직자 길을 포기하고 자신처럼 군(Militaire)으로 진로를 선택했다는 소식이었다. 나뽈레옹 샤흘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조제프 부친의 방문이후 4일이 경과한 시점인 1784년 6월 25일에 고모부인 니꿀라 라비듀 빠라비치니(Nicula Lavighu Paravicini)에게 서

나폴레옹과 부친 샤를의 학교 방문 [내부링크]

나뽈레옹 (Napoléon)의 부친 샤흘(Charles)은 나뽈레옹이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로 진학한 이후에 인생이 잘 풀리질 않았다. 샤흘 나뽈레옹이 브히엔의 학교에 입학했던 1779년에 파리(Paris)를 방문해서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66575549)에서 언급했던, 까사 데이 미렐리(Casa dei Milelli)를 반환받으려 했으나, 반환받을 명분이 부족했기에 반환 받지 못하였다. 대신, 샤흘은 자신이 접대했던 꼬르시까(Corsica)의 총독(Gouverneur)인 샤흘 루이 드 마흐뵈프(Charles Louis de Marbeuf)의 소개장을 통해 프항스(France)의 왕(Roi)이었던 루이 16세(Louis XVI)를 알현했다. 마흐뵈프의 소개장이 루이 16세에게 신뢰감을 주었는지 루이 16세는 나뽈레옹의 부친 샤흘의 청원을 수락했다. 샤흘 루이 드 마흐뵈프 루

나폴레옹과 장학관 케랄리오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이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 입학한 4년이 경과한 시점인 1783년의 동계에 폭설이 발생했던 당시의 사건이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나뽈레옹은 교내 학생들에게 친구들에게 마당(Cour d'Immeuble)에 쌓인 눈으로 요새(Forteresse)를 구축해보자고 제안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77955151)에서 언급했듯이 교내 학생들은 학교에서 요새 구축(Fortification) 교육을 받았었다. 그러니까 교육을 받았던 것을 활용했던 것이다. 학생들은 마당에 요새를 구축한 이후 공성군과 수비군을 편성해서 눈싸움(Bataille de Boules de Neige)을 벌였다. 당시 눈싸움은 일반적인 눈싸움으로 진행되지 않았고, 눈뭉치(Boule de Neige)에 돌을 넣어 진행되었기에 부상자가 속출했다고 한다. 당시 나뽈레옹은 공성군과

나폴레옹과 신입생 브라즐론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이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에 입학한지 3년 후인 만 13세가 되었던 1782년에 엘루아 샤흘 발라티에 드 브하즐론(Éloi Charles Balathier de Bragelonne)이 입학했다. 이 학생은 1771년 12월 3일 생으로, 1769년 8월 15일 생이었던 나뽈레옹보다 2살 연하였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엘루아의 부친 앙뚜한 안(Antoine Anne)은 꼬르시까(Corsica) 내 지역인 바스띠아(Bastia)에 주둔했던 부대인 루에르게 연대(Régiment de Rouergue)의 중위(Lieutenant en Premier)였다. 엘루아는 부친이 복무하고 있던 지역인 바스띠아(Bastia)에서 출생했다. 그러니까 나뽈레옹과 같이 꼬르시까에서 출생했던 학생이었다. 단, 엘루아의 경우 부친이 브하즐로뉴-보부아(Bragelogne-Beauvoir) 출신의 프항스인(Français)

학교 정원에 독립 국가를 건국했던 나폴레옹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이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에 재학중이던 시절, 학교를 운영했던 교장(Princiapal) 루이 세바스띠앵 베흐똥(Louis Sébastien Berton)과 교감(Sous-principal)이자 그의 동생이었던 장 바띠스뜨 베흐똥(Jean Baptiste Berton)은 ‘건강한 신체, 계몽주의(Lumières) 정신, 정직한 마음’ 이라는 교훈을 선정해서 교내 학생들에게 실외 활동을 권장했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나뽈레옹은 3명의 학생들과 함께 조원(Jardinage) 활동을 야외 활동으로 했는데, 나폴레옹은 이 3명의 학생들을 매수해서 조원 활동을 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고, 소교모의 정원(Jardin)을 독점한 후 정원을 둘러싼 방책(Palissade)을 구축했다. 그 결과 이 소규모의 정원이 보루(Redoute) 기능을 수행했다 한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

극성 민족주의 사상을 가진 외국인 학생 나폴레옹 [내부링크]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 시절의 나뽈레옹(Napoléon)은 꼬르시까(Corsica)에 대해서 극성 민족주의(Ethnonationalisme) 사상을 가졌을 뿐 아니라, 꼬르시까가 프항스(France)에 병합되기 직전 꼬르시까 공화국(Ripublica Corsa)의 국가총통(Generale di a Nazione)을 역임했던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를 숭배했었다. 또한 1768년 5월 15일에 제나(Zêna)가 베흐사유 조약(Traité de Versailles)을 체결해서 프항스에 꼬르시까를 양도했을 당시 프항스 측 대표로 참석했던 국무수석장관(Principal Ministre d'État)인 에띠엔-프항수아 드 슈아죌(Étienne-François de Choiseul)을 혐오했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빠스꽐레 빠올리 에띠엔-프항수아 드 슈아죌 꼬르시까인(Corsi)이었던 나뽈레옹과 달리 꼬르시까

군사 학교를 운영했던 20-30대 성직자 형제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77955151)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은 1779년 5월 15일에 만 9세의 나이에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이라는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에 입학했다. 지난 주제에서 언급했듯이 프항스(France) 내 군사 학교는 전국에 10개 존재했다. 지난 주제에서 언급했듯이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은 재정적으로 열악해서 일류 교사(Professeur)들을 채용하지 못했는데, 교내 교사들은 교사로서 능력이 부족했다. 박하게 평가한다면 무능한 교사들로 운영되던 학교였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인물들은 교장(Princiapal) 루이 세바스띠앵 베흐똥(Louis Sébastien Berton)과 교감(Sous-principal)이자 그의 동생이었던 장 바띠스뜨 베흐똥(Jean Baptiste Berto

수학과 고대사 지식에 우수했던 학창시절 나폴레옹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79162420)에서 언급했듯이 나뽈레옹(Napoléon)이 졸업했던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에선 라띤어(Latina)를 학생들에게 교육을 했다.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기초 라띤어만 교육했었고, 헬라스어(Ἑλληνική)는 교육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웨르길리우스(Vergilivs), 율리우스 까이사르(Ivlivs Caesar), 살루스띠우스(Sallvstivs), 끼께로(Cicero), 호라띠우스(Horativs), 꼬르넬리우스 네뽀스(Cornelivs Nepos) 등의 고대 시대(Antiquité)의 로마(Roma) 출신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교육했었다. 나뽈레옹이 가장 좋아했던 작가는 작품을 헬라스어로 저술했던 쁠루따르코스(Πλούταρχος)였다. 나폴레옹은 이러한 작가들의 작품을 번역본으로 분야를 가리지 않고 잡다하게 읽었다 한다. 에꼴 밀리떼흐

왕따를 당했던 성적이 우수한 외국인 학생 나폴레옹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e)은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에서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사제 관계 혹은 교우 관계만큼은 좋게 평가할 수 없던 학생이었다. 나뽈레옹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에선 체벌은 육신과 영혼을 해롭게 한다는 사상을 근거로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었는데, 그럼에도 교내에서 체벌이 행해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의 대표적 예시로는 나뽈레옹이 석찬(Dîner) 시간에 착용감이 거친 천으로 제조된 갈색 의복을 착의하고 보네 단(Bonnet D'âne)이라는 체벌용 모자를 착용한 상태에서 무릎을 꿇고 식사를 하는 체벌을 받았던 사건이 있다. 체벌을 받았던 나뽈레옹은 히스테리아(Hysteria)를 일으키며 체벌을 받으면 식사를 했던 것을 구토했다 한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80011477)에서 언급했듯이 교내에서 나뽈레옹이 애착을 가졌던 교사(Profess

시골 군사 학교의 학생 나폴레옹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은 1779년 5월 15일에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 정식으로 입학했다. 당시 나뽈레옹의 나이 만 9세였다. 나뽈레옹 학교가 위치한 브히엔-르-샤또(Brienne-le-Château)에는 샤또 드 브히엔-르-샤또(Château de Brienne-le-Château)라는 성(Château)이 있었는데, 이 성은 나뽈레옹이 입학하기 1년 전 시점인 1778년에 완공되었었다. 샤또 드 브히엔-르-샤또 본래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헨은 수도원(Monasterium)이었는데, 1730년부터 오르도 미니모룸(Ordo Minimorum)이라는 수도회(Ordo)에서 운영하는 꼰웬뚜스(Conventus)라는 수도자(Monachus)를 양성을 위한 학교로 사용되었던 곳이었다. 그리고 나뽈레옹이 입학하기 2년 전인 1776년에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로 전환되었었다. 사실 이렇게 군사 학교로 전환되었던 배경은 빠

나폴레옹의 오툉에서 브리엔으로의 이동 [내부링크]

카를로(Carlu)는 장자 듀제뻬(Ghjuseppe)와 우리에겐 나뽈레옹(Napoléon)으로 알려진 차자 나불리오네(Nabulione)가 꼴레주 도'뙹(Collège d'Autun)에 입학한 3주가 경과한 시점에 전쟁국무경(Secrétaire d'État de la Guerre)을 역임하고 있던 몽바헤 백작(Comte de Montbarrey)인 알렉상드흐 마히 레오노흐 드 생-모히스(Alexandre Marie Léonor de Saint-Mauris)에게서 차자 나불리오네가 꼴레주 후아얄 에 밀리떼흐 드 티홍(Collège Royal et Militaire de Thiron)에 배정되었으며 귀족(Noblesse) 신분 증명의 절차가 완료될 때까지 대기해야 한다는 통지를 받았다. 그런데 1779년 3월 28일에 몽바헤는 까를루에게 차자 나불리오네가 꼴레주 후아얄 에 밀리떼흐 드 티홍이 아닌 에꼴 밀리떼흐 드 브히엔(École Militaire de Brienne)에 최종 배정되었

고향 코르시카를 떠나 프랑스로 이동하는 나폴레옹 [내부링크]

1778년 12월 15일에 까를루(Carlu)의 인솔하에 두 아들인 듀제뻬(Ghjuseppe), 우리에겐 나뽈레옹(Napoléon)으로 알려진 나불리오네(Nabulione), 그리고 처제 요제프(Joseph)가 꼬르시까(Corsica)를 떠났다. 출발지는 그들이 거주하고 있던 아얏츄(Aiacciu)였다. 당시 장자 듀제뻬의 나이 만 10세, 나불리오네의 나이 만 9세, 처제 요제프의 나이 만 15세였다. 이 세 명 전원 처음으로 자신들이 출생했던 꼬르시까 이외의 지역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까를루 듀제뻬 나불리오네 or 나뽈레옹 요제프 이 네 명의 사내들의 최종 목적지는 모두 달랐다. 까를루의 경우 코르시까의 귀족 대표(Député de la Noblesse)로 재지명되었기에 베흐사유(Versailles)를 방문해야 했다. 요제프의 경우 아이스 데 쁘루벤소(Ais de Provença)에 위치한 신학교(Seminarium)을 진학해야 했다. 장자 뜌제뻬의 경우 오뙹(Autun)에 위치

제1의 나폴레옹과 제2의 나폴레옹 [내부링크]

어린 시절 꼬르시까(Corsica)에서 생활하던 시절 나뽈레옹(Napoléon), 아니 꼬르시까의 소년 나불리오네(Nabulione)는 형인 듀제뻬(Ghjuseppe)와 경쟁하는 데 집착했다고 한다. 나불리오네 or 나뽈레옹 듀제뻬 or 조제프(Joseph)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65370790)에서 언급했듯이 꼬르시까의 소년 나불리오네는 형 듀제뻬(Ghjuseppe)를 자주 협박하고 괴롭혔었다. 그리고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35986775)에서 언급했듯이 학교에서 역할극(Recitare un Ruolo) 수업을 했을 당시 교사(Maestro)가 형인 듀제뻬에게 역사적 승리자 역할을 배정하고 자신에게는 역사적 패배자 역할을 배정하자, 교사에게 졸라서 역할 배정을 바꾸게 해서 자신이 승리자 배역을 맡고 형인 듀제뻬가 패배자 배역을 맡도록 만든다. 이런 소년 나불리오네의

부오나파르테 가문과 포초 디 보르고 가문 [내부링크]

꼬르시까(Corsica)에는 지역 고유의 특이한 문화가 있다. 그것은 복수 문화인 벤데따(Vendetta) 문화이다. 이 복수 문화는 한 번 복수의 대상자가 될 경우 복수를 하는 자가 복수를 완수될 때까지 최초 대상자부터 시작해서 일곱 세대까지 복수 대상이 되는데다, 복수를 하는 자 역시 복수를 완수할 때까지 본인부터 시작해서 일곱 세대까지 복수 의무를 지게 되던 문화였다. 복수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가문의 미혼인 여성들은 가문이 당한 굴욕을 길이 기억하려고 혼인 시 사촌의 수를 지참금(Dos)에 누계시켰으며, 가문의 남성들은 가문의 명예를 모욕당했던 것에 복수할 때까지는 면도를 하지 않고 수염을 기른 채 살았다. 그리고 꼬르시까의 벤데따 문화는 대상자가 계급과 직위가 높아도 가문에 굴욕을 선사한 이들이라면 누구든 보복을 하던 문화였다. 특히, 프항스(France)의 수석 국무 장관(Principal Ministre d'État)이었던 에띠엔-프항수아 드 슈아죌(Étienne-Fr

부오나파르테 부부의 자녀 진학 문제 해결 방식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이 접대했던 고위 인사였던 꼬르시까(Corsica)의 총독(Gouverneur)인 샤흘 루이 드 마흐뵈프(Charles Louis de Marbeuf)는 까를루의 자녀들에게 교육적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 마흐뵈프 까를루 마흐뵈프는 까를루가 재정적으로 위기 상황임을 인식하고 있었는데, 까를루에게 프항스(France)에서 귀족(Noblesse) 가문의 자제들에게 무상 교육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을뿐 아니라, 그런 제공을 받아낼 수 있는 절차까지 알려주었다. 이렇게 무상 교육을 제공받는다면 까를루의 장자인 듀제뻬(Ghjuseppe)는 아이스 데 쁘루벤소(Ais de Provença)에 위치한 신학교(Seminarium)에 입학할 수 있었고, 우리에겐 나뽈레옹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차자인 나불리오네(Nabulione)의 경우 군사 학교(École Militaire)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장녀인 마리아 안나(Maria Anna)의 경우 루이 1

아버지를 혐오했던 코르시카 소년 나폴레옹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은 1769년 8월 15일에 코르시까(Corsica)의 아얏츄(Aiacciu)에서 출생했다. 출생 당시의 꼬르시까식 이름은 나불리오네(Nabulione)였다. 그리고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6900596)에서 언급했듯이 만 9세의 나이에 꼴레주 도'뙹(Collège d'Autun)에 진학하게되면서 고향인 꼬르시까를 떠나야 했다. 그러니까 만 9세가 되기까지 꼬르시까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아얏츄 나불리오네가 출생한 이후 만 9세까지 경험했던 18세기의 꼬르시까의 아얏츄의 환경은 다음과 같다. 거리(Strada)는 정육점(Macellaio)에서 도축된 가축의 악취가 났을 뿐만 아니라, 거리에 일광건조 중인 동물의 피혁(Pelle)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하계 시기에 거리에 파리(Mosca)가 가득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얏츄는 극심하게 식수가 부족한 지역이기도 했다. 오

부오나파르테 부부와 총독 마르뵈프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66575549)에 나뽈레옹(Napoléon)의 모친 레띠치아(Letizia)의 불륜(Adulterium)과 관련해서 언급했었다. 레띠치아의 모친 레띠치아는 1776년부터 남편인 까를루(Carlu)가 접대했던 고위 인사인 꼬르시까(Corsica)의 총독(Gouverneur)인 샤흘 루이 드 마흐뵈프(Charles Louis de Marbeuf)와 불륜을 했었다. 사실 불륜 관계를 시작할 당시엔 총독으로 부임하기 이전이었는데, 그 당시엔 중장(Lieutenant Général)으로, 1772년 8월 4일부터 꼬르시까에 주둔한 군의 총사령관(Commandant-en-Chef)으로 임명되면서, 총독(Gouverneur Général)이었던 노엘 주흐다 드 보(Noël Jourda de Vaux) 다음으로 꼬르시까에 주둔한 군 내에서 권력 서열 2위였다. 마흐뵈프는 드 보의 후임자로서 1779년 4월 10일에

코르시카의 늙은 총독 마르뵈프 [내부링크]

1768년 5월 15일에서 1769년 5월 9일까지 1년간의 정복 활동(Conquête)을 완수하고 꼬르시까(Corsica)를 자국의 국토에 병합시킨 프항스(France)는 꼬르시까에 총독(Gouverneur)과 지사(Intendant)를 임명해 임명된 두 인물이 바스띠아(Bastia)의 최고 위원회(Conseil Superieur)의 의견을 수렴해서 통치하도록 했다. 최고 위원회에는 의장(Président) 한 명, 프항스인(Français) 출신 위원(Conseiller) 여섯 명, 꼬르시까인(Corsi) 출신 위원 네 명으로 구성되었었다. 꼬르시까는 프항스에게 정복된 이후 꼬흐스 국(États de Corse)이라는 지방국(États Provinciaux)으로서 통치되었다. 총독은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57311944)에서 언급했던 프항스가 꼬르시까 정복 활동을 수행할 당시 참전했던 샤흘 루이 드 마흐뵈프(Charles

소송을 남발했던 나폴레옹의 부친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의 부친이었던 까를루(Carlu)는 자신의 저택의 최상층에서 친척들이 거주하게했다. 까를루의 부친 듀제뻬 마리아(Ghjuseppe Maria)에겐 네 명의 형제자매들이 있었는데, 1710년 8월 25일에 출생했던 2살 연상의 큰 누나 빠울라 마리아(Paula Maria), 1712년에 출생했던 1살 연상의 작은 누나 마딸레나(Matalena), 1717년에 출생했던 4살 어린 큰 동생 나불리오네(Nabulione), 그리고 그 뒤에 년도인 1718년 1월 8일에 출생했던 작은 동생 루치아누(Lucianu)가 있었다. 우선 큰 누나 빠울라 마리아의 경우 첫 번째 남편인 뻬뜨루 떼르나노(Petru Ternano)와의 사이에서 1738년 2월 14일에 플라미니아(Flaminia)라는 딸을 보았으나 8월 23일에 6개월만에 요절했고, 1740년 5월 16일에 안나 마리아(Anna Maria)라는 딸을 보았다. 1757년 5월 17일에는 만 46세의 고령의 나이에 세

나폴레옹의 모친 레티치아의 교육 방식 [내부링크]

노년의 당시 나뽈레옹의 모친 레띠치아(Letizia)는 어린 시절의 나뽈레옹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아이들에게 놀이방(Stanza dei Giochi)의 벽에 그림을 그리라고 물감(Colore)을 주었을 때 다른 아이들은 모두 꼭두각시(Marionetta)를 그렸지만 나뽈레옹은 병사(Soldato)를 그렸다." 이는 어린 시절부터 나뽈레옹이 군인에 관심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증언이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1141920)에서 언급했지만, 나뽈레옹은 태내에 있었을 때부터 전쟁터에서 군생활을 경험했었을 뿐 아니라, 전투 현장까지 경험했었다. 레띠치아의 증언에 따르면 나뽈레옹은 어린 시절에 병적인 거짓말쟁이(Bugiardo)였다 한다. 레띠치아는 나뽈레옹, 아니 나불리오네(Nabulione)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나불리오네에게 사실대로 직고할 것을 요구했다 한다. 이는 사실 레띠치아와 나불리오네 뿐만 아니라 모든 어머니와

여학교의 남학생 나폴레옹 [내부링크]

1774년에 나뽈레옹(Napoléon)은 만 5세의 나이에 아얏츄(Aiacciu)에 소재한 수녀(Nonna)들이 운영하는 학교(Scuola)에 입학했다. 학교를 운영했던 수녀들은 평신도(Laicus)급 신도였는데, "베귀나스(Beguinas) 수도회(Ordo)"라는 평신도급 신도들이 결성한 수도회에 소속된 수녀들이었다. 이 학교는 본래 소녀(Ragazza)들을 교육했던 여학교였다. 나뽈레옹 or 나불리오네 아얏츄 일설에 따르면 나뽈레옹은 그 여학교에서 문제아였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오후 시간에 산책을 했다 하는데, 나뽈레옹은 댜꾸미네따(Ghjacuminetta)라는 여학생(Studentessa)의 손을 잡고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한다. 어저면 나뽈레옹의 첫 사랑으로 생각되겠지만, 실제 나뽈레옹의 첫 사랑은 다른 여성이다. 이 댜꾸미네따라는 소녀의 가문은 어느 가문인지는 불명확한데, 아얏츄에 거주하던 나뽈레옹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들 중에 1766년생으

나폴레옹의 출생과 이름의 비밀 [내부링크]

1769년 5월 23일에 리똔두(Ritondu)에서 프항스(France)에 유격전(Guérilla)으로 저항하다 항복했던 까를루(Carlu)와 레띠치아(Letiza)는 아얏츄(Aiacciu)로 귀환했는데, 당시 나뽈레옹(Napoléon)의 모친이었던 레띠치아는 임신 7개월의 만삭이었던 상태였다. 레띠치아 그리고 3개월 후인 성모 승천 대축일(Assumptio Beatae Mariae Virginis)인 1769년 8월 15일에 까떼드랄레 디 산따 마리아 아순따(Cattedrale di Santa Maria Assunta)에서 미사(Missa)에 참례하고 있을 때 산통이 시작되었다. 다행히도 3층 건물인 까를루와 레띠치아의 부부가 거주하던 저택은 360m의 1분 거리에 위치해있었는데, 까를루보다 4살 많은 누이, 레띠치아 입장에선 시누이였던 마리아 제르뜨루데(Maria Gertrude)가 레띠치아를 부축해 저택으로 데리고 갔다. 일설에 따르면 맘무치아 까떼리나(Mammuccia Cat

귀향해서 승승장구했던 코르시카 공화국의 국부 파올리 [내부링크]

1755년에 11월 18일에 제나(Zêna)의 통치를 받던 꼬르시까(Corsica)에서 공화국(Ripublica)이 건국된다. 그리고 15년 전인 1740년에 멸망했던 꼬르시까 왕국(Regno)의 국가총통(Generale di a Nazione)이었던 댜친뚜 빠올리(Ghjacintu Paoli)의 아들인 만 30세의 빠스꽐레(Pasquale)가 국가총통으로 선출된다. 빠스꽐레는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57997347)에서 언급했듯이 부친인 댜친뚜와 함께 만 14세의 나이에 나뿔르(Napule)로 망명했었다. 빠스꽐레 빠올리 그의 나뿔르에서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나뿔르로 망명한지 2년 이후인 1741년에 빠스꽐레는 만 16세의 나이에 그의 부친 댜친뚜가 대령(Colonnello)으로 복무하던 꼬르시까 연대(Reggimento Corsica)에서 훈련받는 생도(Cadetto)로서 입대하면서, 가에따(Gaeta) 지역에서 군복무를

프랑스의 귀족으로 인정받고 싶어했던 나폴레옹의 부친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 부친의 까를루(Carlu)와 레띠치아(Letiza)의 혼인할 당시 두 부부의 자산은 레띠치아의 지참금(Dos)은 6,750 리브흐(Livre), 까를루의 자산은 약 7천 리브흐였다. 그리고 이 두 부부의 공동 자산으로 인해 발생하는 연간 소득은 약 670 리브흐였다. 레띠치아의 지참금 6,750 리브흐는 현대 기준으로 76,116.73 유로, 까를루의 지참금 7,000 리브흐는 현대 기준으로 78,935.87 유로, 두 부부의 자산 총합은 현대 기준으로 155,052.6 유로, 두 부부의 자산이 발생시키는 수익은 현대 기준으로 7,555.29 유로이다. 까를루 부오나빠르떼(Carlu Buonaparte) 레띠치아 이러한 자산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 이외에도 까를루가 일을 통해 발생시키는 수익이 있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57311944)에서 언급했듯이 까를루는 꼬르시까(Corsica)의 국가총통

도박과 투기로 인생을 망친 사내, 노이호프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59130496)에서 언급했던 테오도어 폰 노이호프(Theodor von Neuhoff)이 낭인이 되었던 이유와 관련해서 설명하겠다. 테오도어 폰 노이호프 테오도어의 부친 레오폴트(Leopold)는 레오폴트는 트리어(Trier)의 남작(Baron)의 딸이었던 마리아 카타리나 폰 나이슨(Maria Catharina von Neyssen)과 혼인했는데, 혼인 이후로는 메스(Metz)에 소재한 요새(Forte)에서 군복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1694년에 테오도어가 출생했다. 하지만 1년 후인 1695년에 부친인 레오폴트가 테오도어가 출생한지 1년만에 사망하게 된다. 이후 테오도어의 모친 안은 메스에서 징세총관(Receveur Général)으로서 조세(Gabelles) 징수를 담당하던 장-바띠스뜨-브누아 마흐노(Jean-Baptiste-Benoist Marneau)와 재혼했다. 테오도어에겐 마리 안느 엘리자

낭인 노이호프가 코르시카의 왕이 되었던 이유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57997347)에서 언급했던 테오도어 폰 노이호프(Theodor von Neuhoff)가 어떻게 해서 꼬르시까(Corsica)의 왕(Rè)으로 추대되었는지 설명하겠다. 테오도어 폰 노이호프 노이호프는 본래 꼬르시까 출신이 아닌 쾰러(Kölle)출신이었다. 그의 부친 레오폴트(Leopold)는 브란든부르크(Brandenburg)의 선제후(Kurfürst)인 프리드리쉬 빌헬름(Friedrich Wilhelm)의 치세의 프로이슨(Preußen)에서 연대(Regiment) 소속의 대위(Kapitän)로서 군복무를 수행했던 군인이었다. 그의 부친 레오폴트는 프로이슨에서의 군복무 경력 이외에도 묀스터(Mönster)의 주교(Episcopus)였던 프리드리쉬 크리스티안 폰 플레튼베르크(Friedrich Christian von Plettenberg)를 호위하는 근위대(Garde)에서 군복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프리

코르시카의 독립 투사 파올리 부자(父子)와 프랑스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57311944)에서 언급했던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와 그의 부친 댜친뚜(Ghjacintu)와 프항스(France)는 어떤 악연이 있는지, 그리고 노엘 주흐다 드 보(Noël Jourda de Vaux)는 꼬르시까와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와 관련해서 설명하겠다. 빠스꽐레 빠올리 1729년 12월에 꼬르시까(Corsica)에서 제나(Zêna)의 통치에 저항하는 혁명(Rivoluzione)이 발발했다. 이렇게 혁명이 발발했던 원인은 보지우(Boziu)의 사목구(Parochia)에서 파견한 징수원(Esattore)이 부스따니꾸(Bustànicu)의 주민에게 두에 세이니(Due Seini)라는 난로세를 부과한 것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난로세라는 것을 만들어서 조세를 추가로 부과했던 것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었다. 당시 제나의 뒤제(Duxe)는 뤼꾸 그리마두(Lucco Grimado)였다. 이후

청년 독립 투사였던 나폴레옹의 아버지 [내부링크]

1767년에 꼬르시까(Corsica)의 국가총통(Generale di a Nazione)이었던 빠스꽐레 빠올리(Pasquale Paoli)가 제나(Zêna)의 국토였던 까쁘라디아(Capraghja)를 점령했을 당시 교황(Papa)이었던 끌레멘스 13세(Clemens XIII)를 회유할 목적으로 만 21세의 청년이었던 나뽈레옹(Napoléon)의 부친 까를루(Carlu)를 특사(Inviato)로서 로마(Roma)로 파견했다. 당시 까를루는 빠올리의 개인 비서(Segretario)로 고용된 상황이었다. 당시 제나의 뒤제(Duxe)는 마르셀루 두아수(Marçello Duaço)였다. 까를루 빠스꽐레 빠올리 꼬르시까와 까쁘라디아는 모두 1284년의 멜로리아(Meloria) 해전에서 제나가 삐사(Pisa)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획득한 지역이었는데, 빠올리가 480년 만에 까쁘라디아를 제나의 통치에서 해방시킨 것이었다. 꼬르시까의 경우 까쁘라디아보다는 제나의 통치에서 일찍 일시적으로 해방되었는데

나폴레옹의 모친은 미녀였는가? [내부링크]

어떤 이들은 나뽈레옹(Napoléon)의 부친 까를루(Carlu)가 레띠치아(Letizia)의 외모에 반해서 사랑의 감정으로 혼인하였다고 주장한다. 레띠치아 라몰리노(Letizia Ramolino) 18세기에 그려진 초상화에서 묘사된 레띠치아의 젊은 시절 외모는 숱이 많은 흑갈색 두발에, 크고 반짝이는 깊은 눈을 가졌었지만, 입은 너무 작고 코는 너무 긴 데다 얼굴은 아름답게 보이고 싶어 하는 여성치고는 치장 상태가 부실하다. 그러니까 당대 여성들과 비교하면 부실하다는 의미다. 초상화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레띠차아의 신장은 155cm의 단신이었고, 야위고 흰 손을 가졌었다. 이렇게 치장이 안된 원인은 가정의 경제적 여건이 그녀를 매력적이게 치장을 할 여건이 안 되었거나, 꼬르시까(Corsica)의 섬이라는 지역적 한계 때문에 매력적으로 치장할 물건을 구하기 어려웠거나, 타 지역의 여성들을 접할 기회가 부족했기에 치장에 신경을 써도 지역 여성들과 자신을 비교해서 치장을 했을 가능성

여덟 아이의 엄마였던 나폴레옹의 모친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의 모친 레띠치아(Letizia)는 당대의 여성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교육을 받지 못했고 가사(Faccende) 능력 외의 능력은 없었던 여성이었다. 대신 레띠치아는 당대의 여성들의 필수능력을 가졌었다. 그 능력이란 출산(Puerperium) 능력이다. 레띠치아 레띠치아는 14명의 자녀들을 출산했는데, 이 14명의 자녀들 중에서 8명만이 성인(Adultus)으로 성장할 때까지 생존했다. 레띠치아는 1764년에 첫 아이를 출산했는데, 이 아이는 나뽈레옹의 이름과 같은 나불리오네(Nabulione)였다. 하지만 그녀의 첫 아이 나불리오네는 후년도 8월에 사망하게 된다. 레띠치아는 나뽈레옹의 부친이었던 까를루(Carlu)와 1764년 6월 2일에 혼인을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혼인과 동시에 레띠치아는 첫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첫 아이가 일찍 사망했던 이유는 조산아(Premature)였기에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1764년의 가장

부오나파르테 부부의 부부싸움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의 부친이었던 까를루(Carlu)는 체구가 장신이었으며, 오똑한 콧날에 관능적인 입술과 아몬드 형태의 눈을 지닌 쾌락주의자이자 호색한이었다. 오죽하면 나뽈레옹의 모친 레띠치아(Letizia)가 어린 나뽈레옹에게 까를루가 살로네(Salone)에서 도박(Gioco d'Azzardo)과 음주(Bere)를 하는지 감시하라고 할 수준이었다 한다. 까를루 부오나빠르떼(Carlu Buonaparte) 레띠치아 까를루는 1765년부터 우니베르시따 디 로마(Università di Roma)에서 다시 학업을 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로마(Roma)로 이동하게 되었다. 까를루가 처음 로마로 떠나기 이전인 1764년에 나뽈레옹과 이름이 같은 나불리오네(Nabulione)라는 아들이 출생했는데, 까를루가 로마에서 학업을 하던 도중 1765년에 첫 번재 아들 나불리오네가 사망하게 된다. 이후 까를루와 레띠치아는 첫 아이가 사망했던 겨울 초에 꼬르띠(Corti)로 거주지를 이전했다.

개종 때문에 가문으로부터 의절당한 사내, 페슈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52687149)에서 언급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의 외조모 안듈라 마리아 삐에뜨라산따(Anghjula Maria Pietrasanta)와 그녀의 재혼 상대였던 프란츠 페슈(Franz Faesch)의 혼인 생활과 관련해서 논하겠다. 안듈라는 프란츠와 재혼하던 과정에서 프란츠를 설득해 가톨릭(Catholicus) 교도로 개종시켰다. 프란츠는 버즐(Basel)에서 은행가(Bankier)로 활동하고 있었던 프란츠의 부친이었던 베른하르트(Wernhard)의 독남이었는데, 아들이 혼인하기 6년 전인 1751년에 아들이 혼인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었다. 혼인 당시 페슈(Faesch) 가문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가문이었는데, 이 때문에 프란츠는 가문과 의절하게 된다. 페슈 가문의 문장 그리고 이 두 부부가 1757년에 혼인하기 45년 전인 1712년에 토근부르크(Toggenburg) 전쟁이

나폴레옹의 부모가 혼인했던 이유 [내부링크]

1746년 3월 27일에 출생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의 부친 까를루(Carlu)는 우니베르시따 디 삐사(Universita di Pisa)에서 법학을 전공했는데 나뽈레옹의 모친인 레띠치아(Letizia)와 혼인을 하게 되어 학위를 취득하지 않고 중퇴를 했다. 까를루가 법학을 전공했던 이유는 그의 가문 부오나빠르떼(Buonaparte) 가문이 법조계 가문이어서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50548687)에서 언급했듯이 부오나빠르떼의 시조인 쟝파르두(Gianfardo)부터가 공증인(Notaio)이었고, 아얏츄(Aiacciu)에서 실질적인 기반을 형성했던 선조인 가브리엘루(Gabriello)의 아들인 디롤무(Ghjirolmu)역시 공증인이었다. 훗날 까를루는 1769년에 혼인으로 중퇴를 한지 5년만에 자신이 중퇴했던 우니베르시따에서 법학 박사(Dottore)를 취득하게 된다. 까를루 레띠치아 까를루 측

콜랄토 가문과 라몰리노 가문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의 모친인 레띠치아(Letizia) 측 가문인 라몰리노(Ramolino) 가문은 꼴랄또(Collalto) 가문의 방계 가문이었다. 꼴랄또 가문의 문장 꼴랄또 가문과 관련한 최초의 기록은 958년 10월 25일에 람발두스 1세(Rambaldus I)가 이딸리아(Italia)의 렉스(Rex)였던 베렌가리우스 2세(Berengarius II)에게서 로바디나(Lovadina)를 봉토(Feudum)으로서 하사받았던 기록이다. 로바디나 꼴랄또 가문은 1312년에 람발도 8세(Rambaldo VIII)가 로므(Rome)의 케이서(Keiser)였던 헤임리히 7세(Heimrich VII)로부터 가문의 중심 거소였던 까스뗄로 디 산 살바또레(Castello di San Salvatore)가 소재한 수세가나(Susegana)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승인받으면서 지역의 주권을 보장받고 독자적인 법률들을 제정해서 통치하게되었다. 꼴랄또 가문이 수세가나에 기반을 형성할 당시 신분은 백

나폴레옹은 귀족 가문의 자제인가? [내부링크]

부오나빠르떼(Buonaparte) 가문과 관련한 기록을 보면 1616년에 부오나빠르떼 가문에서 아얏츄(Aiacciu)의 꼰실리오 델리 안치아니(Consiglio degli Anziani)의 안치아노(Anziano)를 배출했었다. 여기서 "꼰실리오 델리 안치아니" 는 원로원을 의미하고, "안치아노" 는 원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아얏츄 지역의 원로원의 원로를 배출했던 것이었다. 이 인물의 이름은 프란체스꾸(Francescu)로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8015953)에서 언급했던 인물인 가브리엘루(Gabriello)의 손자이다. 가브리엘루의 아들이자 프란체스꾸의 부친이었던 디롤무(Ghjirolmu)는 노빌리 안치아니(Nobili Anziani)의 쁘로꾸라또레(Procuratore)로 활동했는데, "노빌리 안치아니" 는 귀족 원로회를 의미하고, "쁘로꾸라또레" 는 검사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프란체스꾸의 부친은 귀족 원로회 소속 검

조카와 숙부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8015953)에서 언급했던 조약을 이끌어내었던 전투와 관련해서 설명하겠다. 1557년에 생-깡땡(Saint-Kintin)에서 프랑스(France), 에스빠냐(Espanna), 사보이아(Savoia) 간의 전투가 발발했다. 프랑스 측의 지휘관은 느베르(Nevers)의 뒤끄(Duc)였던 루이 4세(Louis IV)였고, 에스빠냐 측의 지휘관은 꼰도띠에로(Condottiero)였던 페랑떼 궁차가(Ferrante Gonzaga)였으며, 사보이아 측의 지휘관은 사보이아의 두까(Duca)였던 에마누엘레 필리베르또(Emanuele Filiberto)였다. 느베르의 뒤끄 루이 4세 페랑떼 궁차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또 프랑스의 수도였던 빠리(Paris)에서 생-캉땡까지의 거리는 현대 기준으로 171km, 에스빠냐의 수도였던 똘레도(Toledo)에서 생-깡땡까지의 거리는 현대 기준으로 1,502km, 사보이아의 수도였

나폴레옹의 선조가 아작시오로 이주했던 이유는?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38129373)에서 언급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의 선조의 이주의 특별한 사실과 관련해서 설명하겠다. 나뽈레옹의 선조였던 가브리엘루(Gabriello)는 1567년에 사르장-아(Sarzann-a)에서 꼬르시까(Corsica)의 아얏츄(Aiacciu)로 이주해왔다. 지난 주제에서 언급했듯이 사르장-아와 꼬르시까는 제나(Zêna)에 소재한 방꾸(Banco)인 방꾸 데 상 조르주(Banco de San Zòrzo)가 소유했던 지역이었다. 당시 제나의 뒤제(Duxe)는 우따비우 젱띠 우데리구(Ottavio Gentî Oderigo)였다. 그리고 그의 재임 기간 중에 프랑스(France)의 루에(Roy)인 샤를 9세(Charles IX)의 모후였던 까트링느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edicis)가 고용했던 꼬르시까인(Corsi) 출신 꼰도띠에로(Condottiero)였던 삼삐에루 디 바스뗄리까

교황과 황제의 대립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3406998)에서 언급했던 또 하나의 대립과 관련해서 설명하겠다. 1237년 11월 27일 꼬르-뇌아(Cor-nöa)에서 신성 로므 제국(Heilic Romisch Riche)과 룽바르디아 동맹(Liga Lombarda) 간의 전투가 발발했다. 이 전투는 2차 벨프(Welf)-비벨링언(Wibellingen) 전쟁 중에 발생한 전투였다. 신성 로므 측의 지휘관은 로므(Rome)의 황제(Keiser)였던 브리드리히 2세(Vriderich II)였고, 룽바르디아 동맹 측의 지휘관은 밀랑(Milan)의 뿌데스따(Podestà)였던 삐에뜨루 띠에뿔루(Pietro Tiepolo)였다. 신성 로므의 수도는 빨레르무(Palermu)였는데 빨레르무에서 꼬르-뇌아까지의 거리는 현대 기준으로 1,486km인데, 서울에서 타이페이까지의 거리가 약 1,500km이다. 반면, 밀랑에서 꼬르-뇌아까지의 거리는 현대 기준으로 6

교황의 패배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4180909)에서 언급했던 전쟁과 관련해서 논하겠다. 이 전쟁은 1228년부터 1230년까지 2년간 진행되었던 전쟁이었다. 이 전쟁이 바로 시실리아(Sicilia)와 교회령(Status Ecclesiasticus)간의 전쟁이었던 끌라웨싱나띠(Clavesignati)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교황(Papa)이었던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억지로 끄루끼아따(Cruciata)에 참전으로 로므(Rome)의 황제(Keiser)이자 시실리아의 왕(Re)이었던 브리드리히 2세(Vriderich II)가 부재한 상황에서 발발했던 전쟁이었다. 즉 교황과 황제 간의 전쟁이었다. 브리드리히 2세 그레고리우스 9세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3406998)에서 언급했듯이 그레고리우스는 브리드리히가 약조를 위반했던 것을 근거로 그를 파문(Exco

장인과 사위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5148892)에서 언급했던 로므(Rome)의 황제(Keiser)였던 브리드리히 2세(Vriderich II)의 장인이었던 즈앙(Jehan)과 관련해서 설명하겠다. 브리드리히 2세 즈앙 즈앙에겐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바로 브리드리히과 혼인했던 이자벨르 2세(Isabelle II)였다. 사실 즈앙은 자신의 딸인 이자벨르가 브리드리히와 혼인하기 이전에 자신의 딸인 이자벨르와 함께 공동 군주(Monarcha)였다. 그러니까 그는 즈뤼살람(Jherusalem)의 왕(Roi)이었고, 딸인 이자벨르는 여왕(Royne)이었다. 이렇게 공동 군주 체제로 국가가 운영되었던 이유는 차스뗄둔(Chasteldun) 가문 중심의 모계 상속과 관련이 있었다. 이자벨르 2세 이런 모계 상속의 기원은 전임 왕(Roi)이었던 발두인 4세(Baudouin IV)가 질환으로 통치하기 어렵게 되자, 발두인 5세(Baudouin V)가

술탄이 예루살렘을 양도했던 이유는?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3406998)에서 언급했듯이 1229년에 야파(يَافَا)에서 로므(Rome)의 황제(Keiser)였던 브리드리히 2세(Vriderich II)와 아유비윤(أيوبيون)의 술탄(سلطان)인 알-카밀(الكامل) 간의 협정으로 아유비윤이 즈뤼살람(Jherusalem)을 양도했다. 이번 주제에서는 어떤 이유에서 알-카밀이 이렇게 간단히 즈뤼살람을 양도했는와 관련해서 논하겠다. 브리드리히 2세 1227년부터 1229년까지 진행되었다 6차 끄루끼아따(Cruciata) 당시 알-카밀은 예루샬라임(יְרוּשָׁלַיִם)과 나불루스(نابلس)를 획득하기 위해 디마슈크(دِمَشق)의 아미르(أمير)였던 안-나시르 다우드(الناصر داود)와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안-나시르의 부친은 알-무아잠 이사(المعظم عيسى)였는데, 이 인물은 알-카밀의 동생이었다. 그러니까 알-카밀은 자신의 조카

교황이 황제를 파문했던 이유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2900149)에서 언급했던 황제(Keiser)와 교황(Papa)과 관련해서 설명하겠다. 1227년 로므(Rome)의 황제였던 브리드리히 2세(Vriderich II)가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게 파문(Excommunicatio)을 당했다. 이유는 6차 끄루끼아따(Cruciata)와 관련이 있었다. 브리드리히 2세 그레고리우스 9세 당시 브리드리히는 그레고리우스의 요구에 의해 마지못해 파병을 결정해서 1227년 8월에 브린니시(Brìnnisi)에서 출정을 하려 했는데 출병으로 인해 참전했던 그가 지휘했던 부대의 내에서 에피데믹(Epidemic)이 창궐해서 그와 같이 참전했던 뒤트슈 기사단(Diutsch Orden)의 총장(Hochmeister)이었던 헤르만 폰 살사(Herman von Salza)의 권유에 따라 출정을 하지 않았다. 6차 끄루끼아따가 개시되기 1년 전인 1

부오나파르테 가문의 시조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의 부계쪽 가문인 부오나빠르떼(Buonaparte) 가문의 시조는 1122년 당시에 스바븐(Swaben)의 공작(Herzog)인 브리드리히 2세(Vriderich II)의 심복(Scherge)으로 활동했던 뚜스끼아(Tuscia) 출신의 우고(Ugo)였다. 즉 우고는 공작의 심복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우고는 로므(Rome)의 황제(Keiser)의 충실한 지지자였으며 벨프(Welf)과 비벨링언(Wibellingen)의 전쟁에도 참전했었던 인물이었다. 즉 우고는 황제를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우고는 플로렌띠아(Florentia)에서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한 이후 생애의 말년을 항구 도시인 세르기아나(Sergiana)에서 보냈다. 부오나빠르떼 가문의 문장 우고가 플로렌띠아에서 경험했던 권력 투쟁은 1125년에서 1186년간의 전쟁인 1차 벨프-비벨링언 전쟁과 관련이 있다. 당시 플로렌띠아 내부에선 친 벨프파와 친 비벨링언파가 존재했으며, 우고는 친 비벨링언 파 인사

지도 교사와 황자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42774795)에서 언급했던 황제(Keiser)와 관련해서 설명하겠다. 교황(Papa)이었던 호노리우스 3세(Honorius III)는 황제였던 브리드리히 2세(Vriderich II)의 지도 교사(Hauslehrer)였다. 호노리우스는 1197년부터 브리드리히 2세의 지도 교사가 되었는데, 당시 브리드리히의 나이 만3세였다. 그러니까 훗날 교황이 되는 호노리우스가 훗날 로므(Rome)의 황제로 즉위해서 2차 벨프(Welf)-비벨링언(Wibellingen) 전쟁에서 비벨링언의 지휘관으로서 교황과 대립했던 브리드리히 2세를 교육했던 것이었다. 브리드리히 2세는 전임 황제였던 헤임리히 6세(Heimrich VI)의 아들이었는데, 헤임리히 6세는 1차 벨프-비벨링언 전쟁에 참전해서 교황과 대립했던 황제였던 브리드리히 1세의 아들이었다. 그러니까 교황과 대립했던 황제의 손자가 브리드리히 2세였다. 브리드리히

나폴레옹의 선조는 로마 황제? [내부링크]

어떤 이들은 나뽈레옹(Napoléon)을 로미(Ῥώμη) 제국(Βασιλεία)의 꼼니니(Κομνηνοί)와 빨라이올로기(Παλαιολόγοι), 그리고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의 율리우스 가문(Domvs Ivlio)을 나뽈레옹의 선조로 주장한다. 나뽈레옹 우선 콤니니의 혈통이라는 주장은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35702769)에서 언급했던 꼰스딴띠노스 스떼파노뿔로스(Κωνσταντινίδης Στεφανόπουλος)라는 인물과 관련이 있다. 이 인물의 성씨는 꼼니노스(Κομνηνός)였는데, 그러니까 이 인물의 가문은 꼼니니의 혈족이었다. 그리고 빨라이올로기의 개창자였던 미하일(Μιχαὴλ) 8세는 마께도니아(Μακεδονία)의 쁘라이또르(πραίτωρ)였던 안드로니꼬스(Ἀνδρόνικος)의 아들이었는데, 그의 부친의 모친, 그러니까 그의 조모는 이리니 꼼니니(Εἰρήνη Κομνηνή)라는 여성이었다

나폴레옹의 선조는 철가면의 사내? [내부링크]

어떤 이들은 나뽈레옹(Napoléon)의 선조가 바스띠유(Bastille)에 수감된 “옴므 오 마스끄 드 페흐(Homme au Masque de Fer)”라고 주장한다. "옴므 오 마스끄 드 페흐"란 "철가면의 사내"를 의미한다. 철가면의 사내는 볼떼흐(Voltaire)라는 가명(Pseudonyme)을 사용하는 프항수아-마히 아후에(François-Marie Arouet)가 자신의 작품인 케시옹 쉬흐 랑시끌로뻬디(Questions sur l'Encyclopédie)에서 언급했던 인물로, 그는 해당 작품에서 이 인물을 프항스(France)의 헨(Reine)이었던 안 도'뜨히슈(Anne d'Autriche)와 쁘항시빨 미니스뜨흐 데따(Principal Ministre d'État)였던 쥘 마자항(Jules Mazarin) 사이에서 출생한 사생아(Illégitime)로 기록했다. 볼떼흐(프항수아-마히 아후에) 안 도'뜨히슈 쥘 마자항 여기서 안 도'뜨히슈라는 여성은 루이 14세(Louis

나폴레옹은 태아였을 때도 전사? [내부링크]

꼬르시까(Corsica)에서 출생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의 추종자들은 나뽈레옹이 자신의 모친이었던 레띠치아(Letizia)의 태내에 있을 당시부터 게히에(Guerrier), 그러니까 전사였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이런 주장의 근거는 만삭이었던 레띠치아가 전투가 종료된 이후 퇴각하는 리뿌블리까(Ripublica)의 에제르치또(Esercito)와 함께 관목지대(Macchia)를 빠져나오자마자 나뽈레옹이 출생했기에 나뽈레옹이 전사였다는 주장이다. 그들의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긴 하나 사실이다. 나뽈레옹은 1769년 8월 15일에 아얏츄(Aiacciu)에서 출생했는데, 출생 이전에 모친인 레띠치아는 자신의 남편 그러니까 부친인 까를루(Carlu)와 함께 1769년 5월 8일에 뽄떼 노부(Ponte Novu)에서 발발했던 리뿌블리까의 에제르치또와 프항스(France)의 아흐메(Armée) 간의 전투의 현장에서 프항스의 승리로 종결되는 9일까지 1일간 동행했다. 그러니까 전투 당시 레띠

나폴레옹은 쌍생아였는가? [내부링크]

꼬르시까(Corsica)에서 출생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을 잘 알았던데다 그의 치세 당시 외교관(Diplomate)으로 근무하기도 했던 프항스(France)의 작가(Écrivain)였던 프항수아-흐네 드 샤또브히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은 1768년 2월 5일이야 말로 나뽈레옹의 진짜 생일이라고 주장했다. 프항수아-흐네 드 샤또브히앙 나뽈레옹은 공식적으로는 1769년 8월 15일에 아얏츄(Aiacciu)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샤또브히앙의 주장대로 그 일자가 진짜 출생일이라면 모순이 생긴다. 그 이유는 나뽈레옹의 형인 듀제뻬(Ghjuseppe)의 출생일이 1768년 1월 7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뽈레옹이 출생한지 한 달 뒤에 출생했다는 것이 되는데 이는 엄청난 모순이다. 이 기록대로라면 두 형제가 모친인 레띠치아(Letizia)의 태내에 있었을 당시엔 쌍생아였는데, 형인 듀제뻬가 먼저 출생하고 태내에 있던 나뽈레옹이 한

콘도티에로의 후손이었던 두 부부 [내부링크]

1764년 6월 2일 우니베르시따 디 삐사(Università di Pisa)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열여덟 살 학생(Studente)이었던 아얏츄(Aiacciu) 출신의 까를루(Carlu)는 동향 사람인 열네 살 소녀 마리아 레띠치아 라몰리노(Maria Letizia Ramolino)와 혼인했다. 그러니까 현대의 대한민국 기준이긴 하지만 이제 막 성인(Adultus)이 되었던 만18세의 나이에 대학교에서 재학중인 대학생과 만14세 중학교 2학년생 간의 혼인이었다. 이 두 어린 부부의 가문은 모두 제나(Zêna)에 고용되었던 꼰도띠에로(Condottiero)의 후손이었고, 두 남녀의 가문 모두 16세기 초에 꼬르시까(Corsica)에 정착했던 가문들이었다.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38129373)에서 언급했듯이, 1510년에 사르장-아(Sarzann-a)에서 아얏츄로 이주해온 까를루의 선조인 프랑세스꾸(Françesco)는 꼰도띠

나폴레옹의 선조는 잉글랜드의 왕?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의 선조를 잉글랜드(England)의 킹(King)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무슨 근거로 했던 주장인지는 불명확하지만, 아마도 이는 브리티쉬(British)들이 나뽈레옹을 보니(Boney)라고 지칭했던 별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Boney" 는 "깡마르다" 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인데, 나뽈레옹의 보나빠흐뜨(Bonparte)라는 성씨(Nom de Famille)를 통해 브리티쉬들이 조롱할 목적으로 그런식으로 별명을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별명과 비슷한 별명을 가진 잉글랜드의 킹의 후손이 있었는데, 이 인물은 셰머시흐(Seumasaich)의 타커러흐(Tagarach)였던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Charles Edward Stuart)이다. 그의 별명은 알라퍼(Alba)의 방언이었던 보니(Bonnie)였는데, "Bonnie" 는 "잘생기다" 라는 의미를 가진 형용사였다. 그러니까 나뽈레옹의 별명이었던 "Boney"와 타커러흐인 찰스 에드워드의

나폴레옹의 선조는 유대인? [내부링크]

브리튼(Britian)의 프라임 미니스터(Prime Minister)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mn Disraeli)는 케나안(cccc)계 민족들이 꼬르시까(Corsica)에서 거주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꼬르시까에서 출생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을 예후딤(יְהוּדִים), 즉 유대인이라고 주장했다. 벤저민 디즈레일리 꼬르시까는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35986775)에서 언급했다시피 케나안계 민족인 폰님(cccc), 그러니까 카르타고인에게 통치되었던 역사가 있었었다. 유대인의 선조인 이브림(עִבְרִים), 그러니까 히브리인 역시 카르타고인처럼 케나안계 민족이었다. 그러니까 나뽈레옹이 카르타고인의 후손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어야만 나뽈레옹이 유대인과 비슷한 혈통일 수 있게되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감안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 주장을 했던 인물인 디즈레일리는 본인이 유대인이다. 그리고 이

나폴레옹의 선조는 아랍인? [내부링크]

어떤 이들은 꼬르시까(Corsica)에서 출생했던 나뽈레옹(Napoléon)을 그가 오히앙딸리슴(Orientalisme) 성향을 가졌던 것과 꼬르시까가 806년부터 1015년의 기간 동안 아랍(عَرَب)의 침공을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나뽈레옹의 선조가 아랍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들은 나뽈레옹이 성년이 된 후 과도하게 미신(Superstitio)에 의지했었던 행적, 유령(Spiritus), 운명(Fatum), 점성술(Astrología) 같은 것들을 믿었던 행적, 크리스띠아니따스(Christianitas)보다 이슬람(الإسلام)에게 더 호의적이었던 행적을 근거로 그의 선조가 아랍이라고 주장했다. 나뽈레옹 우선 나뽈레옹이 오히앙딸리슴 성향을 가졌던 것을 근거로 아랍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주장이다. 유럽인이 한국 문화를 좋아하는 성항이 있으면 한국인의 후예인가? 한국인이 유럽 문화를 좋아하는 성향이 있으면 유럽인의 후예인가? 두 번째, 꼬르시까가 8

나폴레옹의 선조는 콘도티에로? [내부링크]

프항스(France)의 역사가(Historien)이자 철학자(Philosophe)였던 이뽈리뜨 아돌프 뗀(Hippolyte Adolphe Taine)은 나뽈레옹(Napoléon)을 꼰도띠에로(Codottiero)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뗀의 그러한 주장은 사실이다. 나뽈레옹의 선조였던 프랑세스꾸(Françesco)는 1510년에 꼬르시까의 아얏츄(Aiacciu)로 이주해왔다. 프랑세스꾸는 아얏츄로 이주해오기 이전에 사르장-아(Sarzann-a)라는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가브리엘루(Gabriello)의 대인 1567년에 가문이 완전히 확실하게 꼬르시까에 정착한 가문이 된다. 당시 사르장-아는 방꾸 데 상 조르주(Banco de San Zòrzo)라는 제나(Zêna)가 설립했던 방꾸(Banco)가 소유한 지역이었다. 이 방꾸는 제나에 소재해 있었다. 부오나빠르떼(Buonaparte) 가문의 문장 방꾸 데 산 조르주가 프랑세스꾸와 그의 아들인 가브리엘루가 거주했던

한니발과 집정관 플라쿠스 [내부링크]

이번 주제에서는 지난 주제에서 언급했던 어느 꼰술(Consvl) 그러니까 어느 집정관과 한니발의 관계와 관련해서 논하겠다. 이 집정관은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36496060)에서 언급했는데, 이 집정관의 임기 당시였던 기원전 237년에 카르트 하다쉬트(ccc cccc)가 굴욕적으로 코르심(ccccc)과 사르돈(cccc)의 통치권을 로마(Roma)에게 양도하면서 꼬르시까와 사르디냐는 로마의 쁘로윙끼아(Provincia)가 되었다. 이 지역들이 현대의 꼬르시까(Corsica)와 사르디냐(Sardigna)이다. 이 집정관이었던 인물이 바로 뀐뚜스 풀위우스 플라꾸스(Qvintvs Fvlvivs Flaccvs)이다. 이 인물의 부친이었던 마르꾸스 풀위우스 플라꾸스(Marcvs Fvlvivs Flaccvs) 역시 아들처럼 집정관을 역임했었는데, 부친의 경우 한 번, 그리고 아들의 경우 4번이나 역임하였었다. 한니발 바라크(ccccccc

나폴레옹의 선조는 브르타뉴인? [내부링크]

어떤 이들은 나뽈레옹(Napoléon)을 브레토네트(Bretoned), 즉 브르타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나뽈레옹의 모친의 행적을 근거로하는 주장인데, 적어도 나뽈레옹의 경우 해당되지 않는다. 앞으로 논하게될 내용에서 언급되겠지만, 나뽈레옹의 모친 레띠치아(Letizia)는 브르타뉴인(브레토네트) 출신 남성과 불륜(Adulterium) 관계를 가졌었다. 이 인물이 샤흘 루이 드 마흐뵈프(Charles Louis de Marbeuf)이다. 레띠치아 샤흘 루이 드 마흐뵈프 나뽈레옹의 모친 레띠치아가 나뽈레옹을 임신했을 당시는 1768년에서 1769년 사이인데, 나뽈레옹의 친부라고 주장되는 마흐뵈프는 당시 프항스(France)가 꼬르시까에서 꽁께뜨(Conquête), 그러니까 정복 활동을 할 당시 군을 지휘하고 있었고, 레띠치아는 꼬르시까에서 정복 활동을 진행중이던 프항스에 저항했던 자신의 남편이었던 까를루(Carlu)와 동행하였었다. 그러니까 마흐프가 나뽈레옹의 친부가 되려면

코르시카는 왜 로마의 속주가 되었는가? [내부링크]

지난 주제(https://blog.naver.com/mtglong2023/223235986775)에서 언급했다시피 코르심(ccccc)과 사르돈(cccc)은 로마(Roma)의 쁘로윙끼아(Provincia), 즉 속주가 되었다. 코르심은 현대의 꼬르시까(Corsica), 사르돈은 현대의 사르디냐(Sardigna)이다. 이번 주제에서는 어떻게 이 두 지역이 로마의 속주가 되었는지 설명하겠다. 이 두 지역이 로마의 속주가 되게 했던 전쟁은 기원전 241년에서 238년까지 3년간 진행되었던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자는 카르트 하다쉬트(ccc cccc)였는데, 지난 주제에서 언급했듯이 수혜자는 카르트 하다쉬트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혜자가 패배자 역시 아니었다. 수혜자는 제3자였던 로마였다. 그리고 로마는 이 전쟁에 개입하지도 않았다. 이 전쟁에서 당사자는 지난 주제에서 언급했듯이 카르트 하다쉬트와 1차 뿌니꾸스(Pvnicvs) 전쟁 당시 카르트 하다쉬트가 고용했던 리비(ccc) 출신의 용

나폴레옹의 선조는 카르타고인?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은 꼬르시까(Corsica)의 아얏츄(Aiacciu)에서 출생했다. 어떤 이들은 꼬르시까에서 태어난 나뽈레옹을 꼬르시(Corsi), 그러니까 꼬르시까인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데, 이렇게 인정하지 않는 이들 중에 나뽈레옹을 폰님(cccc), 즉 카르타고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 주장은 과거 콰르트 하다쉬트(ccc cccc)가 꼬르시까를 지배했던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제기한 주장이다. 콰르트 하다쉬트와 꼬르시까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콰르트 하다쉬트가 꼬르시까를 통치하게된 시점은 기원전 540년에서 535년까지 5년간 진행되었던 알라리에(Ἀλαλίη) 전투 이후이다. 당시 콰르트 하다쉬트의 밀크(ccc)는 마곤(ccc)이었는데, 이 마곤이라는 밀크는 마곤 왕조의 개창자였다. 해당 전투에서 콰르트 하다쉬트는 포까이아(Φώκαια)였던 알라리에를 상대로 패배하는 대신 꼬르시까의 동부 지역을 획득하게 되었다. 당시 꼬르시까 지역은 카르

나폴레옹의 선조는 그리스인? [내부링크]

나뽈레옹(Napoléon)은 1769년 8월 15일에 꼬르시까(Corsica)의 아얏츄(Aiacciu)에서 출생했다. 어떤 이들은 꼬르시까에서 출생했던 나뽈레옹을 꼬르시(Corsi), 그러니까 꼬르시까인으로 인정하지 않기도 하는데, 이런 이들 중에 나뽈레옹을 엘리네스(Έλληνες), 즉 그리스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아얏츄 여기서 그리스인의 후손이라는 주장은 1676년에 꼰스딴디노스 스떼파노뿔로스 꼼니노스(Κωνσταντῖνος Στεφανόπουλος Κομνηνός)라는 꼬르시까로 이주해온 그리스인의 후손인 깔로메로스(Καλόμερος)가 나뽈레옹의 부친인 까를루(Carlu)와 동일인이기에, 까를루의 아들인 나뽈레옹은 그리스인 혈통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1676년 이전인 1510년에 부오나빠르떼(Buonaparte) 가문의 사람 중에 프랑세스꾸(Françesco)라는 선조의 사르장-아(Sarzànn-a)에서 꼬르시까로의 이주를 시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