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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는 끝났을까? [내부링크]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오전 08:46~10:03 사이에 민간항공기 4편이 납치되었다. 아메리카 항공의 11편과 77편은 뉴욕의 "제1세계무역센터" 90층 위치와 "제2세계무역센터" 80층 위치에 충돌하고, 유나이티드 항공의 175편은 "버지니아주 펜타곤" 서쪽과 충돌하게 되고, 유나이티드 항공의 93편은 승객들의 저항으로 "펜실베이니아주 섕크스빌" 인근 들판에 추락하게 된다. 학교 수업참관 중 테러를 보고 받는 부시 대통령의 모습 (2001년 9월 11일 09:04) 결국, 이 테러로 테러범을 포함하여 2,996명의 사망자와 최소 6,0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5000명의 분진 피해자까지 포함하면, 14,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여기서 필자는 이 테러의 설계는 누구의 머리에서, 어떤 동기로 만들어졌는지를 알고 싶었다. 더불어, 이러한 설계에 의해 실제로 움직인 젊은 테러범들이 누군지도 알고 싶었다. 주로, 개인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어 논하고자 한다. 시간을 역순으

비파형 동검의 용도는? [내부링크]

비파형동검은 우리에겐 매우 익숙할 것으로 판단된다. 보통 초기 "고조선의 청동검"으로서 "비파형 동검" 외에도 "요령식 동검" 혹은 "만주식 동검"으로도 부르고 있으며, 학창시절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우리의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다. 하지만, 이러한 익숙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유물에 대해서 아는게 많지가 않으며, 그러다 보니, 의문도 많은게 사실이다. 정말 전투용 무기로 사용했나? 아니면, 의식 및 제례용 인지? 또한, 왜 자루와 검을 함께 주조하지 않고, 굳이 분리하여 제작하고 조립형으로 만들었는지? 주변에 다른 지역은 모두 일체형인데.... 다소, 약해 보이는 슴베(자루와 날을 결합하는 부분=경부)와 비파모양의 구배 형상으로 인하여, 찌르는 살상용도에 비해, 칼날로 베는 역할에는 부적합하게 보이는 의문에 명확한 답을 찾기가 곤란한 것도 사실이다. 결국, 이 동검이 전쟁에 적합한가?인데.... 구조적으로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구리(동)의 녹는점

포석정에 숨은, 신라 몰락의 비밀을 밝히다. [내부링크]

신라의 포석정(鮑石亭)은 통일신라(남북국시대)의 몰락에 마지막을 장식한 곳이다. 후배제의 침략으로 포성정에 있던 박씨인 경애왕은 견훤에게 끌려나와 자결하게 되고, 결국, 견훤왕에 의해, 김씨인 경순왕이 왕을 이어받게 된다. 이런, 비극의 장소인 포석정(鮑石亭)은 화랑세기 필사본에서 포석사(鮑石祠)라고 표현했던 것과, 주변에 발굴된 다량의 유물로 보면, 포석정과 포석사는 나라의 안녕과 선대왕에게 제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로 보여지며, 그 규모도 매우 컷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포석정(鮑石亭)의 용도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기 위한 용도이다. 유상곡수연은 4세기 위진남북조시대의 서예가 왕희지에서 비롯됐다.물이 흐르는 수로의 첫 부분에 술이 담긴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수로를 타고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는 구조인데, 수로를 기가 막히게 설계하여 술잔이 떠내려가는 중에도 기울어지거나 부딪히지 않았다 한다. 술잔이 떠내려가는 동안 시를 짓고 만약 못 지으면 벌주 3잔을 마시는 식으로 노는

칠지도(七支刀)의 정의, 의미, 상징, 활용을 밝히다. [내부링크]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전해지는 "백제산 철제 검"이다.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 고대사를 바라보는 한일 간의 시각차가 드러나는 유물 중 하나로, 백제가 야마토국에 하사(下賜)한 검인지, 아닌지를 놓고, 논쟁이 있었다. 칠지도(七支刀) 우선, 하사(下賜)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 사실을 쉽고, 간략히 공유하며, 더 나아가, 알려지지 않은 진실과 칠지도의 형상(7갈래 가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것을 당시 야마토국(왜)이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기록하고자 한다. 1. 두 나라의 상반된 시각 두가지 기록의 상반된 의견을 먼저 보자. 1.1) 칠지도에 새겨진 문구 〈앞면〉 泰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銕七支刀出(生)辟百兵宜供供侯王祥(作) 해석 : 태 4년 5월 16일은 병오인데, 이 날 한낮에 백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다. 이 칼은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으니, 제후국의 왕에게 나누어 줄만하다. 가 만들었다. 〈뒷면〉 先世以來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 히믈러)가 악마가 되는 과정. [내부링크]

하인리히 루이트폴트 힘러(Heinrich Luitpold Himmler / 히믈러 / 1900년 10월 7일 ~ 1945년 5월 23일)는 "독일 나치당의 친위대" 국가지도자로서 "친위대와 비밀경찰"을 지휘했다.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의 실무를 주도한 최고 책임자였으며, "나치 강제수용소"와 학살대인 "특수작전집단"을 창설한 사람이며, 사람들을 대규모로 학살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독일 패망후, 연합군에 의해 주요 전범으로 체포되고, 전범 재판전에 스스로 자살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 히믈러)가 악마가 되는 과정이 알고 싶었다. 그 누가 처음부터 악마가 되었겠나? 개인적인 원인, 욕망이 있을 것으로 믿고, 그게 무엇인지 찾고자 한다. 그는 왜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에 적극 앞장 섰을까? 이러한 의문점을 가지고, 필자의 새로운 시각으로 그가 악마가 되는 과정을 보고자했다. 1. 극우주의자로 시작하여, 목표를 세우다. 하인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은 단지, 잠을 자고 싶었을 뿐이다. [내부링크]

20세기 "King of Pop(팝의 황제)" 마이클잭슨이 2009년 6월 25일 14시 26분에 향년 50세로 사망하게 된다. 그는 사는 동안 행복했을까? 불행했다면, 무엇이 그를 괴롭혔을까? 여기에 대한 답을 줄 수 있는, 하나의 단서가 유언장에 나오는데.... 그가 사망한후, 2009년 7월 미국 LA지방법원에 2002년 ‘팝 황제’ 마이클 잭슨이 작성한 유언장이 제출됐다. 유언장에 의해 재산 분할은 어머니 캐서린(40%)과 세 자녀(40%), 자선 기관(20%)에 남긴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조 잭슨(조지프 잭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오... 아주 의미심장한 유언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성공에 제일 큰영향을 주었고, 아버지이며, 가족인 "조잭슨(조지프 잭슨 : Joseph Walter Joe Jackson, 1928년 7월 26일 ~ 2018년 6월 27일)"이 유언장에 언급 조차없었다는 것은, 유언장을 쓰던 당시 불혹의 나이인 40세인 것을 감안한다면, 그가

"홍길동" 저자 "허균"의 이중성에 대해 밝히다. [내부링크]

"홍길동전" 저자 "허균"은 역모를 꾀하다가, 능지처참으로 처형된다. 현재 많은 평론가들은 "홍길동"의 저자인 "허균"을 혁신의 인물로, 조선의 아웃사이더로서 이단아로서, 관습과 사상의 틀을 싫어하고, 당시에는 혁신적이고, 개혁의 아이콘으로 칭송하는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엔, 인물의 "이중성(二重性)"이 매우 강하게 느껴지며, 고로, 과대평가된 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평소때 저술한 책(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홍길동전(洪吉童傳))을 통해 "호민론(豪民論), 유재론(遺才論), 평등사상"을 주장한 것을 보면, 그는 진정 당시 사회부조리에 분노하고, 혁신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중간 중간 스스로 권력을 탐하고, 독점하고자 하며, 매우 정치적인 인물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정이다보니, 필자는 누이 "허난설헌"의 시집인 "난설헌집"에 대한 표절논란과 "홍길동전"의 저자에 대한 의심도 든다. 누이가 사망한 후, "허균"이 누이의 시를 기억하며, "난설헌집"을 정리

"괴벨스"는 왜 "히틀러"에게 충성했는가? [내부링크]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에 부과된 과중한 배상금과 1923년 독일 마르크의 극심한 인플레이션, 그 기간에 발생한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 경제의 안정성이 심각하게 악화되면서, 중산층이 몰락하고, 실업자가 대량으로 양산되게 된다. 이러한 경제적 혼란은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켜 허약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고, 독일의 재무장과 명예회복에 대한 대중들의 갈망이 나치당과 히틀러를 탄생시키게 되는데, 거기서, 소수 지방 정당인 "나치당"을 반석위에 올려놓은 인재가 있는데, 그가 바로 "괴벨스"이다. 그런데, 괴벨스는 어떤 분노가 있었고, 히틀러에게 어떤 비젼을 봤길래, 함께 의기투합했는가를 알고 싶었다. 그에대해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뻔한 이야기 빼고, 필자는 핵심만 언급하고자 한다. 자.. 먼저, 그나마 정상적일 때 모습부터 보자. 1. 23세, 순수한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로 출발하다. 아래의 편지는 1920년, 23세인 "괴벨스"가 연인 "안카 슈탈헤름"에게 쓴 편

동굴("리오핀투라스")에 남긴 "손모양" 그림의 의미와 상징 [내부링크]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유물 중, "리오핀투라스" 암각화는 "손바닥, 손모양 그림"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리오핀투라스" 암각화는 아르헨티나("파타고니아"지역)의 "산타크루스주"에 소재한, "핀투라"강 근처 동굴에 있는 암각화를 말하며, 왜 유명한지 그 그림을 일단 먼저보자. 상기의 이미지를 보면 선사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왼손(대부분)을 바위에 붙이고, 안료를 뿌려, 손모양의 형상을 그린 흔적인데, 다양한 위치에 자유롭세 겹친 군집을 이루고 있다. 왜 그렸을까??..... 그냥, 우연히 "스텐실(도안 위에 물감을 발라, 문양을 그리는 방식)"로 손 모양을 찍어내 방식을 찾아낸 한 선사시대인이 재미로 마구 그렸다라고, 보면 간단하지만, 재미로 그렸다기엔, 오랜기간 너무 많은 사람들이(약1,000년동안 수백명) 그린 것을 보면, 그리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하여튼.....야~이거 대단한 적수가 나타났는데... 가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 가보자. 1.공식적인 기록부터 보자.

"히틀러"그림에서 보이는, 젊은 "히틀러" [내부링크]

20세기 인물 중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히틀러"라는 인물에 대해 또 다른 시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필자는 그가 10대 시절 그렸던 그림들을 분석하여,그의 인물상을 파악하고자 하는데. 색다른 분석으로서, 재밌을 것 같다. 먼저, 간단히 그의 유년시절의 삶을 간단하게 쫓아가보자. <아돌프 히틀러(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 그는 공무원이 되길 바랬던,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의 강요로 실업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히틀러가 14세때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공무원(세무서장) 생활에서 은퇴하고,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평소에 앓고 있던 지병이 악화되어 급사하게 된다. 이때 아버지가 평소에 그렇게 밉고 싫었어도 막상 죽었을 때만큼은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유산과 연금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엔 별 다른 타격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독학으로 화가의 꿈을 키우던 히틀러는 중등 과정까지는 이수(1904.9)했으나,

"안네프랑크(ANNE FRANK)"가족을 밀고한 그녀. [내부링크]

필자는 과거에 네델란드에 가서,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와 그의 가족들이 2년동안, 은신하던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나는 "안네"의 부모가 "아이들의 키"를 표시해 둔 벽지를 매우 인상적으로 봤으며, 부모로서 슬픈 감정이 밀려왔다. 그 흔적을 보며, "안네와 그의 가족"이 지금도 이 집에 사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 집에 시간은 그들이 체포된, 1944년 8월4일에 멈춰 있는것 같았고,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 가족들의 시간을 잠시 느낄 수 있었다. 그 흔적을 분석해 보면, "안네 프랑크"가 숨어 있던 2년 남짓한 기간 동안 13cm나 자랐고, 3살차이인 그녀의 언니 "마르고 프랑크"는 그곳에 있는 동안 키가 1cm 자랐다. 오토프랑크 (Otto Frank) 당시 가족의 은신처가 발각되어, 체포되는 과정의 기록을 보자. 프랑크 일가가 체포될 당시, 그 자리에 있던 SS 장교가 오토 프랑크에게 '이런 곳에서 숨어 살면서 당신들은 행복했었나?' 라는 질문을 했는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과 생존의 진실 [내부링크]

신라문화의 최대 전성기 시절이며, 불교의 최대 번성기 시절에 만들어진 불국사와 석굴암은 부정할 수 없는 우리나라 최고의 문화유산이며, 더 나아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인정받았다. 따라서, 수많은 학자와 관계자들이 오랜시간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대부분의 데이터는 쏟아져 나온 상태이다. 즉, 더이상 나올 것도 없으며, 나올건 다 나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일연스님의 "삼국유사"에서 기록된 "창건목적"이다. 필자가 보기엔, 너무 종교적이며, 비논리적인 주장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용감하게도. 건방지게도, 삼국유사를 일부 기록을 부정하고, 과학적으로 따질건 따져서,1,300년이 지난 이 시점에 논리적인 접근을 하고자 한다. 자.....뛰어가겠습니다... 1.신뢰할 수 없는 기록 공식적인,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 이유를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한번 보자... [‘삼국유사 권5 대성(大成)이 2세 부모에게 효

"신숙주"는 왜 "성삼문"과 함께 행동하지 않았나? [내부링크]

신숙주와 성삼문은 세종의 전폭적 지원 아래 집현전에서 ‘신흥강국 조선’의 꿈을 현실로 옮긴 당대 최고의 엘리트 학자였으며, 둘은15년동안 함께 했다. 그런데, 문종 사후,그들은 상반된 이념과 주장으로 서로 갈라서게 되는데,세조의 집권으로 가족보다 더 가깝던 두 사람의 우정과 의리는 사라지고, 결국, 신숙주는 "단종의 양위를 주도"하며, 새정권과 함께 부귀영화의 길로, 성삼문은 세조를 끝내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육신의 길"로 감으로서, 명백히 둘은 갈라선다. 기록만으로 본다면, 신숙주도 함께하여,"사육신"이 되거나, 반대로 성삼문도 함께 "세조의 적극 동조자"가 되거나해야 상식적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에, 필자는 오랜기간, 학자로서 동일한 목표로, 동일한 왕들을 모시며, 15년을 함께 학자로서, 죽마고우로서, 관계를 유지하던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길래, 이렇게 상반된 행동을 했을까?를 따져보고자 한다. 신숙주 틀림없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연이 신숙주에게 분명 있을

한 여인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내부링크]

연개소문이 죽고,2년만에 고구려는 멸망을 하게 된다. 대체로 그 원인은 "연개소문의 장남과 차남의 권력투쟁" 결과로 보이긴 하나, 필자가 보기엔,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과 차남 "연남건"의 갈등과 권력투쟁 속에는 "석연치 않는 의문점"이 있으며, 그 의문점에는 또 다른 진실이 있어, 그것을 필자가 밝히고, 그 내용을 공유하고자 한다. 슬..슬.. 가보자.. 연개소문 가계도 1."연남생"과 동생들의 권력투쟁 기록 연개소문의 장남은 "연남생"이며, 아버지 연개소문이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어 2대 대막리지가 되었으나, 그의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과 불화가 생겼고, 권력 투쟁을 벌이던 끝에 궁지에 몰리자,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의 멸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660년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키고, 661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평양으로 대군을 보냈다. "임아상"을 패강도행군, "글필하력"을 요동도행군, "소정방"을 평양도행군, "소사업"을

"삼국지연의 작가 나관중"은 "제갈량"이 되고 싶었다. [내부링크]

장편소설 "삼국지연의"는 원명은 "삼국지통속연의"이며, 오늘날까지도 동아시아 최고의 베스트셀러이며, 막말로......세계적으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알려져 있다. 필자도 너무나 재밌게 읽은 경험이 있고, 이 책의 저자인 "나관중"에 대해 궁금해 한 건, 오래된 이야기이지만,저자로 알려진 "나관중"에 대한 기록은 아주 미비하다. 이에, 필자가 나름대로 분석하여, 나관중이라는 인간에 접근하고자 하며,이 결과를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자....이 엄청난 소설을 인류에게 남기고 떠난 괴상하고, 비밀스럽고, 매력적인 저자를 한 인간으로서 접근하고자 한다. 일단, 나관중에 대한 알려져 있는 기록만으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전해지는 일화들을 봐선 북방출신, 그중에서도 "산시성 타이위안" 출신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의 생존 시기는 원나라 말기~명나라 초기 시대이며, 탄생년도는 불분명하며, 명나라가 1368년에 건국됐는데, 그로부터 32년 이후, 1400년에 사망한다. 친구이

울주의 반구대 암각화는 신석기인의 "인증샷" [내부링크]

울산광역시 울주군 대곡리에는 "반구대 암각화"가 있다.(반구대 : 기암절벽 이름) 필자가 고대 벽화를 연구하던 중, 이 암각화가 고유한 특성을 가진 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연대도 오래되었고, 의미도 있고, 특정 동물에 대한 표현이 특이해서, 유심히 보다보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는데,그 결과를 공유하고자 한다. 일단, 이 암각화가 무엇인지는 알아야, 필자의 주장을 이해가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이 문화재 대한 소개 글을 우선 밝히고 진행하고자 한다. (수많은 자료 중에 가장 간단, 명료하게 잘 정리한 자료라 판단된다.) 출처 : 울산역사문화재단 주제 : 육하원칙으로 풀어보는 반구대 암각화의 비밀 집필: 이상목 (ulsan.grandculture.net/Contents/Indexlocal=ulsan&dataType=01&contents_id=GC80002407)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곳은 어떤 곳일까? Where?] 국보 제285호로 지정된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蔚州大谷里

북한"김정은"은 왜 "장성택"을 제거했나? [내부링크]

2013년에 북한에서,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뉴스가 나오는데, 북한 역사상으로도, 손꼽힐 만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바로 2인자이며,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의 처형이다. 백두혈통에 속하는 인물을 공개처형한 것이었기 때문. 대한민국을 비롯한 동양권 국가에서는 '고모부마저도 잔혹하게 죽인 처조카의 패륜성'이 부각되며, 연일 전 세계뉴스의 지면을 덮었다. 왜 죽였나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소 분분하나, 일단, 김정일 사후, 고모부 장성택이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을 보좌했고, 그 과정에 장성택의 위세에 위협감을 느낀 김정은이 제거를 나섰다는 것만큼은 공통된 평가이긴 하다. 필자도 동의하며, 이 추측은 거의 맞을 것이다. 다만, 필자가 유심히 보는 표정이 있었는데, 아래의 사진이다. 당시 김정은 표정 -1- 2013.12.08 확대회의 "장성택"을 쳐다보는 굳은 표정 -2- 2013.12.17 "정성택" 처형 5일 후에서 굳은 표정 -3- 2017.2.15 김정남을 말레이시아에서 암살 2일 후,

소현세자, 세자빈 강씨의 죽음에 새로운 진실. [내부링크]

소현세자를 독살한 사람이 그의 아버지 인조라는 주장이 많다.하지만, 필자가 뜯어본 결과, 정황상 그럴 듯 해 보이지만,소현세자의 상태와 인조의 성격으로 보면, 방치는 있을지언정, 독살은 적극적으로 주도했다고, 보는건 무리로 판단된다. 오히려, 소현세자의 부인이며, 인조의 며느리인 강빈(훗날 민회빈 강씨)이 죽는 과정에서, 후세가 모르는 내용이 더 있다는 것을 필자는 발견하게 된다. 그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고, 공유하고자 한다. 일단, 소현세자 일가가 제거되는 일련의 과정을 간략히 보고, 필자의 주장을 설명하고자한다.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해 들어갔으나, 이듬해 정월 동생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을 비롯한 비빈종실(妃嬪宗室)들이 피난가 있던 강화도가 함락당한다. 1637년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에 설치한 수항단(受降壇)에서 청 태종에게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항복의 예를 올리며 항복한다. 1637년 4월 10일 소현세자는 자진해서

신라가 "진한(辰韓)"을 어떻게 병합했을까? [내부링크]

원삼국시대에 진한에서 신라(사로, 서라벌)가 어떻게 병합을 해갔는가?를 연구해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감춰진 인물을 발견하고, 뜻밖에도 역사책에 없는 진실을 알게 되었다. 신라를 당시에는 명칭이 사로(혹은 서라벌)로 불리었겠지만, 이해하기 쉽게 "신라"로 통일하여, 이야기를 풀겠다. 자...천천히 가보자.~ 1.점령 순서 No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소개 재위 1 우시산국 (于尸山國) 울산광역시 울주군 웅촌면, 경상남도 양산시 웅상 79년 병합 탈해 이사금(脫解) 2 음즙벌국 (音汁伐國)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102년 병합 파사 이사금(婆娑) 3 압독국 (押督國), 압량국 (押梁國) 경상북도 경산시 102년 병합 4 실직곡국 (悉直谷國), 실직국 (悉直國), 실직 (悉直) 강원도 삼척시 104년 병합 5 비지국 (比只國) (=불사국) 경상남도 창녕군 108년 병합 6 다벌국 (多伐國) 대구광역시 108년 병합 7 초팔국 (草八國) 경상남도 합천군 쌍책면, 초계면 사이 108년

지구의 "물"은 목성, 토성, 화성이 가져다 준 선물 [내부링크]

지구의 물이 어디서 왔는가를 항상 의구심을 가진지 오래다. 이에 이것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나름 연구하고, 고민해봤다. 나도 거기에 하나의 가설을 만들어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현재까지 지구의 물에 대한 가설은 총 2가지로 그룹지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 지구의 암석 기원 지구 형성 초기에 무수한 화산 폭발을 통해 지구 암석 속에 있던 물이 빠져 나왔고, 이것이 증발해 수증기가 됐다. 그리고 대기 중에 수증기가 포화되면서 비가 되어 지표면에 내렸다는 이론이다. 2) 우주에서 온 소행성(혜성 포함)이 지구에 떨어져 공급 먼지,물과 얼음으로 구성된 혜성과 규모가 큰 소행성이 지구의 충돌로 인해 물이 생겼다는 이론이며, 물이 풍부한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해, 바다가 생겨났다는 가설이다. 물론, 학계에서도, 두가지 요인이 모두 작동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필자가 보기엔, 틀림없이 지구에 물을 공급한 비율은 암석1 ,우주소행성을 9로 본다. 그 이유는 암석이 오랜기간 뜨거운 지

어린 소녀 유관순은 죽음을 선택했다. [내부링크]

필자도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이 주제를 내 블로그에 남기고 싶었다. 그 이유는 아래의 기록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유관순은 가짜다" "유관순은 허구다" "유관순은 개신교 친일전력자가 자신의 전력을 덮고, 다른 한편으론 개신교 선교 전략의 일환으로 의도된 영웅 신화 만들기에 사용된 허구이다." 내 PC의 ram이 더러워질 것 같아, 저 말에 근거까지 찾으며, 애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혹여 저 주장에 또 어떤 누군가가 동조하는 우를 범할 것이 걱정되어,필자의 생각과 주장으로 그들에게 당부의 글을 남기고 싶었다. 참고로,필자는 서대문형무소를 딸들과 두 번 간적이 있다. 하필 한 겨울에 가서, 유관순 열사가 있던 그 방에서 그 추위를 느낀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정말 추웠으리라. 더욱이 지하 고문실은 잊혀지지가 않는다. 당시 필자는 지하로 끌려가는 당사자가 되어 상상해봤다. 나도 그들처럼 버틸 수 있었을까? 당시 18세 어린 소녀는 고문장으로 가는 지하계단을 내려가며,무슨 생각을 했을까

개그우먼"정선희"님. 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내부링크]

언젠가 그녀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마음 먹은지 오래이다. 하지만, 혹여, 나의 허접하고, 쪼가리 글이 그녀와 유족 분, 팬들에게 아픔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까..걱정이 되어, 주제로 삼는 것을 주저했었다. 그러나, 이제 10여년이 지난 시점... 그녀도 나름 본연의 자리에 온 것이 보이고, 대중도 그녀를 포용한지 오래이다 보니, 필자도 이에, 덤으로 용기를 내어, 내가 평소 쓰고 싶었던 그녀의 이야기를 나의 블로그에 남기고자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 그녀의 삶 자체의 기구함도 있겠지만, 꿋꿋이 그 역경과 고난을 이겨내고, 나름대로 지혜롭게 잘 헤쳐나간 한 여인에 대한 위대함이 필자의 뇌리에 선명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녀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내심 응원하고 싶은 마음으로 나름 정성을 다해 기록하고자 한다. 혹시나, 독자 중에 정말 삶이 힘들어, 모든 것을 포기할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녀를 보고, 다시 생각하길 바란다. 자..10여년 전 그녀의 삶으로, 우리만 함께 가보자...

유비,관우,장비는 어떻게 만났을까? [내부링크]

나관중의 삼국지연의 이전에 "삼국희곡(三國戱曲)"이라는 공연이 있었고, 소설에는 만담형태 화본(그림책)의 "삼국지평화"가 있었고, 삼국시대(삼국지)를 바탕으로 한 기록에는 진수가 지은 "정사 삼국지"가 있었다. 결국, 나관중은 공연위주인 "삼국희곡(三國戱曲) 이야기"와 만담위주인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를 참고하여, 진수가 지은 "정사 삼국지"를 기반으로 "삼국지연의"로 집대성하게 된다. 그런데, 진수가 기록한 삼국지 정사,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 어느 곳에서도 유비,관우,장비의 도원결의 이전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삼국지의 주제가 도원결의 이후, 황건적의 난 이후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그러한 결과가 나온 것으로 예상된다. 그나마 있는 기록을 필자가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조정은 부패하고, 전국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은 고통 속에 살고 있다. 더불어 황건적이 반란을 일으켜, 약탈과 만행을 저지르니, 이들 3형제는 의기투합해 의병

"차지철" 경호실장...대통령을 꿈꾸다. [내부링크]

10.26 사건 때,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손에 사살된다. 그런데, 차지철 경호실장을 연구하다보니, 대통령을 꿈꾼 것으로 보이고, 그 시점은 경호실장이 되면서, 4~5년 동안 매우 치밀하고, 탄탄한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역사적인 평가는 차지철 경호실장의 개인적인 성향에 포커스가 맞추어, 평가절하하고, 마초와 같은 인물로 취부해 버리지만, 연구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그는 매우 치밀하고, 큰 포부를 가진 사람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유고를 대비하여, 강제로 정권을 이양받을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즉, 만약, 10.26때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는 틀림없이 꿈을 이뤘을 것이다. 이제...... 필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필연성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자 한다. 1.경호실장 전까지의 기록 어머니가 소실이어서 서자로 태어났는데, 이로 인해 정실 소생인 형제들에게 설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용산고등학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 제12기로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의 진실 [내부링크]

어릴때 부터 좋아하던 노래 중에 퀸(Queen)이 부른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에서 의문에 가사가 있다. 바로, 노래 중간에 쌩뚱 맞게 나오는 아래의 가사이다. Mama just killed a man (엄마, 사람을 죽였어요) Put a gun against his head (그의 머리를 향해 총을 겨눠서) Pulled my trigger (방아쇠를 당겼어요) Now he's dead! (그는 죽었어요!) Mama..Life had just begun (엄마..내 삶은 이제야 시작됐는데) But now I've gone and thrown it all away (하지만 내가 모든 것을 내던져버렸어요) 노래 가사로만 보면, 퀸의 리더인 "프레디 머큐리( Freddie Mercury)"가 살인에 대한 내용을 가사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전반적인 인생과 성격을 봤을 때, 틀림없이, 그만의 사연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왜 이러한 가사로 노래를 만들었

"궁예왕의 최후"를 밝히며, 모두 사라지기 전에 발굴해야합니다. [내부링크]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20대부터 18년간 궁예에게 충성하는 장군 혹은 시중, yes맨, 2인자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런 그가, 군부구데타를 통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는데, 끝내 왕건으로 인해, 궁예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필자는 평소 불분명한 궁예의 죽음에 대해 최후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진지 오래이다. 왜 반란이 일어났는가는 수많은 자료와 추정이 많지만, 도대체 어떻게 죽었을까? 어디서 죽었을까? 최후가 어땠을까? 라는 의문에는 답을 못찾고 잇는 실정이다. 현재 남아 있는 2개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고려사"가 있는데, 고려의 신하인 김부식이 제대로 기록했을까? 조선에서 다시 정리한 고려사를 믿을 수 있을까? 필자가 나름대로 공부한 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이에, 왕건측 반란군이 분명 덮을려고 했던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아, 진실된 기록을 남기고자한다. 이제. 918년 7월 24일(음력 6월 14일) 궁예왕이 왕으로서의 마지막 밤. 그때

연산군은 왜 분노했는가? "갑자사화"의 진실을 찾자. [내부링크]

연산군은 조선의 희대의 폭군으로 알고 있으며, 그가 저지른 악행중에 하나는 갑자사화이다. 갑자사화로 형벌을 받은 인원은 관련자 당사자들만 계산 했을 때 23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필자의 생각에는 여기에 연좌제를 통한 가족과 친족들까지 합하면 , 1,000여명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화를 일으킨 원인에 대하여 현재까지 우리는 아래와 같이 알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갑자사화(甲子士禍))> 연산군의 생모이자 성종 비 윤씨가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모에 벗어난 행동을 많이 했다 하여, 1479년(성종 10) 윤씨를 폐했다가 다음 해에 사사(賜死)하였다. 성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이 사실을 임사홍(任士洪)의 밀고로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윤씨 사사 사건에 관련된 성종의 후궁 엄(嚴)·정(鄭) 두 숙의(淑儀)를 궁중 뜰에서 때려 죽이고, 그들의 아들 안양군(安陽君)이항(李㤚)과 봉안군(鳳安君)이봉(李㦀)도 귀양을 보낸 뒤 사사하였다. 또한 연산군은 비명에 죽은 생모의

진시황은 독살(毒殺) 당했고, 서불은 떠나지 못하다. [내부링크]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제는 말기에 들어서, 죽음을 거부하고 싶었고, 영생을 얻고 싶었다. 인간으로서, 당연한 심리인 것으로 보인다. 전국시대의 각 나라를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만들고, 화폐, 도량, 수레바퀴를 통일하여, 통일제국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가 성자가 아닌 이상, 그는 당시 신(神)이고, 그가 법(法)인 자신의 제국을 두고,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이 인물이 인류라는 잔잔한 호수에 던진 공 하나가 있는데, 바로, 서복(徐福), 또는 서불(徐巿)이라는 불리는 방사(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가 그 장본인이다. 기원전 3세기말에 진시황을 위하여, 불로초를 찾아 떠난 이 인물은 2500년 지난 이 시점에도 어디로 갔는지, 가긴 갔는지......, 갔으면 어떻게 되었는지... 아직도 알수 없는 상황이며, 동아시아 전체에 그의 전설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의 행방에 대한 진실을 찾아고자 한다. 1.서불의 1차 항해(BC 218년) 진나라 말기, 시황제의 끝이

대조영의 부친 "걸걸중상"과 "오바마" 대통령 [내부링크]

걸걸중상은 대조영의 아버지이다. 누구나 알듯이 대조영은 성이 "대(大)"씨이다. 그러다 보니, 필자의 궁금중은 발해의 건국자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 이름에서 "걸걸"이라는 성씨 때문이다. - 진정 "걸걸"이라는 성씨는 어디서 왔을까? - 성씨는 맞긴 한건가? - 발해의 왕족은 대씨이며, 이것은 무슨 근거로 지었나? - 대조영은 진정 말갈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궁금증은 더해가는데....딱히 맘에 드는 가설은 없는게 현실이다. (오히려 그러다 보니 승부욕이 더 생긴다..) "그 어려운 피라미드, 나스카 지상화, 모아이석상, 스톤헨지도 밝혔는데...ㅋㅋ..이정도 쯤이야." 하고 덤볐는데...기껏해야 사료 몇개에 의지하다보니...믹막하고 아득하긴 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최대한 진실에 접근하겠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 부터 뒤졌다. 1. 기록에서 보이는 "걸걸중상" 의 힌트 대조영에 대한 기존 기록이 부실한 탓에 겨우 남아 있는 기록은 《오

한반도에 일본 무덤(전방후원분)이 있게 된 이야기 [내부링크]

무덤에 주인과 한반도에 들어오게된 사연을 밝히고자한다. 자.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방후원분(일본어: 前方後円墳 젠보코엔훈)은 본래 일본에서 4~6세기(3세기부터로 보는 자료도 있다) 고분(야마토)시대에 지배층 사이에서 유행했던 무덤 양식이다. 그런데, 이 무덤이 일본이 아닌, 한반도에서 나타난 것이다. 그것도 일본보다 생성시기도 후기인 동일한 무덤을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한 것이다. 영광 월계고분, 함평 장고봉고분·신덕1호분·표산1호분, 광주 명화동고분·월계동1호분·월계동2호분, 영암 자라봉고분, 해남 장고산고분·용두리고분 등으로 모두 10여 기가 한반도 남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을 확대 해석하면, 한반도에 일본이 점령한 지역이 있다고 볼 수도 있는 문제였다. 바로 그게 "임나일본부설"인데, 일본의 침략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논리로 많이 사용되었다. (일본은 신났겠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는 발굴조사를 중지하고, 아무런 보고서도 없이 덮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고의인지,코로나로

이승철의 "서쪽하늘"노래에 있는 3명의 슬픈 이야기 [내부링크]

이승철의 "서쪽하늘" 이야기를 써볼려고 한다...... 오늘도 비가 왔네요. 서쪽 하늘로 노을은 지고 이젠 슬픔이 돼 버린 그대를 다시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또 한 번 불러보네 소리쳐 불러도 늘 허공에 부서져 돌아오는 너의 이름 이젠 더 견딜 힘조차 없게 날 버려두고 가지 사랑하는 날 떠나가는 날 하늘도 슬퍼서 울어준 날 빗속에 떠날 나였음을 넌 알고 있는 듯이 비가 오는 날엔 난 항상 널 그리워해 언젠간 널 다시 만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비 내린 하늘은 왜 그리 날 슬프게 해 흩어진 내 눈물로 널 잊고 싶은데 비가 오는 날엔 난 항상 널 그리워해 언젠간 널 다시 만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비 내린 하늘은 왜 그리 날 슬프게 해 흩어진 내 눈물로 널 잊고 싶은데 가고 싶어, 널 보고 싶어, 꼭 찾고 싶었어. 하지만 너의 모습은 아직도 그 자리에 비가 오는 날엔 난 항상 널 그리워해 언젠간 널 다시 만나는 그 날을 기다리며 비 내린 하늘은 왜 그리 날 슬프게 해 흩어진 내 눈물로 널

박지선(개그우먼)님이 있었음을 기억하며.. [내부링크]

곧, 2주기가 되겠네요.... 오늘도 비가 옵니다....가을이네요. 그녀의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1.그녀와 그녀의 어머니 이야기... 전교 1등을 할만큼 모범생이었던 박지선은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과 4학년에 재학하고 있을 때 '무릎나온 츄리닝을 입고 커다란 가방을 등에 지고 노량진 학원가를 누비며' 임용고시 준비를 하던 학생이었다. 그러던 중 친구들의 격려로 개그맨 시험을 보기로 결심, 2007년 KBS 《개그콘테스트》에 응시하였다. 1차 시험에서 평소 자신의 성격인 '오지랖 넓은 여자'를 컨셉으로 대본을 짜 시험장에서 1인 5역을 연기하였으며 2, 3차 관문도 차례로 통과하여 2007년 KBS 공채 22기 개그맨에 합격하였다. 당시 개그전사 300에서 갈라져 나온 코너인 3인3색이란 코너로 일찍이 대중에 이름을 알렸다. 이때부터 못생긴 여자 역할 전문 개그우먼이 되었다.실제로 출연한 코너 대부분이 외모와 관련된 개그며, 역시 얼굴 전문 개그우먼인 후배 오나미와 자주 엮인다.

경복궁(景福宮) 동쪽,건천문에 "계유정난"진실이 있다. [내부링크]

단종(재위 1452년~1455년)실록에는 유독 눈에 띄는 기록이 있었는데... 계유정난 1달전 부터 새뚱맞게 1453년 9월에 3번이나, "부엉이가 울었다"는 기록이다. 우연에 일치인지, 1453년 10월 10일에 계유정난을 통해 문종의 동생인 수양대군(이유 : 세조)이 왕위을 찬탈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결국 정난은 수양이 승리하여, 단종은 양위를 하게 되고 , 2년 뒤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결국 곧 서인(庶人)이 되어, 죽음을 맞이 한다. 왜 역모 전에 3번이나 부엉이가 울었다는 애매한 표현으로 굳이 사관은 기록을 남겼을까? 1. "노산군일기"가 "단종실록"으로 단종이 양위(讓位)가 폐위(廢位)로 바뀐 결과, 죽은 뒤에도 묘호(廟號)나 시호가 없었으며, 실록도 편찬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남아 있는 『단종실록』은 본래에는 『노산군일기』로 편찬되었는데, 상세한 기록이 없어, 단지, 노산군일기로 남아 있던 기록이, 신원이 회복된후 실록으로 변경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는 과장과 허구를 들여다 보다 [내부링크]

필자의 의문은 "고구려가 왜 통일을 못했나?"로 시작했으며, 가장 직접적인 사유는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다고 믿었다. 이에 필자는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와 비교해가며, 보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필자의 의도와 다르게, 그 이유뿐만 아니라, 용감하게도 "광개토대왕릉비의 허구와 과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 나아가 욕심을 부려, 비석의 "비의 변조 논쟁"에 대해 언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주제를 말하면,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독자도 있을 수가 있으리라 예상된다. 필자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밝힌 내용을 기록하고자 한다. 자... 이 위험한 주제로 글을 시작한다. (필자의 편의를 위하여 '광개토태왕'보다는 '광개토대왕', 광개토대왕릉비 보다는 "광개토대왕비"로 표현했다.) 1.비문 내용 1. 제1면 1-1 아, 옛날 시조 추모왕께서 처음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우셨도다. (추모왕은) 북부여 출신이시니, 천제(天帝)의 아들

최규하 대통령님. 그게 최선입니까? [내부링크]

1995년 11월 김영삼 前 대통령의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이 "한국 근현대사에서 존재하는 어둡고 비극적인 과거를 청산하겠다"라는 공약과 언급이 나온 것에서 이어져, 과거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에서의 광주학살의 주범으로 지목된 대한민국 두 전직 대통령 전두환, 노태우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소환조사하여 각각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서울구치소와 안양시에 있는 안양교도소에 모두 구속시킨다. 그 과정에서 최규하 前 대통령에게는 12.12 사태와 5.18 광주 민주화운동, 그리고 자신의 하야로 이어지는 신군부의 권력찬탈 과정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최규하 前 대통령은 법정에 강제구인됐지만 증인선서 및 관련 증언을 모두 거부했다. "전직 대통령이 재임 중 수행한 국정행위에 대해 일일이 증명하거나 증언을 해야 한다면 국가경영상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게 말이야 글이야...뭔 말이지?............ 필자가 대통령을 안해

사도세자는 영조를 시해(弑害)하려 했다. [내부링크]

사도세자는 28살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손에 죽게 된다. 덩치 큰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8일 동안 고통속에 죽이게 되는데, 필자의 궁금증은...... 얼마든지, 폐세자, 자결, 사약, 귀양, 암살........등 세자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궁내에 8일간 뒤주를 방치하며, 고통 속에 죽였을까? 그 분노는 뭘까? 사도세자의 정신분열과 당쟁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사안이다. 참고로. 당시 50년전에도 장희빈(숙종, 영조의 아버지)이 사약을 받아 죽었음에도, 경종(영조의 이복형)이 결국 왕위에 오른 것을 보면, 모든 걸 정종(영조의 손자)을 위해서 그러했다고 보기엔, 직접적인 이유가 되기엔 부족하다. 즉, 정신분열과 당쟁으로 인하여 죽게는 할 수 있지만, 뒤주 속에서 8일간 고통스럽게 죽이는 "영조의 결심"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이다. 상세하게 나누면 첫째. 굳이 고통스럽게 죽인 이유? 둘째. 굳이 왜 하필 뒤주인가? ............이

파라오는 "피라미드"로 자신이 "신(神)"임을 증명했다, [내부링크]

필자는 꾸준히 국내외 미스테리 유적과 역사를 연구해왔지만, 늘, 마음속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데, 바로, 그 애증(愛憎)의 범인이 "피라미드"이다. 바로 "왜 만들었지?" 단순무덤? 태양의 신에게 제사용? 나일강의 범람시기에 농민들을 먹여살리기 위한 국가 인프라 공사? 모두 틀렸다고 할순 없지만, 필자의 물음은 최초 왜 진정으로 지을려고 했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이유이다. 어떤 유적은 자료가 너무 없어서 힘들지만, 반대로 피라미드는 너무 많아서 힘들었다. 이에, 많은 자료를 뒤져서, 엉뚱한 곳에 도착하느니, 필자의 감을 활용에 직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필자의 감은 "고대 이집트 신화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도출하고자, 노력했으며, 이에, 고대 이집트 신화의 이해부터 파고들어 가고자 했다. 뭐니뭐니해도, 대부분의 고대 유적은 종교적(하늘,땅,기후) 신념없이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신석기인들

조선의 천재화가 "김홍도" 그림 속의 오류는 고의다. [내부링크]

필자의 의문은 "그림의 오류는 고의인가? 실수인가?"였다 하지만 여기에 더하여, 위작인가?에 대한 논의도 끝을 내고자 할 것으로 보인다. 진본이다, 위작이다, 모사본이다 ......말이 많은데, 특히 2012년 강관식 한성대 교수가 “25점 모두 단원이 그린 게 아니다”는 논문을 발표하며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출발하자. 1. "김홍도"는 그림에 실수할 분이 절대 아닙니다. 아래의 그림을 보자. 김홍도가 30대 때 그린 것으로 보이는데, 1771년 26세때 정조의 초상화를 그렸으니, 필자 생각엔 1775~1780년사이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김홍도(金弘道), 강세황(姜世晃) /18세기 후반 /견본담채 (絹本淡彩)/ 90.4 x 43.8 cm /호암미술관) "김홍도"와 "강세황"의 합작품으로 전하는데, 호랑이는 "김홍도"가 그리고 소나무는 그의 스승인 "강세황"이 그렸다고 한다. 하나를 더 볼까? 이 그림 또한 30대에 그린 것으로 1775~178

얼굴을 가린 금관. 그것의 깊은 사연을 밝히자. [내부링크]

몇년전 경주에 황남동 무덤지의 발굴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되는데... 무덤을 열고 발굴하는 과정에서, 금동관은 머리에 쓰지 않고 얼굴을 덮은 망자가 나오자, 금관이 머리에 쓰는 용도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고민에 빠졌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상식적인 측면에서 이해는 되지 않았다. 이에 이 난감한 난제에 대해, 그 누구보다 빨리 해독하고자 한다. 가봅시다. 1. 황남동 120-2호 금동신발 부터 발견 43년만에 출현한 경주 금동신발의 정체…"왕족 혹은 귀족의 가족 무덤" 출처 :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기자 / 2020.05.27 09:00 입력 금동신발이 노출된 경주 황남동 120-2호 고분. 120-2호는 120호의 일부를 깎아 후대에 조성된 무덤이다. 120호 주인공과 혈연관계인 일가족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다.|신라문화유산연구원 제공 경주에서 43년 만에 출토된 금동신발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혈연관계인 일가족

이기붕 일가 자살에 대한 새로운 주장 [내부링크]

"1996.4.19. KBS 역사추리 그날"방송에서 스쳐지나가는 이미지 한장이 필자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방송에서는 자료가 모두 파기되어, 결론을 내지 못하고 종료되지만..... 당시, 사건일지로 보이는 이미지가 필자의 뇌리에 남았다. 기자가 당시의 스쳐가는 사건일지(현재는 기한 만료로 사라짐)를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사실 궁금증은 왜? 이강석은 어머니 박마리아에게만 머리에 총을 쐈나였다. 그저, 조작된 이미지..잘못된 이미지...라고 하면 쉽게 끝날일이지만, 영상의 신뢰성과 공신력을 봤을때, 그리 보기엔 힘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증언과 관련자들은 대부분 고인이 된 상태라, 확인할 길이 없겠지만, 사진 하나로 시작을 해보고자 한다. 혹시 이기붕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가겠다. 이기붕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만송(晩松). 서울 출생. 효령대군(孝寧大君) 보(示甫)의 17대손이며, 아버지는 예조판서 회정(會正)의 손자 낙의(洛儀)이다. 부인 박(朴)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왕족이다. [내부링크]

우리나라가 자랑스러워하는 3대 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강감찬의 귀주대첩,이순신의 한산대첩인데, 그 중, 우리는 을지문덕이 누군지, 언젠, 어디서 태어났는지, 가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 하물며, 사망시점도 모른다. 그 옛날 을파소도 기록이 있고, 바보 온달도 기록이 있는데, 왜 없을까? 그것도 그 분만? 남아 있는거라곤, 중국의 역사서 일부 전쟁사에 잠깐 나올 뿐, 그의 정체를 알수가 없는 상황이다. 그 흔한 비석 하나 없으며, 후손도 정확하지 않다 (후손이라고 주장은 목천 돈씨(木川 頓氏)가 유일한데, 고려 때 돈씨를 하사박았다는 내용 뿐, 그 마저도 전제 인구가 100명내외인 것으로 보인다.) 기록만 보면......고구려-수나라 2차 전쟁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 분을 기필코 찾아야겠다. 함께 찾으시죠..저는 찾아야겠습니다. 1. 고구려-수나라(1~4차) 전쟁 개요 <-1차-> 598년(26대 영양왕) 수 문제가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비밀리에 군대를 양성하고 있

신라는 흉노 후손이 아니다. [내부링크]

신라는 진한 6부 촌장으로 시작하여, 박혁거세를 거처, 탈해이사금, 김알지 후손들로 이어진다. 워낙에 많은 신화속에 쌓여 있다보니, 그 정체와 근원을 찾기 힘든게 사실이다 이에 과감하게도 신라인들의 근원을 찾고자한다. 이러한 용기는 경주 문무왕릉비 (慶州 文武王陵碑)를 보고 생겼다. 가장 논쟁이 많은 글자가 바로 비석 5행에 나오는 "투후(秺侯)"라는 글씨 때문이다. "투후"는 흉노 출신 김일제(마지막 흉노왕의 장남)가 한나라로 부터 받은 작위명이며, 김씨도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이유로 무제가 하사한 성씨였다. 따라서, "투후(秺侯)"를 믿으면, 바로 신라 경주김씨는 흉노족이 조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해당 가문도 모르는 일이며, 당연히 족보에도 없는 일이므로, 매우 황당한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 흉노족은 중화민족 기준으로 봐서 오랑케이지, 실제는 한나라도 조공한 강국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부분이 의미없는 논쟁으로 보여 이 부분

스톤헨지(Stonehenge)...누가? 왜? [내부링크]

인류의 불가사의에서 "스톤헨지"는 빠지지 않는다. 이에, 용납이 안되어(?), 이 불가사의에 도전을 하고자 한다. 최소한 누가? 왜?에 대한 답변을 하고자 한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 장엄한 역사에 겸손함이 생긴다. 현재 살고 있는 우리는 치열하고, 도전하는 수많은 인류의 성공에 의해 살아났다는 것에 경의를 표한다. 자...타임머신을 타고....아주... 아주... 아주... 먼 여행을 시작해보자. 1. 스톤헨지와 그 주변에 대한 조사 스톤헨지(영어: Stonehenge)는 영국 남부 윌트셔 주 솔즈베리(Salisbury) 평원과 에이브버리에 있는 선사 시대의 거석기념물(巨石記念物)에 있는 환상 열석 유적이다. 높이 8미터, 무게 50톤에 달하는 거석 여든여개가 세워져 있다. 수수께끼의 선사시대 유적으로 누가, 어떻게, 왜 만들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풀려지지 않고 있다. 스톤헨지에 사용된 석재는 셰일과 블루스톤(청회색 사암, 휘록암과 유문암), 사르센석(잉글랜드 중남부에 산재하는 사암

가야 허황옥(허황후) 신화는 구형왕의 전략이었다. [내부링크]

한반도 최초의 국제 결혼을 허황옥으로 봤을 때,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정말 인도인인가? 정말 공주였던가? 진짜라면 가능한 일인가? 허구라면 누가 왜 그러한 일을 저질렀나? 그에 합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뛰어든다. 이에, 필자는 이러한 물음에 도전하고자 한다. 그 중요한 허황옥 역사를 기록하고, 사실만을 볼려고 한다. 김수로왕과 국제결혼한 허황옥(허왕후)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신화를 제거하고, 불교 색체를 싹 빼내고 볼려고 한다. 더불어 논리를 필 때, 삼국유사의 기록을 불필요한 신화적인 부분을 과감히 걷어내고 볼려고 한다. 아주 재밌을 것 같은 주제 이지만. 허황옥을 끄집어 올리면, 김수로왕이 연달아 올라오고, 또 이어서, 가야, 신라가 올라오니.... 힘들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머니(김해 김씨)의 자식으로서, 가문에 영광을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자한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는데... 자. 시작하자~ 1. 삼국유사와 김해숭선전신도비문을 참고하여 나열 (비

충무공 이순신의 얼굴과 가장 근접한 인물을 찾다. [내부링크]

충무공 이순신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다. 더 이상에 설명이 필요 없다. 바로 가자 이순신(李舜臣,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1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였으며, 한성 출신이었다. 문반 가문 출신으로 1576년(선조 9년) 32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1. 용모와 관련된 기록을 보자. 1) 서애 류성룡은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사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과정에서 얼마 안되는, 이순신을 신뢰하고 지지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순신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 분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舜臣爲人 寡言笑 容貌雅飭 如修謹之士 而有中膽氣 “이순신의 사람됨은 말과

고려 신돈은 이차돈이 되고 싶었다. [내부링크]

고려말기 고려의 마지막 기회를 살리고자 했던 공민왕과 신돈은 끝내,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자멸하는 운명을 가지게 되는데, 우리가 아는 (구체적으로 말하면 조선 개국공신들이 말한), 요승 신돈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대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어머니가 종인 천한 신분출신에다가 글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여러 과부를 꾀어 간음이나 하던, 인물이었는데, 공민왕을 만난 이후로는 “거짓으로 꾸며 몸을 항상 마른 나무처럼하고 더운 여름이나 추운 겨울에도 항상 한가지 찢어진 장삼을 입었다”(『고려사』)고 한다. 이 바람에 공민왕이 속아 넘어가 사부로 삼아 진평후에 봉하고 ‘수정이순…겸판서운관사’라는 벼슬을 내리고 국정을 전담하도록 했다고 한다.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전제 개혁(田制改革)·노비 해방(奴婢解放) 등 대담한 개혁 정책을 썼으나 점차로 오만해져, 신돈의 자식을 공민왕의 아들로 둔갑시키고, 공민왕을 억압하다, 신돈세력에 위협을 느낀 공민왕이 직접 친정을 하자, 실각에 대한 두려움에 왕의

제주도 돌하르방은 최영장군이다. [내부링크]

제주도의 돌하르방은 한반도의 많은 미스테리 중에 한가지이다. 어렴풋이 유라시아 대륙문화,요나라,원나라 순의 영향으로 보기도 하고 , 남방영향으로 보기도 하고, 자생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제일 강한것이 북방설(원나라 : 몽골)이고, 설득력이 있다고 보고 있지만,) 필자는 용감하게도 이 문제를 최영 장군론으로 풀고자한다. 즉, 필자가 주장하는 최영장군에 의한 자생론으로서, 희한한 주장일 수 있으나, 나름대로의 연구를 기록하고자 한다. 왜 이런 주장을 하는지 함께 가봅시다. 1. 돌하르방과 관련된 기록과 설치현황 돌하르방은 조선시대 당시 제주의 행정구역인 제주목·대정현·정의현 등, 1목 2현의 성문 밖 입구에 모두 48기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목2현제(제주목+대정현+정의현)는 조선 태종16년 (이방원) 1416년에 정립되고, 설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돌하르방 모두 현무암으로 만들어졌지만 조선시대 1목 2현 중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모양과 크기가 각기 다르다. 크기만 비교하면

훈민정음 시작과 과정에 신빈 김씨가 있었다. [내부링크]

훈민정음에 대하여 의문이 들었다. 필자가 이러한 의문이 드는 것은, 왜 만들기로 결심했는가? 이다. 필자가 왜 만들었는가?의 의문이 든 이유는 첫째는 세종의 신분과 경험의 한계이다. 그가 태어난 시점이 1397년 태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른지 6년이 된 시점이었다. 팩트만 보면, 구중궁궐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백성들의 노고는 커녕, 세상물정을 모를수 밖에 없는, 말그대로 금수저 출신에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벌써 태종 이방원이 있을 당시는 4째 아들 세종은 어린시절을 궁궐에서만 지낼 수 밖에 없었다. 세상물정을 알고, 학문의 깊이가 어느정도 자리 잡는 12세가 되던 해인 1408년에 심온의 딸 심씨와 혼인을 하게 되는데. 그때 당시도 아버지 태종이 왕위에 오른지 8년이나 지난 시점이 된다. 이런 분이 어찌 글자가 없는 나라에 글자를 만들어 백성을 위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오로지, 그 분의 인문학적 천재성과 인성 혹은 천성으로 만 해석될 수 있을까? 개인 스승이 일러준 것도,

"여불위"와 "조희"의 억울함을 대신 풀다. [내부링크]

진시황제 탄생전, 전국시대 진나라에는 여불위라는 인물이 있다. 그리고 조희라는 여인이 있다. 필자가 보기엔, 사마천 사기에 의해 의도적으로 아주 천박하고, 극도로 저평가된 인물들로 보인다. 이에, 좀 더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같아. 나름대로 시간을 내어 조사하고 연구했다. 연구하는 과정에서 정말.....여불위가 얼마나 억울했을까라는 교감이 와닿았다. 나라도 사마천의 실수를 언급하며, 진실을 알리기 위해 기록한다. 순서는 년도별 순차적인 기록에 필자 평가를 중간 중간 삽입했다. 여불위 조희(조태후, 진시황제의 어머니) 1. 달리는 말위에 올라타다. [참고로 진나라의 왕의 성씨는 '영'이다. 과거 기원전 900년즈음에 주의 효왕(孝王)을 시중들고 있던 비자(非子)가 말의 생산을 실시해, 공적을 올렸으므로의 영(嬴)이라는 성을 받고 대부가 되어, 진(秦) 땅에 영지를 받았다고 한다.] -------------------------------------------------

첨성대를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으로 본다 [내부링크]

경주는 개인적으로 5~6번은 간 것으로 기억한다. 당연히, 많은 왕릉과 첨성대, 박물관도 항상 들러 보았지만, 아직도 첨성대(瞻星臺)에 대한 용도에 대한 의문은 개인적으로 항상 있었다. 정말, 어려운일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이 문제는 사료의 부족도 있지만, 정치적인 문제도 함께 있는 민감한 문제이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라고 하는게 민족의 이익과 우리 민족에 우수성을 알리기엔, 적절하게 보이나, 극단적인 국수주의,민족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애를 쓰는 중이다. 이에, 아무리 가치에 흠이 간다고 해도, 왜곡보다는 객관적이고 논리적으로 접근하고, 안일한 믿음 보다는 , 의심하고 좀 더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애국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필자가 왜곡시킬수 있겠지만, 아니길 바라며 글을 쓴다. 워낙, 논란이 많은 유적이다보니, 이야기가 좀 길어지는 것에 대해 이해하길 바란다. 1. 선덕여왕의 즉위전후, 반란 진평왕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이어 받은 핏

무당의 점은 진짜인가? [내부링크]

본 주제에 대한 의문점은 늘 있었다. 필자는 무당의 점을 받아본 경험이 2번 있다. 첫번째는 아주 우연히...술집에서.. 두번째는 개인적으로 최대 위기가 왔을때...이것도 참 신기하고 재미나지만, 술자리에서나 말하는 추억으로 갖고 있다. 점을 본 후, 나는 도움을 받긴했다. 일단 안도감, 그리고 긍정적으로 사태를 바라보게 되었고, 결국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고, 현명하게 대응하고, 조바심없이 기다리고, 버텨냈다. 즉, 어느정도 맞았고, 도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놀라움과 호기심에 빠진 경험이 있다보니, 항상 필자는 궁금했다. 하지만, 무턱되고 믿기에는, 과거 과학적 증명이 없던 시절, 흉년과 태풍, 번개가 신기한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인식되어, 무당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이 있었듯이, 우리는 쉽게 원리가 이해되지 않으면, 신의 뜻 혹은 초자연적인 현상으로 취부하고 확대해석과 의미 왜곡을 일으킨것도 역사적으로 사실이다. 이에 무당은 어떻게 상대의 과거,현재,미래를 추측할 수 있는지

의자왕은 왜 "해동증자"에서 "타락군주"가 되었나? [내부링크]

무왕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632년(무왕 33년)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다. 641년에 무왕이 죽자 뒤를 이었고, 당으로부터 주국(柱國) 대방군왕(帶方郡王) 백제왕으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우애가 깊어서 중앙귀족에게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 하고, 그의 아들 부여융의 묘에도 의자왕을 가리켜 “과단성이 있고 사려 깊어서 그 명성이 있었다.”라고 적혀져 있다. 그러나 즉위 전의 칭찬에도 불구하고, 즉위 후에는 실정을 거듭하면서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의자왕을 ‘타락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왜 타락했다고 평가 받는 사연을 우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연산군은 모친의 억울한 죽음이 원인이였다고 치지만, 도대체 의자왕은 칭송에서 비난으로 변절된 이유가 멀까? 앞뒤 정황을 모두 봐야겠지만, 우선 이것을 밝히기 위해,해결해야할 미스테리가 2가지 있다. 첫째. 어머니가 누구인가? 둘째 .의자왕을 시절, 갑자기 비리와 전횡을 일삼은 부인이 누구인가? (일

원균은 전사인가? 자결인가? 처형인가? [내부링크]

원균에 대한 최후에 의문점이 생겨 연구를 하고,그 속에 등장 인물들을 분석해보았다. 0. 칠천량 해전과 원균에 대한 기록 <이미지 출처: 동아일보> 이순신은 배 134척과 수군 병력 1만 7천여 명,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 근,여분의 총통 300자루 등을 후임 원균에게 넘긴 후 2월 26일 서울로 압송되어, 권율의 진영에서 백의종군하였다. 싫어하던 이순신을 내쫒고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된 원균은 자기도 능력이 있다고 보여주고 싶어했다. 원균이 얼마나 이순신을 질투했는지를 묘사한 기록이 있는데, 조선 중기 유학자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은봉전서(隱峰全書)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안방준의 숙부인 안중홍의 처가 원균의 집안 출신이어서 막 통제사가 된 원균이 안중홍을 찾아와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원균은 "제가 이 직함을 영화롭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 대한 치욕을 씻게 된 것이 통쾌합니다." 라고 말하였고, 안중홍은 "적을 무찔러서 이순신보다 더 큰 공을 세워야

김일성의 진실을 탐구하다. [내부링크]

북한의 주석 김일성(김성주)에 대한 나름대로 객관적인 판단을 하고, 그는 누구며, 어떻게 지도자가 되었는지 알고 싶어 탐구했다, 1. 1927년 중학교에서 공산주를 배우다. 김성주(김일성)은 열네 살 때(1925년) 아버지의 병세 때문에, 만주로 건너가 푸쑹 소학교를 졸업했다. 1926년 3월에 정의부(正義府)에서 길림성 화전현(樺甸鎭)에 세운 화성의숙(華成義塾)에 들어가서 잠간 동안 다니다, 1926년 6월 부친 김형직이 사망하자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1927년 중국 지린성 지린으로 가서 중국인 학교인 지린성 유원중학교를 다녔다. 그의 부친 김형직이나 삼촌 김형권이 정의부(正義府) 소속이었기 때문에 정의부에서는 그가 육문중학(毓文中學)을 다닐 때 장학금도 대어주었다 한다. 중학교 재학 중 그는 성적이 우수하였다. 1929년 이 중학에 샹위에(尙鉞, ?-1982)라는 루쉰(魯迅)의 제자인 마르크스주의자 선생을 통해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공부했다. 아버지 김형직의 항일운동에 의해

광해군 폐위 이후, 그의 심리 엿보기 [내부링크]

광해군의 재위는 1608~1623년으로서 15년이다. 1623년 3월 14일 새벽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은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된 후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다가, 1641년 67살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는데, 따라서 재위보다 폐위되어 유배되어있던 기간이 더 긴 천수를 누리고 운명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광해군은 참혹한 주변의 죽음을 보게 되는데, 그의 측근들과 외척의 참형과 아들이 목매달아 죽고, 며느리가 자결하며, 부인이 화병으로 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년의 유배생활을 강화,태안,강화,제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게 되며, 많은 모욕을 견디고 버텨내는데, 그의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광해군을 연구하고자 한다. 1.인조반정과 이후 이야기 정리 인조는 1623년 4월 11일(광해군 15년, 음력 3월 12일) 서인의 김류·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정변을 준비하고 그해 4월 12일(음력 3월 13일) 새벽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진입, 반정군에 힙입어 왕위에 올랐다

빨치산과 토벌대, 그들을 기억하는가? [내부링크]

<차일혁> <이현상> 빨치산 대장 이현상과 토벌대 대장 차일혁은 일제치하에 태어난 인물들이다. 두 분 모두 일제치하에서 대항하며, 어린나이에 고국을 떠나 독립을 위하여 몸바쳐 일한 독립투사들이다. 하지만, 두분의 방향은 정반대의 이념과 철학을 가지고, 고국에서 만나게 된다. 두 분 모두 애국을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새로운 조국을 만들기 위한 방법만 달리했을 뿐 인데, 지금 사는 후세들이 당시 시대에 산다면, 사회주의자가 안된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계급도 없고, 농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모두가 평등하고, 이윤을 공평하게 나누는 나라.... 여성도 공부할 수 있고, 인정 받을 기회가 있는 나라.... 아마.....빨치산이 안되리라곤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두 분 모두 자신의 선택에 충실했으며, 책임을 졌지만, 이러한 상황과 이념에 허우적대는 그들의 고뇌를 이해하고 기록하는 것이, 후세의 본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에, 조국을 사랑한 두 분에 고민과 갈등을 이해하며,

이스트 섬은 감옥이며, 모아이 석상은 형벌이었다. [내부링크]

기여코, 모아이 석상에 대한 의문을 풀겠다라는 각오로 연구했다. 걸으면서, 싸면서, 먹으면서, 마시면서... 1.모아이 석상은 어디에 있는가? 남태평양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화산섬. 오세아니아 폴리네시아 지역의 동쪽 끝으로 현재 칠레 영토이나, 내부적으로 분리독립 목소리가 있는 곳이다. 실제 면적은 163.6 로 충청남도 태안군 안면도(113.5 )보다 약간 큰 정도, 울릉도의 약 2배, 서울특별시의 약 1/4, 제주도의 1/10 정도 크기이다. 인구는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약 5,700명. 신비의 거석상 "모아이"로 유명하다. 1722년 네덜란드인 탐험가 야코프 로헤베인(Jacob Roggeveen)이 이 섬을, 유럽인 최초로 '발견'했을 때가 마침 부활절(Pasen, Easter day)이라서 이름이 이스터 섬(Paasch-Eyland, Easter Island)이 되었다. 이스터(Easter)는 영어 이름이고, 현재는 칠레 영토이므로 역시 부활절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파스쿠

나스카(Nazca) 지상화에 대한 해답을 찾다. [내부링크]

페루의 황량한 사막에 가면 나스카 평원지역에 지상화가 그려져 있다. 우연히 발견된, 지상화는 건조한 기후덕분에 2000년이상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재 과학과 연구로는 누가, 왜 그렸냐에 대한 답을 얻지 못했고, 이에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도전했으며, 하나의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먼저 주변 안데스 당시 문명의 발생시기와 흥망성쇠를 통하여, 역사적인 사실과 문화의 충돌, 화합, 그 시기를 분석하여 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1. 문명의 발전과 흥망성쇠 현재 나스카 지상화는 페루에 있다. 페루 땅에 인간이 출현한 증거는 기원전 9,000년경에 나타난다.페루에서 가장 오래전에 복잡한 사회를 이루었던 노르테 치코 문명은 기원전 3000년에서 1800년경 사이에 태평양 연안을 따라 번성하였다. 그 뒤를 이어 쿠피스니케, 차빈, 파라카스, 모치카, 나스카, 와리, 치무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발견된다. 안데스 사회는 농업에

신라의 독립을 이룩한 눌지왕 [내부링크]

400년 신라의 내물왕은 고구려에 스스로 속국이 되어, 백제,왜,가야의 공격을 막아낸다. 덕분에 고구려 군사가 신라에 주둔하며, 고구려의 간섭을 받게되는데, 이대로 신라는 스스로 고구려에 흡수되어, 사라지는게 순리로 보인다.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독립하여,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전성기(광개토대왕, 장수왕)에도 살아남게되어, 백제와 더불어 반격을 해나가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최초 고구려에게 복속하는 과정과 어떻게 온전히 독립을 달성하고,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했는지, 그 중요한 기로에는 3명의 신라왕의 발자취가 중요하다. 그들에 스펙타클한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1.복속하는 17대 내물마립간 * 내물마립간 (재위: 356년 ~ 402년) 364년 음력 4월 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오자, 토함산 아래에 허수아비 수천 기를 세워 신라 군사로 위장하고 들녘에 용병을 매복시켜놓았다. 토함산에 신라 군사가 많은 것으로 믿은 왜군은 곧바로 직진하여 들녘으로 향했으나 신라 복

궁예의 아버지는 왕이 아니였다. [내부링크]

궁예의 출신에 의구심이 들었다...진정 신라 왕에 아들인가?..그의 발자취를 보면서 답을 찾을려고 한다. 우선, 일단 왕의 아들이라 보고 떠져보자, 궁예의 탄생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두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1) 헌안왕의 서자이므로, 857년 생이다. 2) 경문왕의 서자이므로, 869년 생이다. 하지만,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나이를 확인하고, 당시 시대적인 상황으로 상황을 좁혀 본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그의 태생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1. 사건과 나이 비교를 비교하여 적합한 생년을 구하라. 연도 궁예 왕건 나이 (877년생) 견훤 나이 (867년생) 사건 857년생 경우 869년생 경우 857년 헌안왕 왕에 오르다 1세 - - - 861년 경문왕 왕에 오르다 4세 - - - - 어머니를 떠나다. 약 10세 (866년) 약 10세 (878년) - - 891년 세달사를 떠나서 죽주(竹州-경기도 안성시)에서 활동하던 군벌 기훤(箕萱)을 찾아감. 35세 23세 15세 2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 시대의 놀라운 냉장고 [내부링크]

왜? 빗살무늬토기의 밑바닥은 뾰족한가에 대한 물음에 답하고자 한다. 1. 따뜻한 기후로 먹을 거리가 다양하고, 풍부해지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가장 기온이 낮았던 약 1만8000년 전이다. 중위도 지방까지 덮여있던 빙하가 점차 녹기 시작하면서 낮은 지대는 물에 잠기고, 1만년 무렵 해수면은 점점 높아졌다. 한반도의 해안선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바로, 구석기시대와 다른 새로운 문화를 만든 신석기 시대다. 신석기시대가 시작되는 약 1만년 전 무렵 한반도는 오늘날과 비슷한 환경이 갖추어졌다. 남해안과 동해안은 한류와 난류의 영향으로 어족 자원이 풍부해지고, 서해안에는 큰 조수간만 차와 복잡한 해안선의 영향으로 넓은 갯벌이 형성되어 다양한 조개류가 서식하게 되었다. 기후 변화로 식물상은 온대성 활렵수림으로, 동물상도 추운 기후에 적합한 매머드나 털코뿔이 등 대형 포유류는 점차 사라지고 사슴, 멧돼지, 고라니 등 중소형 포유류가 주를 이룬다. 2. 농경의 시작으로 저장과 보관의 필요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방어정책"이다. [내부링크]

고구려 장수왕은 평양천도를 한다. 많은 가설이 평양천도가 신의 한수인지, 악수인지 논쟁이 되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당시엔 "신의한수"가 맞다. 그럼에도, 이러한 신의한수를 악수를 만들어버리는 장수왕은 아주 잘못된 정책결정(천도와 무관한)을 하게 되는데....이 주제는 내용이 많아, 다음에 다루도록 하고, 어쨌든, 평양천도를 남진정책이 아니라, 방어정책이라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광개토대왕 (재위: 391년 ~ 412년)과 장수왕 (재위: 412년 음력 10월 ~ 491년 음력 12월)의 기록 393년에는 9개 절을 평양에 창건하고, 399년에는 왕이 직접 평양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395년에는 염수(鹽水) 로 진출하여 거란족 패려(稗麗)를 정벌하여 복속시키고 수없이 많은 소, 말, 양떼를 노획하였다. 398년에는 숙신을 정벌하여 동북 국경 지대를 안정시켰다. 399년 광개토왕은 에 평양(平壤)으로 순행하였다. 백제와 왜는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는 평양으로 사신을

세월호에 있던 학생,선생님,승무원,잠수사... [내부링크]

항상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 도리인 것같아, 그들을 나열하고,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리고.. 1. 故최덕하 학생 (향년 18세) : 최초로 해경에 신고해서 170여 명의 시민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구명조끼도 못 입고 빠져나오지 못해 끝내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꼭 친구들을 구출해 달라며, 눈물의 편지를 쓰셨다. 2.故 정차웅 학생 (향년 18세) : 단원고 최초 피해자이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본 사건이 일어났다. 옆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양보하면서 물에 빠진 친구를 구하려고 물에 들어갔다가 의식 불명이 되어 구급대원들이 심폐소생술을 했으나 끝내 숨졌다. 3.故 양온유 학생 : 2학년 2반 반장이었다. 침몰 사건 당시 빠져 나올 수 있던 4층에 있었으나, 아래에 있는 선실로 가서 친구들을 구하려고 하다가 끝내 숨졌다. 4. 故 김동혁 학생 : 문자 메시지로 자기의 여동생에게 수학여행을 가지 말라고 오빠로서 마지막 당부를 했다. 그래서

신라 "이사부 장군"의 한강유역 점령 작전의 숨겨진 전략 [내부링크]

나제동맹을 통해 장수왕시절 빼앗겼던 영토를 신라와 백제가 수복하게 되는데, 551년 백제는 6군 , 신라는 10군을 사이좋게 나눠가지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552년 백제는 이유모를 행동을 하게 된다. 서기 552년 백제가 한성과 남평양(현 남양주)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현재 신라(新羅)의 우두방(牛頭方)·니미방(尼彌方)이다(《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 서기 553년 가을 7월, 신라가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거두어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김무력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신라 진흥왕)이 백제왕(성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삼국사기》진흥왕 조) 결국, 성왕이 어쩔 수 없이 하류 지역을 포기했고, 이에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 전체를 차지했다고 보는 기록이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이 땅을 '버려서' 신라가 그곳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고 적혀 있고,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그 땅을 "빼앗다" 라고 하지 않고

사마천이 못 푼 숙제, 2천년 이후 현재는 풀렸는가? [내부링크]

사마천의 사기를 읽다보면, 놀라운 그의 고민이 나온다.기원전 그 시대에 이런 고민을 한다는것에, 인간은 시대를 뛰어넘어, 동일한 고민을 하고 있구나라는 동질의식이 느껴졌다 이제 그가 풀지 못한 고민을 풀어보고자 한다. 1. 기원전 1세기에 사마천은 누구인가? 사마천 (기원전 145년경 - 기원전 86년경) 산시 성 용문(龍門)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장(子長)이며, 아버지인 사마담의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 벼슬을 물려받아 복무하였다. 태사공(太史公)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司馬談)은 천문, 역법과 학문을 연구하는 직책인 태사령(太史令)이었다. 한무제가 봉선을 거행하자 이 역사적인 현장에 자기도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참석하지 못하고 태산 아래에서 대기하란 명을 받게 되었다. 사마담은 실망한 나머지 몸이 급속도로 쇠약해져 아들 사마천에게 자기가 집필하던 역사서를 완성할 것을 부탁하고 세상을 떠난다. 이후, 아버지의 직책인 태사령을 물려받아 "사기(태사

양녕대군이 왕이 되었다면, 세종은 죽었다. [내부링크]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은 한때 전략적인 양보를 과감하게 실행한, 조선을 위하여 물러난, 아주 선한 이미지로 구축되어 있지만, 연구결과,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그의 인성을 밝히고 , 미화된 부분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 외가 몰락에서 보이는 양녕대군의 간사한 인성 양녕대군은 1394년에 정안군과 군부인 민씨(뒤의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세자가 되기 전부터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이었다. 사실상 그들의 모든 자식 중 부부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이라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사이에서 7남 4녀를 얻었지만, 그 아들 중에서 요절하지 않은 것은 4남 양녕대군, 5남 효령대군, 6남 충녕대군 뿐이다. 실제 장남과 차남과 3남은 이름에 대한 기록도 없이, 겨우 태종의 회고기록 정도에서 그 존재가 확인될 정도인 것으로 보아, 그들은 상당히 어린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여겨진다. 7

한반도 통일이 얼마 안남았다. [내부링크]

북한은 현재까지 북미회담을 통해 얻어낸것이 없는게 사실이다. 앞으로도 북한 자체의 변화가 없으면,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경제제재 해제, 경제지원과 협력, 국가수호는 물건너 간것이 사실이다. 체제의 변화를 하자니, 통치의 세습, 우상화를 포기해야하는데.. 도대체 현 시점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게 무엇인가? 팩트만 짚어보면 답은 뻔하다. 1. 북한의 경제 위기...코로나가 덮치다. - 중국교역 극감과 장기화 (2020.4.24 연합뉴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북중간 국경 봉쇄가 이어지는 가운데, 지난달 양국의 공식 교역 규모가 전년 동기 대비 11분의 1토막 이하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24일 중국 세관당국인 해관총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북중간 상품 수출입 규모는 1천864만7천 달러(약 230억4천만원)로 전년 동월 2억1천450만7천 달러(약 2천652억3천만원) 대비 91.3% 감소했다. - 관광수입 극감과 장기화 (2020.3.26 KBS) 중국은

가야연맹은 왜 통일왕국이 되지 못하고, 멸망했는가? 아라가야에게 그 답이 보인다. [내부링크]

잃어버린 한반도 역사에서 가야의 발견과 연구는 매우 중요하다. 이에 후손들은 가야를 연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 현재의 부족한 사료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따라서, 가야의 흥망성쇠를 기록하고 분석하여, 결국,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멸망한 이유에 대한 답을 찾고자 했으며, 2번의 기회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 핵심에는 안라국 (아라가야)가 있다는게 보인다. 물론, 안라국보다 멸망의 요인은 맹주의 리더쉽과 의지에 있겠지만, 안라국이 일으킨 독자적인 행보도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안라국을 향해 가보자. 1.고대국가로 가는 2번의 기회...그리고 실패 1) 가야연맹의 맹주 탄생 당초에 변한(弁韓) 또는 변진(弁辰)의 각국의 왕들이 마한의 왕에게 임명된 마한 사람일 정도로 마한의 지배를 받았다. (인근의 진한도 마찬가지였었다.) 기원전 1세기에 진한이 사로국을 중심으로 결집해 마한으로부터 독립하고 서기 9년에 마한이 백제에 패망해 합병되는 등 마한의 영향력이 소멸하여가자 기

종교...어느 성인이 그리하라 했나?? [내부링크]

0.무지에서 나온 종교의 시초 인간이 처음으로 종교적으로 되었던 시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종교적 행위의 신뢰할 수 있는 증거는 중기 구석기 시대 (5-30만 년 전)부터 발견되고 있다.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서 종교는 성문화 되어 종교사가 시작된다. 고대국가에서의 농사와 사냥, 채집은 자연현상에의해 생존과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생존이 위협받거나, 예상이 된다면, 그 원인을 파악하고 설득력있는 논리를 제공하는 자에게 권력과 특권이 주어지는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권력자는 제사장의 이름으로 하늘과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존재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지의 세계를 핑계로, 피지배자들을 통치했다. 비 오는것이 자신에게 혹은 조직에게 불리하면 하늘에 뜻이며, 누구 때문! 비 오는것이 자신에게 혹은 조직에게 유리하면 하늘에 뜻이며, 우리 때문! 이것이 바로 원시 종교의 원리다. 1.우리가 아는 성인들...그들이 가르친것 1) 예수님의 이웃사랑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워낙 방대하

고인돌이 한반도에 많은 이유와 그 의미 [내부링크]

고인돌이 한반도에 제일 많다고 하는데 왜 그런지 알고싶어 연구했다. 이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결론을 내기전에 인류역사의 앞뒤정황을 알아야하므로, 제일먼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명의 발자취부터 따라 가보고, 두번째, 고인돌이 언제, 왜 만들어 졌는지 보고, 세번째, 고인돌 생성시대 이전의 세계 인류사를 알아보고, 최종 결론을 내고자 한다. 자 따라가보자. 1. 4대 문명의 시작과 끝 세계 4대 문명에는 B.C. 4000~B.C. 3000년경 큰 강 유역에서 발달한 최초의 인류 문명 발생지들이 있는데 인류의 발생지로 여겨지는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나열해서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는 나일 강변의 이집트 문명, 티그리스 ·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의 인더스 문명, 중국 황허 유역의 황허 문명을 들 수가 있다. 이들 지역은 큰 강의 유역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관개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며, 공통적으로 청동기, 문자, 도시 국가라는 특징을

쫓겨나는 이성계, 애원하는 정도전, 복수하는 이방원 [내부링크]

이방원은 이복 동생 방석이 세자가 되자,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기록에는 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이 죽음을 당하고, 세자 방석을 살해하자, 이로 인해 태조는 이 사건에 몹시 상심하여 왕위를 둘째 아들 이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고 하는데, 조선 태조 이성계 자신이 점지한 세자와 측근을 모조리 죽인 다섯째 아들을 왜 살려두고, 오히려 나약한 모습을 보이며, 상심에 빠져 순순히 물러났는지에 대해 연구하고, 조선의 개국공신이며, 설계자인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붙잡혔을 때, 치졸하게 왜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는지...또한 그것이 진실인지 연구했으며, 태종 이방원은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무엇을 해보고 싶었기에 이리도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왕좌를 차지 했는지에 대하여 연구했다. 연구를 통해 3 위인 입장에서, 오해와 오판이 있지만, 모두들 조선을 사랑한 동일한 교집합을 가지고 건국에 힘썻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첫째 진실 ] 물러난게 아니라, 아들에게 쫓겨난 슬픈 이성

법륜스님의 가르침에 대한 고찰 [내부링크]

법륜 스님의 즉문즉설을 통해, 느끼는게 많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꼈으면 한다. 종교와 무관하게 그 분에 말씀 중에 기억이 남는 것을 나름대로 정리하고, 그 내용을 공유하고 기록해놓자 한다. (아....미리 알았다면 지나간 시간에 후회가 없지 않았을까?) 1. 행복은 괴로움이 없는 것이다. 참으로 명언이다. 아주 쉽지만, 오해하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자신이 부끄러워지는 명언이다. 행복은 항상 즐겁고, 기분 UP되어 있는 나의 상태를 말하는게 아니라, 고민하고, 걱정하고, 괴로워 나를 괴롭히는 상황이 없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괴로운것은 가만히 보면 나에게로 부터 나오고, 문제를 간결하게 정리해 보면, 본인의 가치관과 성격 탓일 뿐. 문제의 실체는 과하게 무겁지도, 과하게 위험한 것도 아니다. 2. 나는 나, 너는 너. 나는 나일 뿐 너가 될 수 없고, 위와 아래가 없다. 남과 비교하고, 우월을 따지다 보면, 항상 본인은 초라할 수 밖에 없다. 본인이 초라해 지

발해 멸망의 진실은 "5경 15부"에 있다. [내부링크]

한 동안 발해의 멸망이 백두산폭발과 관련 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과학적인 분석결과 멸망이후 시점으로 보이면서,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기에는 논리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의견이 모이고 있다. 이에, 발해의 멸망의 요인을 찾기 위해 시대역순으로 서술하여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결과를 유추를 하고자 했으며, 그 결과 멸망의 핵심요인이 대단하게도 "5경 15부"에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1. 발해 멸망후 부흥운동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동만주 헤이룽장성 무단장(목단강)에 동란국을 설치하고, 요나라의 태자 야율배가 통치하게 되나, 귀국중에 야율보기는 사망하게 된다. 이후 발해의 잔여 세력들이 부흥운동을 진행하게 되는데 순서는 아래와 같다. 국가명 년도 설명 동란국 926년~936년 (10년) 서기 926년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의 태조 야율아보기는 발해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동만주 헤이룽장성 무단장(목단강)에 동란국을 설치하고, 요

한고조(유방)의 정신세계를 들여다 보다. [내부링크]

한고조(유방)의 여러가지 의문에 대해, 답하고자 한다. (나와같은 하찮은 사람이 건방지게 , 감히 2000년전 위대한 한고조를 평할려고 하니, 글이 길어질수 밖에 없었으며, 힘든건 각오했지만, 나름대로 그에 대해 풀이는 해야 할 것 같다.한고조와 참모들이여 용서하소서.) 1.타고난 기본 성격 풀이 유방은 패군(沛郡) 풍현(豊縣)의 중양리(中陽里),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강소 성(江蘇省) 서주 시(徐州市) 패현(沛縣)에서 아버지 유태공(劉太公)과 어머니 유온(劉媼)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형 유백·유희가 있었고 아래로 이복 동생 유교가 있었다. 유방의 형제를 살펴보면 이 이름이 형제 간의 서열, 순서를 간편하게 나타내는 백중숙계(伯仲叔季)를 붙여서 지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유방의 형들로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이 언급되는것을 보면 '유계' 라는 호칭이 어떻게 붙여졌는지는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유방은 본래 개별적인 이름은 없는 것이나 다름 없고, 그저 "

"최리 낙랑국"과 "목지국", 삼한의 연합군 "신분고국"의 진실 [내부링크]

한반도 고대국가 중 낙랑국, 목지국의 진실을 밝히고...연구중에 발견한 신분고국에 대한 발칙한 예측을 하고자 한다. 1. 근거자료 1) 기원전 108년 전한 무제로 말미암아, 고조선이 멸망하고, 한무제는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 군의 4군을 설치하게 된다. 2) 32년 고구려 고구려가 낙랑(樂浪)을 공격하여 정복하였다. 낙랑국 정벌에 앞서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沃沮)에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왕 최리(崔理)와 만나 사위가 되었다. 호동은 귀국한 후 최리의 딸에게 은밀히 서신을 보내 낙랑의 고각(鼓角)을 부수도록 하였고 이후 낙랑국을 기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3) 238년 위나라 요동의 공손연이 위에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자 조예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벌을 결행했다. 사마의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전권을 위임한 결과, 반란의 조기 진압에 성공했다. 요동의 공손씨를 제거함으로써 촉한의 침입 때 후방에서 공손씨가 호응할 염려를 끊을 수 있었다. 4)

트럼프, 시진핑, 푸틴... 그들만의 파티로 인류는 죽어가고 있다. [내부링크]

막을수 있을까? 때가 늦은 건가? 1. 트럼프의 죄 1번 죄 :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백지화한 죄 트럼프는 인류 활동에 의해 기후온난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거짓말로 치부하고 공약으로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백지화를 선언했다. 인류에 의한 기후변화는 과학자들 간에 합의된 사실인데다 세계학생에너지회의 등 여러 단체에서 다루어진 사안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석유산업 등 일부 재계의 입장만 대변하며 기후변화에 대한 대처를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인류에 큰 위협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파리기후협약처럼 많은 국가가 합의를 이루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고 실천은 더 어려운 일인데 어렵게 이루어 놓은 합의조차 백지화한다면 기후변화에 대한 인류의 공동 대처가 트럼프 재임기간 최소 4년 그 이상 미루어지게 될 것이고 그 여파가 어떨 것인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우려한 대로 트럼프는 대표적인 지구 온난화 허구설자인 마이런 에벨 기업경쟁력연구소(CEI) 소장을 대통령직 인수위 기후환경분

고종은 군주자리, 이완용은 개인영달을 꿈꾸다. [내부링크]

1. 오로지 아버지의 야심으로 왕이된 고종 고종(高宗, 1852년 9월 8일(음력 7월 25일) ~ 1919년 1월 21일)은 조선의 제26대 마지막 왕(재위: 1864년 1월 21일(음력 1863년 12월 13일)[2] ~ 1897년 10월 12일)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재위: 1897년 10월 12일 ~ 1907년 7월 19일)이다. 고종은 흥선대원군 이하응(헌의대원왕)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순목대원비)의 둘째 아들로 한성부 안국방 구름재 운현궁 사저에서 출생하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둘째 아들의 왕위를 위한 꾸준한 계획을 세웠다. 이는 철종 사망 당시 12세의 미성년자였던 이명복(흥선대원군의 차남)이 성인인 흥친왕보다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는 흥선대원군의 계략과 조대비의 묵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한, 평소 아버지로부터 흥친왕은 '소 같은 바보'라고 멸시당했다는 평가이다. 철종이 후사없이 시름 시름 앓게 되면서 후사 논의가 진행됐고, 그 중 김홍근은 흥선군을 추대하자는 주장

예맥족이 고조선을 건국하다. [내부링크]

기원전 108년전한 무제로 멸망고조선 건국신화와 멸망 이후를 통해 고조선을 건국한 인물과 진실을 유추해본다. 1. 고조선의 건국과 신화 해석 1)고조선의 신화 《삼국유사》(三國遺事)[2] 기이(紀異) 제1편에는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옛날에 환인(桓因)(하늘. 하느님) -제석(帝釋)을 이름-의 서자(庶子-맏아들을 제외한 둘째 이하의 아들) 환웅(桓雄)이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 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계를 널리 이롭게 할만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신권(神權)을 상징하는 부적과 도장) 세 개를 주어, 내려가서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그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지금의 묘향산) 꼭대기의 신단수(神檀樹) 아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불렀다.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그는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수명, 질병, 형벌, 선

노무현. 그분을 기억하다. [내부링크]

1. 보잘 것 없는 작은 시작 1)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정치를 해야겠습니다.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8년 5월 무렵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이후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주로 조세 및 회계 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 등 여유롭게 생활하였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의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 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무현은 나중에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바뀌었다고 회고하며, 당시 학생들이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모습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

백제인이 일본서기로 복수하다 [내부링크]

1. 일본서기란? 일본서기(일본어: 日本書紀, にほんしょき 니혼쇼키[*])는 일본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로, 일본의 육국사(六國史)의 첫 번째에 해당한다. 《고사기》까지 포함하면 현존하는 두 번째로 오래된 일본 역사서이다. 40번째 덴무 천황의 명으로 도네리 친왕이 중심이 되어 편찬, 680년경에 시작하여 720년에 완성했다. 일본의 신화 시대부터 지토 천황의 시대까지를 취급한다.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순한문의 편년체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 30권과 계도(系圖) 1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계도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2. 660년 부터 680년까지의 한반도의 상황 1).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660년 8월 23일(음력 7월 12일) 신라와 당나라 군대와 함께 사비성을 포위했다. 태(泰)는 군색(窘塞)하고 급박하여, 문을 열고 명령에 따를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왕과 태자 효(孝)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그 뒤에 왕자 부여태과 상좌평 천복이 사비성을 지켰으나

베트남 전쟁을 직시해야한다. [내부링크]

당신은 사과할 용기가 있습니까? 1. 베트남에서의 학살사건 1) 퐁니·퐁넛 마을 학살 사건 대한민국 해병대 청룡 여단은 1968년 1월30일부터 2월29일까지 여단 규모로 ‘괴룡 1호작전’을 벌였다. 이 작전은 1968년 1월30일 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구정 대공세에 맞선 것으로 ‘구정공세 반격작전’으로도 불렸다. 1968년 2월12일 오전 11시 무렵 퐁넛 마을을 지나던 청룡 부대 1중대가 퐁니 마을과 퐁넛 마을의 민간인 70여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베트남 주둔 한국군의 공식 기록인 《파월 한국전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68년 2월 12일 9음력 1월 14일 제1중대(장, 김석현 대위)는 08:15에 1번 도로를 정찰하며 북진하고 퐁넛마을에 진입…… 11:05에 목표(11-이곳은 퐁니촌에 해당한다)를 공격하였는데 이 때 서쪽 지역으로부터 30여발의 적 사격을 받아 4.2인치 박격포로 발사지점을 포격 제압…… 부상자 1명 생겨 후송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에게 멸족당했다. [내부링크]

네안데르탈인은 왜 갑자기 사라졌는가에 대한 인류의 의문에 답을 내고자 한다. 1. 인류의 기원 및 흐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는 신생대 신제3기 마이오세부터 제4기 플라이스토세에 살던 유인원과 인류의 중간 형태를 가진 멸종된 화석인류로 500만 년 전에서 50만 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서식하였다. 발원지는 동부 아프리카로 추정되며 남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동부 아프리카 일대에서 생존하였다.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 남방고원(南方古猿) 또는 남방사람원숭이 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현생 인류와는 그 모습이 다르지만, 두 발로 걸을 수 있고, 송곳니가 원숭이와는 다르게 작고 덜 날카롭기 때문에 원숭이에 가까운 인간으로 알려졌다. 1924년에 남아프리카에서 발견됐고 그 후 많은 화석이 발견되었다. 골반·대퇴골은 인간을 닮고 있어 직립 보행한 것 같다. 엄지는 다른 손가락에 비해서 크고, 다른 손가락과 마주보듯 붙어 있다

제3적그리스도 "MABUS"를 찾다. [내부링크]

1. 노스트라다무스는 누구인가? 그의 조상은 원래 유대인이었으나 할아버지때 가톨릭으로 개종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영민한 미셸은 상업 대신 학문의 길을 택해 15세때 아비뇽 대학에 입학했으나 2년 뒤인 1520년에 흑사병이 돌아 대학이 휴교하자, 8년간 프랑스 전역을 방랑하며 견문을 넓히고 학문을 다듬은 후, 1529년에 당대의 명문 몽펠리에 대학 의대에 입학하여 의사 자격을 얻었다. 그 후 당대의 명의 스칼리제 밑에서 수련을 하면서 앙리에트 당코스 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얻었으나, 영화 "노스트라다무스"에서 묘사된 것처럼 흑사병 환자들을 치료해주고 돌아와보니 막상 자기 아내와 자식들이 흑사병에 걸려 죽어버렸더라....는 슬픈 일을 겪는다. 그 후로 약 10년 간의 행적이 묘연한데, 노스트라다무스의 삶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이 기간 동안 신비주의나 점성술과 같은 오컬트에 정진했다고 묘사된다. 그 후 1546년에 남부 프랑스에 흑사병이 퍼졌을 때 새로운 치료법으로

유니 사망 12주기를 맞이하여. [내부링크]

안타까운 그녀를 위해, 나라도 기억을 남기고픈 마음에 기록한다. 1. 유니는 누구인가? 1) 어린 시절 1981년 5월 3일, 경기도 고양시 출생으로, 미혼모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 얼굴도 모른채 외할머니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호적 문제로 초등학교도 2달 정도 늦게 들어갔다. 유니의 본명이 허윤과 이혜련이라는 두 가지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출생 당시 이름인 이혜련이 어머니가 지어준 본명이며, 이후 법정 소송을 통해 허윤으로 개명하였기 때문이다. 유니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 이후 어머니와 떨어져 외할머니와 지내게 된다.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와도 떨어져 살았기 때문에 어린시절과 사춘기 때 많은 아픔을 겪는다. 본명은 허윤(許允)으로 알려져 있고 가수 데뷔 전 아역배우 활동도 했는데 당시의 본명은 이혜련(李慧蓮). 중학생 때도 전교회장을 맡을만큼 모범적인 학생이었다고 한다. 2) 연기자 데뷔 고등학교 진학 후 TV에서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연예

소서노의 쿠데타와 그의 죽음 [내부링크]

-주변 자료- 1. 비류와 온조의 결별 마침내 오간과 마려등 열사람의 부하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이 많았다. <십제공신> 1)마려(馬藜) <-- 장흥, 목천 마씨(馬氏) 시조 2)오간(烏干) 3)전섭(全聶) <-- 전씨(全氏) 시조 4)을음(乙音) <-- 본래 고주몽의 사람, 소서노를 따라옴, 우보가 됨.(기원전 17년) 5)해루(解婁) <-- 을음이 죽자, 해루가 우보자리를 받는다(서기 23년). 해씨 귀족 6)흘간(屹干) 7)곽충(郭忠) 8)한세기(韓世奇) 9)범창(笵昌) 10)조성(趙成) - 직산 조씨 시조 비류와 온조 일행은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가 근거지가 될만한 땅이 있는가 바라보았다. 비류는 바닷가에서 근거지를 잡으려고 했는데 열사람의 그 부하들은 비류에게 간했다. "이 하남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를 끼고 동쪽으로는 높은 멧부리에 의지하고, 남쪽으로 기름진 들이 펼쳐져 있고, 그리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어 그 천연으로 이룩된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 아니다. [내부링크]

정말 백제를 세운 비류와 온조가 고구려의 주몽이 아들인지 따져보자. 아무래도 아닌것 같다. - 알려진 설화 - 백제 건국 설화란, 삼국 시대의 고대 국가 백제의 건국에 관해 전해내려오는 설화를 말한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백제 건국 이야기는 모두 3가지로서, 그 중 2가지는 《삼국사기》에 전하며 나머지 한 가지는 《수서》와 《북사》에 전해진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설화가 각각 온조 설화와 비류 설화이고, 《수서》에 전하는 설화는 구태설화로 불린다. 《삼국사기》의 저자들은 두 설화 중에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밝힌 뒤 두 설화를 모두 언급했다. '백제 건국 설화'라고 할 때, 보통은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지고 유력하게 인정받고 있는 온조 설화만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1) 온조 설화 " 동명성왕이 졸본에 정착하여 졸본 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형은 비류로, 동생은 온조로 이름 지어졌다. 이후 동명성왕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비류와 온조는 왕위에 오르는 가장 유력

안시성 성주는 "고정의"이다. [내부링크]

고구려 역사에서 정체불명 영웅이 많지만, 그 중에 한 명이 "안시성 성주"이다. 외세의 침략에 거의 대부분에 기록이 소멸되어, 찾기는 매우 힘드나, 간접자료로 현재의 양만춘이 아니고, 고정이라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 1. 안시성 전투의 전개 644년 6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당태종은 마침내 고구려의 침략을 명령한 후 11월 수륙 양면으로 약 50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해 공격을 시작했다. 이세적이 이끄는 선발대와 당태종 이세민이 직접 지휘하는 친정군, 그리고 장량이 지휘하는 수군으로 크게 3갈래로 침입해 왔으며 당군은 효과적인 기만전술과 기습으로 고구려의 현도성,개모성,비사성,요동성, 백암성 등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당시 요동방면에서는 가장 북쪽의 신성, 그리고 남쪽의 안시성, 건안성 들이 격렬히 저항하고 있었고, 당태종의 당의 대군은 요동성에서 집결 한 후, 안시성 방면으로 진격하게 된다. 당 태종은 다음해 2월에 뤄양(洛陽)을 출발하여 직접 원정길에 올랐다. 요

백제 요서 진출은 전연을 위한 군사파견이다. [내부링크]

전연의 건국과 고구려와의 전쟁에 대한 사서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1. 역사적 흐름 나열 1) 285년 선비족(모용부)의 모용외는 285년 부여(扶餘)를 공격하여 부여왕 의려(依慮)를 자살하게 하였다. 2) 289년 서진(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은 부여에 원군을 파견하여 모용외를 격파하였으며, 모용외는 서진에 복속하였다. 서진은 모용외를 선비도독(鮮卑都督)에 임명하였으며, 모용외는 우문부, 단부(段部)의 침입을 피해 도하(徒河)의 청산(靑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3) 모용외는 294년에는 다시 본거지를 극성(棘城)으로 옮겼다. 4) 311년 미천왕은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여 낙랑군(樂浪郡) 및 대방군(帶方郡)의 보급로를 끊는 데 성공하였다. 5) 313년 고구려가 백제 서쪽의 낙랑을 뺏어갔다. 백제 분서왕을 죽인 백제 낙랑태수 "장통"이 빼앗긴 것이다. 6) 314년 미천왕은 대방군을 병합하여 중국 군현 세력을 축출하였다. 315년에도 다시 현도성을 공격하였다. 7) 318년에 우

김재규님 재평가 [내부링크]

1979.10.26 사태는 하기와 같은 증거로 인하여, 왜곡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를 파련치한 배신자로 평가하는건 잘못된 평가라고 판단됩니다. 1. 최초 전두환이 직접 발표한 왜곡된 "시해사건 경위발표문"이 결정적이였다. 10월 27일 하루 3회의 신문조서를 작성했고 이는 수사관들의 손을 거쳐서 대검으로 넘겨졌다. 보안사 수사 결과는 대검 1과로 넘겨졌고, 대검찰청은 이종남 대검특수부 1과장, 이건개, 정경식, 주광일 검사 등으로 대응팀이 구성되었다. 수사결과는 10월 28일 오후 4시 국방부 제1회의실 기자회견장에서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에 의해 발표되었다. 발표내용 과 결과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소장은 "이 사건은 주범인 前중앙본부장 김재규가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대통령이 되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허욕으로 빚은 내란목적의 살인사건이며 군부 또는 여타 조직의 관련이나 외세의 조종이 개입된 사실은 전연 없었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발표에 따르면 사건현장에는 박대통령, 차지철 경

신라왕 석탈해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왔다. [내부링크]

신라왕 석탈해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출신이다 신라왕 석탈해 출신에 대한 <삼국사기>에서는 "그 나라는 왜국 동북쪽으로 1천 리에 있었다"고 했다. 일부 주장에서 <삼국사기>에서 석탈해가 왜국 동북쪽에서 왔다고 했고, 일본열도 동북쪽인 캄차카반도에 석탈해 신화와 유사한 신화가 있다는 사실로, 신라왕 석탈해가 캄차카반도 출신일 가능성에 무게를 주지만, 러사아 블라디보스톡의 역사와 한반도와의 거리를 보면, 캄차카반도 보다는 블라디보스톡 부근이 더 가능성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1. 블라디보스톡의 주변의 고대사 만주의 일부로, 먼 과거에는 부여, 옥저(북), 고구려와 발해의 소속이기도 했고 이후 요나라,금나라,원나라의 영토였다가 후금의 누르하치가 이일대를 장악하면서 훗날 청나라에 복속되었고 1860년까진 청나라 영토였다. 즉, 한반도 역사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아마 고대부터 많은 교류와 국가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근접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 논문에 의하면 강원 정선군

한반도로 온 백인은 아리아인이다. [내부링크]

1. 고민의 시작2005년, 강원도 정선군 아우라지에 있는 고인돌 유적지(청동기)에서 아주 놀라운 것이 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