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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진호, 『익스프레스 시리즈』 : 진화란 무엇인가? [내부링크]

목차 프롤로그 1. 유전자를 상상하다: 유전자의 발명 2. 세포로 들어가다: 세포 안 염색체에 유전자가…? 3. 심연 속으로: 분자의 세계 4. 무엇이 유전자인가?: 유전 물질은 단백질? 아니면 DNA? 5. 유전자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슈뢰딩거의 유전자 정의 6. DNA의 정체: DNA의 구조에 슈뢰딩거의 유전자가 숨어 있다 7. 가까이 왔다!: DNA에서 발견한 디지털 정보 8. 위대한 승리: 생명체를 만드는 유전자의 원리, 유전프로그램을 발견하다 9. 길을 잃어버리다: 유전자는 여기저기에 있다 10. 바닥에서 마주한 진실: 그곳에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11. 탈출: 사라진 유전자 12. 돌아가는 길에서…: 생명체의 정보란 무엇인가 1. '진화'만큼 오해하기 쉬운 개념이 또 있을까? 2. 생물 과목을 공부하는 수험생은 물론이거니와, 인문,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사람, 신학적 고민을 하는 신앙인에게 '진화'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가 된다. '진화' 개념을 오해할 경

래디컬 페미니즘 특집 : 어떻게 '평등의 사상'은 '파시즘'이 되었는가? (워마드, 한남충과 김치녀, 하버마스) [내부링크]

1. 자신만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차이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2. 하지만 존중이 불가능한 상황도 있다. 한 사람의 자유는 그것이 실현되는 과정 속에서 때때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침해한다. 양립할 수 없는 차이의 충돌 앞에서, "모든 차이를 존중해야 한다"라는 말은 공허한 말이 된다. 그게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선택과 결단'이 중요하다. 이때, 우리에게는 몇 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3. 첫 번째 선택지는 '토론'이다. 토론은 '이성의 논리'에 의존한다. 만약, 상대방에게 자신의 주장을 설득시킬 수 있다면, 생각의 차이는 '저절로' 좁혀지게 된다. 물론, 현실에서 '100%의 설득'은 거의 없다. 모든 사람의 생각은 저마다 '그럴 듯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토론은 '이기고, 지는 결투'가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중간 지점'을 발견하기 위한 '협업'의 과정이다. 그 과정에는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 오로

성서의 발명 : 성서는 정말로 '무오류한 글'인가? [내부링크]

1. 우리는 모세를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의 저자로 알고 있다. 하지만 모세 오경은 '모세'가 직접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세 오경에는 모세의 죽음이 등장한다. 스피노자는 신정론에서 '모세 오경'이 모세에 의해 쓰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정오의 태양보다 더 명확하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모세를 오경의 저자로 알고 있는가? 4.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의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벳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느니라 7. 모세가 죽을 때 나이 백이십 세였으나 그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8. 이스라엘 자손이 모압 평지에서 모세를 위하여 애곡하는 기간이 끝나도록 모세를 위하여 삼십

기독교의 발명 : 제국의 헬레니즘과 식민지의 헤브라이즘 [내부링크]

1. '구약'과 '신약'은 '하나의 성경'이다. 하지만 두 책은 때때로 이질적인 책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었던 '구약의 하나님'과 예수와 초대 교회와 함께 했던 '신약의 하나님'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또 신약에서는 '구약'에서 들어보지 못했던 '생소한 단어'가 갑자기 등장한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세례, 십자가, 열심당, 헬라"와 같은 단어를 구약에서 본 기억이 있는가? 2. 저번 글에서 나는 '구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요시아 왕의 종교 개혁'과 '바빌론 유수'라는 두 시기를 충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신약'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시기를 주목해야 하는가? 우리는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와 신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 사이에 벌어진 복잡한 사건들을 주목해야 한다. '신구약 중간사'라고 불리는 바로 그 시기다. 유튜브에 중간사를 전공한 분의 훌륭한 강의가 업로드되어 있다. 궁금한 사람들은 참고하면 신약을

후속 공부 가이드 : 토론에서 절대로 지지 않는 꿀팁 [내부링크]

1. 토론은 승자를 패자를 가르는 싸움이 아니다. 오직 '만족스러운 토론'과 '불만족스러운 토론'이 존재할 뿐이다. 만족스러운 토론에서는 두 사람이 모두 승자요, 불만족스러운 토론에서는 두 사람이 모두 패자가 된다. 2. 일단, 상대를 이겨먹으려고 생각하는 사람과 대화를 피해야 한다.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사항이다. 왜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과 '대화'를 나누려고 하는가? 토론을 '이기고 지는 문제'로 생각하는 사람과 '정상적인 토론'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불만족스러운 토론에서는 모두가 '패배자'일 뿐이다. "아싸, 이겼다!"라고 생각하는 '신난 패배자'와 "더러워서 상대를 말아야지!"라고 생각하는 '빡친 패배자'가 남게 된다. 1. 확대해석하라 2. 동음동형이의어를 사용하라 3. 상대방의 구체적인 주장을 절대화하고 보편화하라 4. 당신의 결론을 상대방이 미리 예측하지 못하게 하라 5. 거짓된 전제들을 사용하라 6. 은폐된 순환 논증을 사용하라 7. 질문 공세를 통해 상대

신학의 발명 : 초월성의 플라톤, 내재성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주의와 주지주의) [내부링크]

초월, 믿음, 외적 개입, 예측 불가능, 주의주의, 현상 기술, 물질의 불활성, 예정론, 귀납, 개연성, 기계론, 불가지론. 내재, 이성, 내적 본질, 예측 가능, 주지주의, 본성 규명, 물질의 활성, 자유의지, 연역, 필연성, 유기체론, 목적론. 지금까지의 줄거리 지금까지의 줄거리를 간략히 요약해보자. 우리는 '성경'과 '기독교'가 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신권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던 요시아왕, 바빌론 제국으로 끌려간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는 '종교적 구심점'이 필요했다. 그래서 '성경'과 '유일신 교리'가 발명된 것이고 '헤브라이즘'이라는 독특한 문화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것이다. 헤브라이즘의 핵심은 '제의 중앙화'와 '반제국 사상'이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알렉산더의 정복 전쟁'이 벌어졌다. 헬레니즘 문화가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다. '유대교'도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예수와 사도 바울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미 '식민지의 헤브라이즘'과 '제국의 헬레니

개신교의 발명 : 루터 이전에는 종교개혁이 없었는가? [내부링크]

1. '개신교'는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을 통해 '발명'된 것이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과거에는 '종교개혁'이 없었나? 2. 당연히 아니다. '최초로' 종교개혁을 시작한 사람은 루터가 아니었다. 기독교 역사상, 셀 수 없이 많은 '종교 개혁'의 움직임이 있었다. 개혁이 반드시 '가톨릭 교회'와 불화를 야기했던 것도 아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와 '도미니코 수도회'와 같은 '탁발수도회'는 성직자들의 사치와 도덕적 방종을 비판했던 '종교개혁가'들이었다. 그들은 '청빈'과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다. '알비파' 또한 가톨릭 교회의 사치와 방종에 반발하며 등장한 중세의 이단이다. 그들 또한 '청빈'과 '금욕'의 가치를 중시하였다. 루터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면죄부'를 비판하기 이전부터 이미 '청빈'을 강조했었던 무수한 '개혁 운동'이 존재했었다. 3. '성서의 직접 해석' 또한 '루터의 발명품'이 아니다. 성경은 '라틴어'로 쓰였고, 가톨릭 미사는 '라틴어'로 집전되었다. 라

과학의 발명 : 중세에 등장한 근대적 과학(?) [내부링크]

1. 근대 과학은 천문학 분야의 과학혁명을 통해 등장했다. 천문학 분야에서 과학혁명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에서 시작되었고, 티코 브라헤, 요하네스 케플러,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을 통해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의문이 생긴다. 과연 코페르니쿠스 이전에 근대적인 과학은 없었는가? 2. 당연히 아니다. 1300년, 전통의 길(via antiqua)을 부정하고, 근대의 길(via moderna)을 따를 것을 천명했던 사람들이 있다. 옥스퍼드 대학, 파리 대학에 소속된 사람들은 마치 '근대 과학'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연구 방법론을 보여주었다. '장 뷔리당'과 '니콜 오렘'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때, 윌리엄 오컴의 '유명론'은 새로운 연구 방법론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사상적 토대를 제공했다. 그들은 필연성에 대한 개연성의 우위, 법칙 설명에 대한 경험 서술의 우위, 형이상학에 대한 논리학의 우위를 강조한다. '근대의 길(via moderna)'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과학'을 촉발

케플러의 노빠꾸 인생 : 신학자의 과학과 과학자의 신학 [내부링크]

목사 지망생 케플러 : 불도저와 같은 신념 케플러 3법칙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케플러는 '천문학자'가 아니었다. 요하네스 케플러의 꿈은 '목사'였다. 그는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나, 아델베르크 중등 신학교, 마울브론 고등 신학교를 거쳐 튀빙겐 대학교 합격했다. 그의 전공은 '신학'이었다. 그는 꽤나 고집이 강한 인물이었다. 중등 신학교를 다닐 때에 '칼빈의 성찬 교리'를 비판하는 강의가 열렸다. 칼빈은 루터교의 논적이었다. 하지만 고집이 강한 케플러는 '성서의 본문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직접' 판단했다. 그는 '신학'에 꽤나 진심이었다. 13살이 되던 해에는 튀빙겐 대학에 '예정 교리'에 관한 논문을 요청해서, 교리의 논쟁점을 다루는 신학 논문을 받아 읽을 정도였다. 튀빙겐 대학을 졸업할 때, 케플러의 신학적 고민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표현된다. 나는 그리스도의 위격에 관한 교리에서 칼빈주의와 예수회가 일치하고 그들의 입장이 초대 교회 교부들과 해석가들과 동일하다는 것을 알게 되

ADHD 특집 : 산만함은 치료해야 하는 질병인가? [내부링크]

1.ADHD 환자가 꼭 약을 먹어야 하냐고? 2. 제발 약을 먹어라. 쉽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돌고 돌아서 해결할 일이 아니다. 3. 그것을 고치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집이다. 마치, 시력이 나쁜 사람이 안경을 쓰지 않는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과 같다. 당연히 사는 것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을 것이다. ADHD 치료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이 죽는 것은 아니다. 본인과 주변 사람들이 약간의 불편함을 느낄 뿐이다. 4.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을 상대하고 있다면, 설득의 관점을 바꾸는 편이 좋다. '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백날 떠들어도 소용이 없다. '치료를 받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구태여 '그 불편함을 감내할 이유'가 있는지 물어야 한다. 5. 불편함에 이미 적응을 마친 사람들은 별다른 문제를 못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불편함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너무 익숙해져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

근대의 발명 : 서양이 동양을 추월할 수 있었던 이유? [내부링크]

* 자본주의 :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중세 가톨릭은 보수적인 농업 사회였다. 농업 사회에서 '부'는 '농지의 크기'에 비례한다. 봉신과 주군은 '토지'를 매개로 하여 '봉건 계약'을 맺었으며, '정해진 계급'에 따라 부여받는 토지의 '크기'가 정해졌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땅의 크기는 바뀌지 않는다. 토지는 신분적 계약에 묶인 생산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톨릭은 탐욕을 죄로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펑펑 사용했다. 마땅히 쓸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자들의 사치는 탐욕이 아니었다.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어서 쌓아놓는 행위야말로 '진정한 탐욕'인 것이다. 당연히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서, 부를 재투자한다는 자본주의적 발상을 떠올리지 못했던 것이다. 막스 베버는 가톨릭의 윤리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과거 가톨릭은 필요 이상으로 돈을 벌거나 저축해 자본을 축적하는 것을 죄악시했고, 노동을 인간의 원죄에서 비롯된 고통으로 봤다" 그런데 개

공지사항 : 글을 쓰는 이유 [내부링크]

1. 내 자신을 위해 쓴다. 누구도 읽어주지 않는다고 해도, 글쓰기는 그 자체로 유익한 활동이다. 나는 내 자신을 위해 글을 쓴다. 내가 지금까지 접했던 흥미로운 정보를 다시 정리하기 위함이다. 이 과정에서 잊어버렸던 정보가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심지어 과거에는 보이지 않았던 정보들 사이의 흥미로운 연관을 발견할 때도 있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앎은 점점 더 깊어진다. '정보량'은 크게 늘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정보와 정보 사이의 '관계망'은 더욱 촘촘하게 구성된다. 나는 글을 쓰면서, 동시에 배운다. 여러분들을 가르치려고 드는 것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여러분들도 대충 파악하셨겠지만, 나는 설명하는 것을 꽤나 좋아한다. 정말 맛있는 음식점을 발견했을 때, 홍보비를 받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홍보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오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책을 읽다가 충격적인 정보를 접했을 때, 나 또한 입이 근질거려서 참을 수 없는 상태에 빠진다. "너네 그 음식점

공지사항 : 광신도 상대법 [내부링크]

이 블로그에는 '종교'와 관련된 글이 많다. 이번 글에서는 그 이유를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블로그 주인장의 신앙 경력 나는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다니는 교회에 출석했었다. 그곳은 예장통합 교단에 속한 교회였고, 담임 목사님은 총회장을 맡았던 적이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사이비 이단'과 꽤나 거리가 먼 교회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다녔던 미션스쿨 또한 마찬가지다. 현대 종교의 '탁지원 소장'을 초청해서 몇 차례나 '이단 특강'이 열리기도 했다. '사이비 이단'과 꽤나 거리가 먼 단체인 것이다. 물론, 과거에 개신교 신앙에 불만을 느꼈던 적도 있었다. 어떤 불만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상태에 있지만, 지금은 부모님을 따라 가끔씩 교회에 출석한다. 절에도 나가지 않고, 성당에도 나가지 않으니, 나는 일단은 '개신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개신교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

근대인의 발명 : 쪽빠리와 조센징 [내부링크]

한국인들에게 '제국주의 일본'은 두 가지 상반된 이미지로 표헌된다. 하나는 '전통과 근대'라는 이분법을 중심에 둔 근대주의 서사다. 그들은 일본이 우리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미개한 전통'을 더욱 나쁜 '악'으로 규정한다. 그들의 이분법에 따르면 '근대'는 이성적인 것, 합리적인 것, 문명적인 것, 유능한 것과 관련을 맺는 반면, 전통은 비이성적인 것, 비합리적인 것, 맹목적인 것, 야만적인 것, 무능한 것과 관계를 맺는다. 따라서 그들은 일본을 우호적인 입장에서 그려낸다. '일본'은 나쁘지만, 식민 통치 시기에 '일본보다 더욱 나쁜 악'을 몰아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제국과 식민'을 중심에 둔 민족주의 서사다. 그들은 '폭력'과 '차별'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 일제가 얼마나 많은 자원을 수탈해갔는지, 당시 조선인들이 얼마나 불평등한 환경에 있었는지를 주목한다. 그들은 조선이 '무능한 상태'에 있지 않았고,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전통과 근대 : 한의학은 정말로 엉터리 의학인가? [내부링크]

전통과 근대의 이분법 : 틀린 것인가, 다른 것인가? 현대인들은 '근대적 상식'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현대인들의 눈에는 '전통적 사고'란 '비이성적 사고'로 보일 것이다. '근대적 합리성'에 따르면 전통적 믿음이란, 지극히 비합리적이고, 지극히 야만스럽고, 지극히 무능한 생각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전통의 합리성'이 작동하는 방식이 '근대적 합리성'의 작동 방식과 다를 뿐이다.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근대적 합리성'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과거의 합리성' 개념을 평가하고자 한다. 하지만 '당대의 생각'은 반드시 '당대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한 상태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여기 '사회문화적 배경'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조선말에 있었던 흥미로운 일화다. 외국에서 파견된 서양의 외교관들은 테니스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고종이 그들이 하고 있는 운동을 보았다. 여러분들은 고종의 입에서는 어

특집호 : 주역과 황제내경 (동양적 사고의 특징) [내부링크]

오늘은 주역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역(易)'은 '변화'를 의미한다. 주역은 '변화의 원리'를 다룬 책이다. 주역의 세 가지 기본 원리는 변역, 불역, 간이다. '변역'은 만물은 계속해서 변한다는 뜻이고, '불역'은 그것이야말로 변치 않는 유일한 변화의 원리라는 것이다. '간이'는 너무나도 쉽고 평이해서 누구나 쉽게 '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주역에는 '64괘'가 등장한다. 갑자기 64괘를 살피는 것은 부담이 될 것이다. 일단은 두 가지 사실만 기억하자. 하나는 쌓아올려진 '작대기의 층'이 '6층'이라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작대기의 형태'가 딱 '두 종류'라는 점이다. '긴 작대기'도 있지만, '나눠진 작대기'도 있다. 일단은 이 정도만 기억하고 넘어가자. 지금부터는 작대기를 하나씩 쌓아서 '6층'까지 올려보도록 하겠다. (1층) 태극(1)에서 '음과 양(2)'이 나온다. '음과 양'은 각각 '양효'와 '음효'로 표현된다. '음과 양'은 '추상적 코드'다. 둘로 나

특집호 : 고려는 정말로 황제국인가? (고려 거란 전쟁, 고려 여진 전쟁, 고려 몽골 전쟁) [내부링크]

고려는 정말로 황제국이었나? : 반쪽은 황제, 반쪽은 왕 요즘 유행하는 '고려거란전쟁'에서는 고려가 '황제국(皇帝國)'임을 강조하고 있다. 흔히 고려를 '황제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된 근거는 다음과 같다. 건국 초기에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고, 해동(海東)의 천자국(海東天子國)이라는 정체성을 대내외적으로 내세웠다. 심지오 다른 나라(탐라국, 여진족 등)에게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그들이 가장 주목하는 근거는 '중국의 다른 황제국'과 교환된 서신이다. 그 서신 중에 고려를 '황제국'으로 표기한 기록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중국의 황제국' 또한 고려를 '동등한 황제국'으로 대우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안'에서 고려가 '황제국'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바깥'에서 고려는 '황제국'이 아니었다. '고려'는 외왕내제(外王內帝)라는 독특한 체제를 사용했다. '밖(外)'에서 부를 때는 '왕(王)'이고 '안(內)'에서 부를 때만 '황제(帝)'라는 것

동양의 두 하늘 : 역법과 우주론 (왜 과거 사람들은 그토록 천문을 중시했는가?) [내부링크]

① 동양에서 '천문'이 중요했던 다섯 가지 이유 동양에서 '천문'은 가장 중요한 학문 중 하나였다. 첫째로, 천문은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는 '실용적 학문'이다. 달력과 시계는 '하늘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활용해 만든다. '천문 역법'이 더욱 정확해지면, 시간을 더욱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된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시간은 무척이나 중요한 정보였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씨를 언제 뿌리고, 추수를 언제 시작할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도 선조들에게는 '정확한 달력'이 필요했다. 하늘을 관찰하여 백성들에게 때[時]를 알린 까닭 중국 고전인 『서경(書經)』의 ‘요전(堯典)’에는 “일월성신을 역상(曆象)하여 삼가 백성에게 때를 알린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 말은 하늘의 움직임을 살펴 백성들에게 농사에 필요한 시기를 제때 알려 준다는 ‘관상 수시(觀象授時)’를 뜻한다. 농사를 중시하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에서도 관상수시는 임금의 중요한

토착왜구와 종북좌파 (극과 극은 통한다) [내부링크]

악마는 어디에 있는가? 세상에 '악마'는 없다. 홀로코스트와 난징 대학살과 같은 '인류 최악의 범죄'는 '머리에 뿔 달린 악마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다. 그들은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이 바로 '악마 같은 행동'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들은 모두 주어진 '상황'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대학살'은 그들의 '최선'이 만들어 낸 결과다. 그러니 '독일'과 '일본'을 '악마 같은 민족'이라고 비하해서는 안 된다. 우리 또한 '그와 같은 상황'에서 '악마 같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누군가는 나를 일제의 학살을 옹호하려는 '토착왜구'로 볼 것이다...) 아니,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한민족'은 '선량한 민족'이기 때문에, 틀림 없이 다르게 행동했을 거라고?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악마'에 근접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욕했던 '악마들(독일, 일본)' 또한 '정확하게 그와 같은 논리(선량한 아

나의 증산도 일일체험기 [내부링크]

옛날에 증산도 회관에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직접 찾아갔던 것은 아니다. 친구들과 놀던 중, 모임이 너무 일찍 끝났던 적이 있었다. 자세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붕 떠버렸다. 길을 어슬렁거리던 찰나에, 어떤 증산도 신도가 말을 걸어왔다. 인상이 참 좋아보인다고 하더라.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잠깐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했다. 꽤나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먼저,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은 그들의 '도(道)'가 절대로 '노장의 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에는 조상님 이야기를 하다가 나중에는 환단고기로 주제가 바뀌었다. 역사를 꽤나 좋아하는 분이었다. 그때 들었던 설명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사람은 '이스터 섬'의 '모아이 석상'이 사실 '환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다큐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흥미진진한 이야

어떤 교수님과의 일화 [내부링크]

나는 온갖 말들에 휘둘리곤 했다. 어떤 때는 신앙인이었고, 어떤 때는 무신론자였다. 어떤 때는 민족사관을 통해 역사를 해석했고, 어떤 때는 식민사관을 통해 역사를 해석했다. 때로는 과학지상주의에 빠지기도 했으며, 과학의 한계를 넘어선 신비주의에 눈을 돌렸던 적도 있다. 때로는 과감한 사회변혁을 요구했던 사회주의자였고, 때로는 작은 정부를 원하는 시장지상주의자였다. 때로는 구조를 통해 명확하게 세상을 이해하려고 했고, 때로는 구조의 한계를 실감하며 해체에 빠져들었다. 너무나도 부끄러운 시행착오다. 나는 과거에 꽤나 열심히 공부를 했었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배울 수록 멍청해졌고, 배울 수록 편협해졌다. 나는 책에서 보았던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보았는데, 그것을 벗어난 현상을 전부 '잘못된 것'으로 규정했다. 다른 것과 틀린 것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론적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극단적인 교정'을 정당화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은 다 지나

식민지와 근대화 (천황 폐하의 은덕에 대한 고찰) [내부링크]

일제강점기 시기에 인구 사망률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이는 수치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팩트'다. 누군가는 '근대 의학'이 도입되어 백성들이 '발전한 의료'의 혜택을 누렸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그런가? 일단 '한일합병' 당시 쓰였던 '데라우치 총독'의 포고문을 살펴보자. 인생의 우환은 질병의 혹독함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종래 조선의 의술(醫術)은 어린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병고(病苦)를 구제하기에 부족하여 타고난 수명만을 온전히 하는 것이 가장 통탄스런 바이다. 지난번 경성(京城)에 중앙의원(中央醫院)을 개원하였고 또 전주(全州) 청주(淸州) 및 함흥(咸興)에 자혜의원(慈惠醫院)을 설립한 이래로 백성이 그 은혜를 입은 자가 극히 많으나, 아직 전국에 보급되지 못한 것이 유감이므로 명령을 내려 다시 각 도에 자혜의원을 증설케 하며 명의(名醫)를 두고 양약(良藥)을 구비하여 기사회생(起死回生)의 인술(仁術)을 널리 베풀게 하는 것이다. 돌아보건대, 인문(人文)의 발달은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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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 공부 가이드 : 블로그 주인장의 책 추천 TOP 10 [내부링크]

인문학 초심자를 위한 추천 도서 10선 1.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난이도 : (2) - 초심자도 술술 읽을 수 있는 책. 추천도 : + (5 + α) - 역사, 철학, 사회학, 과학, 경제학을 넘나드는 '인간'에 대한 통합적 분석을 보여줌. 특징 : 잡다한 책들을 '여러 권' 읽느니, 사피엔스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시라. 인문학의 중요한 지식을 두루 접할 수 있다. 긴 말이 필요 없다. 인문학을 이제 막 공부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책 중 하나다. 목차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 서문_ 인공지능의 시대,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서문_ 한국의 독자들에게 역사연대표 제1부 인지혁명 1. 별로 중요치 않은 동물 2. 지식의 나무 3. 아담과 이브가 보낸 어느 날 4. 대홍수 제2부 농업혁명 5. 역사상 최대의 사기 6. 피라미드 건설하기 7. 메모리 과부하 8. 역사에 정의는 없다 제3부 인류의 통합 9. 역사의 화살 10. 돈의 향기 11. 제국의 비전 12. 종교의 법

시간과 공간의 한계 : 과학과 종교는 양립불가능한가? [내부링크]

1. 공간의 한계(최대) : 관측 가능한 우주 2. 공간의 한계(최소) : 플랑크 길이 3. 시간의 최대 크기(최대) : 138억년 4. 시간의 최소 크기(최소) : 플랑크 시간 5. 수의 크기 : 우주적 규모의 수를 체감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다. 6. 통합본 7. 관련된 내용 * 「3절 : 망각과 새로운 시작, 뭉침과 흩어짐, 중간 층위들 (1)」에서 '세계관 전복의 사례' 설명을 참고하라. * 「4절 : 노드 만들기, 층위 뒤섞기, 블랙박스 모델」에서 설명한 '우주적 규모의 시공간'을 참고하라. 인간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가?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사람들은 "종교가 옳은가, 과학이 옳은가"라는 논쟁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러한 토론은 시작부터 완전히 글러먹었다. 첫 질문부터 이미 '양립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욕이 넘치는 극렬주의자'들은 '다른 분야'를 '정복'하려고 한다. 그들은 '종교적 설명'을 통해

요약 및 결론 : 실용 규칙들 [내부링크]

실용 규칙 1 : 모든 사람은 ‘가장 단순한 앎’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사람들은 모두 '맨몸'으로 ‘복잡한 세상’에 던져진다. 모든 사람의 ‘앎의 출발점’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가장 단순한 앎'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가장 단순한 앎'은 유전자에 각인된 '본능'과 널리 통용되는 사회의'상식'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능과 상식에 따라 살아간다. 그러한 앎은 '질점' 또는 '진공'과 같은 단순화되고, 이상화 된 전제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만큼 무너지기도 싶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처음 '언어'를 배울 때처럼 '가장 간단한 앎'을 받아들인다. ‘산’은 그냥 ‘산’이다. 이유는 없다. ‘산의 의미’는 이미 그렇게 정해져 있다. '맹목적 학습'에서 중요한 것은 '똑같은 반복'이다. 누군가는 이와 같은 과정에 '불만족'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맹목적 학습의 과정은 불가피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가장 간단한 앎’은 모든 앎의 ‘출발점'이 된다. '출발점'을 없애버린다면, '출발' 자체

시각의 한계 :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 [내부링크]

1.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 우리는 '원자'에서 발생한 '빛의 산란'을 본다. 「4절 : 전일주의(Holism), 합쳐서 뭉뚱그리기, 생기(生氣)의 부활」에서 '이중적 상태'에 대한 설명 참고하라. 2. (세포의 층위) 우리는 어떻게 보는가? : 우리는 '세포들'을 통해 본다. 「4절 : 노드 연결하기, 시스템과 네트워크, 일자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에서 '지네의 딜레마'를 참고하라. 3. (의식의 층위) 우리는 어떻게 보는가? : '뇌'는 '형태'를 '구성'한다. 「2절 : 공포와 비약, 신과 코끼리, 더닝크루거 (1)」에서 '아포페니아'와 '휴리스틱'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라. 「4절 : 초점의 유비와 삼분법적 도식」에서 '화소'에 대한 설명을 참고하라. 4. 시각의 한계 : 없지만 보이는 것 vs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5. 추가 질문 : '다른 생물'은 '무엇을' '어떻게' 보는가? 환경세계(Umwelt) 개념 - 윅스퀼의 짚신벌레 오토포이에시스(autopoiesis) 개념

『 개꿀팁 』 : 설명서 [내부링크]

엄선된 개꿀팁을 담았다. 즐겁게 놀다 가시기를.

논리의 한계 : 있으면서도 없을 수 있는가? [내부링크]

1. 배중률 : P이거나~P다. P이거나 ~P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P) 소크라테스는 죽지 않는다 (~P) 나는 어제 밥을 먹었다.(P) 나는 어제 밥을 먹지 않았다.(~P) 서울은 미국의 수도다. (P) 서울은 미국의 수도가 아니다 (~P) 서울은 남대문에 있다. (P) 서울은 남대문에 있지 않다. (~P)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참'이다. P가 거짓이면, ~P가 참일 것이고 P가 참이면, ~가 거짓일 것이다. 그렇다면... P도 거짓이고 ~P도 거짓인 경우를 상상해 볼 수 있는가? 2. P도 거짓이고, ~P도 거짓인 경우도 있을까?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다. (P)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가 아니다. (~P) 둘 중 하나는 참이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프랑스'에는 '왕'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P'도 거짓이 되고 '~P'도 거짓이 된다. '존재하지도 않는 왕'을 두고 '대머리'인지, '대머리가 아닌지' 논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더글라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 층위란 무엇인가? [내부링크]

1. '층위 개념'을 조금 더 자세히 공부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시라. (관련 개념 : 자기 지시, 전경과 배경, 무한 후퇴, 재귀성, 전일주의와 환원주의 등) 2. 『깨달음의 구조』를 적을 때 '다양한 방면'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주었던 책이다. (여러분들은 '메타-메타 개념', 'PUSH & POP', '괴델부호화', '콰인 문장'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익숙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3. 물론, 쉽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전혀 이해가 불가능한 책은 아니다. 유튜브에 있는 수학 강의를 참고하자. (도움이 될 수 있는 유튜브를 아래에 소개해드릴테니 참고하시라.) 4. 겉모습을 보고 미리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이토록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잘 녹여낸 책은 흔치 않다. (장과 장 사이에서 아킬레스, 거북, 게, 요정, 개미핥기와 같은 '등장인물'이 나와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눈다.) 추천 유튜브 1. 칸토어 2. 괴델 3. 튜링

언어의 한계 : 언어는 사고를 제약하는가? [내부링크]

1. 한국인들은 '문어'와 '낙지'를 구분할 수 있다. 아주 먼 옛날부터 문어와 낙지 같은 두족류 생물(頭足類)을 '먹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두족류(頭足類)는 머리(頭)에 발(足)이 달린 생물을 칭하는 말이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문어와 낙지 같은 두족류 생물을 기피했었다. 2. 한국인들은 '낙지의 맛'을 알고 있었지만, 서양 사람들은 '낙지의 맛'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때, '맛'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외양'의 차이를 넘어선 '내부의 질적 차이'다. 한국인들은 '문어'와 '낙지'의 차이를 분명하게 느낀다. 우선, 조리 방식이 다르다. 낙지는 산채로 먹지만, 문어는 산채로 먹지 않는다. 입 속에서의 식감도 다르며, 찍어 먹는 소스도 다르다. 마지막으로, 낙지에는 "쓰러진 황소도 일으킨다"와 같은 독특한 의미가 부여된다. 하지만 문어에는 원기와 관련된 독특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다. 3. 반면, 영어를 쓰는 사람들에게 '두족류 생물'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차이'는

반드시 걸러야 할 인간 유형 : 자기애성 성격 장애 [내부링크]

1. 자기애성 성격 장애는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인간의 유형' 중 하나다. 자세한 설명은 유튜브의 설명을 참고하시라. 2. 물론, 관계를 '완전히 차단'할 필요는 없다. '자기과시'의 과정 속에서 예상하지 못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칭찬'은 그들을 다루는 효과적인 수단이다.) 3. 하지만 '거리'가 너무 많이 가까워진다면,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보일 것이다. (권력욕, 시기 질투의 화신이기 때문에 주변에서 '피곤한 정치질'이 끝나지 않는다.) 4. 그들은 세상을 보는 '렌즈'가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와 같은 왜곡은 본인조차 속일 정도로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왜곡'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쉽다. 멀리서 보면 "GOOD(좋음)"으로 보였던 것들 가까운 곳에서 보게 될 경우 "BAD(악함)"로 보이게 된다. '자신감'은 전자에 속하고, '나르시시즘'은 후자에 속한다. "가로 방향으로 읽는 겁니다. ex) 강함-쎈척, 화려

반드시 걸러야 할 인간 유형 : 경계성 성격 장애 [내부링크]

1. 자기애성 성격 장애가 '그냥 커피'라면, 경계성 성격 장애는 성격 장애의 'TOP'다. 2. 정신병원에 가야 하는 것은 '본인'인데, '주변 사람'들을 정신병원에 보내는 것으로 유명한 성격 장애다. 3. 물론, 사랑은 때때로 우리에게 '고통'을 준다. 사랑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타산적 관계를 넘어선 관계다. 4. 관계를 맺는 두 사람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어떤 고통'이라도 '함께 견딜 수 있는 용기'다. 5.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참된 사랑'과 '극단적 의존'을 혼동한다. 그래서 '정리해야 할 관계'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못한다. 6. '극단적 의존'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행동한다. 이때 발생하는 '고통'은 '자신의 충동대로 행동한 결과'이며, '인내의 주체'는 '상대방'이 된다. 반면, '참된 사랑'은 (절대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더라도, 상대를 '배려'하기 때문에, 기꺼이 고통을 참아낸다. 7. 두 가지

뭉침과 흩어짐 : 물리학의 엔트로피와 불교의 연기법 [내부링크]

1. 우리 몸을 이루는 재료 : '별 먼지'가 뭉치고 흩어짐을 반복한 것이다. ('우주적인 규모'의 시간과 공간) 2. 어떻게 뭉치고 흩어지는가? : '복잡한 인과의 연결망'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적인 규모'의 시간과 공간) 3. '생명'은 무엇인가? : '엔트로피'와 '네겐트로피'의 '일시적 균형'을 이룬 결과 형성된 '찰나의 뭉침'이다. (물론, '정보의 탈신체화'는 강한 비판을 받고 있는 관점이다. 정보의 '물질성'과 '매체성'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4. '나'는 무엇인가? : 나는 '불변의 영혼'이 아닌, '찰나의 뭉침'이다. 나는 '단수의 존재'가 아니라, '다수의 존재자들'이다. 5. 불교의 '연기법'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용수(나가르주나)'가 저술한 『중론』을 자세히 살펴보시라. 6. 관련된 설명 * 「4절 : 앎과 함의 맞물림, 구분짓기와 경계변화」에서 '뭉침과 흩어짐' 개념 * 「4절 : 노드 만들기, 층위 뒤섞기, 블랙박스 모델」에서 '복잡한

이해의 깊이 : 잘 알고 있다는 착각 (담배 끊는 꿀팁, 거꾸로 뒤집은 푸코, 부정과 긍정) [내부링크]

1. 나는 누구라도 담배를 끊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부모와 자녀를 대나무숲으로 끌고 가서, 머리에 총을 겨누고, "지금부터 네가 담배를 피우면, 곧바로 방아쇠를 당길 것이다"라고 협박을 하면 된다. 다소 과격하고 불편한 상상인가? 그런데 실제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해보자. 2. 이처럼 '생생한 협박'을 듣게 된 사람은 과연 또 다시 담배를 피울 수 있을까? 기존의 습관이 제아무리 오랜 역사를 갖더라도, 담배의 유혹이 제아무리 강렬하더라도, 소중한 가족의 목숨에 비하면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을 감시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3. '부모와 자식이 대나무 숲에 묶여 있는 상황'을 '허황된 상상'이 아니라, '리얼한 현실'로 착각할 수 있다면, 세상에는 바꾸지 못할 것이 없다. 물론, 나는 여러분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이상한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상상'은 제아무리 리얼해져도 '상상

이해의 깊이 : 이미 알고 있다는 착각 (욕망의 한계, 이상적 쾌락 추구법, 구멍과 흔적) [내부링크]

1. 인간의 욕망은 멈추는 법을 모른다. 욕망의 본성은 그것의 실현이 끝없이 '지연'되고 '유예'된다는 점에 있다. 원리적 한계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들의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완벽한 만족의 상태'를 그대로 구현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들은 그 상태에서 또 다른 '결핍'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000억만 있으면, 정말 행복할텐데"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1000억'이 실제로 '결핍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욕망의 완전한 실현'은 일어나지 않는다. 2. 욕망은 장독대에 뚫린 구멍과 같다. 구멍은 계속해서 넓어진다. '마약 중독'은 구멍 확장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우리는 '마약'이 '극도의 쾌감'을 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극도의 쾌감'이라는 말은 실제로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경험하는 '극도의 쾌감'이 아니다. "개라는 관념은 짖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현실의 개'와 '개라는 관념'은 서로 구분된다. 마찬가지로, 현실에서 느낄 수

앤드류 테이트 특집 : 어떻게 '무례함'은 '강자의 도덕'이 되었는가? (레드필, 초인과 알파메일, 이대남) [내부링크]

1. 요즘 뉴스의 헤드 라인을 보고 있자면, 정신이 참 어질어질하다. 언제부터였던가. 배려와 인내가 멍청하고, 못난 행동으로 비추어지고, 오만방자한 행동을 잘난 사람의 특징으로 포장하기 시작한 시점이. 2. 배려를 하기 위해서는 '현명함'이 요구된다. '진정으로 훌륭한 배려'는 타인의 입장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을 정도로 '사려 깊은 인간'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얼마나 많은가.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라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진실된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배려에는 반드시 '현명함'이 필요하다. 3. 물론, 좋은 배려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대방의 입장을 부지런히 살펴보아야 한다. 좋은 배려는 상당한 '노력'을 요구한다. 이것은 꽤나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기 때문에, 타인을 향한 '진실된 마음'이 없다면 지속되기 어렵다. '좋은 관계'는 '좋은 배력'의 선행 조건인 셈이다. 4. 마지막으로, 좋은

[감정] 안치환 : 애끓는 분노 [내부링크]

1. 민중 가요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인다. 그런데 가수의 소리에 따라 감정을 흔드는 방식은 조금씩 다른 것 같다. 김광석의 소리는 처량한 감정을 부른다. 노찾사의 노래는 무겁고 엄숙하다. 하지만 안치환의 소리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애끓는 분노'다. 사람들은 어떤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단전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낀다. 안치환의 노래는 바로 그런 분노를 표현한다. 2. 안치환의 목소리는 사람의 마음에 불을 지핀다. '빈대에 대한 분노'에 '초가삼간을 태울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처럼, 안치환의 노래에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어떤 친구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느닷없이 데모가 하고 싶어지는 목소리"인 것이다. 사랑의 달콤함. 이별의 쓸쓸함. 파티의 흥겨움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가수들은 많다. 하지만 이런 감정을 표현하는 가수는 흔치 않다. 안치환은 무척이나 순도 높은 '분노'를 표현한다. 3. '안치환의 분노'는 슬립낫의 "people = shit"

선생님 특집 : 친구-선생님 (됨됨이를 살피는 꿀팁, 격의 없는 관계, 우정을 빙자한 동정) [내부링크]

우리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선생님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① 첫 번째 부류의 선생님은 ‘친구’다. 우리는 부모님보다, '친구-선생님'에게 더욱 많은 것을 배운다. 1. 친구는 '비판'에 열려있어야 한다. 상대방의 기분이 상할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오늘 날의 관계에서는 “그래그래”라는 ‘무조건적 공감’이 강조된다. 하지만 그것은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값싼 위로'일 뿐이다. 반면, '진심 어린 비판'은 누구나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가벼운 조언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친한 친구'에게 들을 수 있는 '값진 비판'이다. 물론, 잠깐은 비판을 듣는 친구의 '기분'이 나쁠 수 있다. 하지만 '진정성 있는 비판'은 '관계'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가볍고 피상적인 관계에서 '진심 어린 조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누구에게나 ‘사고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 온다. '친구'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사람이 '무너진 균형'

선생님 특집 : 어른-선생님 (한심함의 상대성, 계약에 묶인 관계, 동정에서 자비로) [내부링크]

오늘은 ‘어른-선생님’이 무엇인지 이야기해보자. ‘친구-선생님’을 정의하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교학상장(敎學相長)’이라면, ‘어른-선생님’을 정의하는 핵심적 키워드는 ‘자비심(慈悲心)’이다. ‘어른’을 ‘어른’으로 만드는 것은 ‘나이’가 아니다. 그것은 ‘겉보기 차이’일 뿐이다. ‘어른’의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친구’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친구 관계’는 ‘수평적 관계’다. ‘한심함’은 ‘관계의 사형 선고’를 의미한다. ‘한심함’을 느끼는 순간 ‘수평적 관계’는 무너진다. 이 세상에 ‘영원한 우정’은 없다. ‘든든한 우정’을 보증하는 힘은 ‘도원결의’와 같은 ‘거창한 선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우정 영원히”와 같은 ‘유치한 선언’은 도리어 ‘관계의 불안정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다. ‘든든한 우정’은 두 사람이 함께 쌓아온 ‘관계의 역사’가 보증한다. 잠깐은 “왜 저렇게 한심하게 행동하지?”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함께 쌓아온

후속 공부 가이드 : 키메라와 아상블라주 [내부링크]

(오타와 비문은 시간이 있을 때, 수정하겠음.) 후속 공부 가이드 : 키메라와 아상블라주 우리는 '음악'을 들을 때, 그것의 '멜로디'를 기억한다. '멜로디'는 '전경'에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음악'만 들을 수는 없다. 우리는 '미세한 잡음'까지 동시에 듣는다. 하지만 '잡음'을 기억할 수는 없다. 아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때때로 '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실제로 당신은 오늘 내내 '잡음 투성이의 소리'를 듣고 있었다. 여러분들의 몸은 자동적으로 '신호와 잡음'을 구분한다. 그래야 살 수 있다. '선명한 신호'는 '잡음'을 배제하여 얻어낸 결과물이다. '잡음'이 밑으로 가라앉으면, 그것의 '신호'는 더욱 선명해진다. 그런데 그게 '후속 공부 가이드'와 무슨 상관이냐고? 나는 지금부터 '책의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모든 앎에는 '전경과 배경'이 있다. 우리들은 그것을 살펴볼 것이다. 왜 그래야 하냐고? 첫째로,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잡음과 같은 앎'의 존재

후속 공부 가이드 : 블로그 주인장의 인생 회고담 [내부링크]

이번 글에서는 블로그 주인장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내가 이곳저곳에서 '폐품'을 모아, 그것들을 '변형'하고, '결합'시켰던 구체적인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시행착오의 역사'에 대한 '구구절절한 회고담'이다. 물론, 그것은 유난스럽게 떠벌릴 만한 '대단한 사실'이 아니다. 대단할 점이 거의 없다는 점이야말로, 참 대단한 점이 아닐까. 오히려, 나의 인생은 부끄러운 흑역사의 연속이었다. 여러분들에게 자랑할 것이 거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 글은 어떤 사람에게 큰 도움을 될 수 있다. 나와 같은 상태에 놓인 학생이라면, 이 회고담을 '자료집'으로 삼고 기존의 생각을 빠르게 '전환'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런 학생들을 상대해야 하는 선생님들은 '임상 데이터'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학생들이 할 법한 생각들을 이토록 세세하게 기록한 '임상 데이터'는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세 가지 측면

[명보컬] 데이비드 펠프스 : 가스펠에 대한 단상 [내부링크]

1. 걸어다니는 보컬 교과서다. 이 보컬의 훌륭함을 더 부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일단 들어보면 모를 수 없을테니. 2. 종교적으로 몹시 고조된 상태의 인간의 내면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종교 부흥회에 참석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 말의 의미를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자신이 '성령'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더욱.) 성령 임재 현상은 '불'에 비유될 정도로 강렬한 종교적 체험이다. '기쁨/슬픔', '쾌/불쾌'와 같은 이분법에 근거하여서는 그러한 감정의 복잡성을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그것이 '공포'에 가까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공포영화를 볼 때 느끼는 '공포'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독특한 감정이다. 3. 코미디 영화에서 경험하는 '즐거움'은 단순한 '호'에 가까운 감정이다. 우리들은 재미있고 유쾌한 장면을 보고 낄낄 웃는다. 이때, 우리의 뇌에서는 쾌락 물질이 뿜어져 나온다. 즐거움은 즉각적으로 쾌락과 연관된다. 이것이 우리들이 즐거움, 재미, 기

요약 및 결론 : 심화 규칙들 [내부링크]

심화 규칙 1 : 세계는 '복잡'하다. → '무한한 복잡성'에도 '수준차'가 있다. [기본 규칙 1]의 '심화'다. '무한'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무한'이 아닌 것처럼, '무한한 복잡성'에도 분명한 수준차가 존재한다. 삼분법적 도식에 따르면, '세계의 복잡성'은 규모에 따라,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압축되지 않은 세계'는 몸의 '감각'과 이성의 '한계'를 넘어선 지점에 있다. '몸을 통한 생생한 앎'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 차례의 압축'이 진행되어야 하고, '몸을 통한 앎'을 '인간이 다룰 수 있는 형태'로 변환시키기 위해서는 '두 차례의 압축'이 진행되어야 한다. '압축'의 횟수에 따라서, '복잡성'의 규모는 크게 달라진다. 모든 '복잡성 압축'은 '지극히 단순한 앎'을 만들어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 * 「4절 : 초점의 유비와 삼분법적 도식」을 참고하라. 심화 규칙 2 : ‘앎’은 ‘복잡성 압축’의 결과다. → 모든 압축은 '지나친 단순화'다. 물론, '단순과 복잡'

요약 및 결론 : 기본 규칙들 [내부링크]

기본규칙 1 : 세계는 '복잡'하다. '무질서'는 질서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파악 가능한》 ‘질서의 부재’ 상태다.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질서’는 ‘무한하게 중첩된 상태’에 있다. 그 자체로 '무한한 복잡성'을 갖기 때문에, '하나의 앎'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복잡성'을 줄여야 한다. 만약, ‘질서’가 ‘존재와 부재’라는 이분법을 따른다면, ‘질서의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가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어떤 것’이 창조되었는지가 중요하다. ‘기존의 질서 모델’에서 ‘질서’는 마치 ‘벽돌’과 같다. ‘벽돌’과 ‘벽돌’이 쌓여, ‘건물’을 만드는 것처럼 ‘질서’와 ‘질서’가 쌓이는 과정에서 ‘또 다른 질서’가 형성된다. 이때, ‘존재와 부재’의 이분법에 따르면, ‘질서’는 ‘존재하는 것’이 되지만, ‘무질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실제로, ‘완성된 건물’ 어디에도 ‘무질서’의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해석은 오로지 인간이

요약 및 결론 : 다섯 가지 규칙들 [내부링크]

『깨달음의 구조』에 등장하는 모든 내용은 ‘다섯 가지 기본 규칙’을 설명한 것이다. ‘기본 규칙’은 1절부터 4절까지의 내용에 두루 적용된다. 물론, 나는 직접 ‘다섯 가지 기본 규칙’을 명시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책을 열심히 읽은 사람이라면 ‘다섯 가지 기본 규칙’이 전혀 새로운 내용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할 것이다. ‘똑같은 내용’은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었다. 이때, '다섯 가지 기본 규칙'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던 내용의 정체다. 물론, 이 책은 '존재'니, '무한'이니 하는 복잡한 개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었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이 책은 ‘깨달음'이라는 현상을 설명하는 책이었다. 이때, ‘깨달음’은 ‘혼란의 극복’을 의미한다. 나는 '깨달음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특수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다섯 가지 기본 규칙’을 변형시켰다. '다섯 가지 실용 규칙'은 조금 더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변형된 '기본 규칙'이다. ‘다섯 가지 실용 규칙’

총정리 : 전일주의(Holism), 합쳐서 뭉뚱그리기, 생기(生氣)의 부활 [내부링크]

과학이 발달하면, 이전 시대에 '신비한 힘'으로 알려진 것들은 더 이상 '신비한 힘'이 아니게 된다. 사실, '신비한 현상'은 없다. 세계의 모든 변화는 '자연법칙'을 따르고 있다. '신비한 현상'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초월'이나,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신비'를 느낄 뿐이다. 과학은 물론이거니와, 모든 설명에는 '한계 지점'이 존재한다. 지성사의 거인들조차 '한계'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는 '신'을 요청했었다. 그것은 '무지' 또는 '미신'이 아니라, 설명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불가피한 '현실적 타협'이었다. 방금까지 '신비했던 현상'은 언제든 '신비하지 않은 현상'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믿는 '산타클로스'와 같다. 크리스마스 저녁, 부모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은 '부모가 놓아둔 선물'을 보고, 그것을 '산타클로스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산타'는 아이의 눈 앞에 놓인 '선물'에 대한

총정리 : 노드(Node) 만들기, 층위 뒤섞기, 블랙박스 모델 [내부링크]

오늘은 서로 다른 층위를 뒤섞어 새로운 층위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알아보겠다. 지금까지 살폈던 '카드섹션 모델'이 '단순한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라면, '혼층'은 '복잡한 문제를 다루는 방법'이다. 먼저, 「총정리 : 전일주의(Holism), 합쳐서 뭉뚱그리기」를 제대로 숙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해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모두 다 읽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지금부터 설명을 시작하겠다. 우리들은 지금까지 '층위'를 다분히 '수직적인 개념'으로 파악했다. '낱장의 카드의 층위'와 '창발된 패턴의 층위'가 서로 구분되는 것처럼, 각각의 층위에는 분명한 높낮이가 존재한다. 지금까지 다루었던 내용의 핵심은 '층위 구분'이었다. 우리들은 서로 다른 층위의 규칙들이 뒤섞이는 극단적 상황을 살폈으며, 초심자가 층위를 구분하지 못하고 규칙을 마구잡이로 뒤섞을 경우, 다양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보았다. 초심자의 입장에서 '층위의 뒤섞임'은 극심한 '혼란의 단초'가 될 수 있

총정리 : 노드(Node) 연결하기, 시스템과 네트워크, 일자(The One)와 비트루비우스적 인간(Vitruvian Man) [내부링크]

"상자 속 상자" 부분(단수) 속에는 또 다른 전체(복수)가 있다. 한 존재를 '단수'로 보기 위해서는 블랙박스의 '뚜껑'을 닫아야 하며, 그것을 '균열'이 없는 '낱장의 카드'로 보아야 한다. '블랙박스(단수)'의 '뚜껑'이 열리게 될 경우, 그것은 '또 다른 블랙박스들의 연결망(복수)'이 되고, '낱장의 카드(단수)'에 '균열'이 생길 경우, 그것은 '또 다른 카드들이 모여 만든 패턴(복수)'이 된다. 부분과 전체는 '프랙탈 구조'를 갖는다. '부분(단수)' 속에는 '또 다른 부분들(복수)'이 존재하고, '또 다른 부분(단수)' 속에는 '그것을 전체로 삼는 또 다른 부분들(복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부분과 전체의 프랙탈 구조'는 단순한 '사고실험의 결과물'이 아니다. 그것은 '층위'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구분틀'을 유지하는 선에서 '세계의 복잡성'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방법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층위'를 구분하지만, '실제 세계'는 '층위'를 구분하지 않

3절 : 망각과 새로운 시작, 뭉침과 흩어짐, 중간 층위들 (3) [내부링크]

"십계명" ‘법’ 또한 ‘양질 전환의 원리’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주는 분야다. 법을 통해 ‘양질 전환’의 더욱 세세한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자. 법은 집단의 유지에 필요한 최소한의 규칙이다. 만약, 규칙이 없다면 어떤 행동도 가능하게 될 것이며, 홉스가 말했듯,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일어나 집단의 존립이 위협받게 될 것이다. 국가와 같이 거대한 정치집단은 물론이거니와, 작은 단위의 동아리, 심지어 가정과 연인 사이에도 규칙은 존재한다. 집단의 규모가 작아질수록, 성문화되지 않은 법, 암묵적으로 존재하는 법의 비율이 높아진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작은 서점에 복잡한 분류가 번거로운 일이듯, 작은 규모의 사회에서 민법, 형법, 상법, 행정법 등을 엄밀히 구분할 필요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법의 층위를 헌법, 민법, 형법, 상법 등으로 세밀히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집단의 크기가 거대해짐으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된 당연한 변화다. 실제로 법의 발달과정을 보자. 작은 규모의 사회의 최

3절 : 사례 분석 수파리(守破離), 포정해우(庖丁解牛) 모델, 학(學)과 도(道) 모델 [내부링크]

지금부터는 가장 낮은 층위에 있는 ‘약한 깨달음’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장 높은 층위의 ‘강한 깨달음’까지 차근차근 접근하겠다. 미루었던 설명들을 모조리 회수해보자. 먼저, 검도의 수파리(守破離) 모델을 보자. 마지막 단계인 ‘리(離)’는 스승에게 배운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새로운 무예의 세계로 출발하는 단계를 말한다. 검도에서의 ‘깨달음’은 스승의 가르침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은 운동을 배울 때, 먼저 ‘작은 동작’들을 구분하여 학습한다. 번거롭게 동작을 '구분'하는 이유는 더욱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다. 구분 동작은 ‘스승’의 축적된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제자는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것보다, 스승이 정립한 검도의 방법을 따르는 편이 더욱 효율적이다. 하지만 그 동작은 ‘스승의 것’이지, ‘제자’의 것이 될 수는 없다. 제자는 경직된 상태에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죽도를 휘두른다. 이것이 바로 수(守)의 단계다. 하지만 ‘구분 동작’을 학습하

3절 : 사례 분석 '낙타-사자-어린아이' 비유, 코끼리 모델의 붕괴, 깨달음의 비탈길 [내부링크]

자, 다음으로 '더닝 크루거 곡선'과 니체의 ‘낙타, 사자, 어린아이’ 모델을 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했던 플러스, 마이너스, 플러스의 3단계 구조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다만, '강조점'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지금부터는 우리들에게 친숙한 '더닝 크루거 곡선'을 함께 엮어, 니체의 '낙타, 사자, 어린아이' 모델을 살펴보겠다. 이제 우리들은 '3단계의 깨달음'을 더욱 분명한 형태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 어린아이는 천진무구 그 자체이며 망각이다.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며, 쾌락이다.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시원(始元)의 운동이고, 신성한 긍정이다. 그렇다. 나의 형제들이여, 창조라는 쾌락을 위해서는 신성한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욕구하며 세계로부터 격리된 정신은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주인’의 목소리는 ‘낙타’가 사는 세계의 유일한 법칙이다. 낙타는 ‘그 이외의 법칙’을 모르기 때문에, 주인의 말을 묵묵히 따르는 수밖에 없다. 주인은 낙타에게 '정신

3절 : 사례 분석 '직선형의 정반합 모델'과 '원환 정반합 모델' [내부링크]

자, 이제 마지막으로 ‘정반합’ 모델이 남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수파리’, ‘포정해우’, ‘학과 도’, ‘낙타, 사자, 어린 아이’와 같은 모델은 모두 ‘인간의 앎’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일상적 경험'과 결부시켜 모델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반면, ‘정반합’ 모델은 ‘존재 일반’의 모든 변화를 논한다. 인간은 존재이다. 그리고 지식도 존재이며, 기술도 존재다. ‘존재 일반’의 변화를 논한다는 것은 인간, 인식, 가치 등을 모두 아우르는 ‘근본적 원리’를 설명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들의 모든 생각을 지탱하는 ‘존재론’이며, 모든 생각들이 반드시 통과하는 ‘의무적인 통과지점’이 된다. '존재'에 대한 생각이 변할 때, 우리들은 세계 인식이 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강한 깨달음'은 가장 높은 추상성을 갖는다. 인간을 철저하게 배제할 경우, 조금 이해가 어려울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시간에 곧바로 인간을 제외한 추상적 구조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총정리 : 초점의 유비와 삼분법적 도식 [내부링크]

모든 존재는 두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한편에는 ‘인식 가능한 존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인식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 여기서 '인식'은 육안은 물론이거니와, 관측장비나 이론을 경유하여, ‘무엇인가를 아는 행위’ 전부를 의미한다. 우리들은 '의식적으로' 한 개념을 압축하고, 풀고, 다시 압축하는 과정을 통해 '중간층위'를 만들 수 있음을 보았다. (3절의 '압축' 특집호를 참고하라) '3단계의 깨달음'이란 그와 같은 과정들을 반복하며, '새로운 중간 층위'를 누적시키는 과정이었다. (3절의 '낙타-사자-어린아이' 사례 분석을 참고하라) 나는 그와 같은 사유의 테크닉을 '명사적 사유'와 '동사적 사유'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것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유의 테크닉'이 아니다. '압축'은 모든 '인식'의 과정에서 관찰되는 일반적 원리다. '인식'이 성립하기 위해서 '압축'은 불가피한 선택인 것이다. (3절에서 언급한 '보르헤스의 지도'를 떠올려보자) 하지만 우리들이 '이성'과

총정리 : 앎과 봄의 맞물림, 체화(體化) [내부링크]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봄'이 모두 같은 '봄'이 될 수는 없다. 평범한 사람들은 병원에서 'MRI 사진'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숙련된 의사들이 MRI 사진을 '보는 것'과 완전히 다른 종류의 '봄'이다. 사람마다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 아는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같은 대상'을 보더라도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앎'과 '봄'은 서로 피드백 루프를 이룬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알고, 새롭게 알게 된 만큼 새롭게 보이고, 새롭게 보이게 된 만큼 더욱 새롭게 알 수 있다. 현실에서 '앎'과 '봄'을 완벽하게 분리시킬 수는 없다. '순수한 관찰'은 '현실'에서 보기 어렵다. 우리들은 '앎'은 '봄'에 영향을 주고 있다. 따라서 개념적으로 그것들을 분리할 수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앎'과 '봄'을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투명한 관찰'은 현실에 없다. 과학철학

총정리 : 앎과 함의 맞물림, 구분짓기와 경계변화 [내부링크]

'자기동일성'은 '초점'과 더불어 관찰을 성립시키는 '또 다른 조건'이다. '자기동일성'이란, '내가(A)' '내가 아닌 것(~A)'이 아닌(~), '바로 나(~(~A))'일 수 있게 하는 성질을 뜻한다. "테세우스의 배" 예컨대, 여러분들은 ‘내 자신’, ‘정신’, ‘영혼’이라는 어떠한 ‘자기동일성’을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분들의 몸은 시시각각 달라지고 있다. 1년 전의 '나'는 1년 후의 '나'와 같지 않다. 한때, 여러분들이었던 것들(A)은 노폐물이 되어 몸 바깥으로 빠져나갔고, 한때 여러분들이 아니었던 것들(~A)은 신체를 구성하는 영양분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사자'인 여러분들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사람들은 1년 전의 '나'와 1년 후의 '나'를 '완전히 다른 존재'로 여기지 않는다. '영혼' 또는 '정신' 같은 '자기 동일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러분들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여러분을 보는 주변 친구들 또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죽음은 여러분의 ‘

총정리 : 특집호 패턴의 창발, 지도-카드섹션 모델 [내부링크]

"물고기는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학문'은 '존재'라고 볼 수 있는가? 누군가는 '학문'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허구'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학문'은 그것의 '물리적 경계'를 구체적으로 지시하기 어려울 뿐, '완전한 허구의 개념'이 아니다. 예컨대, '보이지 않는 손'은 '어떠한 실체의 손'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각의 경제적 행위자들의 움직임으로부터 '창발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은 '물리적 경계'를 갖는 '실체'가 아니지만 '물리적 갖는 실체'의 움직인과 완전하게 무관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패턴'으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적 경계' 또는 '실체'를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는 '시장'도 '허구'고, '국가'도 '허구'가 된다. 세상에는 오로지 '개별적 행위자'가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개별적인 행위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

총정리 : 환원주의(Reductionism), 나누고 구분하기, 생기(生氣)의 소멸 [내부링크]

'창발된 패턴'이 '생명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하지만 '패턴'은 '생명'을 가진 것처럼 움직인다. '패턴'은 '자신'과 '자신이 아닌 것'을 구분한다. 이것은 존재의 '앎'이다. 또한 '패턴'은 존재의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바깥 세계'에 자신을 부분적으로 열어두고 있다. 따라서 '정보, 물질, 에너지'를 받아들이고, 내보낸다. 이것은 존재의 '함'이다. 이때, '경계' 바깥의 세계를 볼 수 없다면, 이와 같은 '앎'과 '함'은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방식과 다르겠지만, 존재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외부세계'를 본다. 이것은 존재의 '봄'이다. '생명체'가 아닌 '존재'도 봄과 앎과 함을 가질 수 있다. 가령, 평생 '잠수함'에서 자란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은 잠수함 '바깥'에 어떤 세계가 존재하는지 모른다. 자신이 바다 안에 있는지도 모르고, 암초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를 수 있다. 이 사람은 오로지 레이더와 계기판을 통해 바깥

1절 : 불가능성 인지, 입증의 무게 줄이기 (3) [내부링크]

"기상청 일기예보가 자주 틀리는 이유" 분명, 나는 어떤 형태의 인간을 느끼고 있었지만, 그 생생한 느낌을 도무지 언어의 형태로 표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아. 분명히 느끼고 있는데 표현이 안 될 때의 답답함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스스로의 내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우리의 마음이 생각보다 더욱 복잡한 것임을 이해했다. ‘산 넘어 산’이다. ‘절대주의’와 ‘상대주의’의 산을 넘은 후에도 ‘마음’이라는 또 다른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은 우리의 생각만큼 단순하게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다. 마음은 복잡한 실타래와 같다. 컴퓨터의 경우, 정보를 입력하면 출력이 나온다. 컴퓨터의 알고리즘은 투명하게 관찰할 수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마음의 작동은 블랙박스 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fMRI'와 같은 관측기구로 볼 수는 있지만, 그 과정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기는 어렵다. 또한 뉴런들의 방대한 연

2절 : 공포와 비약, 신과 코끼리, 더닝크루거 (1) [내부링크]

"구름 속에서 보이는 말의 모습" 세계관의 작동은 이토록 복잡하다. 뒤엉킨 ‘실타래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세계관의 어떤 부분을 주목해야 하는가? ‘진리’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왜냐하면, ‘진리’는 세계관을 구성하는 요소 중에서 특별한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것’과 ‘저것’을 구분할 수 있다. ‘이것’을 ‘이것’이라 부를 때 우리는 “맞다!”라고 판단하고, ‘저것’을 ‘이것’이라 부를 때 “아니다!”라고 판단한다. 경험을 통해 배우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진리를 판별할 수 있는 '느슨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옳다’와 ‘그르다’에 대한 느슨한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도 저것’이 되고 ‘저것도 이것’이 되어 우리는 심각한 무질서를 경험할 것이다. ‘이것’과 ‘저것’, ‘옳다’와 ‘그르다’라는 기준이 없다면 세계관(世界觀)은 물론이거니와 그 어떠한 관찰(觀察)조차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A’를 규정하는 작업이

2절 : 공포와 비약, 신과 코끼리, 더닝크루거 (2) [내부링크]

진리 이미지는 일(一)과 다(多)의 이분법에 따라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될 수 있다. 진리의 근원이 1개일 경우, 일원주의고, 2개 이상일 경우, '다원주의'가 된다. 일원주의와 다원주의에 각각 대응하는 '진리 이미지'는 '신 모델', '코끼리 모델'이다. 아마도, 교회를 열심히 다녔던 사람들은 대체로 전자의 이미지를 떠올릴 가능성이 높겠고, 포스트모더니즘 사상과,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사상에 친숙한 사람들은 대체로 후자의 이미지를 떠올릴 가능성이 높다. "존재의 대사슬 : 신 모델의 전형적인 이미지" 물론, '신 모델'에 등장하는 '신'은 단순히 '기독교의 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강한 중심성'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 전체로 자신을 '발산'시키는 상징 전반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데아, 형상, 천(天), 이(理)와 같은 개념들을 이미지화 시킨 것이다. 이해가 잘 안 된다면, 다음과 같은 철학의 특징들을 면밀하게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데아론의 모방(模倣

2절 : 공포와 비약, 신과 코끼리, 더닝크루거 (3) [내부링크]

"장님 코끼리 만지기" 어느 나라의 왕은 장님들을 모아 코끼리를 만지게 했다. 코를 만진 장님은 “뱀이네요.”라고 이야기했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기둥이네요”라고 이야기했고, 상아를 만진 장님은 “딱딱한 돌이네요”라고 말했다.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장님들은 끝내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몹시 유명한 이야기다. 이는 인식의 한계를 ‘장님’에 비유하고, 다양한 해석이 등장할 수 있는 세계를 ‘코끼리’에 비유한 것이다. 이 관점은 세 가지의 교훈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는 인간은 장님과 같은 존재라 단번에 코끼리의 윤곽을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교훈이고, 둘째는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설명도 모두 정답이 될 수도 있다는 교훈이며, 셋째는 저마다 다른 설명을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차츰 코끼리를 정체를 파악할 수도 있다는 희망찬 교훈이다. ‘코끼리 모델’은 ‘신 모델’에 비교하면 비교적 세련된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원적 진리의 가능성 또한 ‘위치의 다름’에 비유하여 적절히

2절 : 특집호 "가짜" 더닝 크루거 곡선에 대한 고찰 [내부링크]

더닝 크루거 곡선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하나는 더닝과 크루거의 연구 논문에 삽입되었던 '원본' 그래프고, 다른 하나는 대중적 버전으로 각색되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가짜' 그래프다. "원본 더닝 크루거 그래프" 원본 그래프에서는 학생들의 '백분위 성적'을 사등분하여 네 개의 그룹으로 나눈다. 그래프 상에서 점선으로 표현된 부분은 '실제 시험 점수'를 의미한다. 반대로, '성적이 얼마나 좋은지'를 물었을 때, 학생들이 '스스로 예상했던 점수'는 실선으로 표시했다. 가장 낮은 성적을 받은 하위 25% 학생은 자신의 실제 성적(점선)보다 더 높은 점수(실선)를 예상했다. 반대로, 가장 높은 성적을 받은 상위 25% 학생은 자신의 실제 성적(점선)보다 더욱 낮은 예상 점수(실선)를 예상했다. '예상 성적'과 '실제 성적'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다면, 그것은 '올바른 자기평가'일 것이다. 하지만 두 직선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예상 성적과 실제 성적의 차이가 '양수'의 값

2절 : 공포와 비약, 신과 코끼리, 더닝크루거 (4) [내부링크]

지금까지 다루었던 내용을 짧게 요약해보자. 우리들은 '비약'을 통해, 세계로부터 오는 복잡성(예측불가능성, 무의미, 무질서)에 대처하고자 했다. 더욱 분명한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흔들리지 않는 기준, 공리, 지반을 요청할 필요가 있었다. '신 모델'은 그렇게 얻어진 '추상'과 '비약'의 결과물이었다. 하지만 다시금 세계의 복잡성을 본격적으로 맞닥뜨리는 과정에서, '신 모델'에 치명적인 '비약'이 존재함을 알아차리는 순간이 온다. 이때, '신 모델'은 붕괴하여 '작은 코끼리 모델'이 된다. 이때부터, '신 모델'이 철저하게 차단했던 '세계의 복잡성'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들어오게 된다. '코끼리의 크기'는 점점 더 커지게 되고, 그러한 변화가 극에 이를 때, 우리는 '강한 상대주의', '회의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무한 코끼리 모델'이다. 초심자는 그와 같은 경로를 따라서 끔찍한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더닝 크루거 그래프와 연결이 되는가? 일단, '신 모델'에서 '코끼리

2절 : 공포와 비약, 신과 코끼리, 더닝크루거 (5) [내부링크]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영심이의 숫자송'이 떠오른다. 하나면, 하나지 둘이겠느냐, 둘이면 둘이지 셋이겠느냐.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고, '하나마나한 말장난'이다. 송대의 청원유신 선사와 한국의 성철 큰스님이 내놓은 법어는 '영심이의 노래'와 다를 게 없다. 그들이 이토록 '당연한 말'을 법어로 내세운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한 말장난인가? 더닝 크루거 곡선을 떠올리면서, 그들의 법문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노승이 30년 전 아직 참선 공부에 들지 않았을 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었다. 老僧 三十年前 未參禪時 見山是山 見水是水 (그러나) 나중에 이르러 여러 선지식을 친히 뵙고 가르침을 받은 후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乃至後來 親見知識 有個入處 見山不是山 見水不是水 (허나 진정 깨쳐) 마음 쉴곳 얻은 오늘에 이르러 다시 그 예전의 산을 보니 산은 단지 산이요 물은 단지 물이더라. 而今 得居休歇處 依前 見山只是山 見水只是水 청

2절 : 공포와 비약, 신과 코끼리, 더닝크루거 (6) [내부링크]

이제 또 다른 종류의 깨달음들을 살펴볼 차례다. 앞서 설명했던 플러스, 마이너스, 플러스라는 3단계의 구조를 떠올리면서 읽어보자. 디지몬의 진화인가? 1. 낙타에서 사자, 사자에서 어린아이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대하여 설명하겠다. 정신이 어떻게 해서 낙타가 되고, 낙타가 어떻게 해서 사자가 되며, 마지막으로 사자가 어떻게 해서 어린아이가 되는가를 차례로 설명하겠다. 내부에 외경(畏敬)을 간직하고 있는,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많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이 정신의 강함은 무거운 짐, 가장 무거운 짐을 갈망한다. 무엇이 무겁고 곤란한가?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이렇게 묻고는 낙타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아주 무거운 짐이 실려지기를 원한다. 그대 영웅들이여, 어깨에 메고서 자신의 강함을 즐길 수 있을 정도로 무거운 것은 무엇인가? 중력을 견디어 내는 정신은 이렇게 묻는다. 가장 무거운 것은 그대의 자랑에 고통을 주기 위

3절 : 망각과 새로운 시작, 뭉침과 흩어짐, 중간 층위들 (1) [내부링크]

3절 : 망각과 새로운 시작, 뭉침과 흩어짐, 중간 층위들 이제 '플러스, 마이너스, 플러스 구조'의 마지막 단계를 살펴볼 시간이다. 먼저, 각각의 깨달음 모델에서 그러한 변화를 설명하는 키워드들을 뽑아보자. '모순의 통일', '대립의 해소', '전체적이며 총체적인 자기 인식'(진테제), '얽매이지 않음', '떠남', '새로운 시작'(리), '망각' '창조', '긍정', '천진무구'(어린아이) 이런 키워드들은 '절망의 계곡'에서 벗어나는 '전환'을 달리 표현한 말이다. 첫째로, 그러한 변화는 '부정적인 것'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모순의 통일', '대립의 해소', '긍정') 둘째로, 그러한 변화는 '단절적 변화'를 통해 새로운 상태로 나아감을 의미한다. ('떠남', '새로운 시작', '창조') 마지막으로, 앎은 점차 '자족적인 상태'에 이르게 된다. ('얽매이지 않음', '천진무구') 하지만 '망각'이라는 키워드는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앞서 '우매함의 봉우리'

3절 : 특집호 명사와 동사, 복잡성과 압축 [내부링크]

특집호. 지금까지 우리들이 그렸던 ‘도(道)’의 이미지는 ‘명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목적지'와 같은 것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초월적 원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라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도'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 된다. 만약, 도를 '동사'에 가까운 이미지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존재에 괄호를 치는 것은 몹시 유용하고 강력한 사유의 테크닉이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명사적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명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자기동일성'이 필요하다. 인식의 주체는 어떠한 대상의 ‘자기동일성’을 인식하고 비로소 그것에 이름을 붙인다. 길에 떨어진 돌덩이가 됐던, 그 돌덩이를 발로 차는 철수가 됐던,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예외 없이 '자기동일성'을 갖는다. 만약, 돌덩이를 잘게 갈아 모래가루로 만들면 그것은 더 이상 돌덩이로 불릴 수 없게 될 것이다. '

3절 : 망각과 새로운 시작, 뭉침과 흩어짐, 중간 층위들 (2) [내부링크]

중간 특집호가 사이에 끼어서, 전체적인 흐름을 놓쳤을 수도 있다. 산만해진 내용을 조금 정리해보자. 우리들은 ‘3단계의 깨달음’의 특징인 '망각'을 이해하기 위해, '학과 도'의 모델과 '포정해우' 모델을 경유하기로 했다. 하지만 각각의 모델은 '도(道)'를 조금씩 다르게 해석하는 것 같았다. ‘학과 도’ 모델은 ‘신비한 경지’를 말하는 것 같았고, ‘포정해우’ 모델은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말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명사적 사유’와 ‘동사적 사유’를 구분하면서, 우리들은 ‘깨달음’을 '도달해야 할 목적지', '초월적 경지', '신비한 원리'로 보지 않고, 부단한 정신의 변화 중 '특정한 국면'을 일컫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깨달음’은 부단한 정신의 변화에서 관찰되는 특정한 국면들을 압축하여 명사화시킨 것이다. '도와 학 모델', '포정해우 모델'은 각기 다른 '도(道)'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단순히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전자의 모델이 '단절'의

『 깨달음의 구조 』 : 설명서 [내부링크]

# 이 글을 왜 썼는가? 내가 살던 세계가 완전히 무너졌던 적이 있었다. 정말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삶의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당장 눈앞의 "옳고, 그름"조차 판단하기 어려웠다. 질문은 또 다른 질문으로 이어졌고, 무엇 하나 제대로 답할 수 없음에 답답함을 느꼈다. 궁금한 것들은 정말 많았지만, 정작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책"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무작정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혼란"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려주는 책은 없었다. "철학"을 복수전공해도 크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나는 공부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마땅한 대안이 없었으니까. 단서가 될 만한 다양한 영역들을 이곳저곳 살폈다. 그러던 도중 나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나만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 아니었다. 아주 먼 과거부터, 많은 사람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나와 같은 "혼란"을 경험했다. "혼란"이란, 개인의 삶 속에서 벌어진 "특수한 사건"으로 볼 수도 있지

머리말 : 저는 인문학 전공자가 아닌데요? (1) [내부링크]

"왜 중요한지 설명할 수 있는가?" ※ 저는 인문학 전공자가 아닌데요? 이 책은 인문학을 처음 공부하는 ‘초심자’들을 위해 작성됐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은 ‘인문학’에 관심이 없는 아주 평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저는 인문학 전공자가 아닌데요~”라고 말하며 읽기를 거부해도 딱히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책을 덮기 전에 아주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시라. 조금 더 이야기를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아주 잠깐이면 된다. 이 세상에는 ‘그럴듯한 해석’들이 참 많다. 정보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많은 ‘그럴듯한 해석들’을 접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럴듯한 해석들’이 서로 조화롭게 어울리는 것은 아니다. 해석들은 종종 격렬하게 대립한다. 하나의 사안을 두고도 누군가는 “옳다”고 말하는 반면,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말한다. 어느 한쪽의 말도 틀린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들은 종종 혼란에 빠지곤 한다. 혼란은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지나치게 많을 때 발생한다.

머리말 : 저는 인문학 전공자가 아닌데요? (2) [내부링크]

지금부터는 앞서 언급했던 ‘혼란’의 정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밝혀보도록 하자. 우리들은 모든 말을 그럴듯하게 느낀다. 이는 ‘상대주의적 진리관’을 수용한 결과다. “진리는 상대적이다”라는 짧은 문장은 무수한 ‘다름’의 이유를 훌륭하게 설명한다. 더 나아가, 하나의 절대적 진리에 다른 진리들을 억지로 포함시키려 들지 않는다. ‘상대주의적 진리관’ 아래에서는 이것도 옳을 수 있는 것이고, 저것도 옳을 수 있는 것이다. 실로, 경제적이며 쿨한 진리관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때때로 쉽게 ‘진리의 상대성’을 도피처로 삼는다. 예컨대, 두 사람의 논쟁이 과열될 적에, 싸움을 중재하는 사람은 “그만 싸워! 진리는 상대적이잖아!”라고 말하며 논쟁을 중단시킨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음으로써 과열된 열기를 식힐 수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세련된 처세술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중재행위는 종합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이는 각자의 ‘다름’을 존중하는 것과 별개의 문

1절 : 불가능성 인지, 입증의 무게 줄이기 (1) [내부링크]

"답할 수 있는가?" 1절 : 불가능성 인지, 입증의 무게 줄이기 나는 인문학을 공부했지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오랫동안 답하지 못했다. 인문학(人文學)을 공부하는 학생이 '인간'을 분명히 정의하지 못하다니. 여러분은 '인간'을 정의할 수 있겠는가? 나는 공부를 더 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초창기의 나는 위대한 인류의 지성이 찾아놓은 "정답"을 그대로 받아서 쓰려고 했었다. 나는 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인간을 정의하는 실로 다양한 이미지를 접할 수 있었다. 먼저, 인간은 '이성적 사유능력'을 가진 존재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지금 여러분이 책을 읽고 있는 것 또한 ‘이성적 사유’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찾아낸 정답은 만족스러운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성적 사유에 근거하지 않는 인간의 행동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길을 걷고, 문을 열고 닫는다. 이러한 과정에 특별한 논리와 계산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1절 : 불가능성 인지, 입증의 무게 줄이기 (2) [내부링크]

나는 지금까지 "진정한 인간"을 정의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하지만 ‘진정한 인간’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찾을 수는 없을테니깐. 그제서야, 나는 ‘물음의 형식’을 문제삼기 시작했다. "물음의 방향"을 바꾼 것은 커다란 진일보였다.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두 질문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1) “동일한 대상에 대한 설명들이 어찌하여, 이리도 이질적일 수 있다는 말인가!” 2) “이리도 다른 설명들을 과연 '동일한 대상'에 대한 설명이 맞는가?” 두 질문은 얼핏 보기에는 똑같은 질문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질문을 구성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확연한 차이를 갖는다. 전자의 질문은 우선 동일한 대상이 일단은 '존재'한다고 전제한다. 그 이후, 전제한 대상으로부터 다름의 이유를 찾아나가는 한편, 후자의 방식은 동일한 대상의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먼저, 전자의 질문을 보자. 나는 지금까지 이와 같은 접근법